2023-11-12

Yamada Hōkoku - Wikidata 山田 方谷(やまだ ほうこく)

Yamada Hōkoku - Wikidata
Yamada Hōkoku (Q6565667)

Japanese
山田方谷
日本の儒家・陽明学者
===

야마다 호타니 (야마타 호코쿠)는, 막말기 의 유가 · 양명학 자, 비나카 마츠야마 번사 .

호타니는  . 는  (큐), 글자 는(린케이), 통칭 은 안고로 . 비중성인 , 소창산 이라고 불린 [1] .

평생 소스 편집 ]

살아남기 - 청소년기 소스 편집 ]

문화 2년 2월 21일 ( 1805년 3월 21일 ), 당시 비나 카마쓰야마 번령이었던 비중국 아가군 서방(현·오카야마 현 다카하시 시 나카이마치 서방 )에서 야마다 고로 길·카지(니시가타씨) 부부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다. 유명은  .

야마다가는 원래는 겐지씨를 칭하는( 후술 ) 향사의 집이었지만, 호타니의 증조부·소사에몬이 장남을 마음대로 출가시킨 절의 주직을 살해해 자해한다는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주석 1] , 재산 몰수 위에서 소불로 여겨진 할아버지 ·선타로는 신미번 영토교 ( 현· 신미시 도교)에 기숙해, 20년 정도 후에 용서 되어 서방의 땅으로 돌아왔다 3] . 호타니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농업과 유채유 의 제조·판매를 가업으로 생계를 세웠다.

집 재흥을 바라는 부모님은 호타니에게 학문으로 세상에 나오려고 생각하고, 그가 우유 마시는 시절부터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호타니는 3세에 한자를 기억했다고 하며, 생가 근처의 키야마 신사에는 4 세 때 봉납했다는 편액이 남아 있다 [4] .

호타니는 5세가 되면 친가에서 20km 떨어진 신미 번영에 있는 친척의 절에 맡겨져 번창·마루카와 마쓰시카의 회양학원에서 배우기 시작 한다 . 여기에서도 신동과 평판을 불러, 6세 때에 번주·세키나가 테루의 앞에서 책을 피로한, 9세 때에는 학문에 힘쓰는 목적을 묻고 「치쿠쿠히라 천하」라고 대답한 등의 일화 가 남아 있다 [5] .

문정 원년( 1818년 ) 8월 27일, 어머니·카지가 사망하고 [6] , 타카야는 아버지·고로 요시로부터 친가로 돌아가 가업을 돕도록 명령받지만, 마루카와 마츠카시가 아버지를 설득하고 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7] . 그러나 이듬해 고로요시도 어머니의 뒤를 쫓도록 사망해 버렸고, 호타니는 멈추지 않고 송숨의 용서를 떠나, 친가로 돌아가 가업을 이었다[8 ] .

집을 이은 가타야는 가업 유상의 일에 격려했고, 수년 후에는 그 성실한 거래 자세로부터 정직자와의 평판을 얻게 되었다[9 ] . 또 가업 옆 독학으로 학문도 계속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마루카와 마츠시카에의 편지 중에서는 “가업에 쫓겨 학문을 하는 시간이 적고, 또 일에서는 속물이나 평범한 인간과만 사귀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자신도 평범한 인간에게 타락해 버려, 지금까지의 학문이 모두 낭비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라고 현황에의 불만과 초조를 토로하고 있다[10 ] . 호타니는 이 시기를 별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시마 나카스는 『호타니 연보』 중에서 “이 시기의 경험이 번정 개혁 시에 부패 장교나 그것과 유착한 상인·쇼야와 대치한다 위에서 도움이 된 것이 아닐까"라고 분석하고 있다 [11] .

분정 8년( 1825년 ) 말, 가업과 학문에 힘쓰는 가타야의 이야기를 들은 비중 마츠야마 번주·이타쿠라 카츠노리로부터 장학금으로서 두 사람 부지를 주어져 번의 학문소에의 출입을 허락 받고 [12 ] 친족들 사이에서도 집 재흥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호타니를 학문에 전념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나게 되었다[13 ] 분정 10년( 1823년 )과 같은 12년(1825년)에 타카야는 가업을 가족에게 맡기고 교토로 유학해, 마루카와 마츠카시의 지인인 테라시마 시라카[주석 2] 의 문하생  된다 13] 한편으로 번주의 추천으로 스즈키 무센 [주석 3] 에도 배웠다. 이때 무천문하에 종생의 친구가 된 카스가 잠안이 있었다 [15] [주석 4] .

2번째 교토 유학에서 귀향하여 3개월 후의 문정 12년(1825년) 12월 23일, 호타니는 이타쿠라 승직으로부터 묘자대도를 허락받고, 12월 28일 에는 사분  세워져 가격을 중소성격으로 여겨 팔인부지를 주어졌다. 또 번교· 유종 관의 회두(교수)에 임명되어 [17] , 부모의 비원이었던 집 재흥을 완수했다.

분정 13년( 1826년 ) 6월, 호타니는 마쓰야마 성하 의 혼쵸(현·타카하시 시내 야마시타 )에 저택을 주어졌다 [18] . 텐포 원년( 1830년 ) 12월, 번에 소원하고 있던 3번째의 교토 유학의 허가가 내렸기 때문에 유종관 회두를 사직해, 내춘에도 출발할 예정으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덴포 2년 ( 1831년 ) 2월 10일, 호타니의 저택에서 출화해 유종관도 소실 [주석 5] 하는 화재가 발생해, 책임을 묻은 호타니는 성하의 마츠렌지에서 1 개월간 근신했다 [20] .

양명학과의 만남 소스 편집 ]

텐포 2년(1831년) 7월, 27세의 호타니는 번으로부터 2년간의 교토 유학의 용서를 얻어, 미타데지마 시라카의 학원에 입문했다[21 ] .

호타니는 어린 시절부터 주자학 을 배우고 있었지만, 배움이 깊어짐에 따라 주자학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높아지고 있었다 [22] . 텐포 4년( 1833년 ) 가을 [23] , 왕양명 의 『전습록』을 숙독하고, 본격적으로 양명학 의 사상에 접했다 [24] [25] . 같은 해 12월, 한층 더 양명학을 배울 수 있도록, 번으로부터 한층 더 3년간의 에도 유학을 허락 되어 교을 떠난다 [26] . 그 직전, 덴포의 기근의 영향으로 곤궁한 친가로부터는 귀향을 간청하는 편지가 도착했지만, “지금은 학문에 전심하고 싶다. 그냥 마츠야마로 돌아가지 않았다 [26] .

텐포 5년( 1834년 ) 1월, 호타니는 사토 이치사키 의 학원에 입문했다 [27] . 이치사이는 학장을 맡은 창평황 에서 주자학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사학원에서는 양명학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양주음왕 [주석 6]」이라고 말해졌다 [27] . 이치사이의 문하에서 호타니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고, 이치사키 학원의 학원이 되고[28], 나중에 입문해 온 사쿠마 상산과 함께 「사몬의 2걸」이라고 나란히  해졌다 [28] .

세각·카츠시즈와의 만남 소스 편집 ]

텐포 7년( 1836년 ) 정월, 대소성격으로 승격해 [25] , 9월에는 번주·이타쿠라 승직의 참근의 행렬에 공봉해 마쓰야마에 돌아온다 [29] . 10월에는 번교·유종관의 학두(교장)에 취임해, 마쓰야마 성하의 어전(오나자키)정(현·다카하시시 오마에초)에 새로운 저택을 주었다  30 ] .

텐포 9년( 1838년 ), 사저 안에 사학원 「소기사[주석 7] 을 연다. 소기사에는 많은 입문 희망자가 몰려들었고, 문인은 수십 명으로 부풀어 오르고, 학사의 증축을 강요당하는 사태가 되었다[31 ] . 호타니는 신분에 관계없이 농가·상가의 ​​출신자도 문인에게 맞이하고, 그 중에는 후의 번정 개혁에 있어서 카타야의 사지가 되는 미시마 나카스, 진코케이 등  있었다 [ 32 ] . 우기사는 호타니가 번정 개혁에 종사하게 된 후에는 미시마 나카스가 사범대로 강의를 받았지만, 가나가 5년(1852년)에 나카스가 제국 유학에 나온 것을 계기로 폐쇄되어 [33 ] .

홍화 원년( 1844년 ), 2년 전에 쿠와나 마츠다이라가 에서 요시코로 맞이한 이타쿠라 가쓰시즈가 마츠야마에 첫 나라가 되었다. 가쓰시즈의 마쓰야마 체류 중, 호타니는 유종관의 전 학두 오쿠다 라쿠야마 [주석 8] 와 격일로 승정에 경서의 강의를 실시해, 가쓰시즈의 영내 순시에도 동행하고 있다. 당시 남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가쓰시즈의 문무에 대한 격려와 자기를 이끄는 모습을 극찬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35] . 또 카츠시마도 타카야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되었다.

히로카즈 4년( 1847년 ) 4월, 호타니는 미시마 나카스를 동반해 쓰야마 번을 방문해, 1개월의 체재 동안에 쓰야마 번사·아마노 나오토로부터 타카시마 유포술을 배우고, 대신 쓰 야마 번사 에게 왕 양명 『고모토대학』을 강의했다 [36] . 마쓰야마에 귀국하자마자 대포 2문을 제조시키고, 번사들에게 서양포술을 전수하고 있다 [37] .

카나가 2년( 1849년 ) 4월, 카츠시즈는 에도에서 번주로 취임. 8월, 전번주·이타쿠라 승직이 에도에서 병몰했다. 자신을 무사에게 건네준 은인인 승직의 죽음과 승정의 번주 계승을 지켜본 호타니는 은거원을 에도의 승정에 제출하고 있다[38 ] .

마쓰야마 번의 번정 개혁 소스 편집 ]

가나가 2년(1849년) 11월, 호타니는 번주·이타쿠라 카츠시즈에서 에도에 소환되어 번의 재정을 담당하는 전 체역과 그 보좌역인 음미역의 겸무를 명령받았다 [ 39 ] . 당초, 호타니는 농민 상승의 유자인 것을 이유로 취임을 고사했지만, 승정의 설득에 드디어 취임을 맡게 되었다[40 ] . 호타니의 전 체역 취임은 번사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맞이되고, 마츠야마 번에도 저택 에서는 ,

야마다시 가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산출(시골자)의 유자의 야마다씨(호타니)가 원조가 된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라고 호타니를 야유하는 의미.

마음대로 공자 묘코를 끌어들이고 나호코에게 당나게 할 것인가

"마음에 멋대로(재정)에 유자를 등용해, 재정을 한층 더 악화(당=하늘) 시킬 생각인가"라고 승정을 비판하는 의미.

라는 광가가 유행했다 [41] .

귀국한 호타니는 조속히 번의 재무 상황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연간 회계는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고 선송이 반복되고, 굶주림이나 불시의 지출이 있을 때마다 부채를 하고, 이를 상환하기 위해 더욱 부채를 거듭한 결과, 원본만 로 총액 10만량을 넘는 부채를 안고, 번사의 가로쿠의 빌림이나 연공의 임시 징수가 상태화하고 있어[ 42 ] 도 못 미치는 약 1만 9천여석에 불과하다 [42] [주석 9] , 지금까지의 전 체역은 채권자에게 번의 실수입을 숨기고 빚을 반복하고 있었다[ 44] 가 판명되었다.

가나가 3년(1850년) 3월, 이타쿠라 카츠시즈는 마츠야마에 귀국하면 정식으로 번정 개혁의 대호령을 발해, 개혁에 대해 불평을 말하거나 배신 행위를 실시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하는 취지를 선언해 , 또 개혁의 전권을 맡긴 가야에 대한 비방 중상을 금지했다 [45] .

우선 번내에 번주로부터 영민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절약령이 발행되었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고,

  1. 세월을 기하여 전 번사의 봉록을 감봉 [주석 10] .
  2. 신분 마다 착용할 수 있는 의복·장식품을 제한해, 실크나 금등을 이용한 제품의 사용을 금지. 생활 전반에 있어서의 노예의 금지 [주석 11] .
  3. 장교가 영민으로부터 뇌물이나 접대를받는 것을 금지 [주석 12] .

이다.

번의 재무 상황 공개 소스 편집 ]

개혁이 시작될 때, 호타니는 번의 재무 상황을 조사한 보고서를 카츠시마와 번 상층부에 제출하여 번 재정이 위기 상황에 있음을 밝히고[45] 상황을 타개 하려면 채권자인 에도·오사카  환전상  에게 모두를 정직하게 공표해 재정재건에의 협력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51] .

호타니는 스스로 오사카에 가서 채권자를 모아 장부의 내용을 모두 공개하고 채무의 10~50년간의 상환연기를 요청하고[52] 그동안 재정의 재건과 산업진흥을 도모 하고 에 의해 나온 이익으로 부채를 상환하겠다는 재건계획을 제시하고 그들의 협력을 잡았다 [53] .

재정개혁의 시작으로 호타니는 마츠야마번의 오사카 구라 저택을 폐지했다. 그때까지 창고 저택에서는 장역인들이 미국 도매상 과 유착해 그들에게 거래를 맡긴 결과, 큰 손실을 내고 있었다. 호타니는 쿠라야시키의 폐지에 의해 연간 1,000량에 이르는 유지비를 띄우고, 부채의 선반에 의해 저당을 해제된 연공미를 번에 되찾았다[54 ] .

되찾은 쌀은 영내 40곳에 마련한 저축에 보관해, 미시세의 동향을 보고 번이 직접 거래를 실시하는 것으로 연간 3,000 - 6,000량의 이익을 내, 그 중에서 상환이 행해졌 다 [55] . 또 저창은 기근 때에는 민중에게 쌀을 배급하는 요시쿠라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56] .

식산 흥업 정책 소스 편집 ]

마쓰야마가 있는 비중 북부 는 옛부터 고품질의 사철 의 산지로 알려져 있어, 그것을 사용한 후 제철이 활발 했다 . 호타니는 영내에 있는 철산 · 동산 의 개발을 번의 직영 사업으로 하고 [57] , 성하의 다카하시 강 대안에 있는  (치카리) 마을(현·타카하시 시 오치아이마치 근사)에 철 제품의 제조 공장을 차례차례 라고 건설해, 여기를 「 오이 마을」이라고 명명해, 농구· 철기 ·  의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58] . 그 중에서도 삼본치의 비중  는 통상의 괭이 에 비해 토지를 깊게 경작시키면 평판을 불러 특산품이 되었다 [59] .

또한 야마노에 삼나무 , 대나무 , 옻나무 , 차 의 식림을 실시 [60] , 마츠야마의 종래 로부터의 특산품이었던 엽연초 , 단지 , 유베 시의 증산도 장려했다 [61] . 특히 담배는 번의 보호 장려책에 의해 「마츠야마  (키자미)」의 이름으로 알려진 명물이 되었다 [60] .

호타니는 연공미 이외의 특산품의 전매 사업을 담당하는 「무육소」라고 불리는 관공서를 신설했다 [61] . 무장소에 모인 산물은 다카하시 강을 내려 타마시마항 에서 번 소유의 선박으로 옮겨졌다 [59] . 배는 상인에 의한 중간 착취를 피하기 위해 오사카를 통과하고, 배후에 관동 지방이라고 하는 거대 시장을 가지는 에도로 직접 회타되어, 적하는 기사마치(현·도쿄도 주오구 긴자 3가) 의 에도 나카 야시키 안 창에서 관리되었다 [59] .

전매사업의 이익은 개시로부터 3년째의 가영 5년( 1852년 )에는 1만량을 넘어, 다음해에는 5만량에 다가갔다 [59] . 이로써 번의 부채상각이 전도로 시작되어 영내의 도로와 하천의 정비도 진행되었다 [61] . 호타니는 전매의 이익을 번으로 독점하지 않고,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서민의 생활도 촉촉해, 여행자는 그 모습만으로 마쓰야마령에 들어간 것을 알 정도였다고 한다[61 ] .

이 전매사업은 폐번치현 에서 마쓰야마번이 소멸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戊辰 전쟁 이후 연공을 오카야마번으로 억제하고 있던 시기에는 번의 비용의 전부는 전매사업의 수입으로 충당되었다[62 ] . 나중에 번이 2만석으로 재흥되었을 때도 마츠야마번의 재정은 같은 규모의 다른 번보다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62 ] .

또한 닛타 개발도 장려하고 닛타로부터의 수확에는 조세를 면제했기 때문에 경지 면적과 농촌 인구가 증가하여 농지의 거래 가격도 상승했다 [63 ] .

번패 쇄신 소스 편집 ]

에도시대 후반이 되면, 각지의 번은 막부의 허가를 얻어, 번찰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지폐  발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화와 환전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재정이 박박한 번에서는 교환용 준비금을 다른 사람에게 유용하고, 또한 구멍 메우기를 위해 번찰의 난조가 반복된 결과, 번찰의 가치는 종이 조각 동연하게 되어 있었다. 비나카마츠야마번도 예외가 아니고, 호타니가 전 체역으로 취임한 당시 번번 발행의 5종찰에는 위찰까지 나돌고 있어 번찰의 신용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64 ] .

호타니는 가나가 3년(1850년)에 번찰의 발행을 정지하고, 3년간의 기한부로 시중에 나돌고 있는 5전찰을 모두 액면에서 매입한다고 하는 접촉을 냈다[65 ] . 그 결과, 미발행분도 아울러 711관 300엔 [66] (금 환산으로 11,855량 [주석 13] )이 번의 지갑에 모였다. 가나가 5년(1852년) 9월, 호타니는 마쓰야마 성하의 근사 가와하라에서 매입한 번찰을 모두 소각한다고 포고했다[67 ] . 9월 5일, 포고를 듣고 모인 번사·영민의 눈앞에서 번찰의 소각이 행해졌다 [67] . 작업에는 호타니 자신도 만나, 타츠의 각(오전 8시)부터 시작된 소각 작업이 종료한 것은 신의 각(오후 4시)이었다[68 ] .

모든 번찰을 처분한 가타야는, 전매로 얻은 이익의 일부를 쌓아 환전 준비금으로 해, 「영전(永札)」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번찰을 발행했다 [ 69 ] . 영전은 발행되는 동시에 발군의 신용을 얻어, 마쓰야마번내는 커녕 인근 타번의 영내에서도 사용되게 되었다[70 ] . 마쓰야마번의 긴조에는 영전과의 교환에 의해 더욱 정화가 쌓여져, 이에 의해 부채의 상환은 가속도로 진행되고[70], 안정 4년(1857년)에는 10만량의 부채를 완제 해 게다가 10만 양의 잉여금 축재에 성공해 [주석 14] , 당시 마쓰야마번의 재력은 20만석 이상으로 평가되기까지 이르렀다 [72] .

문무의 장려와 군제 개혁 소스 편집 ]

개혁을 시작할 때 집안에는 절약령과 함께 문무의 단련에 격려하는 것이 장려되었다 [70] . 아울러 총포가 주체가 되는 서양식 군제의 도입이 시도되었지만, 내륙의 산국인 마츠야마번에서는 외국 세력에의 위기의식이 얇고, 또한 전국 이후의 구폐에 구애되는 번사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3] .

호타니는 무사 주체의 군제 개혁을 포기하고 대신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을 군의 주체로 하는 농병제의 도입을 결정했다 [ 73 ] . 우선 번내의  (리세이, 촌장)와 그 자제 중에서 굴강한 사람을 선택해, 양식 보병의 훈련을 실시해, 대도를 용서해 농병의 지휘관으로서 양성[74 ] . 게다가 사냥꾼을 모아 서양식 총대를 편성하고, 농한기에 들어가자 농가의 젊은이를 모아 사정의 지도 아래 사격훈련을 실시해 주로 국경의 경비에 들었다[74 ] . 호타니는 일년에 한 번 농병을 마쓰야마 성하에 집합시켜 대규모 연습을 실시했다 [75] . 안마사 5년(1858년)에 마츠야마를 방문했을 때, 농병의 연습을 견학한 쿠사카 겐즈는 「아주 우리 번이 미치는 곳은 아니다」라고 감탄하고, 그에 의해 조슈 번에 가져온 농병 의 구상 은 타카스기 신사쿠 의 기병대 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76] .

산국이며 지형이 얽힌 마츠야마번에서는 성시 방위의 요가 되는 땅을 집중적으로 방위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중 많은 것은 산간의 미개지였다.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가타야는 절약령으로 곤궁한 하급 번사들을 이주시켜, 평시에는 토지 개간에 종사시키고, 개간지로부터의 수확에는 조세를 면제한다[77] 것으로 그들의 궁상  구하면 동시에 항상적인 방위체제를 정비한다는 뒤에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에 채용한 둔전제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는 제도 를 발안했다 [78] . 이 안은 당초야말로 「무사의 신분을 빼앗긴다」라고 오해되어 반발을 받고 [79] , 소수의 희망자가 단신으로 카요 군 노 야마(현· 요시비 주오마치 미야지)에 입식했을 뿐이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조세 면제도 도와주고 큰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가족이 이주하고 또 번이 학문소나 도장을 정비한 것으로 이주지원자가 속출하게 되었다[80 ] .

안정 2년( 1855년 )에는 쓰야마번으로부터 식원정방 [주석 15] 등을 초대하여 신전류 고식영법을 전해졌다. 성하 교외의 츠지마키(현·고량시 쓰가와마치 이마즈)에 수영장이 열려, 60세 이하의 번사 전원에게 여기에서 수영법의 훈련을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82 ] .

분쿠 2년(1862년) 9월에는 미시마 나카스 등의 의견을 받고 미국제 스쿠너선을 14,300달러(7,150량)로 구입해 ‘쾌풍환’ 이라고 명명 했다 . 쾌풍환은 평상시에는 타마시마항과 에도 등으로의 물자 수송에 사용되었지만, 비상시에는 군함으로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정비되어 있었다[83] [주석 16 ] .

호타니는 서민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성하의 단지쵸(현·타카하시시 단지쵸), 히지 의 야타베(현·  샤시 총사)와 타마시마 (현· 쿠라시키시 타마시마)에 민간을 위한 학교 “교사소”를 마련했다 [74] . 교사소에는 번교·유종관의 회두가 교대로 출장해 강의를 실시해, 조교는 서민 출신자가 맡고, 성적 우수한 학생에게는 사분에의 등용의 길도 열려 있었다[84 ] .

막부 말기 소스 편집 ]

참정 취임 소스 편집 ]

가나가 6년( 1853년 ), 비나카 마츠야마는 심각한 가뭄에 휩쓸렸지만 , 호타니가 저창을 열고 곤궁한 영세 농민에게 쌀을 배포했기 때문에, 마쓰야마 영내에서는 아사자는 혼자도 나오지 않았다 [85] . 영민들은 호타니를 생신으로 모시는 사당을 세워 그를 기리었다 [86] .

安政元年( 1854년 ), 호타니는 번정의 실질적인 톱인 참정 의 지위에 취했다 [86] . 개혁 개시로부터 5년이 경과해, 번 재정이 회복·성장을 이룬 것을 계기로 타카야는,

  1. 절약령에 있는 번사의 봉록의 감액조치의 철폐.
  2. 농민에 대한 연공을 경감하고, 지금까지의 중세로 곤궁하고 있는 마을에의 구제책의 적용.
  3. 번고의 돈을 마을 사람들에게 융통시켜 교역을 진흥한다.

의 3안을 승정에 헌책해 인정되었다 [87] .

야스마사 2년( 1855년 ) 10월, 야스마사의 대지진 에서는 비나카마츠야마번의 에도 저택도 피해를 받았지만, 번에 돈을 빌려 온 에도·오사카의 환전상들의 기부로 조기에 재건하는 것 수 있었다 [88] .

요즘 카츠시즈는 막각에의 발걸음이 되는 연주자 차례 의 직책에 대해 있었다. 안정 4년( 1857년 ), 가쓰시즈시에 사사 봉행 취임의 타진이 있었다. 가쓰시즈는 쿠니모토의 호타니에 취임의 부디를 묻는 편지를 낸다. 박박을 초래하자 가쓰시즈의 막정 참가에 난색을 보였고, 가쓰시즈가 에도에 불러 설득해도 목을 세로로 흔들지 않았다[89 ] . 다만 머리로부터 반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뇌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취임의 생명이 내려진다면, 그것은 천명이며, 피해서는 안 된다」라고도 대답하고 있다[90 ] .

그러나 국원에서는 절약령으로 불만을 모으고 있던 상급 번사들 사이에서 “호타니는 주군의 출세의 기회를 망치려 하고 있다”라고 불만이 분출해, 한층 더 성하 방위와 생활 구제를 목적으로 한 하급 번사의 이주계획도 '무사의 신분을 빼앗긴다'고 오해한 번사들 사이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오르고, 호타니의 암살계획도 소문이 되었다[79 ] .

요즘 번명으로 마츠야마를 방문한 아이즈 번사 미나미 마츠키 는 견문록 '부가세 관견'에서 카츠시즈와 가타야의 개혁을 평가하는 한편, '수법이 너무 과격해서 실패할 수 있다. 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91] .

같은 해 8월, 호타야의 조언에 따라 엽관운동을 앞두고 온 가쓰시즈미에게 사사봉행 취임의 생명이 내렸다. 가쓰시즈의 생명으로 가타가야가 온 번정 개혁이 막부에 평가된 결과였다 [92] . 호타니는 카츠시마에게 편지를 보내, 사찰 봉행 취임을 축하함과 동시에 노령과 개혁에 일정한 목표가 붙은 것을 이유로 은거를 바라, 아울러 번사의 이주 계획에의 반감을 완화하기 위해 스스로도 적당한 토지를 배령하고 귀농하고 싶은 취지를 제기했다 [93] . 가쓰시즈는 참정에는 잠시 유임받는 대신 원체역의 겸임을 풀고, 은거·귀농도 어쨌든 인정한다는 타협안을 나타내고, 호타니도 이것을 받아들였다[94 ] . 전 체역은 호타니의 제자로 이타쿠라 가보대의 오이시 하야오 가 이어졌다 [94] .

야스마사 5년( 1858년 ) 9월, 야스마사의 대옥이 시작되자 막부에는 '오수걸' [주석 17] 로 명명된 조사 기관이 설치되어 사찰 봉행의 승정도 그 일원이 되었다 . 가쓰시즈는 쿠니모토의 호타니에게 의견을 요구하고, 타카야는 시사들에게 온정으로 심판하는 것을 헌책하고, 카츠시즈도 그 의견을 넣어 처치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대로· 이이 나오히로 의 불흥을 사 안정 6년( 1859년 ) 2월 에 사찰 봉행을 파면되었다 [95] .

나가세로 이주 소스 편집 ]

야스마사 6년(1859년) 4월, 호타니는 가쓰시즈의 용서를 얻어 마쓰야마 성하에서 약 11km 떨어진 나가세(현·타카하시 시 나카이마치 서방의 카타야역 부근)에 옮겨 살았다 [ 96 ] . 호타니가 이 땅에 눈을 돌린 것은 이주 2년 전으로 [97] , “나가세”라는 지명도 호타니 자신이 명명하고, 그 다음 해에는 “무량 수암”이라고 명명한 쿠사암을 이 땅에 만들고 있었다 [97] . 나가세를 선택한 것은, 여기가 신미번 영으로부터 마쓰야마에 침공하는 적군을 맞아 쏘는 것이 쉬운 땅이라는 이유도 있었다[98 ] .

호타니는 참정 재직 그대로 이주했기 때문에, 달의 절반은 마츠야마에 출사해 「수차」라고 불리는 성하의 번주 별저[99]에 잠들어 정무에 있어서, 나가세와의 사이를 오가는 생활이 계속 되었다 [100] . 참정이라고는 해도, 당시의 가야의 가로쿠는 비싼 것이 아니고, 한층 더 이주를 계기로 바쁜 것을 이유로 거절해 온 입문 희망자를 받아들이려고 큰 저택을 세운 적도 있어, 야마다가 의 가계는 상당히 괴로워지고 있었다 [101] .

같은 해 7월 17일, 에 치고 나가오카 번사·카와이 계지스케  나가세의 저택을 방문해, 제자들이를 지원했다 [102] . 호타니는 반월 가까이에 걸쳐 계노스케의 인물을 정하고, 8월 3일에 제자들이를 허락했다. 가노노스케의 배우는 방법은, 호타니나 문제들과의 대화, 교사소나 번사 입식지의 견학, 아이즈의 아키즈키 에지로 등 마츠야마를 시찰에 방문한 타번사와의 교류, 등 실제를 견문해 지식 을 깊게 한다는 수법이었다 [103] .

호타니가 에도에 소환 되었기 때문에, 계노스케는 9월 18일에 규슈·시코쿠의 유력에 출발해 일단 마쓰야마를 떠나[104], 10월 3일에 마쓰야마로 돌아가[105], 12  25  에 는 나가세의 가타야 택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되어 만연 원년( 1860년 ) 4월까지 마쓰야마에 체재해 가르침을 받았다 [106] .

번주의 정치 고문 소스 편집 ]

사쿠라다 문 밖의 이상으로 이이 나오히로가 암살된 다음 해의 분쿠 원년( 1861년 ) 2월, 계정 봉행에 재임된 이타쿠라 카츠시즈는 호타니를 따라 에도에 출부했다 [107] . 호타니는 에도에 있어 가쓰시즈의 정치 고문이 되라고 명령되었다 [108] . 그러나 호타니는 3월에 아타고야마 근처의 거리에서 얕히고 쓰러져, 1개월 정도 정양 후, 병이 코야스를 얻었으므로 마쓰야마에 귀국해[109], 유바라 온천에서 유치 했다 [ 110 ] .

분쿠 2년( 1862년 ) 3월 15일, 가쓰시즈는 노중 으로 이례적인 승진 [주석 18] 을 했다. 병이 치유된 가타야도 4월에 다시 에도에 나와 가쓰시즈의 측근으로 돌아왔다 [111] . 6월, 칙사· 오하라 시게토쿠 가 시마즈 히사미츠가 이끄는 사쓰마 번병에 호위되어 에도에 하향했다. 가쓰시즈는 노중으로서 칙사와의 협상에 해당했지만, 이 때 오하라는 교토의 이와쿠라 구시시로 향한 편지 중 「방주(이타쿠라 가쓰시즈)는 극히 평범한 인물로, 상식적인 대응 밖에 할 수 없는 인물이다.당인에게도 이와 같은 정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 측근의 야마다 야스고로(호타니)는 협상의 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꽤 인물인 것 같고, 방주 의 의견은 아무것도 이 사람으로부터 발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호타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12] . 협상 결과, 도쿠가와 게이키 가 장군 후견직, 마츠다이라 하루타가 정사 총재직으로 임명되지만, 타카야는 제자인 하야시 토미타로에게 보낸 편지  에서 “(교섭은) 전혀 이쪽의 생각대로는 가지 않는다 (약) 외양의 권세에는 놀라울 뿐이다”라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113] .

10월, 조정은 다시 칙사로 산조미미 들을 하향시켜 막부에 삼이를 다가갔다. 이 때, 호타니는 카츠시즈에 대해 “성심을 세우는 것을 제일의로 하고, 쇄국·개국 어느 쪽으로 결정해도 신속하게 이것을 실행할 것”이라고 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114 ] . 11월에는 장군 · 도쿠가와 가모 에게 속견을 허락받았고, 앞에서 「사 여기에 이르러서는 신속한 씹기 실행밖에 없다」라고 의견을 말했다[115 ] . 12월, 카츠시즈는 호타니를 번의 연기역(가로에 이은 직위)에 임명해, 「소중하다면 반드시 참가해야 할 것」을 신청된 카타야는 가독을 입양·경장에 양보, 은거부지를 받게 되었다 [116] .

분쿠 3년( 1863년 ) 2월, 호타니는 승정에 노중 사임을 다가와, 그 약속을 달고 마쓰야마에 돌아왔다 [117] . 3월, 장군·가모가 상경해, 가쓰시즈도 노중으로서 수행했다. 4월, 호타니는 교토에 소환되어 세번 고문의 임무에 붙었다 [118] . 조정의 압력 앞에 막부는 5월 10일에 카이를 실행 하겠다고 약속하게 되지만, 당일이 되어도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던 막부에 호타니는 실망해, 다시 승정에 노중 사임을 다가갔다 [119] . 일단은 사임을 승낙한 가쓰시즈가, 가모에 설득되어 사의를 철회하면, 타카야는 6월에 고문을 사임하고 마츠야마에 귀국하면 나가세의 저택에 농담하고[120], 노인과 병을 이유로 출사 도 거절했다 [121]

겐지 원년( 1864년 ) 6월, 카이의 불이행이나 생밀 사건 의 배상 문제로 가모의 불흥을 샀던 카츠시즈는 노중을 파면되어 제1차 조슈 정토의 선봉을 배명해, 마츠야마에 귀국 했다 . 호타니도 번정으로 복귀하고, 카츠시즈 출진 후 마츠야마의 병권을 맡기고, 본진이 놓인 도리쿠지에 들어갔다 [ 122 ] . 최신 총포를 갖춘 마츠야마 번병은 타번을 압도하고 있었다 [123] 가, 조슈 번이 싸우지 않고 막부에 협순했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게이오 원년(1865년) 10월, 가쓰시즈는 노중에 재임된다. 다음 게이오 2년( 1866년 )에 시작된 제2차 조슈 정토 에서는 막부군은 사츠나가 동맹 에 의해 최신식 장비를 손에 넣고 있던 조슈군에 대패하고, 또한 장군·가모가 장작했다. 가쓰시즈는 사태를 하야마로 마츠야마의 가야에 알려 선후책을 물었다 [124] . 호타니는 반환으로,

  • 大挽回: 도쿠가와 게이키를 후계 장군으로 작년 칙허를 얻은 통상 조약에 따라 개국 정책을 진행한다. 조슈번의 씹는 당시의 칙에 따랐을 뿐이므로 훼손하지 않고, 그리고 조슈나 다른 유번도 맞아 막부의 체제를 일신한다.
  • 小挽回: 경희가 장군직을 잇는 것을 고사한 경우 대신 마에오 장번주·도쿠가와 경승을 장군 으로 한다. 제1차 정토에서 막부군 총독을 맡은 경승이 조슈와 직접 협상해 관대한 조치를 조건으로 휴전에 가져온다.
  • 임시 혼식 (「최대의 어책」의 단서 적어):막부가 조슈에 대해 과잉으로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거나, 조정 혹은 다른 대번・유번에 조정을 의뢰하거나 하면, 막부는 드디어 경시되어 대란을 초래한다.

의 삼책을 나타냈다 [125] . 전은 막부가 8월 20일에 조정으로부터 정전의 칙명을 끌어내는 것으로, 9월 2일에 막장간에서의 정전이 성립한다고 하는 「일시간식」의 책에 가까운 결과가 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 6월, 호타니는 가쓰시즈에 소환되어 다시 교토에 오르지만, 8월에는 마쓰야마에 귀국했다[126 ] . 10월 12일 밤반, 호타니의 허에게 "경희공이 대 정봉환을 결의했기 때문에, 그 상주문의 문안을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라는 승정의 밀서가 도착했다[127 ] . 호타니가 서둘러 쓴 문안은 하야마에서 교토에 전해지고, 게키 자신의 손으로 청서되어 10월 14일에 상주되었다[128 ] .

戊辰戦争 - 마츠야마 번의 재흥 소스 편집 ]

메이지 원년( 1868년 ) 1월 3일부터 시작된 도바·후시미의 싸움 으로 구 막부군이 신정부  에 패배하면, 도쿠가와 케이키는 1월 6일에 심야에 오사카성을 탈출 군함· 개양 환 에서 에도로 도망해, 노중·이타쿠라 카츠시즈는 호위의 구마타 츠요미 주석 19] 등 150명의 마쓰야마 번사에게 귀국을 명령해 [주석 20] 경희에게 동행 [133] . 이후 소식 불명이 된다.

도바·후시미의 싸움 직후, 가쓰시즈는 도쿠가와 게이키, 마츠다이라 용보 ·마츠다 이라 정경 형제에 이은 제3등의 조적으로 여겨져 [134] , 오카야마 번을 비롯한 중국 지방의 여러 번에 마쓰야마 번정 토의 칙명이 내려, 정토 총독· 이키 충쿄 (오카야마 번가로)가 이끄는 군세가 마츠야마령을 포위했다 [133] . 정보를 재빨리 입수한 호타니는 동계연습의 명목으로 농병대를 총동원하여 국경을 굳히고[135] 성에 중신들을 모아 협의 결과 항복·개성으로 결코 성하에는 번  들었다 근신이 포고되었다 [136] .

1월 14일,  (미나기, 현·오카야마현 총사시 미부쿠로)의 정토군 본진에 오이시 하야오, 미시마 나카스, 요코야 시노노스케의 3명이 사죄사로서 파견되어, 정토군 측과  교섭 가 시작되었다 [137] . 정토군은 마츠야마번에 사죄서의 제출을 ​​요구하고 그 초안을 제시했다 [138] . 다음날 초안을 본 호타니는 문중에 있던 '대역 무도'의 4문자 [주석 21] 에 격노하고 정토군에게 '대역 무도'를 '경거폭동'으로 바꾸도록 요구 ,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는 타카야가 절복해 번주에게 사과한다고 대답했다 [140] .

정토군 측은, 연도와 장비의 충실한 마츠야마군과 싸우면 패할 가능성이 있고, 또 타카야를 죽게 하면 그를 당황하는 마츠야마의 영민까지 적에게 돌릴 위험성이 있는 것을 고려해 요구 을 받아 1월 17일에 마쓰야마는 무혈 개성되었고, 영민을 제외한 번사는 모두 성하를 일시 퇴거했다 [138] . 총독·이키 타다카즈는 호타니에게는 “은거의 몸”이라는 이유로 행동의 자유를 보장해, 희망하는 오카야마 번사에게는 호타니에의 입문을 허락하는 등, 호타니에 대해서 각별한 예를 다하고 [141 ] .

번사와 영민의 목숨을 구한 가타야는 마츠야마 번 재흥을 위해 행방불명의 번주·카츠시즈와 세속·카츠전(가쓰나루)의 행방을 찾았다  142 ] . 그러나 가쓰시즈라의 행방은 모르고, 승적에 들어가기 위해 에도 교외 코우메무라(현·도쿄도 스미다구 무카시마 3가 근처)의 죠센지에 기숙하고 있던 제4대 번주·이타 쿠라 카츠 마사 의 손자 · 에이지로를 새로운 세속으로 맞이하기로 했다 [143] . 호타니의 목숨을 받은 눈부신 카와다 고가 에도에 잠입하여 에이지로를 마츠야마 에 데려가고, 에지로는 이름을 이타쿠라 카츠히로로 바꾸고, 마츠야마번은 그를 새로운 상속인으로 번의 재흥을 소원했다 [144] .

12월에 들어가면 신정부에 의한 조적 여러 번에 대한 처분이 시작되지만 번주부자가 행방불명의 비중 마쓰야마번에 대한 처분은 보류로 되어 관군 지배로 인하여 생활이 곤궁한 영민들의 일개가 빈발한다 된다 [145] . 같은 시기, 카츠 시즈가 에노모토 무양의 함대와 함께 에조지 에 있다는 정보가 마쓰야마 번에 들어갔다 호타니는 연기역·사이코 구마 사부로를 비밀리에 에조지에 잠입시켜 승정과 접촉시켜 신정부에의 자수를 추천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승정은 완고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146 ] .

어쩔 수 없이 호타니는 마츠야마번과 거래가 있어, 승정 모두 면식이 있는 프러시아인  상선장 웨이프에게 예금 1만 달러 로 승정의 구출을 의뢰 [147] . 메이지 2년( 1869년 ) 4월 23일, 웨이프는 진중 편견이라고 칭하고 승정을 배에 불러 그대로 출항해, 5월 13일에 에도에 도착한 승정은 가신들로부터 자수를 설득되어, 6월에 嫡子·승전과 함께 자수해, 안나카번 에의 영예 로 여겨졌다 [148] .

9월, 마츠야마번에는 3만석의 감봉 위에서 카츠히로를 번주로 재흥을 허락한다는 처분이 내려졌고, 10월에는 번명을 고량번으로 바꾸었다[149 ] .

만년 소스 편집 ]

관군에 성을 새겨 놓은 호타니는 나가세의 저택에 갇혀, 여기에서 전후 처리나 집 재흥 활동의 지령을 내면서, 다시 학원을 열어 문제의 받아들이기를 시작했다[150 ] . 나가세 학원에는 입문 희망자가 쇄도하고, 다음 해까지 학사를 6동으로 증축해야 할 정도의 성황 만이었다[151 ] .

호타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와쿠라구시, 오오쿠보 이도리 , 키도 타카히토 등이 메이지 정부에 등용된 미시마 나카스와 카와다 쓰루에 등을 통해 회계  으로의 출사를 요구해 왔지만, 는 노령과 병, 향학에 전념하고 싶은 것을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152] .

메이지 3년( 1870년 ) 10월, 호타니는 나가세의 저택을 입양·경영의 일가에 양도해, 자신은 고제로 카미이치(현·신미시 카미시)의 쇼야를 맡는 야부키 쿠지로 로부터 제공된 아 테츠군 오사카부(현·신미시 대령 오사카부)의 곳으로 옮겨 살고, 여기에 새로운 학원을 열었다 [153] . 오사카부학원에는 호타니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전국 각지에서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154] . 호타니는 자신의 학원 외에도 근린의 학교에서도 수업을 하고, 청취되면 그 명부모가 되었다[154 ] .

메이지 5년( 1872년 ) 1월, 특지에 의해 이타쿠라 카츠시즈의 영예가 해제되었다고 하는 보도가 초래되었다 [155] . 같은 시절, 구 오카야마 번사의 오카모토 준 (타카시)과 나카가와 요코타 로가 오사카부를 방문해, 오카야마현에서 [주석 22] 계획되고 있는 새로운 학교에 호타니를 맞이하고 싶다고 오카야마에의 이주를 바랐다 [156] . 호타니는 이주 요청은 거절했지만, “2년 전에 폐교가 된 한곡 학교가 재개된다면, 월일을 구분 하여 한곡을 찾아 교단에 서도 좋다”고 응답했다 [157] . 메이지 6년( 1873년 ), 모토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게이마사의 지원으로 한곡 학교는 “한곡 정사”로서 재흥되어, 호타니는 약속대로 같은 해 3월부터 봄과 가을에 1개월씩 한곡을 방문해 양명학의 강의를 실시했다 [158] . 이 강의는 메이지 9년(1876년)의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159] .

메이지 8년( 1875년 ) 4월, 이타쿠라 카츠시즈로부터 「조상의 묘참에 고량(마츠야마)을 방문하기 때문에 재회하고 싶다」라고 하는 편지가 도착하는 방법은 5년만에 고량을 방문했다[160 ] . 가쓰시즈는 8년 만의 재회였다. 카츠시즈와 호타니는 나가세의 구 카타야 저택에 3박을 했다 [161] .

메이지 10년( 1877년 ) 6월 26일, 호타니는 오사카부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162] . 향년 73. 사인은 신염으로 알려져 있다 [163] . 유해는 고향 니시카타무라의 야마다가의 묘지에 장사되었다. 계명은 「가타야인 심문순덕거사」[164] . 묘석 「가타야 야마다 선생님 묘」의 문자는 이타쿠라 카츠시즈가 휘말려 [165] , 묘비 의 문면은 카츠시즈의 생명으로 미시마 나카스가 기초했다 [166] . 현재, 묘소와 그 주위는 공원으로서 정비되어 「가타야엔」이 되고 있다 [167] .

사상 소스 편집 ]

호타니 붓

호타니는 왕양명 의 ' 전습록 '에서 자득하는 곳이 있던 부분을 뽑아 쓴 '전습록 발췌'(서문만 현존)를 작성해 그 서문 속에서 주자학과 양명학  비교해 논한다 . [168 ] .

주자학의 장점은 초보자라도 학문의 순서를 따라 배우면 깊이 배울 수 있다 [169] . 그러나 내 마음 속을 잊어 내 마음이 득심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편, 양명학의 장점은 우리 마음이 득점하고 있는지를 묻고 인간성의 본질에 육박할 수 있고, 충분한 지식을 얻은 인물이 배우면 도리를 보다 올바르게 판별할 수 있어 사업에 있어서 성과를 낸다 수 있다 [169] . 그러나 미숙한 인물이 배우면 독선으로 달려 노력을 게을리하고 도리의 판단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단점이 있었다[169 ] .

호타니는 제자들로부터 양명학의 가르침을 청하더라도 안이하게 가르치는 일은 없고, 우선 주자학을 깊게 배우는 것을 촉구했다[170 ] . 이것은 앞서 언급 한 양명학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71] . 호타니는 주자학을 충분히 습득한 뒤,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양명학을 배우기를 희망한 자에게만 양명학을 강의했다[172 ] .

(시세이소쿠다츠)라는 진심과 자애의 정신을 설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을 소인이라고 불린 미시마 나카슈에게 "세상에 소인 없음. 일절, 중생, 모두 사랑한다."라고 계명했다고 한다[173 ] . 이후 지성 怛怛의 정신은 후쿠니시 시게코 들을 통해 이시이 10차 , 루루오카 유키 스케 , 야마무로 군평 , 나카지마 무게그것은 어쨌든 일본 복지 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의미한다 [174] .

의사 대책과 이재론 소스 편집 ]

가짜 
텐포 3년(1832년) 무렵 [주석 23] 에 적힌 정치론이다 [176] . 당시의 정치에 대한 가야의 생각을 과거  전시(책문)의 회답문( 대책 )에 의지하는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 제목이 있다.
문중에서 호타니는 “근래 시세에 쇠퇴의 징조가 보이지만, 그 원인은 무사계급의 풍기의 쇠퇴에 있다”라며 “쇠퇴의 요인은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거나, 도를 넘은 호화 에 의해 무사계급이 재정난에 빠진 것에 있다.우수한 군주나 개혁자가 나타나 재정개혁을 실시해 사풍을 바꾸는 것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176 ] .
 (리자 이론)
텐포 6년(1835년) 전후의 시기에 [177] 쓰여진 상하 이편으로 이루어진 경제론의 개론이다 [178] .
가미편에서 호타니는 “오늘, 이재의 방책이 면밀해지고 있는데 각 번의 빈곤은 악화되는 한편이다”를 지적해, 그 원인을 “이재를 담당하는 자가 재정에 단지 사로잡혀 대국적인 시점을 잃고 있는 것에 있다고 하고, 이것을 「사물 안에 굴한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79] . 게다가 “이재를 지배하는 사람은 항상 일 밖에 서 , 회계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대강을 관리하는 것에 그치고, 통치의 대방침을 나타내어 교육의 진흥·강사의 숙정·무비의 충실을 동시에 가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성공예로서 제의 관중, 진의 상가 의 개혁 을 들고 있다 [ 180 ] .
하편은 상편에 대한 '어떤 사람'의 반론에 호타니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호타니는 전한대의 이중중계의 말 '의를 밝히고 이익을 헤아리지 않고'를 비유하여 위정자는 그 자리 에서  대책 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를 정돈하여 정령을 밝히고 의와 이익을 명확하게 구별함으로써 진행해야 할 길은 스스로 정해져 간다고 설했다[181 ] .

「이재론」과 「의대책」은 나중에 제자 미시마 나카스의 「요시 합일론」으로 발전하여 미시마가 개척한 사학원인 니마츠 학사를 통해 시부자와 에이이치를 비롯한 관계자  에게 전한다 . 그들을 통해 일본의 재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 요출전 ] .

외교론 소스 편집 ]

호타니의 외교론에 대해 미시마 나카스는 『호타니 연보』 중에서 「개국을 지론으로 하고 있었다」라고 하고 있다[182 ] . 그러나 가타야는 정세가 눈부시게 변화하는 가운데 때때로 씹을 주장한 적도 있었다 [182] . 미시마는 이에 대해 “(호타니는) 조리 일관을 귀하는 사람이며, (자설보다) 주군의 의사를 우선하고, 그것을 일관되게 하도록 노력하는 주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 113] . 호타니는 이타쿠라 가쓰시즈에 제출한 의견서 가운데 ​​“개국인지 씹는가? "라고 주장한다 [183] .

분쿠 원년(1861년) 무렵에 현저한 대외 정책의 의견서 『병을 청국에 사용할 수 있는 의』에서 「현재, 청국에서는 내란과 영불의 침공으로 국가의 형태  이루고 있지 않다 . 일본 청국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출병해야 한다 . 인생은 귀복할 것으로 보인다. 1년이 지나면 중국에 영웅이 나타나 전토를 평정할 것이다 .

분쿠 3년(1863년) 5월, 쓰시마 번사 · 오시마 토모유키 에서 “ 일본 이 개국한 것을 이유로 조선과의 무역이 끊어져 곤란하다”고 상담을 받은 호타니는 “비는 일방적으로 관계를 거절한 조선에 있기 때문에, 쓰시마 번이 선봉을 맡고 사쓰마·초슈와 함께 정벌해야 한다”는 조선 출병안을 기초하고 있다[185 ] .

이러한 방안은 채용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사츠나가의 군사력을 해외로 향하는 것으로, 그 힘을 깎을 의도가 있었다고도 말해진다[186 ] .

인물 소스 편집 ]

계보 소스 편집 ]

호타니의 야마다가는 청화원씨 만정류에서 오와리 쿠니 야마다 군을 본관 으로 하는 야마다  의 방류를 칭하고 있다.

초대· 야마다 시게히데 는 야마다 중직 의 조카로 여겨지는 인물로, 원범뢰 에 따라 헤이케 추토 에 참가해, 은상으로서 비중국 아가군 28 개 마을을 주어, 토착했다고 한다 [187] . 전국 시대 에는 야마다 시게모토가 모리 키모토 를 섬기고 비중 병란 으로 전사하고 [187] , 후손은 세키가 하라의 싸움 에 패한 모리씨가 방장 2개국으로 감봉되었을 때 아가군 니시카타무라에서 귀농했다고 여겨진다 [188] .

사생활 소스 편집 ]

호타니에는 3번의 결혼력이 있다. 2 여자를 벌었지만, 남자에게는 축복받지 못하고, 동생·  (헤이진)의 아이·경장을 입양으로 취해 후계로 했다.

  • 첫 아내는 신미번사·와카하라 히로유진의 딸·진이다. 분정 4년(1821년)에 결혼. 분정 9년(1826년)에 장녀·瑳奇를 벌지만, 덴포 7년(1836년)에 조세. 홍화 4년(1847년)에 이연 [189] .
  • 두 번째 아내는 문인인 신직·아라키 주계의 누나(명불상)이다 [190] . 안정 원년(1854년)에 차녀·코유키를 벌지만 같은 해에 이연되고 있다. 신분 차이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정식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하고 '호타니 연보'에는 '연'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 191 ] . 「타카야 연보」에 의하면 이혼 후, 마츠야마 번사·이노우에 모에게 재가했다고 한다 [192] .
  • 3번째의 아내는 이와라무라 의 쇼야·오쓰 기화당의 여동생으로 오노미치 출신 의 요시이 초록이다 [193] . 안정 3년(1856년) 9월에 결혼. 호타니는 전회의 반성에서 이타쿠라 카츠시즈의 허가를 얻어 결혼했기 때문에 「호타니 연보」에도 「아내」라고 기재되어 있다[194 ] .
  • 차녀·코유키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호타니의 제자로 천령·가미이치(현·오카야마현 신미시 카미시)의 쇼야·야부키 쿠지로의 양녀가 되고, 그 후, 쿠지로의 아들·발사부로에 시집 다 [ 195 ] . 메이지 5년(1872년)에 사망 [196] . 향년 20.

일화 소스 편집 ]

  • 어린 시절부터, 사색을 할 때는 기둥에 기대어 명상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어, 현재도 신미시에 있는 마루카와 마츠카시의 구택에는 호타니가 몇번이나 기대어져 머리유가 스며들어 머리 모양에 흔적이 붙은 기둥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다 [197] .
  • 사토 이치사키 의 학원에서 배우고 있었을 무렵, 동문의 사쿠마 상산 으로부터 몇번이나 논쟁을 걸고 있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심야까지 그리고 그것이 연일 반복되기 때문에 다른 학생이 능욕하고 일사이에 멈추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일사이는 이것을 방치해 양자의 토론을 襖을 분리한 이웃실에서 즐거워 듣고 있었다고 [198] .
  • 카와이 계지스케에게 상산의 인물평을 물었을 때, 「사쿠마 씨에게는 온(온화함) 좋음(솔직함)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199] .
  • 가나가 5년( 1852년 )에 우기사의 이웃집에 사는 이치번사가 병몰하고, 그 과부가 카타야야의 문을 두드렸다. 과부는 아버지를 잃은 7세의 딸에게 모자 가정의 아들과 만나지 않도록, 남성과 서로 능할 정도의 학문을 베풀어달라고 가타니에게 물었다. 그것은 당시의 일반 상식에 비추면 있을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문의 인생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체감으로 지문하고 있던 호타니는 번정 개혁의 바쁜 한창이었지만 소원을 쾌적하게 맡아 남녀의 별을 신경쓰는 일 없고, 그 재기 있는 딸을 소기록 집에 다니게 해서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딸이야말로 나중에 고량의 땅에서 여자 교육 의 보급에 노력하는 후쿠 사이 시계자였다 [200] .
  • 이타쿠라 카츠시즈 가 세속이었을 무렵, 그가 당나라 의 덕종 에 대해 논한 글을 보여준 호타니는 “이것을 배령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가쓰시즈가 이유를 묻자 호타니는 “젊음님이 번주가 된 뒤 이 서부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일이 있었다면, 단언할 때의 증거와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가쓰시즈는 “후일의 증거로 하라”고 호타니에 논문을 건네주었다. 논문을 받은 호타니는 “신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군의 죄입니다만, 자신의 보신을 위해 주군에게 단언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죄. 의 증거임과 동시에 주군에게 잘못되었을 때 신하로서 반드시 말씀드리겠다는 자신에 대한 계명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201] .
  • 호타니가 이타쿠라 카츠시즈에 이케이를 강의 하고 있던 방의 앞뜰에는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호타니는 여기를 「관수당」이라고 명명했다. 카츠 시즈에 유래를 묻는 가타 야는 "쉽고 물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충분히 조심하면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 않고 정진해 주셨으면 한다는 생각을 담았습니다”라고 회답했다 [202] .
  • 번정 개혁에서는 화폐의 유통에 가장 조심했다. “천유여년에 걸친 지폐의 이해를 득실시를 시음한다면, 후세의 재정권을 가진 자의 계명이 될 것”이라고 중국 역대 지폐의 변천을 17목의 시로 하고 있다 [ 203] .
  • 야스마사 2년(1855년), 쓰야마 번사 ·우에하라 정방 등을 초대한 연석에서 도쿠가와 막부를 의복 에 비유해 “도쇼진군이 재료를 조성해, 대덕원님 이 짜 올려 오유인님 이 처음으로 착용해 그 후, 역대 장군이 착용해 왔다.유토쿠인님이  번 세탁을 하고, 시라카와 라쿠쿤 이 두번째의 세탁을 했다.그러나, 이제 더러움과 깨끗함이 심해, 신조하지 않으면 용으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다시 세탁하듯이 포질이 이미 열화되어 칫솔질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204] .
  • 야스마사 4년(1857년), 오미조 번 에 100석으로 섬기고 있던 가와다 甕江을 50석으로 뽑았다. 가나가 6년(1853년)에는 가와다의 스승 가마타 겐케이 도 초대하고 있다 [205] .
  • 우에스기 타카야마 가 실시한 요네자와 번의 번정 개혁에 대해 “어려운 절약으로 재정 재건은 이뤄졌지만, 문무가 폐기했기 때문에 부국 강병이 완수되지 않고, 한손 떨어진 것이 유감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 206] .
  • 안정의 대옥 에서 입감하고 있던 카스가 잠안의 해방에 진력했지만, 당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해방으로부터 5년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잠안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감동했다 [105] .
  • 카와이 계지 스케에게 번정 개혁의 극의를 묻는 호타니는, 주군·이타쿠라 카츠시즈로부터 들은 마츠다이라 정신의 말을 인용해 “개혁은 15년 정도에 걸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해 주세요.성급하게 진행 한다 라고 반드시 연장자가 반대할 것이다 .
  • 마츠야마를 떠나는 카와이 계노스케에게 비장의 『왕양명 전집』을 양도해 주었으면 한다고 묻은 가타야는 권말에 「왕문성 공집의 뒤에 써, 카와이생에게 준다」라고 제목을 붙인 계노스케에게의 충고의 장문 을 덧붙여 4량(약 28만엔)으로 양도했다 [208] . 継之助는 호타니를 깊이 존경하고, 바닥 사이에 호타니의 서폭을 내걸고 매일 아침 예배를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209] .
  • 호쿠코시 전쟁 에서 전사한 카와이 계노스케의 현창비의 비문을 나가오카시 로부터 의뢰받았지만, 「비  이시부미)를 쓰는 모하츠카시 죽음에 지연」의 한 구를 보내 사퇴하고 있다. 대신 미시마 나카스 가 비문을 기초했다 [210] . 또, 가노노스케의 유족이 곤궁하고 있다고 듣고, 마츠야마로의 이주를 권하고 있다 [211] .
  • 계정 봉행에 복귀한 가쓰시즈의 공을 해서 에도 성을 견학했을 때, 감상을 묻자 "큰 배 같았습니다. 아래에는 치히로의 파랑이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 다책가에서 항상 상중하의 3안을 가지고 진언하고, 상대에게 선택하게 했다 [213] .
  • 도쿠가와 가모 와 효명 천황 의 급사를 암살로 간주하고 있었다 [214] .
  • 게이오 3년(1867년), 교토에 오른 호타니가 숙소로 하고 있던 오쿠무라가에 이타쿠라 카츠시즈로부터 잉어가 전해졌다 . 호타니는 이것을 정원의 연못으로 내뿜고, "잉어들과 볶은  가되면 다시 올 때까지 두는 마을의 연못" 타포에 받은 물고기이기 때문에 또 교토에 올 때까지 오쿠무라의 연못에 두자)라는 승정을 야기하는 광가를 읊고 있다[215 ] .
  • 게이오 3년(1867년) 8월, 호타니가 마쓰야마에 귀국했을 때, 카츠시즈는 카타야에 마쓰야마 번교 저택에 축적되어 있던 군용금을 마쓰야마에 가져오라고 명령 했다 . 이때 호타니는 카츠시게에게 「 보다는 어디 (이즈코) 생명의 두고 싶어」라고 노중을 그만두고 마츠야마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카츠시즈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구를 헌상했다[216 ] .
  • 게이오 3년(1867년) 8월, 호타니는 쿠니모토에서 교토에 있는 쿠마타 아키라에게 보낸 편지 중 “양학에 관해서는 인근 번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비젠(오카야마 번 ) 등 는 양학소를 만들어 활발히 포술의 연습을 시키고 있다고 (들)물습니다. [217 ] .
  • 메이지 4년(1871년) 8월에 단발 폐도령이 나왔을 때, 문인들은 활발히 이것을 비판했지만, 호타니는 “옛날에는 칼 등 띠고 있지 않고, 혹도 묶이지 않았다. 건은 단지 옛날로 돌아왔을 뿐이다”라고 의로하지 않았다 [218] .
  • 오다현 의 현령 야노 미츠요시 가 구라시키의 호상을 데리고 오쿠보 이도리에 면회했을 때, 호타니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하면 “오다현의 정치를 하는데 야마다 옥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한다”고 일갈이 되었다. 야노는 호타니를 방문하여 정치에 대해 가르쳤다. 나중에 야노가 호타니가 기초한 물산회사의 규칙안을 오쿠보에게 보여줬는데, 오쿠보가 그 자리에서 일독한 것만으로 허가를 냈기 때문에 야노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219 ] .

평가 소스 편집 ]

  • 미시마 나카스 는 “(호타니는) 임기응변으로 상식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특히 번정이나 국정에 관한 계획 등은 신중하고 결코 외부로 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잡을 곳은 없었다. 하지만 지성 怛怛의 관점에서 잡으면 그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220 ] .
  • 아키즈키 유지로는 호타니 를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소박하고 위대하지 않고, 언뜻 보면 시골의 노인인 것 같았지만, 번주로부터 시사에 대해 물어보면, 변설 상쾌하고, 그 의견은 사물의 급소를 붙여 오리, 포백 이나 미곡은 물론, 가지나 호우의 시가까지 들고 의견을 말해, 실무에 정통한 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평가하고 있다[221 ] .
  • 카와이 계지 스케는 호타니의 경영의 재능을 「야마다 선생님이라면, 에치고  의 번두도 맡는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222]
  • 야스이 숨 과 시오타니 타카 네가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누군가"라고 논의했을 때, 아처는 후지타 토호를 추격했지만, 타카네는 호타니를 추론 "그는 토호의 인물에 더 학문을 더한 인물 로 있다”라고 평가했다 [223] .
  • 호타니와 카스가 잠안의 쌍방에 사사 한 무라카미 작부 는 "(호타니) 선생님은 세상을 버려도 세상을 잊지 않고, 세상에 있어도 세상의 먼지에 멈추지 않았다. 그런 청결한가? 하지만 온화한 노경은 깊은 일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배 안에는 늙어도 여전히 영걸 호걸의 마음은 쇠퇴하지 않고, 때때로 접해 감격하면 시를 낭송하면서 扼腕하고 자비되는 일이 있었다 " 라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호타니와 잠안을 비교하여 "야마다 옥의 기락은 쾌절 봄 바람처럼. 따라서 문하 유영 자유, 때문에 인재 배출. , 따라서 저명한 제자 없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24] .
  • 가와다 쓰카에는  나카 에토키  도덕은 익히고 있었지만 볼만한 업적은 없었다 . , 덕과 공적은 2명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호타니 선생은 3명의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충해 별로 일가의 특색을 기축했다. 호타니를 칭찬하고 있다 [225] .
  • 니시슈 는 호타니를 「천하의 호걸이라니. 만약 아이즈번과 같은 대번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막부는 안태였을 것이다」라고 칭하고 있다[226 ] .
  • 미야케 유키미네 는 잡지 ' 일본급 일본인 ' 제518호의 기사 중에서 다카타니를 「내무대신의 그릇 으로, 오쿠라대신, 농상무대신 , 문부대신도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227] [228] .
  • 야스오카 마사 아츠시 는 「이 사람을 알면 알수록 문자 그대로 심취를 기억한다」 「만약 막부나 대번의 유력한 지위에 있었다면, 어떤 영향을 시세에 줄 수 있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173] [228] .
  • 시마 료타로 는 소설 ' 고개 '를 쓸 때 취재로 고량을 방문했을 때, 호타니를 소재로 한 소설도 쓰는 것을 추천받아 “야마다 카타야는 훌륭하다. 하지만, 소설로 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야마다 카타야는 너무 위대하다"고 대답하고 있다 [229] .

연표 소스 편집 ]

날짜는 메이지 6년까지 음력. 나이는 세고 년.

나이사건
문화 2년( 1805년 )12월 21일, 비중국 아가군 서방(현· 오카야마 현 다카하시시 나카이 마치 서방 )에 태어난다.
문화 5년( 1808년 )4기야마 신사 에 편액을 봉납.
문화 6년( 1809년 )5신미 번 유 · 마루카와 마츠 시카 의 학원에 입문.
문화 7년( 1810년 )6신미번주·세키나가 테루 의 앞에서 휘호를 한다.
문화 12년( 1815년 )12첫 한시 '득가서'를 시전한다.
분정 3년( 1820년 )16가업을 잇는다.
분정 4년( 1821년 )17와카하라진과 결혼.
분정 8년( 1825년 )21비나카 마츠야마 번주 ·이타쿠라 승직 으로부터 두 사람 부지를 주어진다.
분정 10년( 1827년 )23봄부터 연말에 교토 에 유학.
분정 12년( 1829년 )253월부터 9월에 걸쳐 두 번째 교토 유학.

12월 23일, 성자대도를 용서받는다.

12월 28일, 8명 부지·중소성격으로 승격. 번교·유종관의 회두(교수)를 명령받는다.

텐포 원년( 1830년)266월, 주택을 마츠야마 성 혼마치에 주어진다.

12월, 유종관 회두를 사직.

텐포 2년( 1831년 )272월 10일, 실화에 의해 저택 및 유종관을 소실.

7월부터 번으로부터 2년간의 허가를 얻어 3번째의 교토 유학.

텐포 4년( 1833년 )29가을, 양명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10월, 오오시오 헤이하치로 의 「세심도 箚記」을 유종관 학두 오쿠다 라쿠야마에 보낸다.

12월, 번으로부터 한층 더 3년간의 에도 유학 을 허가되어 에도 들어갔다.

텐포 5년( 1834년 )301월, 사토 이치 사이에 입문.
텐포 7년( 1836년 )321월, 대소성격으로 승진.

9월, 사토 이치사이의 학원을 그만두고, 귀번.

10월, 유종관 학두(교장)가 되어 성시 오마에초에 저택을 준다.

텐포 9년( 1838년 )34가쿠라 「소기사」를 연다.
텐포 14년( 1843년 )39미시마 나카스가 소기사에 입문
홍화 원년( 1844년 )406월, 번세각· 이타쿠라 카츠시즈 가 나라들이.
홍화 2년( 1845년 )413월, 승정의 영내 순시에 순종한다.
홍화 3년( 1846년 )42근습 역을 겸무한다.
홍화 4년( 1847년 )434월, 쓰야마 로 향해 서양식 포술을 배운다.

아내·진을 이연한다.

가나가 2년( 1849년 )454월, 이타쿠라 카츠시즈가 번주가 된다.

 4월 쓰야마를 재방문하여 포술 전습을 받는다.

12월 9일, 전 체역 겸 음미역을 배명한다.

가나가 3년( 1850년 )4610월, 오사카에 출장해 채권자와 회담해 번 재정 재건에의 협력을 잡는다.
가나가 5년( 1852년 )48군봉행을 겸무한다.

무육방·물산방을 설치해 전매 사업을 개시.

9월 5일, 신용이 저하하고 있던 구 번패를 모두 소각해, 신찰을 발행한다

안정 원년( 1854년 )50참정이 된다.
안정 4년( 1857년 )538월, 이타쿠라 카츠시즈가 테라사 봉행 에 취임.

전 체역을 사임.

안정 6년( 1859년 )554월, 니시카타무라 나가세의 한집으로 이주해, 저택 안에 쿠사안 「무량 수암」을 짠다.

7월, 에 치고 나가오카 번사 · 카와이 계지스케 가 방문.

분쿠 원년( 1861년 )572월, 이타쿠라 카츠시즈, 테라사 봉행에 재임. 호타니, 에도에 올라, 카츠시즈의 상담역이 된다.

4월, 병 때문에 마츠야마에 귀국. 요양을 위해 미사쿠 쿠니 유바라 온천을 방문한다.

분쿠 2년( 1862년 )583월, 이타쿠라 카츠시즈, 노중에 승진.

4월, 에도로 돌아와 가쓰시즈의 상담역으로 복귀.

11 월, 에도 성에 등성해, 장군 · 도쿠가와 가모 에게 배모한다.

12월, 연기역이 된다. 가독을 입양·경장에 양보한다.

겐지 원년( 1864년 )6011월, 가쓰시즈의 조슈 정토 출진에 즈음해, 유수의 병권을 맡길 수 있다.
경응 원년( 1865년 )6110월, 이타쿠라 카츠시즈, 노중에 재임.
게이오 2년( 1866년 )624월, 쿠라시키 아사오 소동 에 대해 일대를 이끌고 출진.
메이지 원년(1868년)641월,戊辰戦争발발.

1월 18일, 비중 마쓰야마성을 신정부의 정토군으로 개성한다.

메이지 2년( 1869년 )656월부터 나가세의 학사를 증축해, 자제의 교육에 노력한다.

9월 이타쿠라 카츠히로를 번주로 비중 마츠야마 번의 재흥이 인정된다.

메이지 3년( 1870년 )6610월, 아테츠군 오사카부(현·신미시 오오사카부)에 이주해, 계속해서 자제 교육에 노력한다.
메이지 6년( 1873년 )692월, 처음으로 한곡을 방문해, 한곡 정사 에서 강의를 실시한다.
메이지 10년( 1877년 )736월 26일, 오사카부에서 몰.

6월 29일에 서방촌의 묘지에 장례된다.

메이지 43년( 1910년 )11월 16일, 정5위를 추증 [230] .

주요 문인 소스 편집 ]

기념·현창 소스 편집 ]

  • 호타니 역 - 1928 년 ( 쇼와 3 년) 개업 JR 니시 니혼 백비 선 역.
  • 야마다가타야(소행성) - 1977년(쇼와 52년)에 발견된 소행성. 발견자의 혼자 카니시 요키 는 오카야마현 출신.
  • 호타니엔 - 야마다 호타니에 연관된 같은 이름의 공원이 2곳 존재하고 있다.
    • 타카하시시-1910년(메이지 43년) 5월 완성. 호타니의 유덕을 현창하기 위해 당시의 카미보군 교육회가 야마다가 의 묘소와 그 주변을 공원으로 정비했다. 입구의 비석 「호타니엔」의 문자는 개양인 의 휘말. 원내에는 묘소 외에 미시마 나카스미문의 기념비가 있다. [231] [232]
    • 신미시 - 1923년( 타이쇼 12년) 개원. 호타니가 만년을 보낸 오사카부의 저택(구 오사카부 진야) 자취를 공원으로서 정비한 것. 원내의 가타가야가 임종했을 때에 베개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카츠카이후나휘・미시마 나카스미분・가네이 유쿄서의 「가타야 야마다 선생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 [233]
  • 호타야바야시 공원 - 1911년(메이지 44년) 개원 [234] . 호타니에의 위층 추증을 기념해, 아울러 유덕을 현창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원내에는, 호타니·치족사이(양자·경장)·제사이 (의손, 경장의 여위)의 야마다가 삼대의 한시를 새긴 “타카하시 산켄시비”, 호타니 4세 때의 글자를 새긴 '풍월의 바위'가 있다.
  • 호타니바시 - 1914년(타이쇼 3년) 가교. 타카하시시 혼마치와 오치아이마치 사이의 타카하시 강에 걸치는 도로 다리. 초대의 다리는 목조였지만, 1934년(쇼와 9년)의 무로토 태풍에 의한 수해 로 유실해, 1942년(쇼와 12년)에 현재의 랭거 형식 으로 재건되었다 [235] . 2010년(헤세이 22년)에 「무로토 태풍의 재해 복구 교량군」의 하나로서 토목 학회 선장 토목 유산 으로 선택되고 있다 [236] .
  • 동상- 다카하시 시 향토 자료관 앞(1976년 설치)과 비중 고량역 앞 (2017년 설치)
  • 기념비 - 야에 등 신사 (타카하시 시내 야마시타) 경내에 “가타야 야마다 선생 묘소 비석”(1879년 건비, 마츠다이라 하루타 휘비)  가타야 선생 칠절 시비”
  • 전시 시설
    • 호타니의 마을 만남 센터: 2003년 개관. 다카하시 시 나카이초 니시카타 [237]
    • 야마다 카타야 기념관: 2019년 개관. 타카하시 시 무카이초(건물은 구 타카하시 중앙 도서관) [238] .
    • 야마다 카타야 기념관: 2004년 개관. 신미시 대령 고난 [239]
  • 호타니 타카야 고등학교 - 2023년(헤이와 5년) 6월에 그때까지의 교명을 다시 한번 호타니의 이름을 씌운 명칭으로 변경했다.

주제로 하는 작품 소스 편집 ]

만화
  • 야마다 호타니 이야기
소설
  • 노지마 토오리 “야마다 호타니의 꿈” 메이토쿠 출판사, 2011년
영상 작품
  • 야마다 호타니 이야기(2005년, 산요 신문사 기획, ONI 비전)
  • 재정 의 천재 에도막부 말기를 달린다 ~ 야마다 가야 · 기적 의 번정 개혁 ~

각주 소스 편집 ]

주석 소스 편집 ]

  1.  이때 장남은 백야국 으로 도망쳐 뻗어 상 복사 12세 주지·공산 에림이 된다 [2] .
  2. ^ 諱는 천유. 생국은 탄바국. 구조가를 섬긴다. 홍화 3년(1847년) 6월, 종육위 시모탄 고스케. 홍화 4년(1848년) 3월부터 학습소(후의 학습원)에서 가르친다. 가나가 3년(1850년) 몰. [14]
  3. ^ 별호를 유음. 통칭은 恕平. 텐포 4년(1833년), 히메지 번에 초빙된다. [15]
  4. ^ 타카야와 카스가 잠안이 만난 시기에 대해서는, 텐포 2년(1831년)으로 하는 설도 있다 [16] .
  5.  그 후의 유종관은 나카노초(현·타카하시 시 나카노초)에 재흥되지만, 덴포 10년(1839년)에 화재에 의해 다시 소실. 가영 4년(1851년)에 재흥되어 메이지 4년(1871년)에 폐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량 ​​초등학교 및 고량 유치원의 전신으로 되어 있다 [19] .
  6.  (표면)에서는 주자학 을 가르치고, 그늘 에서는 왕학 (양명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의미.
  7. ^ 마츠야마성의 서 있는 와우산 의 기슭 의 뜻.
  8. ^ 통칭은 사다구라. 별호를 창창. 봉행격, 근습두, 음미역, 유종관 학두를 역임. [34]
  9. ^ 이것은 원록 기에 이타 쿠라가 앞의 번주· 미즈타니가가 단절한 후, 막명으로 히메지 번주· 혼다 충국에 의해 행해진 모란 검지가 원인이다 [43] .
  10. ^ 타카야는 전 체역 취임에 있어서 승정으로부터 타진된 가증을 악보의 상급 번사들의 로고를 넘지 않도록 억제해 주고, 게다가 스스로에는 그들을 넘는 대폭적인 감봉을 부과하고 있다 [ 46] .
  11. ^ 주로 상급 번사와 호농·호상의 생활 수준을 하사·서민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목적으로 위로 엄격히 아래에는 완만한 내용이 되었다[47 ] .
  12. ^ 타카야가 맡는 전 체역 자체가 역득이 있는 역할 때문에, 번사들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야마다가의 가계를 번사·시오다 히토에에게 맡기고, 솔선해 공개하는 것으로 뇌물을 받지 않은 것을 [48] ​​[ 49] . 또, 부득이하게 받은 붙여 신고의 물건은 모두 번에 내밀어, 필요한 인간에게 입찰로 납부시켰다 [50]
  13. 일본은행 금융연구소 - 에도시대의 1량은 지금의 얼마? 에 기재된 레이트, 금 1량=은 60원으로 계산.
  14.  이 축재한 10만량은, 그 대부분이 제1차 조슈 정토시의 군비 증강에 지출되었다. 가타야는 만년에 읊은 한시 속에서 “십만의 저금, 한 아침에 하고 다한다”고 읊고 있다 [71] .
  15.  통칭은 로쿠로 사에몬. 호는 익룡. 근왕가에서 후지타 히가시코 등과 교류가 있었다. [81]
  16. ^ 당시 5만석 이하의 소번으로 서양식 범선을 소유하고 있던 것은 마쓰야마번 외에는 오노번과 타하라  뿐이다 [ 83 ] .
  17. ^ 5손이란 대목 첨부 , 눈부신 , 사찰 봉행, 마을 봉행 , 계정 봉행 의 5개의 직책을 말한다.
  18. ↑ 교토소 사다이 · 오사카 성대 나 젊은이를 거치지 않고 승진했다.
  19. ^ 恰(아타카)는 통칭. 마츠야마 번검 지남 역. 호타니의 재경중은 호위도 맡았다 [131] .
  20. ^ 구마타 이하 150명은 마츠야마번이 개성을 결정한 1월 27일에 타마시마에 상륙하지만, 마을은 오카야마 번병에 포위되어 있어, 마츠야마·오카야마 양번에 의한 협의상에서, 구마타가 책임자 로 절복함으로써 사태를 수렴시켰다(타마시마 사건, 구마다 사건). 희생이 된 쿠마타의 유족에게 번은 가증을 통해 보상, 또 타마시마 지구에서는 현재도 「마을을 전화로부터 구한 은인」으로서 모셔지고 있다. [132]
  21. ^이번, 도쿠가와 마에우치부(게이키) 왕명을 봉하지 않고, 병단을 열고, 대역 무도에 및 후처, 주인 이가 모리(이타쿠라 카츠시즈) 가사의 임을 잃고, 그 후 
  22.  당시의 오사카부는 오다현 의 영역에 있었다.
  23. ^ 「호타니 연보」에 의한 설. 야마다 고토 『야마다 호타니』에서는 텐포 6년(1835년)경으로 하고 있다 [175]
  24. ^ 여성이기 때문에 정규의 문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료도 있다 요출전 ] .

출처 소스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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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하야시다 1996 , p. 15.
  3. ↑ 야부키 1996 , pp. 12–13; 하야시다 1996 , p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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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b 하야시다 1996 ,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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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야부키 1996 , pp. 47-48.
  21. 야부키 1996 , p. 50.
  22. 야부키 1996 , pp. 41,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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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소스 편집 ]

헤세이 8년(1996년)에 의손인 야마다 준편 『야마다 카타야 전집』이 명덕 출판사 (전 3권)에서 복간되고 있다. 같은 해에는 호타니의 전기로서 야부키 쿠니히코 『불꽃의 양명학 야마다 카타야전』(메이토쿠 출판사)・하야시다 아키다이 『재정의 거인 에도막부 말기의 양명 학자・야마다 카타야』(산고칸)이 잇달아 간행 되는 등 최근에는 명덕출판사를 중심으로 호타니의 전기연구가 다수 간행되고 있다.

저작권
전기·연구서
  • 이부키 이와고로 “야마다 호타니”, 순정 고등 여학교 청량회, 1930년.
  • 동문 후 유지 『마코토는 하늘의 길이 되어 막부 말기의 명보좌역・야마다 카타야의 평생』코단샤 , 1995년. ISBN  978-4062070829 . 나중에 「야마다 호타니」학양서방・인물문고, 2002년.
  • 하마쿠오 『야마다 호타니의 글:호타니 유문역해』 메이토쿠 출판사, 1999년. ISBN 978-4896191493 .
  • 하야시다 아키다이 『재정의 거인 - 에도막부 말기의 양명 학자·야마다 카타야』산고칸 , 1996년. ISBN 4-88320-097-3 . 
  • 하야시다 아키다이 '재무의 교과서 - '재정의 거인' 야마다 카타야의 원동력 '산고칸, 2006년. ISBN 978-4883203437 .
  • 하야시다 아키라대 「야마다 호타니의 사상을 둘러싸고, 양명학 좌파 입문」메이토쿠 출판사, 2010년.
  • 히구치 공계『야마다 호타니의 사상과 번정 개혁』 명덕 출판사, 2011년. ISBN 978-4-89619-789-1 . 
  • 후카자와 켄지『양명학의 스스메 III 야마다 호 타니 “의대책 ” ISBN 978-4896197228 .
  • 미시마 복『철인 야마다 호타니』문화당 , 1910년. NDLJP : 782125 .
  • 카나기 카즈요시 「번의 빚 200억엔을 상환해, 200억엔 저금한 남자, 야마다 카타야」카시와 서방, 2017  . ISBN 978-4-7601-4841-7 . 
  • 미야하라 노부『철인 야마다 카타야』 명덕 출판사, 1976년. ISBN 978-4896190823 .
  • 미야하라 노부『야마다 호타니의 시:그 전역』 명덕 출판사, 1982년. ISBN 978-4896191004 .
  • 야부키 쿠니히코 『불꽃의 양명학 야마다 카타야전』명덕 출판사 , 1996년. ISBN 978-4896191288 . 
  • 야부키 쿠니히코 『케인즈에 선구한 일본인 야마다 카타야 외전』 메이토쿠 출판사, 1998년. ISBN 978-4896191417 . 
  • 야마다 준 “호타니 선생님 연보” 오카야마 현 내무부, 1916년.
  • 야마다호 「야마다 호타니」메이토쿠 출판사〈시리즈 양명학(26)〉, 2001년. ISBN 4896199286 .
  • 야마다 호타니에 배우는 모임(편)『입문 야마다 카타야 -지성의 사람-』메이토쿠 출판사, 2007년. ISBN 978-4896191851 . 
  • 야마다 호타니에 배우는 모임(편) 「야마다 호타니의 말」등 룡관 , 2007년 ISBN 978-4896194951 .

외부 링크 소스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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