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선택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기업들이 이른바 ‘특수’를 누린 건 잘 알려져 있는 대로다. 그 중엔 토요타도 있었다.
사진은 당시 토요타가 만들어 전쟁중이던 한국에 보낸 트럭. 이것 말고도 지프차가 성능이 좋아 산속오지 이동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이야기를 다른 자료에서 읽은 적이 있다.
전에 어떤 분의 포스팅에 단 댓글에서 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다시 소환한 이유는, 오늘 김명인 선생께서 ’토요타 차 디자인이 일본의 사무라이며 토리이를 연상시켜 불편하다‘는 취지의 글을 쓰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토요타를 “전범기업”이라 쓰셨기 때문.
(전에 쓴 적이 있지만 아무리 미워도 기업이나 국가에 “전범”이라는 용어를 쓸 수는 없다. “전쟁범죄인”의 단축어이고 원칙적으로 사람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학인이자 유수의 잡지를 오랫동안 발간해 온 분의 발언이라 사실 많이 놀랐다. 일반인들과는 조금은 다르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김선생님 스스로가 “반일민족주의와 친연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호들이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소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댓글에 쓰셨는데, 실제 투구와 도리이는 괜찮으신지, 아니 일본 음식이나 일본대중문화는 괜찮으신지 걱정이 될 정도.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어도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건 물론 ’기억의 계승‘ 결과다.
문제는 그런 기억이 지극히 선택적이라는 점.
그리고 이런 (박경리식) 기억의 계승이
선택된 기억의 계승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계실 것이기에 놀랐던 것.
물론, 식민지 트라우마가 만든 기억의 자장 안에서는
한국전쟁때 한반도를 누비고 다녔을 트럭조차
그저 “좌파 혹은 공산당” 에 대한 살상무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글퍼서 쓴다.
그 기억조차 고작 최근 30년동안 자리잡은 기억일 뿐 아니라 식민지기억의 극히 일부일 뿐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2001년에 비오는날 학교 앞에 서 있던 아름다운 토요타를 보고 반했지만 정작 산 건 비슷하게 예뻐 보였던 삼성이었다.
아름다운 건 좋아하지만 집착하기엔 너무 바쁘게 산 탓에 (게으름의 변명이다) 그 차를 이제껏 옆에 두고 있다.
곧 처분할 생각이지만, 토요타를 샀다면 처분조차 복잡한 심경으로 해야 했을 듯 하다.
온나라에 팽배한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라,
치유에는 관심이 없는 ‘영속하는’ 트라우마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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