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6

Park Yuha - 기억의 선택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기업들이 이른바 ‘특수’를 누린 건 잘 알려져 있는 대로다. 그... | Facebook

Park Yuha - 기억의 선택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기업들이 이른바 ‘특수’를 누린 건 잘 알려져 있는 대로다. 그...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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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선택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기업들이 이른바 ‘특수’를 누린 건 잘 알려져 있는 대로다. 그 중엔 토요타도 있었다.
사진은 당시 토요타가 만들어 전쟁중이던 한국에 보낸 트럭. 이것 말고도 지프차가 성능이 좋아 산속오지 이동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이야기를 다른 자료에서 읽은 적이 있다.
전에 어떤 분의 포스팅에 단 댓글에서 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다시 소환한 이유는, 오늘 김명인 선생께서 ’토요타 차 디자인이 일본의 사무라이며 토리이를 연상시켜 불편하다‘는 취지의 글을 쓰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토요타를 “전범기업”이라 쓰셨기 때문.
(전에 쓴 적이 있지만 아무리 미워도 기업이나 국가에 “전범”이라는 용어를 쓸 수는 없다. “전쟁범죄인”의 단축어이고 원칙적으로 사람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학인이자 유수의 잡지를 오랫동안 발간해 온 분의 발언이라 사실 많이 놀랐다. 일반인들과는 조금은 다르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김선생님 스스로가 “반일민족주의와 친연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호들이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소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댓글에 쓰셨는데, 실제 투구와 도리이는 괜찮으신지, 아니 일본 음식이나 일본대중문화는 괜찮으신지 걱정이 될 정도.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어도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건 물론 ’기억의 계승‘ 결과다.
문제는 그런 기억이 지극히 선택적이라는 점.
그리고 이런 (박경리식) 기억의 계승이
선택된 기억의 계승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계실 것이기에 놀랐던 것.
물론, 식민지 트라우마가 만든 기억의 자장 안에서는
한국전쟁때 한반도를 누비고 다녔을 트럭조차
그저 “좌파 혹은 공산당” 에 대한 살상무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글퍼서 쓴다.
그 기억조차 고작 최근 30년동안 자리잡은 기억일 뿐 아니라 식민지기억의 극히 일부일 뿐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2001년에 비오는날 학교 앞에 서 있던 아름다운 토요타를 보고 반했지만 정작 산 건 비슷하게 예뻐 보였던 삼성이었다.
아름다운 건 좋아하지만 집착하기엔 너무 바쁘게 산 탓에 (게으름의 변명이다) 그 차를 이제껏 옆에 두고 있다.
곧 처분할 생각이지만, 토요타를 샀다면 처분조차 복잡한 심경으로 해야 했을 듯 하다.
온나라에 팽배한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라,
치유에는 관심이 없는 ‘영속하는’ 트라우마들 때문에.
May be an image of timber y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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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이하는 그 정황에 관해 쓰여 있는 토요타의 홈피 글을 번역한 것.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남한)을 침공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한국군의 장비를 시급히 보충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산업력이 활용되었고, 같은 해 7월 10일에 벌써 미 8군 조달부에서 트럭을 요청했다. 도요타는 BM형 트럭 1,000대를 수주해 7월 31일 도요타 자공(自工)자판(自販)합작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납품은 이듬해 8월에 200대, 9월과 10월에 각각 400대씩이었다.
이후에도 도요타는 8월 29일에 2,329대, 이듬해 1951년 3월 1일에 1,350대 등 총 4,679대의 BM형 트럭을 수주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36억 600만 엔이다.
이러한 특수에 대응해 도요타자동차는 생산 계획을 월 650대에서 1,000대로 상향 조정했다. 노동력 부문에서는 보유 인력이 2시간 연장근무하도록 해 대응하고, 계획중이던 BM형 트럭의 BX형으로의 전환은 특수용차량이 완납될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도요타자동차의 실적은 조선 특수로 인해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그 모습을 '제22회 사업보고서'(1950년 4~9월)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과거에 항상 경영에 큰 부담이 되었던 자동차 판매 통제가격이 4월 중순에 철폐되어 한국전쟁 발발 후 소재, 부품, 타이어 등 연이은 가격 폭등에도 불구하고 자동차판매 가격을 개정함으로써 수시로 채산성을 시정할 수 있었고, 수요및 생산량 증가와 맞물리며 노동투쟁해결 이후로는 실적은 달마다 개선되는 추세에 이르렀다.
도요타자동차는 닷지 라인의 영향으로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져 정리해고까지 단행해야 했지만, 조선 특수를 계기로 실적이 호전되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https://www.toyota.co.jp/.../chapter2/section7/item2.html
トヨタ企業サイト|トヨタ自動車75年史|第1部 第2章 第7節|第2項 朝鮮戦争による特需の発生
TOYOTA.CO.JP
トヨタ企業サイト|トヨタ自動車75年史|第1部 第2章 第7節|第2項 朝鮮戦争による特需の発生
トヨタ企業サイト|トヨタ自動車75年史|第1部 第2章 第7節|第2項 朝鮮戦争による特需の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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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김명인 선생 글.
Gwang-hong Park
세이코나 시티즌이 일본군에 시계 납품했다고 전범기업 운운하는 인간들이 있는 사회입니다..
Park Yuha
박광홍 조선기업도 없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장현우
전범기업 운운하기에 벤츠는요 ??라고
Park Yuha
장현우 그러게요. 암튼 기업이나 국가는 대상이 아니라는.
김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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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물자공급 잘 안됬으면 중공군 공세에 전선 붕괴됬습니다. 국군도 중공군과 맞설능력이 51년까진 없었고 화력전 의존했어야했는데 그 탄약 장비 전부 일본제조가 필수였죠
Park Yuha
그렇죠. 한국에 도움이 된 건 분명한데, 그걸 강조하고 싶다기보다, 이런 기억은 망각/은폐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네요. 어떤 사람들한텐 그런 얘기조차 상처가 될 테니까요.
이병권
토요타 차주로서.. 일개 차 디자인을 사무라이니.. 전범기업이니.. 하는 분들은 정신의학과 진료를 진심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조리퐁같은 과자가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고 하는 정신나간 여성단체도 있었죠. 토요타 세계판매 1위인 미국인들이 전범기업의 사무라이 디자인의 차를 산다고 한다면? 미친사람 취급할겁니다. ㅎㅎ
Suk Hee Yu
77년 제가 야전병원에서 타고 다닌 앰뷸란스도 역시 일산이었지요.
Park Yuha
Suk Hee Yu 당시엔 아직 많은 것들이 그랬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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