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재판’이 우리 사회에 남긴 것 by 유창선 - 얼룩소 alookso
‘박유하 재판’이 우리 사회에 남긴 것
한국정치+4노동/인권/사회+5언론/미디어+4
유창선·칼럼니스트
2023/10/27
학문의 결과를 형사처벌 하려던 무모함
‘단일한 서사’만 허용되는 여론 몰이에 대한 성찰 필요
"학문적 연구에 따른 의견 표현을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가 무죄라는 취지의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는 26일 박 교수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제국의 위안부』 표지
검찰은 2015년 11월에 박 교수를 기소하면서 "위안부의 본질은 매춘", "위안부들은 일본 또는 일본군의 애국적 협력자로서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위안부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등의 표현을 허위라고 봤다. 또 "1996년 시점에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이라거나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였지만 식민지인으로서 협력자이기도 했다" 등 모두 35개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명예훼손죄에서 학문적 연구에 따른 의견 표현을 사실의 적시로 평가하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 비춰 보면 박 교수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을 부인하거나, 자발적 매춘 행위를 했다거나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매춘부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2심 재판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결이 있기까지 무려 8년의 시간이 걸렸다. 2심에 대한 상고가 접수된 지 6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대법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간만 끌어왔다. 우리 정치 사회 일각에서 반일여론이 비등하던 때라서 대법원이 눈치보기를 하면서 판결이 지연되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독해만 하면 되는 단순한 사안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이토록 미루어졌던 것은 사법부의 책임과 권위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박 교수가 2018년에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이라는 재판 기록을 책으로 냈다. 그 책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 싸움은 나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조차 생각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그동안 '위안부'의 목소리를 오로지 하나로만 인식해오지 않았을까. 최근에 <아이 캔 스피크>라는 영화가 나오면서 보통 생활인으로서의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이 전달되기도 했지만, 모든 노인을 '노인'이라는 하나의 캐릭터로만 을 수는 없는 것처럼 '위안부 할머니' 역시 한 분 한 분 개성이 있고 생각이 다르다. 당연히 그 옛날의 '위안부' 체험 역시 모두 같은 건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건 극도로 정형화된 '위안부' 이야기이고 거기서 벗어나는 이야기들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말이었다. 그러나 학자가 꺼낸 ‘새로운 시각’은 단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상황까지 내몰렸다. 단일한 피해자 서사만을 고수하던 사람들에게는 ‘위안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은 다양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꺼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유하 교수에 대한 오랜 재판의 결과는 단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지켜야 할 이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을 법정으로까지 갖고 간 사람들은 학자가 쓴 책의 내용을 오독하고 거두절미하며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시대의 정치적 분위기에 휩쓸려 이성이 아닌 집단의식이 이 사건을 가둬버렸다. 반일 여론을 등에 업은 오독이 사태를 이끈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일본을 향해 쓴 책”이라는 저자의 말은 힘없이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 사안에 대해 돌을 던지는 것 이외의 다른 의견을 표명하는 일은 감히 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우리가 잃었던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담은 내용에 대한 학문과 공론의 장에서의 토론이었다. 박 교수가 책에서 쓴 내용에 대한 이견과 반론이 있다면 다른 연구나 토론을 통해서 꺼내질 일이었다. 그런데 학자의 학문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까지 다짜고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그런 토론이 진행될 공론의 장은 아예 불가능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학문적 표현물 평가는 형사처벌보다는 원칙적으로 공개적 토론과 비판 과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선언한 것이다." 이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데 무려 8년의 세월이 걸렸다. ‘박유하 재판’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유창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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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시사평론을 했습니다. 2019년 뇌종양 수술을 하고 긴 투병의 시간을 거친 이후로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문화예술과 인생에 대한 글쓰기를 많이 합니다. 서울신문, 아시아경제,아주경제,시사저널,주간한국, 여성신문,폴리뉴스에 칼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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