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는 왜 60년 ‘침묵의 전통’ 깨고 콩고에 사과했나?
기자최현준수정 2020-07-10 17:20
등록 2020-07-08 16:30
지난달 9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 레오폴 2세의 흉상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벨기에에서는 1885~1908년 중부 아프리카 민주콩고를 식민 지배하면서 원주민을 가혹하게 착취한 레오폴 2세의 동상을 없애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과거의 상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다.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로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벨기에 필리프 국왕은 아프리카 중부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DRC)의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이날은 민주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지 꼭 60년째 되는 날로, 1885년부터 1960년까지 민주콩고를 식민 지배한 데 대해 완곡하게 사과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벨기에는 민주콩고를 가혹하게 침탈해,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원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민주콩고 독립 뒤 ‘침묵의 전통’을 지키던 벨기에 왕실은 왜 60년만에 식민 역사에 대한 사과에 나섰을까?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보듯이, 침략국 벨기에는 ‘선택적 기억’과 ‘의도적 망각’으로 역사를 조작했고, 이에 맞서 진실을 알리는 여러 폭로와 자성들이 100년 가까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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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케디 민주콩고 대통령은 “민주콩고 역사상 벨기에로부터 받은 가장 훌륭한 서한이었다”고 답했지만, 아직 벨기에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아니고, 국내외 여론에 떠밀려 유감을 표시하는 정도의 제한된 사과라는 한계가 있다.
벨기에 왕실 누리집 캡쳐. 벨기에 2대왕 레오폴 2세에 대해 노예제를 반대한 것처럼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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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인 2세 14살 노아의 외침…“히틀러 동상이 베를린에 있다면…”
벨기에에서 최근 불붙은 식민역사 청산 움직임은 지난 5월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비롯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시작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은 대서양 넘어 유럽으로 건너갔고, 벨기에에서는 식민 역사를 반성하자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벨기에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1800년대 후반 아프리카 중부를 식민지로 개척해 가혹하게 통치했던 벨기에 왕국의 두 번째 왕, 레오폴 2세의 동상을 없애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도 없애자고 주장했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어두운 식민역사교육을 제대로 할 것도 요구했다.
콩고 출신 부모와 함께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14살 소년 노아도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지난달 국제 온라인 청원 누리집 ‘체인지’에 레오폴 2세의 동상을 제거하자는 글을 올렸다. 레오폴 2세가 벨기에의 ‘건축왕’으로 추앙받는 현실을 문제 삼으며, “그는 대량학살의 왕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영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학살자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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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마감된 청원에는 총 8만2679명이 참여했다. 목표치인 15만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필리프 왕의 사과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는데 일조했다. 노아는 “이것은 내 선조들의 이야기고, 그들은 수없이 죽었다”며 “레오폴 2세 동상이 브뤼셀에 있는 것은 히틀러 동상이 베를린에 있는 것과 같다”고 <시엔엔>(CNN)에 말했다.
이런 여론에 떠밀려 벨기에 의회는 민주콩코 등 식민 역사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꾸리기로 했고, 교육 당국은 벨기에 학생들에게 식민역사 교육을 하기로 했다.
벨기에는 1908∼1960년 백인 남성과 식민지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수천~수만 명을 강제로 가족에게 떼어내 보육원 등 시설에 수용했다. 벨기에는 혼혈 아동이 식민통치 원칙 중 하나인 인종분리 차별 정책을 약화한다고 여겼다. 벨기에 정부는 지난해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사진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언론 인터뷰를 위해 모인 콩고 출신 혼혈 여성들로, 자신들을 가족과 강제 분리한 데 대해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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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사이…“식민 통치로 아프리카 경제 발전 이뤘다”는 벨기에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덩치 큰 국가들에 가려졌지만, 벨기에는 19세기 후반부터 100년 가까이 아프리카 중부에서 어느 제국주의 국가보다 잔혹하게 식민 통치를 했다. 특히 왕실 23년, 정부 52년 등 도합 75년을 지배한 민주콩고에서는 잔혹한 통치로 수십만 혹은 수백만 콩고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하지만 벨기에는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식의 주장만 되풀이해 왔다. 일본이 한국에 관해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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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벨기에의 인종차별 문제 등을 조사한 ‘아프리카계에 대한 유엔 전문가 워킹그룹’은 언론을 인용해 “벨기에 고교 졸업생 중 4분의 1이 콩고가 벨기에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초·중등 교과 과정에 식민 통치 역사가 제대로 담겨있지 않고, 교육 내용도 교사 개개인의 관심에 크게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교과 과정도 식민 지배의 결과로 아프리카에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식민지 시대 선전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식민지 개척에 앞장선 레오폴 2세에 대해서도 사회 전체가 선택적인 기억만을 한다. 레오폴 2세는 콩고를 식민 통치해 번 돈으로 브뤼셀에 공원과 궁전 등 여러 건축물을 세웠는데, 후손들은 그를 ‘건축왕’이라 부르며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따 거리의 이름을 짓고 있다. 그의 악행은 얘기하지 않은 채, 그가 한 선행만을 기리고 있다.
벨기에 왕실이 앞장 서서 이를 이끌었다. 벨기에 왕실 누리집을 보면, 레오폴 2세에 대해 “1890년 7월 브뤼셀 국제회의에서,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조약이 체결돼, 아프리카 노예제 반대의 기초가 됐다”고 설명해, 그가 흑인 노예제를 반대하는 데 앞장선 것처럼 묘사했다. 1960년 6월 민주콩고 독립 당시 벨기에 8대왕 보두앵 국왕은, 레오폴 2세에 대해 “‘정복자’가 아닌 (문명을 전파한) ‘시빌라이저’로 행동했다”고 말했다. 레오폴 2세의 악행은 그가 사망하기 전인 1900년대 초 유럽 전역에 폭로돼, 1908년 그가 콩고에서 손을 떼게 되는 계기가 됐으나, 벨기에 왕실은 이를 외면한 채 계속 그를 추앙해 온 것이다.
이런 전통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필리프 국왕 동생인 로랑 왕자는 지난달 12일 레오폴 2세가 “콩고에 가본 적도 없기 때문에“ 잔학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열린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브뤼셀 자유 대학 전 총장인 에르베 아스캥은 벨기에가 콩고에서 전파한 보건 제도와 사회기반 시설, 초등 교육 등을 열거하며 “식민지화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2월 벨기에를 조사한 한 유엔 워킹 그룹은 벨기에에 여전히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다며 “식민지화의 진정한 범위와 부당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98년 애덤 호크쉴드가 쓴 <레오폴드 왕의 유령>. 레오폴 2세의 가혹한 통치를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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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시작된 폭로들…모여모여 사과로
1998년 미국 작가 애덤 호크쉴드의 책 <레오폴드 왕의 유령>이 출판되면서 벨기에의 식민 지배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일어났다. 레오폴 2세가 아프리카 중부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가 100년 만에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식민 지배에 대한 벨기에 사회의 내부 토론이 이뤄지고, 국제사회에서도 널리 환기됐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2003년 번역 출판됐다.
이보다 100년 앞선 1900년대 초에는 훗날 언론인과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영국인 에드먼드 모렐이 “아프리카에 공익사업을 펼치는 인도주의 지도자” 레오폴 2세의 가면을 벗긴다. 당시 화물회사 직원이었던 모렐은 콩고에 드나드는 무역 기록 등을 토대로, 레오폴 2세가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아프리카 중부를 개척해 인도주를 전파한다고 선전하면서, 실상은 원주민을 착취해 상아와 고무 채취에 나서 이익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다. 그의 활동과 더불어,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여러 선교사들이 벨기에 군인에게 손이 잘린 원주민 사진을 공개하는 등 벨기에의 잔혹한 통치에 대해 폭로했다. 이런 노력이 모여, 레오폴 2세는 국제적 지탄을 받게 되고, 1908년 본인이 세운 콩고 자유국가에서 손을 떼게 된다.
이외에도 2001년 콩코 초대 총리이자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패트리스 루뭄바의 1961년 암살에 대한 책 <루뭄바의 암살>이 출판되면서, 벨기에는 2002년 루뭄바 암살에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루뭄바의 집권에 따라 콩고의 막대한 천연자원에 대한 벨기에의 지배력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 벨기에 정부는 지난해 민주콩고 식민통치 시기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수천 명을 부모로부터 납치해 분리·격리하고, 강제 입양시킨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벨기에 식민통치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인 인종 분리 차별정책에 따른 조처였다.
손이 잘린 콩고 자유국 원주민들. 레오폴 2세 식민 지배 당시 고무 수확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신체를 훼손하는 등의 학대가 이뤄졌다. 위키피디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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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중부 민주콩고에서 무슨 일이?
1865년 벨기에 2대 왕에 취임한 레오폴 2세는 야심가였다. 그는 당시 열강인 영국,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건설해 자국의 부국강병을 이루길 원했다. 1885년 레오폴 2세는 아프리카 중부 지역 추장들로부터 땅 200여만㎢를 빼앗아 콩고 자유국가로 이름 짓고, 스스로 왕이 됐다.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경영에 반대해, 국가 차원의 점령이 아닌 레오폴 2세의 사적인 점령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전 세계적인 고무 붐이 일면서 원주민들은 가혹한 수탈에 내몰렸다. 할당량을 채취하지 못할 경우 레오폴 2세가 보낸 군인들에 의해 손목이 잘렸고, 노동을 견디지 못한 채 도망가면 가족들이 살해됐다. 이런 가혹한 식민통치는 알려지지 않다가, 1900년 초반 영국 언론인과 그곳에 다녀온 선교사들의 고발로 알려졌다. 특히 손이 잘린 채 망연자실한 듯 눈을 뜨고 있는 원주민 사진 등이 공개되면서 잔학한 통치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레오폴 2세는 잔혹 행위가 드러나 국제적 비난을 사자 1908년 사유지였던 콩고 소유권을 벨기에 정부에 넘겼다. 당시 인구에 대한 구체적 통계가 없고, 증거가 인멸돼 정확한 사망자 수를 알 수 없다. 일부 역사가들은 레오폴 2세의 20여년 통치 기간에 희생된 콩고인을 최대 1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지만, 당시 아프리카 인구에 비춰 수십만명 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벨기에의 식민 지배를 받은 민주콩고와 르완다, 브룬디는 훗날 내전을 치르거나 잦은 쿠데타 등 정치불안에 시달린다. 분쟁의 씨앗은 벨기에에 의해 뿌려졌다. 벨기에는 식민화 전 인위적인 국경을 그어 종족간 갈등을 만들었고, 식민 지배 때는 철저한 종족 차별정책으로 갈등을 심화했다. 르완다에서는 1994년 100만에 가까운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고, 민주콩고는 2차례 내전을 겪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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