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비해방을 가져오게 했는가?
누가 노비해방을 가져오게 했는가?
-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29)이상용 수석논설주간 (기자)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등록 2021.12.19
이 지구상 어느 나라든 노비와 농노, 노예가 있었다. 조선은 노비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노비보다 나을 게 없었거나 더 열악한 삶을 살아간 양인들도 많았다.
인류사를 보면 ‘인간 불평등론’ 혹은 ‘인간 차별론’은 문명 이전 아득한 태고부터 시작돼 오랫동안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도 순장이 행해졌던 것을 보면, 노비는 고대부터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노비의 뿌리는 전쟁 포로로 잡혀 온 노예일 것이다. 포로 외에 빚을 갚지 못했거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노예가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쟁이 늘 있었던 게 아니고, 삼국 통일 후에는 주로 침략을 받아온 터라 포로에서 유래한 노비는 차츰 사라졌을 것이다. 어떤 연유든 노비는 노예가 주인집에서 거주하고 혼인하고, 누대에 걸쳐 정착하면서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의 ‘신분’으로 굳어진 형태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역대 왕조 중에서 노비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15~17세기 조선 시대로, 인구의 30~40%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한양의 양반 관료들은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천명을 오르내리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노비 비중은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부모가 노비이면 자식들도 노비가 되는 종천법이란 세습 원리는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이 종천법이 단순한 듯 보여도 처음부터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고, 노비 숫자가 증가 함에 따라 더욱 복잡하고 큰 사회문제가 됐다.
노비끼리 결혼하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종적으로 외모가 흡사하고 노비 중에서 뛰어난 미모와 건장한 남녀가 있을 터이고, 한집에 기거 하거나 주인에게 신공을 받치러 오느라 왕래가 잦은 환경이다. 주인인 양반과 노비 사이에 정을 통하고, 양인과 노비 사이에 혼인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여기서 태어난 자식들도 모조리 노비로 만든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봐도 가혹하게 여겼을 것이다.
조선 시대 노비의 재산 가치가 땅의 가격보다 높게 형성됐던 극성기에는 노비끼리 결혼해도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났다. 노비 자식들의 소유는 어머 니 쪽을 따르게 돼 있는 법 때문이다. 주인의 입장에서 자기집 노가 이웃집 비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들은 이웃집 주인의 소유가 되고 자신은 손해를 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는 노비와 양인 사이의 결혼을 강력하게 금지하고 어겼을 시 태형을 가하고 일정 기간 유배를 보내는 식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노비와 양인 사이에 낳은 자식들이 전부 노비가 되면 국가의 조세를 받을 양인 인구가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또한 노비 숫자가 적을 때는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여 국가 재정을 정비할 즈음에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태종은 양인 남자와 비 사이에 난 자식은 아버지 쪽을 따라 양인으로 판정하는 종부위량법을 제정했다. 노와 양녀의 결혼은 이전처럼 엄하게 금하였으며, 그 자식들은 관노비로 삼도록 했다. 그래도 서로 사랑이 지극하면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종이 정한 종부법은 세종대에 와서 조정의 의논 끝에 비와 양인 사이의 결혼은 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은 노비로 삼는다 는 종모위천법을 제정했다. 노와 양녀의 자식들을 관노비를 만드는 법은 세종이 죽고 난 뒤 곧 폐기됐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저서에서 세종의 종모법이 조선의 노비 팽창의 한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노비제도는 임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군사가 부족해지고 기근이 빈발하자 군사에 입대하여 공을 세운 노비를 해방하고, 많은 곡식 을 헌납한 노비를 양인으로 면천해줬다.
조선 노비는 세 종류가 있었다. 관청에 속하는 관노비와 양반과 양인의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노역을 하는 솔거노비, 주인집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관노비도 경작지를 가질 수 있어서 외거노비와 관노비 중에는 부자들이 꽤 있었으며 그들이 자신의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임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농업생산량 증가와 노비 가치가 하락하면서 곡식을 바쳐 면천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세종평전」에서 “노비는 악공이나 공장이 되어 국가로부터 일정한 벼슬과 녹봉을 받기도 하고 의녀가 되기도 하고, 양반의 첩이 되어 부귀를 누리기도 했다. 태종과 세종은 노비를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노비의 매매가 가능하다고 해서 서양처럼 노예시장에 내다 놓고 팔지도 않았다. 따라서 노비가 많다 하여 마치 서양의 노예처럼 보고 노예제 사회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조선 시대 노비에 관해 상반된 견해가 나타나 일반인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동일한 사실과 현상을 두고 그 해석을 달리하는 까닭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성리학의 인륜을 그토록 부르짖는 양반 관료들이 ‘어찌 그리 노비들을 가혹하게 대할 수 있는가’라고 보면 비판적인 해석을 내리게 된다.
이와는 다르게 고매한 성리 학자라도 그 역시 집안을 경영하고 체신을 지키며 생계를 이어가려면 노비를 늘리는 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양반도 욕구를 감출 수 없는 존재라고 보면 조선 사회가 노비에게 비정하기만한 시대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영훈 교수는 세종이 태종의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바꾸면서 비와 양인 사이에 난 자식들이 죄다 종이 됐고 그 바람에 노비들이 크게 증가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영우 교수는 태종이 만든 종부법이 세종대에 와서도 그대로 시행됐다고 말했다. 다만 여종이 가끔 남편 종이 있는데도 양인과 양반과 사통하고 난 자식이라고 하여 주장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세종이 중신들과 의논한 기록은 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례였다. 주인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쉽게 여종들을 건드릴 수 있었고, 자식만은 양인으로 살게 하고픈 비가 양인과 양반과 정을 통하려는 욕구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한영우 교수는 종부법은 그대로 두되, 종부법을 악용하는 사례에 대한 논의는 치열하게 있었지만 결국 종부법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이영훈 교수는 여종과 양인·양반과 혼인을 금하는 규정을 만들었지만 처벌조항이 없었고, 그들의 소생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일종의 노비 증식을 방임하는 정책으로 인해 노비가 크게 늘어나게 됐다는 주장이다.
한영우 교수는 앞의 저술에서 고조선 시대부터 수천년간 내려온 노비세습제를 세종이 하루아침에 혁파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비소유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군왕으로서는 대규모 노비를 가지고 있는 양반 관료는 물론이거니와 소규모 노비 를 가진 양민, 그리고 노비를 소유한 노비들조차 크게 반발할 법을 제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노비의 노동력을 누가 대체할 수 있겠는가도 현실적인 난제였기 때문에 세종이 급격한 개혁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한 교수는 덧붙였다.
한 교수는 또 “세습노비제도의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다. “노비는 벼슬길로 나가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양민보다도 더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도 땅이나 노비 등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고, 조상을 제사 지내고, 성씨도 가지고 있었다. 양민이 담당하는 군역의 고통도 없고, 온 가족의 생계를 주인이 보장하니 굶어 죽을 염려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자진하여 노비가 되는 양민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영우 교수는 양천 혼인의 소생을 양인으로 만들어주고 노비의 인권과 생활조건을 단계적으로 개선해가는 데에 진력한 세종을 높이 평가했다.
이영훈 교수는 종모위천법으로 인해 노비가 늘어난 점에 주목한 반면, 한영우 교수는 종부위량법으로 인해 노비의 자식들도 양인이 될 기회를 터줬다는 데에 초점을 뒀다고 하겠다. 이영훈 교수는 조선왕조의 노비 감소의 가장 큰 공로자로 영조를 꼽았다. 영조는 노와 양녀가 낳은 자식을 양인 신분으로 하는 선대의 종모위량법을 확정 짓고 죄인의 가솔을 노비로 삼는 연좌제도 폐지했다.
영조는 이어 노비의 신공 부담도 낮추고 관청에 소속된 비의 신공을 없애는 조치를 취했던 점을 이 교수는 강조했다. 이후 노비제는 해체의 길을 밟게 돼 순조 때에 관노비가 해방되고 사노비도 갑오개혁에서 폐지됐다.
조선 노비들이 왜 오래 유지됐나?
중국 송나라 태종이 민간의 노비 소유 금지 명령을 내린 이후 사실상 사노비는 중국에서 사라졌는데, 조선은 그리 오래토록 노비제를 유지했는가 하고 비판을 가할 수 있다. 노비는 중국에서 시작됐다는게 정설이다. 황하 유역에서 대규모의 집단 농업이 발달된 중국의 고대왕조인 하·은·주 나라부터 많은 노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중국의 제도를 도입한 고조선과 삼국시대부터 노비제가 본격적으로 스며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에서 노비제도가 먼저 사라진 것은 전란이 많았고, 상공업의 발달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은 극단적인 폐쇄국가였다. 신라 천년, 고려 5백 년, 조선 5백 년, 긴 왕조 통치 기간에 외침도 있었지만 많은 숫자의 외부 인구의 유입이 없었다. 반란도 소규모에 그쳤고 성공하지 못했다. 기존의 신분제도가 변혁을 맞이할 환경이 없었던 셈이다.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중세와 르네상스의 유럽처럼 자립심이 강한 상인과 무역 계층, 엔지니어 길드 장인층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유럽에서 신분의 해방과 평등은 오랜 시간 피의 투쟁에 의해 달성됐다. 유럽은 기독교로 부터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의식을 수혈받았고 무역과 상업 발달로 성장해온 강력한 도시의 경제적 부가 뒷받침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다. 유럽의 자유 시민들은 유럽에 할거하는 봉건영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절대왕권을 확립 하려는 왕들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자유 시민의 해방을 정당화해주는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 JS 밀 등 정치 철학자들의 혁혁한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의 봉건영주들과 기사계급은 조선왕조의 양반 관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강고한 양반 관료를 뒤엎기에는 양인과 노비들의 세력은 너무나 미약했고 왕들은 무능했다.
이익을 비롯한 실학파 개혁자들은 유의미한 정치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조선 후기의 왕과 양반 관료들에게 기존의 낡은 제도와 정책을 쇄신할 능력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런 와중에 천주교의 전래와 동학의 개창은 진정한 ‘인간 평등사상’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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