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 2세 (벨기에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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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 레오폴드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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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국왕 | |
레오폴드 2세 | |
군림 | 1865년 12월 17일 – 1909년 12월 17일 |
이름 | Léopold Louis Philippe Marie Victor 레오폴드 루이 필립 마리 빅토르 |
태어나다 | 1835년 4월 9일 벨기에 브뤼셀 |
주사위 | 1909년 12 월 17일 (74세) 벨기에 브뤼셀 라켄 라켄 궁전 |
묻다 | 벨기에 브뤼셀 라켄 노트르담 드 라켄 교회 |
배우자 | 마리 앤리엣 도트리쉬 |
어린이 | |
집 이름 | 색스-코불 에 고타 집 |
아버지 | 레오폴드 1세 |
어머니 | 루이스-마리 돌레앙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교회 |
기호 |
레오폴드 2세 ( 프랑스어 : Léopold II , 1835년 4월 9일 -1909년 12월 17일 ) 는 제2대 벨기에 국왕 (재위: 1865년 -1909 년 ).
초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 의 왕태자 로 태어나 1865년 에 부왕의 붕괴에 따라 즉위. 레오폴드 2세의 재위 중, 1884년 까지는 자유당 , 그 이후는 카톨릭당 이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다. 벨기에 경제는 부왕의 대로부터 계속해서 급속히 성장을 이루었지만, 노동자 계급의 사회 불안도 증가. 재위 후반에는 벨기에 노동당 이 대두한 것으로 다양한 사회개혁이 이뤄졌다.
즉위 전부터 식민지 획득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다른 열강의 지배가 미치지 못한 콩고 에 눈을 돌리고 콩고 국제협회 를 창설해 탐험을 지원. 원주민 부족장과 협정을 맺는 등 콩고 지배의 기성사실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1884년 베를린 회의 에서 콩고를 사유지로 통치하는 것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콩고 자유국 ).
콩고의 통치 초기에는 철도 부설이나 아랍인 노예 상인에 의한 노예 사냥으로부터 흑인을 지키는 등, 콩고의 근대화에 노력하는 면도 있었지만, 원주민을 혹사하여 천연 고무 의 생산 증가를 도모해, 영국 등 에서 원주민에 대한 잔학 행위를 비판받아 1908년에는 콩고를 벨기에 국가에 위양하는 것을 강요당했다( 왕의 사령 에서 벨기에 식민지 로의 전환).
1909년에 붕괴. 질출자 의 남자가 없고 조카의 알베르 1세가 왕위를 이어갔다.
평생 [ 편집 ]
왕태자 시대 [ 편집 ]
1835년 4월 9일에 벨기에 왕국의 수도 브뤼셀 에 초대 벨기에 왕 레오폴드 1세 와 그 비비 루이스-마리 돌레앙 (프랑스 왕 루이=필립 1세 의 딸)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난 [1] [2] . 오빠 루이 필립은 전년에 갈등했기 때문에 왕 태자가되었다 [3] .
동생에게 필립 왕자( 프랑드르 백 ), 여동생에게 샬롯 공주(멕시코 황제 막시 밀리아노 1세 황후)가 있다. 작센=코부르크=고타공 에른스트 1세와 작센=코부르크=고타공자 페르디난트는 백부, 영국 여왕 빅토리아 는 종언자, 영국 왕배 알버트 와 포르투갈왕 페르난도 2세는 종형이다.
9세 때 브라반트 공에 서서(이후 벨기에의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작위가 된다) [3] .
1853년 8월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부왕 요제프 안톤 의 딸 마리 앤리엣 드 압스부르 로렌 과 결혼, 그녀와의 사이에 3명의 여자와 1명의 남자를 벌었지만, 남자 레오폴드 는 9세로 해 욕절하고 있다 [3] . 당시 벨기에는 여자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남 레오폴드의 장작과 함께 직계의 왕위 계승자를 잃었다.
1855년 에 상원의원 이 되어, 정계에 들어갔다 [3] .
벨기에는 1830년에 네덜란드 로부터 독립된 신흥국이었지만, 부왕 레오폴드 1세의 입헌군주의 틀을 넘은 강력한 지도하에 다른 나라에 앞서 1836년에 철도를 완성 하자,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4] . 그래도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은 벨기에는 유럽 속에서는 소국에 불과했지만, 레오폴드 왕태자는 언제까지나 벨기에를 그 입장에 달게 할 생각은 없었다 [5] . 이웃 네덜란드가 커피 붐을 타고 식민지 자바 에서 막대한 이익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고, 벨기에에도 식민지가 불가결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6] .
식민지를 물색하기 위해 중근동 과 북아프리카 , 실론 섬 , 청 등을 여행했다 [7] . 귀국 후 상원에서 식민지 획득을 열심히 호소했지만 식민지에 관심을 가진 상원의원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과테말라 식민지화의 실패 이후 벨기에 국민도 의회도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8] .
그래도 왕태자의 식민지에 대한 열의는 사라지지 않고, 1860년에는 “밖을 향해 팽창해야 할 시기가 와 있다.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 벨기에가 식민지화할 수 있는 곳을 처치하는 대로 물색해, 1865년에는 “청나 일본 에의 원정이 성공하면 벨기에는 거대한 제국이 될 것이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착취하는 것 는 허용되지 않지만, 유럽의 출현을 동양이 구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라고 말해, 극동의 식민지화에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9] [6] .
즉각 [ 편집 ]
부왕 레오폴드 1세가 1865년 12월 10일에 무너진 것에 따라, 17일에 레오폴드 2세로서 벨기에 국왕에 즉위했다. 이후 1909년 12월 17일의 붕괴까지 재위했다 [1] [10] .
내정 [ 편집 ]
1857년부터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당 자유당 은 학교교육의 무종교화를 지원하는 훔베이크법을 1879년에 통과시켰다 [3] [11] [12] . 야당 카톨릭당 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고, 마침내 교황령이 벨기에와의 국교를 단절하는 소란에까지 발전했다 [11] . 레오폴드 2세는 종교 논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이 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11] .
훔베이크법을 둘러싼 대립의 격화와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농민의 반발, 군확·교육개혁에 따른 부담증가에 대한 비판 등으로부터 결국 1884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패하고 가톨릭당이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의 거국 일치 내각까지 동당이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 훔베이크법은 개정되어 종교교육이 부활했다 [3] [13] [14] .
경제는 레오폴드 1세의 통치에서 이어져 비약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벨기에는 농업의 수익률에 있어서 유럽 제일이며, 또 철도의 밀도는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석탄 생산, 철강 생산도 급상승했다 [15] . 불황 등에도 불구하고, 영국불 등과 통상조약을 맺어 자유무역을 추진했다 [16] . 경제에 대해서만 말하면 벨기에는 이미 경제대국으로 되어 있었다 [15] .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에 수반하는 소경영에서 대규모 공장제로의 전환에 의해 노동자계급의 환경은 악화되어 갔다 [17] . 이러한 국민의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1885년 에는 사회주의 나 사회민주주의 의 파벌 등이 통일되어 벨기에 노동당 이 결성되어 동당이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 ] [18] . 1886년에는 리에주나 샤를로 와에서의 노동자의 파업이 폭동으로 발전 하여 군대가 투입되는 소란이 되었다 [19] .
이러한 사회정세에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가톨릭 정부도 양보를 강요받아 노동자 보호 정책이 내세워졌다. 1887년 월급 현물지급이 금지되었고, 1889년 여성과 아동 노동이 제한되었다. 1900년에는 노령연금의 제도가 도입되고, 1905년에는 일요일 노동이 금지되어 있다 [19] . 또 노동당의 조직한 노동조합에 의한 총파업 의 압력으로 1893년 에는 남자 보통선거법 이 제정되기에 이르고 있다 [3] [20] .
1902년에는 왕비 마리 앙리엣에 앞서 있었다 [1] .
붕괴 3일 전인 1909년 12월 14일에는 새로운 병역법에 서명했다. 불공정이라고 비판되고 있던 지금까지의 추첨의 징병제를 개정해, 한 가족당 한 사람을 병대에 내는 것을 의무화했다 [주석 1] .
콩고 획득 [ 편집 ]
레오폴드 2세는 즉위하자 상원에서 식민지 획득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필리핀 , 모잠비크 , 보르네오 , 청, 모로코 , 에티오피아 등의 식민지화를 노리고 책동했지만, 먼저 손을 붙이고 있는 열강에 저지되어 실패가 계속되었다 [22] [5] . 그러던 중 중부 아프리카 콩고 에 식민지 획득 기회를 발견하게 됐다. 콩고는 천연 고무 , 상아 , 다이아몬드 , 금 , 은 , 구리 등 매력적인 자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의 「발견」이 늦어진 것으로, 아직 열강의 손이 거의 붙어 있지 않다 공백지대'였다 [6] [5] .
레오폴드 2세는 1876년 9월에 아프리카 탐험과 "문명화"에 대해 토론하는 회의를 브뤼셀 에서 개최했다 [8] [23] . 그 회의에서 콩고 탐험을 지원하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 」의 창설을 결의해, 레오폴드 2세 스스로가 그 집행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8] . 1879년에는 위 콩고 연구위원회에, 또 1882년에는 콩고 국제협회 로 개편했다 [22] [24] . "국제"라고 명명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레오폴드 2 세의 사적 기관도 동연했다 [25] .
영국에서 패트론 을 찾을 수 없었던 탐험가 헨리 스탠리 의 패트론이 되어, 1879년부터 1883년에 걸쳐 스탠리에 콩고 강 유역을 탐험시켜 [26] , 거기에 수많은 중계지를 만들게 하는 것과 동시에, 원주민 부족의 부족 장들과 독점적인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27] [28] [29] .
레오폴드 2세의 적극적인 콩고 식민지화 정책을 경계한 포르투갈 은 15세기에 콩고 왕국 과 관계를 맺은 이래 포르투갈의 권리로 콩고 강 하구 주변의 주권을 주장하게 되어 영국 가 포르투갈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 식민지 문제로 영국 불을 대립시키려고 하는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는, 프랑스와 결탁해 레오폴드 2세의 입장을 지지했다 [30] .
콩고를 둘러싸고 유럽 국가들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1884년 이해관계 조정을 위해 비스마르크의 주최로 구미 14개국에 의한 베를린 회의 가 개최되었다. 콩고에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것, 문호를 개방 하고 콩고를 자유무역의 땅으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콩고가 레오폴드 2세의 개인적 사유지인 것이 인정되었다 [31] [29] .
콩고 지배 [ 편집 ]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레오폴드 2세의 사령 ‘ 콩고 자유국 ’이었다. 벨기에 의회는 여전히 식민지 지배에 관심이 없어 "콩고 통치는 벨기에 국가와 상관없이 레오폴드 2세의 사적 행위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벨기에의 국비를 콩고 통치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라는 조건하에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통치를 승인했다 [32] [33] .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 본국에서는 입헌 군주로서 헌법상의 묶음이 있지만, 사령인 콩고에서는 그러한 권력의 제한은 일절 없고, 전제 군주로서 군림했다. 콩고 통치를 맡은 직후인 레오폴드 2세는 거액의 사비나 국내외 투자자의 투자를 모집하여 콩고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벨기에 본국의 75배나 되는 국토가 있고, 또한 정글 이나 산악 때문에 답파가 곤란한 콩고의 땅에 마타디·레오폴드빌 철도를 비롯한 현대적인 철도망을 부설했다 [주석 2] .
또, 다른 열강과도 협력 위에서 요새를 건설해, 흑인을 잡아 매각하려고 하는 아랍인 노예 상인의 단속을 강화했다 [32] [37] . 레오폴드 2세는 이러한 활동을 위해 사재의 대부분을 쏟아내고 있으며, 자신의 생활도 잘라야 할 정도였다 [32] .
하지만 곧 레오폴드 2세는 이익 회수를 최우선으로 하게 됐다. 1891년과 1892년의 칙령에 의해 가장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상아 와 천연고무 를 자신의 독점 사업으로 삼고, 특히 189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수요가 높아지고 있던 천연고무 채취를 서두르게 했다. 1893년까지 250톤 부족했던 천연 고무 생산량을 1901년에는 6000톤으로까지 높였다 [38] [17] [37] . 그러나 그것은 원주민의 가혹한 노동 위에 성립되었다 [37] [39] . 가장 중요한 자원인 천연고무에는 노르마 제가 설치되어, 생산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손발 절단 등의 벌이 가해졌다 [40] [41] . 가혹한 압정에 의해 콩고의 인구는 1885년에 콩고 자유국이 건설된 시점(3000만명)에 비해 70% 감소하고, 900만명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42] . 이런 잔학 행위를 하고 있던 것은 레오폴드 2세의 사군인 공안군 이었다. 이 부대는 사관은 백인이지만, 병사는 나이지리아 나 서아프리카 제국의 흑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43] [44] .
영국 로데 시아 식민지 세실 로즈가 진출해 오는 우려에서 콩고 남부의 카탄가 진출에도 힘을 쏟았다 [45] .
한편, 영국 식민지성 은 콩고 자유 국내에서의 잔학 행위의 보고를 모으고 있었다. 또, 콩고에 체재하는 선교사도 그러한 보고를 『타임즈』 종이를 비롯한 신문에 공표하게 되어, 유럽중에서 레오폴드 2세에의 비판이 강해져 갔다 [46] . 1903년에는 영국 하원 이 “콩고 자유국은 베를린 조약 을 위반하여 원주민에 대해 가혹한 압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결의를 내고 있다 [47] . 에드몬드 모렐 의 '붉은 고무', 마크 트웨인 의 '레오폴드 왕의 독백' 등 레오폴드 2세 비판의 저작도 잇달아 출판되었다 [48] .
무엇보다 이러한 보고에는 과장이나 루머 등의 종류도 많았다고 한다 [42] . 이러한 비판이 시작된 배경에는 영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와 자본가가 레오폴드 2세의 중세 지배한 자의적인 통치를 싫어하고 보다 합리적인 근대 식민지 통치로 대체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49] ] . 따라서 반드시 벨기에에서 콩고를 빼앗으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콩고를 레오폴드 2세의 사령으로부터 벨기에 국가의 식민지로 전환시켜 책임있는 통치를 시킬 의도가 있었다 [50] .
하지만 레오폴드 2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국의 음모라고 의심했다 [51] . 콩고 통치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벨기에 국민도 갑자기 시작된 레오폴드 2세 비판 캠페인에 의심을 갖고 “영국인은 보어 전쟁 으로 보어 인 으로부터 재산을 빼앗고 다음은 콩고를 노리고 있다”고 비판하는 자 많았다 [50] .
영국에 들어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식민지 대신 에드먼 반 에트발드 남작에 대해 “정말 잔학 행위가 행해지고 있다면 멈춰야 한다. 그러한 잔학 행위가 계속된다면 콩고 자유 나라의 붕괴를 초래한다”고 말해 원주민 보호위원회를 조직시켰다. 이 위원회는 조사권에 다양한 제한이 가해져 큰 성과는 들 수 없었지만 [52] [49] 일단 강제노동 완화, 원주민 부족에게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의 개혁 가 행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53] .
그래도 맞지 않는 국제적 비판을 견디지 못한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가 콩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면 콩고를 국왕의 사령에서 벨기에 국가의 식민지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1906년 에 의회에 그것을 쫓았다. 한편,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은) 내 개인적인 노력의 결정이다. 그 잔해로부터 이익을 잡으려고 하는 자 들이다 .
그러나 벨기에 의회는 레오폴드 2세에 콩고를 놓아 달라고 결의했다. 영국과 미국 등 국외로부터의 비판도 여전히 치열해, 레오폴드 2세도 마침내 콩고 개인 영유를 포기했다. 1908년 10월 18일에 벨기에 국가에 콩고를 양도하는 취지의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 [55] .
이 후 벨기에 의회의 결의로 손목 절단 등 중세 갈등의 잔학형은 금지되어 근대적 식민지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어 레오폴드 2세를 거치지 않고 자본가에게 직접 이익이 들어가게 되었다 . 강제노동은 온존했지만,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와 비교하여 특별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56] .
붕괴 [ 편집 ]
레오폴드 2세가 원하는 대로 콩고를 보유한 벨기에는 열강의 한 나라로 꼽히게 되었지만, 레오폴드 2세 자신의 명성은 콩고 통치를 위해 땅에 빠졌다. 비비나 딸에게까지 희미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57] .
장년기에 장남 레오폴드 를 수난 사고로 잃고, 이후도 후계자의 남아에게 축복받지 못한 왕비나 가족과의 소원 때문인지, 1900년경부터 브란슈 드라크로와 와 애인 관계가 되어 그녀와의 사이에 사생아 의 남자를 2명 벌고 있다. 하지만 이 애인관계도 국민의 비판이 되어 레오폴드 2세의 인망은 더욱 떨어졌다 [57] .
1909년 12월 초 장폐색 으로 중체가 되었다. 왕비에는 1902년에 앞서 있었고, 붕괴의 시기를 깨달은 레오폴드 2세는 가톨릭 사제 를 소집해 애인 브란슈와의 결혼을 강행했다 [57] . 그 결혼 후 며칠 후 브란슈가 지켜보는 가운데 74세에 무너졌다. 그러나 벨기에의 법률에서는 이 결혼은 무효로 간주되고 있고, 브란슈는 레오폴드 2세의 붕괴 후 즉시 궁정을 쫓기고 있다 [57] .
왕위는 동생 플랑드르 백작 필립 의 아들 알베르 1세가 이어졌다 [3] .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장례를 간소한 것에 머물렀고, 또 장렬도 생략하도록 유언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부로부터 조카로 하는 미묘한 왕위 계승이었기 때문에, 선왕을 거칠게 취급했다는 비판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알베르 1세는 성대한 국장을 거행시켰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공내에 걸친 스캔들 탓에 국민으로부터 거의 경의를 갖지 못했던 레오폴드 2세의 장례는 군중의 부잉에 노출되어 안에는 레오폴드 2세의 관에 침을 뱉는 자까지 있었다고 [58] .
2020년 , 후술하는 레오폴드 2세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왕 필립 은, 콩고의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유감의 극한」을 전했다 [59] .
인물상 [ 편집 ]
콩고 통치에서 악명을 떨쳐 '유럽 최악의 종주'로 불렸다 [60] . 그러나 본래는 야만적인 행위를 싫어하는 인물이며, 흑인에게 폭력을 흔들지 않도록 현지 행정관에게 자주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이 흔들리는 원인이 그 자신의 천연 고무 생산률에 대한 집념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나이브 한 '자선가'였다 [39] .
건강에 집착이 있어, 턱수염을 비로부터 지키기 위한 특별제의 커버를 만들고 있었다 [61] . 또, 병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시종이 감기 에 걸리면 회복할 때까지 궁정에의 출사를 금지했다. 시종들 사이에서는 레오폴드 2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가병으로 휴가를 가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61] .
프란츠 슈레이커 의 오페라《헨트 의 대장장이 》( Der Schmied von Gent ; 초연 : 1932년 , 베를린 )는 2019년 이후 「베를린 출신의 젊은 귀재, 엘잔 몬터크」의 연출에 의해 오페라 발레 프란달렌(Opera )에서 상연되었지만,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대장장이의 부모님 스메의 위치에」레오폴드 2세를 짜넣어, 「벨기에 제국주의 시대의 콩고에 대한 부의 역사를 가시화해, 땅 시대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되어 있었다” [62] .
동상 [ 편집 ]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은 벨기에 국내에 다수 존재하고 있지만, 인권보호단체가 과거의 압정을 이유로 동상의 철거를 호소해 온 경위가 있다. 2020년 6월, 미국 에서 발생한 반인종 차별 시위 가 벨기에에도 파급. 앤트워프 시내에 있던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습격을 받아 방화 된 위에 도료 가 걸리는 사태가 되었다. 앤트워프시는 같은 달 9일에 동상을 철거, 수리한 후, 시내의 박물관에 수장할 방침을 발표했다 [63] .
계보 [ 편집 ]
레오폴드 2세 | 아버지 : 레오폴드 1세 (벨기에 왕) | 할아버지 : 프란츠 | 소조부 :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작센-코부르크-자르펠트 공) |
소조모: 조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 |||
할머니 : 아우구스테 | 소조부 : 하인리히 24세 (로이스-에버스도르프 백) | ||
소조모: 칼로리네 (엘바흐-셰인베르크 후녀) | |||
어머니: 루이스=마리 | 할아버지 : 루이 필립 (프랑스 왕) | 소조부 : 루이 필립 2 세 (오를레앙 공) | |
소조모 : 루이스 마리 | |||
할머니 : 마리 아메리 | 소조부 : 페르디난드 1세 (양 시칠리아 왕) | ||
소조모 : 마리아 칼로리네 [주석 3] |
가족 [ 편집 ]
1853년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 앤리엣 과 결혼해 1남 3녀를 벌었다.
- 루이스 (1858년 - 1924년) 작센 코브룩 고타 공자 필립 비
- 레오폴드 (1859-1869) 브라반트 공작
- 스테파니 (1864-1945)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비
- 클레만틴 (1872-1955) 나폴레옹 빅토르 보나파르트 부인
등장 작품 [ 편집 ]
- TV드라마
각주 [ 편집 ]
주석 [ 편집 ]
- ↑ 이것에 의해 지금까지 횡행하고 있던, 복권으로 징병되게 된 부유한 자가, 복권으로 징병을 도망친 가난한 사람을 고용해 몸 대신에 병대에 가게 한다고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21] .
- ↑ 한편으로 이 철도 건설에 있어서도 콩고 선주민이나 인근 제국 주민, 청 등으로부터 모인 노동자에게 가혹한 노동이 부과되었다고 하는 비판이 있다 [34] [35] . 또, 원주민에게 개인소유의 개념이 없었던 것을 이용하여 토지를 마음대로 무주지로서 접수해 행해진 사업이라고 하는 비판도 있다 [36] .
- ↑ 마리아 칼로리네 는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의 딸.
출처 [ 편집 ]
- ^ a b c d 벨기에 왕실 공식 사이트 "The Belgian Monarchy"
- ↑ 세계 전기 대사전(1981) 제12권 p.291-292
- ^ a b c d e f g h i 세계 전기 대사전 (1981) 12 권 p.292
- ↑ 듀몬(1997) p.65-71
- ^ a b c 루이스 (2010) 2 권 p.279
- ↑ a b c 미야모토, 마츠다 (1997) p.332
- ↑ a b 트웨인(1968) p.32
- ↑ a b c 듀몬(1997) p.73
- ↑ 트웨인(1968) p.33
- ↑ 진(2001) p.269
- ↑ a b c 듀몬(1997) p.72
- ↑ 모리타(1998) p.384
- ↑ 지금부터(1972) p.440
- ↑ 모리타(1998) p.384-386
- ^ a b 지금(1972) p.441
- ↑ 모리타(1998) p.386
- ↑ a b모리타 (1998) p.392
- ↑ 모리타(1998) p.393-394
- ↑ a b모리타 (1998) p.394
- ↑ 모리타(1998) p.395-396
- ↑ 듀몬(1997) p.89
- ↑ a b모리타 (1998) p.391
- ↑ 루이스(2010) 2권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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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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