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껍데기 쓴 파시즘적 역사인식은 유사역사학에만 해당하지 않아” - 경향신문
“민족주의 껍데기 쓴 파시즘적 역사인식은 유사역사학에만 해당하지 않아”
2023.09.18 07:00 입력
김종목 기자
주류 역사학계 몰아붙이는 ‘유사역사학계’, 전형적 파시스트 선동 원리
주류 학계도 자유롭지 않아…김구·신채호 등도 민족주의 한계
국가·개인 하나로 보는 ‘역사의 대중화’는 ‘비국민’ 만들어 소외
책은 앞서 출판 거부, 논문 게재 불가 판정 받아
김종준(청주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의 <한국 근현대의 파시즘적 역사인식>(소명출판)은 문제작이다. 여러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했다. 책 바탕이 된 논문도 앞서 게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논쟁적인 문제의식을 담았기 때문이다.
김종준은 E메일 인터뷰에서 게재 불가와 출판 거부 과정에서 “‘한국사학계 전체를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거냐’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유사역사학 계통인 문정창을 이병도와 비교하게 되면 역사학으로 인정해 주는 꼴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책은 주류 역사학계와 유사 역사학계, 뉴라이트를 두루 비판한다.
민족주의의 외형을 띤 파시즘적인 역사 인식
주류 역사학계는 이광수, 안호상, 박정희 등이 파시즘적 역사 인식을 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안재홍, 이병도 등의 역사학자 역시 ‘민족주의’나 ‘실증주의’ 구호 아래 파시즘적 세계관을 공유했다고 본다”는 김종준의 관점과 어긋난다. 주류 역사학도 민족주의의 외형을 띤 파시즘적인 역사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김종준의 주장은 논쟁적이다. 그는 김구나 신채호 등 ‘긍정적 이미지’인 인물의 ‘민족주의’도 비판적 접근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금도 파시즘적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살아남았고, 파시즘적 운영 원리가 여전히 이 사회에 작동한다고 본다.
개인에 대한 전체 우위 주장하며 개인 희생 당연시
김종준은 ‘파시즘적 운영 원리’를 “한마디로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시”하는 것으로 본다. “충성의 대상이 전통 시대 가족, 문중, 마을, 왕조에서 근대 이후 민족, 국가, 계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파시즘적 세계관의 기본 속성도 “개인에 대한 전체의 우위를 주장하고, 유기체인 전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김종준은 이어 “이는 전체주의 일반의 특징이기도 하다. 파시즘은 대중의 지지 기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전제주의와 구분되고, 자유주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전체주의와도 구분된다”고 했다. “독재자의 신성한 권력이나 계급적 우위를 부정한 상태에서 전체를 절대시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민족’”이라고 했다. 파시즘적 사고방식이 “‘민족/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인식”에서 생겨난다고도 했다.
저항적 민족주의 껍데기 걸친 파시즘적 사고방식
김종준은 파시즘적 사고방식이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껍데기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했다. 우선 ‘유사역사학’계 문제를 지적한다.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 ‘조선총독부사관’으로 몰아붙여 자신들의 신성하고 숭고한 ‘민족사관’과 대비시키는 작업을 통해 대중들을 선동”하는 게 한 예다. 김종준은 이를 두고 “전형적인 파시스트의 대중 선동 수법”이라고 했다.
김종준은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계보와 정립 과정을 분석한다. “세계사적으로 파시즘이 ‘대중의 열정적인 민족주의’를 정서적 기초로 삼은 점은 공통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내·외부의 ‘적’과 싸워온 ‘희생양’으로 보는 인식하에서는 어떤 행동도 정당화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니체 등이 한데 묶여 영향을 끼쳤다. 대중도 그 영향을 받았다. 1938년 춘천중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상록회’ 회원 중엔 조흥환이라는 이가 있다. 그는 1938년 7월 5일 일기에 ‘히틀러전’을 읽은 소감을 실었다. “오늘도 대아(大我)를 잊고 소아를 생각한 점은 없다. 있다고 하면 성공심이 있었을 뿐이다. 동포를 사랑하는 점에도 다른 마음은 없었다”고 썼다.
히틀러와 파시즘에 감화된 1930년대 지식인과 대중
김종준은 “나치즘을 애국적 사상으로 치장시킨 조선총독부 당국과 언론의 선전이 평범한 조선 지식인 청년의 내면에까지 스며드는 정황을 잘 보여준다. 민족애, 애국심, 대아 등의 키워드를 매개로 해서 나치즘과 민족운동은 이질감 없이 어울려졌던 것”이라고 했다.
1930년대 파시즘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동아’는 1932년 8월 ‘강력의 철학-현세의 정치사상을 지배하려는 니체와 파시즘’이란 기사를 실었다. ‘강력 철학의 3용사’라는 표제 아래 니체, 히틀러, 무솔리니 사진도 함께 실었다. 다만 이 기사는 “니체의 강력주의, 반민주주의가 파시즘의 국가지상주의, 인종주의, 독재주의를 낳았다”며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소명출판 제공
[책과 책 사이]니체와 파시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유명 철학 개념 중 하나다. 니체 하면 떠올리는 개념이다. 여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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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식인들이 파시즘 전파를 주도했다. 히틀러가 집권하던 시점 이광수는 파시즘을 ‘세계사의 조류’로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윤치호도 무솔리니의 자서전을 읽고는 “낭만적인 국제주의, 짐승 같은 볼셰비즘, 구역질 나는 사회주의’로부터 구제받기 위해 무솔리니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일기에 썼다.
안호상은 독일 유학 시절 바이마르시에서 히틀러의 대중 연설을 직접 보고 감명받은 이야기를 1938년 잡지에 실었다. ‘죽은 듯한 군중이 다시 새 생명이나 얻은 듯’ 환호하는 모습 등을 적었다.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강세형은 1947년 히틀러 유겐트를 본뜬 민족청년단 설립에 참여했다.
파시즘 비판자가 없던 건 아니다.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박치우는 “입으로는 민주주의자라고 하지만 ‘조선 사람은 세계에 으뜸가는 민족이라든가 우리글과 문화가 덮어놓고 세계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바로 국수주의자이고, 거기에 민족 감정에 불을 질러서 정치적 야심을 만족시키려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파시스트”라고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파시즘 비판에 나섰다. 동아일보 1932년 1월 1일자에는 파시즘이 ‘데모크라시를 부정한 전제주의’이자 ‘현존한 사회계급을 부정한 국가지상주의’라는 글이 실렸다. 조선일보도 1932년 6월 20일장에 마르크스주의 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반자본주의적으로 보이나 도로 최후적 자본옹호운동에 불과’하다며 일본 역시 군부 중심의 국수적 파쇼라고 썼다.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파시즘은 금기시된 이데올로기였다. “민족주의가 대체재로 떠올랐다. 아울러 ‘민족주의’ 앞에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면의 파시즘적 세계관을 감추려 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 부각해 박정희 권력에 유착한 안호상, 인종 우월론에 군국주의 옹호한 문정창
안호상은 “전체를 중시하고, ‘국가의 자유’를 우선시하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모두 반대하며, 한국 고유 전통 사상에서 보편적 민주주의를 찾는 방식에서 파시즘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안호상은 1960년대 자신의 파시즘적 세계관에서 ‘민족주의’를 부각한다. 김종준은 그 이유를 두고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론, 발전국가론, 한국적 민주주의론에 호응함으로써 권력에 유착하려 했다”고 썼다. 1976년 문정창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한다. ‘식민사학인 주류역사학’ 대 ‘민족사학인 재야사학’이라는 “허상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정치권력에 접근했다.
[역사와 현실] ‘국뽕’의 시대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 한복의 기원은 중국 전통 의상.” 반중정서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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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준은 안호상과 함께 유사역사학 활동을 주도한 문정창의 인종 우월론은 군국주의 자체를 옹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지적한다. 문정창은 “영양이 양호하고 골격이 튼튼한 일본인 장정들이 허약한 조선 청년들을 압(壓)하는 사회현상”이 가슴 아프다며, “조선인 2세들의 체력을 일본인 청장년들과 같이 건장하게 만들어내려면, 다소의 희생을 내더라도 조선인 청소년을 일본군대에 입대시켜 신체의 발육을 도우며 단련을 꾀함이 양책”이라고 했다.
‘유사역사학자’로 분류되는 안호상 등은 파시즘 영향을 받았다. 1940년 10월 경성역에 도착한 히틀러 유켄트 일행과 환영회 모습.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0년 1월 24일자에 실렸다. 소명출판 제공
김종준은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파시즘적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대한민국 정계와 학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고 본다. “파시즘적 운영원리가 정치, 사회, 학문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파시즘 성향의 국가지상주의 VS 자유주의적·개방적 민족주의’라는 이분법
김종준은 이광수, 안호상, 박정희 등이 내세운 민족주의는 ‘파시즘 성향의 국가지상주의’이고, 안재홍, 김구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적, 개방적 민족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지배적인 담론에 균열을 내려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는 어법이 지식인들에게 꽤 많은 지지를 받는다”며 “‘저항적’, ‘개방적’ 등의 긍정적 수식어는 민족주의가 독점하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권력 유지를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등 부정적 이미지들은 모두 ‘국가주의’에 떠넘기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민족주의 역사학 자체가 파시즘적 세계관을 지니고 반민주주의적, 반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점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김종준은 ‘긍정의 이미지’를 지닌 이들을 불러낸다. 김구는 파시스트, 나치스, 소련식 독재정치에 비해 민주주의가 좋다는 생각을 보였다. “피와 역사를 같이 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옛날 그리스나 로마 민족만 못할 것 없다’ 등등의 발언에 이르면 안호상,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별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명확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족(국가)의 자주, 자유가 개인의 그것과 동일시되는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집권 두고 ‘파시즘 부활’ 비판한 장준하도 ‘민족’ 한계
장준하는 박정희 집권 과정을 두고 “민족주의라는 간판 아래 국가지상주의를 통해 파시즘이 부활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국민자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민족지상주의는 나치스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종준은 장준하도 “1970년대 민족, 통일 관념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송건호는 1957년 “파시즘을 개인이 근대 국가 아래에서 자기 소외화를 의식하고는 애국심의 원시적 비합리성을 배경으로 한 ‘불만족의 애국심’이 폭력적 행동과 야합하여 나타난 정치원리”로 정의했다. 다만 “송건호도 우리 민족은 다르다는 예외주의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김종준은 말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 위한다는 사고방식이란 점에서 국가주의, 민족주의 차이 없어
식민지배와 분단 체제를 겪어온 한국 사회에서 ‘국가주의’는 억압적·폭력적인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는 저항적·실천적인 이념으로 여겨졌다. 김종준은 “개념의 본질상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한다는 사고방식이라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파시즘적 역사인식과 포퓰리즘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금 한국 사회로 확장한다. 그는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데 있어 포퓰리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포퓰리스트는 ‘진짜 국민’을 대표한다면서 ‘비국민’을 배제하는데, 그 편 가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혈통, 인종 등에 의존하곤 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반민족자’와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는 이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라고 했다.
김종준은 “부르주아나 지식인들의 ‘자유주의적 생활양식’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포퓰리즘적 전략은, ‘파시즘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종종 써먹는 수법”이라고 했다.
한국역사연구회 등이 2017년 10월 ‘환단고기류’ 등 위서를 활용햐는 유사역사학의 실체를 밝힌다며 마련한 ‘한국사회의 파시즘, 유사역사’〉전시회 전단이다. 김종준은 유사역사학의 파시즘적 역사인식을 비판하면서도 ‘민족(주의)’ 문제에서 주류 학계도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소명출판 제공
‘경제성장 이바지=애국’이라는 뉴라이트 논법, 기존 역사교과서도 완전히 부정 못 해
책의 상당 부분은 이른바 보수 우파와 유사역사학계에 대한 비판이다. 김종준은 책에서 뉴라이트 문제도 지적한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친일 - 독재 옹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으로 국가주의적, 근대주의적, 발전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것들은 근대 초기 급진개화파들로부터 일본강점기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을 거쳐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온 이데올로기이며, 현시점에서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친일을 했어도 독재를 했어도 경제성장에 이바지했으면 그것이 곧 애국이라는 논법이 성립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기존 역사교과서 역시 그같은 논리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회원들이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무효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2013년 9월12일 오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서 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종준은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친일, 독재 옹호(이른바 반민족. 반민주) 세력이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주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저자도 지녀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학계 주류 세력이 자동적으로 민족적,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의로운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는 “(주류가) ‘친일’ 뉴라이트 역사학에 대해서는 ‘민족’ 가치를 앞세운다. 그러나 ‘국수주의적’ 유사역사학 앞에서 ‘민족’ 이념은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실증’이라는 근대적 연구방법론을 내세우게 된다”고도 했다.
국난 극복의 민족주체사관 교과서 박정희 정권 정치 도구 역할 수행
김종준은 1973년 국정 국사 교과서와 2015년 초등 사회과 역사 교과서를 비교한다. 1970년대 국정 교과서는 “군사 정부의 정치 도구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국난 극복의 민족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쓰인 국사교과서는 자랑스러운 민족사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현존 국가 권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국사 과목의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전환한 1973년 나온 교과서는 민족의 순수성을 부각하려 단일 핏줄’을 내세운다. “그런데 교과서 필자들도 ‘다른 민족과의 접촉으로 피가 섞여 왔다’는 역사적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다른 민족과는 달리, 비교적 순수한 핏줄’을 지녀왔다고 선험적 가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혈연을 통해 형성되는 민족의 순수성은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부여, 동예, 옥저 같은 부족 국가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도 “‘우리 민족이 서로 나뉘어 나라를 세웠을 때에도, 하나로 뭉쳐 한 나라를 세우려는 소원은 매우 간절하고 끈질겼다’는 선험적 감상”이 전제됐다. 신라 통일도 “‘우리들은 동족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혀 가며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다. 삼국의 분립과 통일 과정을, 객관적 역사사실과 당대인들의 시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드러낸다”고 했다.
1973년 대통령 비서실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 제출한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방안 보고’다. “민족중흥의 의욕에 충만한 후세국민을 길러낸다는 관점” 등 문구가 보인다. 김종준은 당시 국정교과서가 “군사 정부의 정치 도구로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출처: 국가기록원.
김종준은 순수한 민족적 기원과 계보가 현재 국가에 속한 국민의 ‘역사적 사명’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즉, 순수한 민족성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신성한 것이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이 민족을 위해 一즉, 현존 국가 권력을 위해 一무엇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 보라는 주문이 된다. ‘민족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기반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개인을 국가에 종속시키기 위해 민족의 기원과 계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했다.
2015년 교과서에서 직접적으로 민족의 단결과 결속을 강조하는 용어나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다만 “민족의 성장과 발전 이야기로서의 역사 내러티브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유한 문화’ ‘독특한 문화’라는 표현을 통해 민족적 특수성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공동체 외부와 내부의 적을 설정하는 방식의 경우, 이전보다 표현의 수위는 악화되었지만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삼국의 ‘전성기’는 여전히 영토 확장의 측면에서 접근되고 있다”고 했다.
[특집]역사파시즘으로 무장한 두 얼굴
“한민족이 건국한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 이전의 환국이다. 환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반을 지배하는 대제국이었다. 고대 중동의 수메르 문명의 정체도 환국 12연방..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603151555291&code=115
김종준은 2020년대 현재 역사 교과서를 두고도 “특히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역사 서술 및 교육과 아무런 이질감 없이 병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2020년대 민주공화국 대학 신입생도 “민족적 자긍심 고취”
김종준이 논쟁적 문제 제기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는 갓 입학한 대학 신입생들에게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어보면 이런 답을 들었다고 했다. “민족적 자긍심 고취 및 민족의식 함양을 위해서라든가 위기 상황에서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저자가 수업하고 있는 곳이 2020년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인지 1930년대 나치 치하 혹은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하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는 “민족뿐만 아니라 계급, 계층, 지역, 성별, 세대 등 다양한 정체성, 풍부한 역사상에 입각한 역사의 대중화는 불가능한가”고 되묻는다.
[역사와 현실] 전라도 천년사 ‘논쟁’
<전라도 천년사> 논쟁이 뜨겁다. <전라도 천년사>는 2018년부터 5년간 광주시, 전라...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7060300025
그는 모호한 ‘민족주의 구호의 진정성’ 대신, ‘국가 대 개인의 관계 설정’을 보자고 제안한다. “‘국가의 우위’를 강조할수록 전체주의, 파시즘, 사회주의적 역사인식이 될 테고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할수록 자유주의, 개인주의적 역사인식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종준은 인터뷰에서 “학계는 (내 주장에) 도무지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 학계 밖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드러내기로 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했다.
김종준은 2008년 ‘대한제국 말기(1904-1910년) 一進會(일진회) 연구’로 박사 학위(서울대)를 받았다. “‘친일·매국’의 잣대에서 벗어남으로써 일진회에 참여·탈회하거나 동조·대립한 세력들의 다양한 ‘욕망’고 ‘신념’을 드러내고 분석”한 것이었다. 이름을 알린 논문이기도 하다.
김종준은 “박사논문에서 일진회가 한말 최대의 민권운동 단체이자 개혁자들이었는데, ‘일종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친일매국노’로 낙인찍히고 실제 그렇게 전락했음을 밝힌 바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일진회는 여전히 통사 책이나 교과서에서 ‘친일매국단체’의 대명사에 불과하다. 제가 근본적으로 주류 학계의 역사인식 자체를 비판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다”고도 했다.
김종준은 책에서 한국사 통사 책이나 검정 교과서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역사학을 주류로 정의했다. “그럴 경우 제가 그동안 중점적으로 파헤친 사안들은 그러한 내러티브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를 ‘비주류’로 여긴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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