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6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 Wikipedia 12·12 군사 반란- 한국어, 일어한역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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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Gwanghwamun on December 13, 1979
DateDecember 12, 1979
LocationSeoul
Also known as12.12 Military Insurrection
ParticipantsShingunbu (containing Hanahoe (including Chun Doo-hwanRoh Tae-woo)) vs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OutcomeShingunbu (new military group)[1] became the controller of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The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or the 12.12 Military Insurrection (Korean12.12 군사 반란Hanja十二十二軍事反亂) was a military mutiny which took place on December 12, 1979, in South Korea.

History[edit]

Republic of Korea Army Major General Chun Doo-hwan, commander of the Defence Security Command,[2] acting without authorization from Acting President Choi Kyu-hah, ordered the arrest of General Jeong Seung-hwa, ROK Army Chief of Staff, on allegations of involvement in the assassination of former President Park Chung Hee.

After Jeong's capture, 29th Regiment of the 9th Division, along with the 1st Special Forces Brigade and 3rd Special Forces Brigade, invaded downtown Seoul to support the 30th and 33rd Capital Security Group loyal to Chun, then a series of conflicts broke out in the capital. Two of Jeong's allies, Major General Jang Tae-wan[3] (Commander of Army Capital Security Command) and Major General Jeong Byeong-ju (Commander of Army Special Warfare Command), were also arrested by the rebel troops. Major Kim Oh-rang, aide-de-camp of Jeong Byeong-ju, was killed during the gunfight.[4]

By the next morning, the Ministry of Defense and Army HQ were all occupied. Chun and his fellow 11th class of Korea Military Academy graduates, such as Major General Roh Tae-woo, commanding general of 9th Infantry Division, and Major General Jeong Ho-yong, were in charge of the Korean military. Chun was supported in the coup and the subsequent consolidation of power by the powerful private club of military officials called Hanahoe.[5]

The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and the Coup d'état of May Seventeenth were the beginning of the end of the Fourth Republic of Korea. The coup, alongside the Gwangju Uprising,[6] is the primary justification for Chun's 1995 arrest by the Kim Young-sam administration.

Cultural references[edit]

Film[edit]

Television[edit]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compared to Gunbu (military group) causing May 16 coup
  2. ^ "기무사 '37년 소격동시대' 마감... 과천 이전"The Dong-a Ilbo (in Korean). 19 November 2008. Retrieved 11 December 2022.
  3. ^ "7월 26일은 비운의 진짜 군인 장태완(張泰玩) 장군 사망일 - 개미뉴스" [July 26th is the death anniversary of General Jang Tae-wan, a truly unfortunate soldier - Ant News]. Ant News (in Korean). Retrieved 2022-01-14.
  4. ^ "The harrowing real-life stories of the Korean military coup depicted in "12.12: The Day""English Edition: The Hankyoreh. 29 November 2023. Retrieved 30 November 2023.
  5. ^ "육사·하나회·쿠데타 질긴 인연 전두환과 노태우... 죽음도 '추종'"NewsPim. 2021-11-23.
  6. Jump up to:a b "[영화는실화다] 영화 '서울의 봄'_ 12·12 군사 반란" [[The movie is a true story] Movie '12.12: The Day'_ December 12 Military Uprising]. YTN (in Korean). 24 November 2023 – via Naver.
  7. ^ "<방송> MBC「제4공화국」12.12사태 재현" [Broadcast MBC「Fourth Republic」Reenactment of the December 12 Incident]. Yonhap News Agency (in Korean). 31 October 1995. Retrieved 24 November 2023 – via Naver.
  8. ^ "'제5공화국', 12.12 장면 방송에도 시청률 하락" ['The Fifth Republic', viewership ratings drop even after the December 12 scene was broadcast]. Yonhap News Agency (in Korean). 16 May 2005. Retrieved 24 November 2023 – via Naver.
  9. ^ "12·12 다룬 '서울의 봄'과 '제5공화국'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12.12: The Day' and '5th Republic', both of which were covered on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What's the same and what's different?]. Ilyo Shinmun (in Korean). 29 November 2023. Retrieved 30 November 2023.
  10. ^ "오 유튜브에 서울의봄 올라왔는데?" [Seoul Spring was uploaded on YouTube]. Flayus. 9 December 2023. Retrieved 10 December 2023.
  11. ^ "許和平의원,'제4공화국'.'코리아게이트' 고소" [Rep. Heo Wha-pyeong sues the '4th Republic' and 'Koreagate']. Yonhap News Agency (in Korean). 7 December 1995. Retrieved 24 November 2023 – via Naver.
  12. ^ [신비한TV 서프라이즈] 1979년 12월 12일, 작전명 '생일 집 잔치'. 전두환을 필두로 한 10.26 사건으로 촉발된 그날 밤의 이야기, MBC 231203 방송 [[Surprise Mystery TV] December 12, 1979, operation name 'Birthday Home Party'. The story of that night triggered by the October 26 incident led by Chun Doo-hwan, broadcast on MBC 231203] (in Korean). MBC 미스터리 :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 3 December 2023. Retrieved 10 December 2023.
  13. ^ "지금 서프라이즈에서 서울의 봄 스포중..." [Spoilers for 12.12: The Day in Surprise...]. Dprime. 3 December 2023. Retrieved 10 December 2023.

Further reading[edit]

  • Don Oberdorfer, The Two Koreas (Addison-Wesley, Reading, Mass, 1997, ISBN 0-201-40927-5, p. 121)
  • Young, James V. Eye on Korea: An insider account of Korean-American Relations. (Texas A&M University Press, College Station, TX) 2003. ISBN 978-158544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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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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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 반란

쿠데타가 끝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날짜1979년 12월 12일 ~ 13일
장소
결과

반란 성공

교전국

신군부

대한민국 위기관리정부
   (최규하 정부)
지휘관
전두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유학성
노태우
장세동
허화평
차규헌
최규하
노재현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류병현
이건영
병력

대한민국 제1공수특전여단

  • 1대대
  • 2대대
  • 5대대
  • 6대대

대한민국 제5공수특전여단
대한민국 제2기갑여단

  • 16전차대대

대한민국 9사단

  • 29연대

대한민국 20사단
대한민국 30사단

  • 90연대
  • 수색검문소

대한민국 수도경비사령부

  • 전차대대

대한민국 청와대

  • 경호실

대한민국 국군보안사령부

  • 서빙고 분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대한민국 30경비단

  • 본부
  • 기동타격부대

대한민국 33경비단

  • 기동타격부대

대한민국 수도경비사령부

  • 헌병단
  • 33헌병대
  • 2차 헌병 특공대

대한민국 제3공수특전여단

  • 특공조

미국대한민국 한미연합군사령부
대한민국 제9공수특전여단

  • 5분대기조 대대

대한민국 수도경비사령부

  • 사령부 잔류 병력
  • 1차 헌병 특공대
  • 수경사 정문 위병소
  • 제1한강교 검문소

대한민국 육군특수전사령부

  • 사령부 본부 행정중대

대한민국 해군본부

  • 육군총장 공관 해병대

대한민국 30사단

  • 행주대교 북단 검문소
  • 개화초소

대한민국 제1방공여단

  • 국방부 방공포대

대한민국 국방부

  • 국방부 벙커 초소

대한민국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대한민국 26사단

12·12 군사 반란(한국 한자十二十二軍事反亂, 영어12.12 Military Insurrection) 또는 12·12 숙군 쿠데타(十二十二肅軍 - , 영어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는 1979년 12월 12일부터 13일까지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를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1]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으로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5·17 쿠데타에 반항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총을 들고 일어난 폭동으로 생각하여 계엄군을 보내서 강경 대응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1일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2]

사건의 배경[편집]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정승화가 10.26 일어난 사건현장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과 김재규와 같이 육군본부로 이동한 사실, 그 이후 국방부장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동시키고 이것을 국방부장관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김재규에게만 보고[3]한 사실 등이 알려지기 전이었다.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 당시 서울지검의 공안부 및 특수부 검사 7명이 파견 되었으며, 파견검사 대부분은 10·26 직후에 전두환 본부장에게 박 대통령 시해 당시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총장을 엄중 조사해서 김재규와의 연루혐의를 추궁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총장에 대해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못했다[4].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1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5]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6]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7]

전개 과정[편집]

정승화 수사 지지 지휘관들의 30경비단 집결[편집]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최세창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정승화총장 연행을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8]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노태우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

같은 날 18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목욕 시간을 피해서 20분 일찍 오라는 전갈까지 받고[9]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윤필용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 시급하고 비밀을 요하는 경우라며 홀로[9] 제안했으나 거절당한다.

육군 참모총장 강제 연행[편집]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10] 33헌병대는 해병대 병력이 경비하던 공관 내에 일제 슈퍼 살롱 한 대와[9] 마이크로 버스 1대를 타고 들어와[11] 보안사 차장의 보고라며 손님 대접까지 받으며 거실에서 대기한다.[7]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7]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11] 사복 차림에[9]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7]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11] 이 총격전에서는 보안사 휘하 납치대의 육본 소속 우경윤 대령 1명만 납치대 간의 오인 사격으로 인해서 총상을 입는다.[11]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12]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허대령의 총구가[9] 뺨에 닿아 있는 상태로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7],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은 세단 뒷좌석에서 2명의 대령에게 붙들려 꼼짝 못하는 상태로[9] 총장의 기대와는 반대로 저지를 받지 않고 순조롭게 통과한다.[7] 공관 경비병까지 연행을 당했는데[13] 상부에서 무단 연행으로 뒤늦게 알려왔고[7], 해병대가 공관을 재탈환하는 과정에서 공관 정문에 잔류한 반란군측 박윤관 일병이 사살당한다.[14] 계엄사령관 공관에서 모두 3명이 사망, 20명이 중경상을 입는다.[15]

19시 21분, 반란군은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20시경 육군본부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은 북한 특수부대의 총장공관 침투로도 의심하다가 합수부로 파견이 나간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의 행동을 보고받고 보안사의 총장 연행으로 의심한다.[16]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총리공관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 총리공관에 있던 전두환 장군의 체포 준비를 다짐 받는다.[16]

총리 공관에서 밤새 연행 재가 요구[편집]

21시 30분경,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 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국방부장관의 배석이 없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결재와 관련한 의견들로 밤을 새우게 되는 밀고 당기기가 시작된다.[17] 새벽 3시30분경 국방부 청사에 도착한 총리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데리고 갔고, 총리공관에 도착후 재가를 하고, 뒤 이어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하므로서 사실상 12.12 사태는 종결된다.

참모총장 연행 이후의 육군본부와 합동수사본부의 갈등[편집]

1공수여단의 육군본부 출동 오보 발생[편집]

21:30분경 1공수 여단이 육군본부를 공격하기 위해서 출동했다는 위협적인 첩보가 육군본부에 전달된다. 이 첩보는 후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12.12 사태 당시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우선 당시 육군본부는 9공수여단이 지키고 있었으나, 1주일 전에 복귀한 상황이고 1공수를 막기위해 육군본부는 9공수여단의 출동을 요청했으며,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9공수 출동을 요청한다. 뿐만 아니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하여 육군본부 지휘부는 필동의 수도경비 사령부 영내로 이동하여 22시 15분 수경사 정문에 도착[18]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감청이 되지 않는 미8군 벙커로 자리를 옮긴다[16] .

그러나 당시 1공수여단은 당시에 영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1공수를 지휘할 수 있는 박희도는 30단에 있었으며, 부여단장인 이기룡이 작전지시를 받으로 육군본부로 출발해서 제1한강교를 통과했는데, 이것을 1공수특전여단의 출동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19][20][21].

1공수여단 출동 관련 보고서 내용[편집]

1공수여단이 12.13일 출동한 것은 사실이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많은 기사와 보고서에서는 1공수여단의 출동이 9공수여단의 출동보다 먼저이며 그 시간이 대략 22:00 경 이전으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개 불일치하고 몇 가지 버전이 있다.

  1. 이에 따라 12일 오후 9시 10분께 박희도 1공수여단장은 이기용 부여단장에게 병력출동 준비를 지시, 9시 45분께 1공수 1대대 병력이 신월동 삼거리에 집결했다[22].
  2. 22:03 부근에 한강다리 검문소를 통과했다[23].
  3. 제1한강교에서 막혀서 행주대교를 거쳐서 육군본부로 진입했다[18][24][25].

이상 여러 보고서와 기사의 내용이 불일치하며, 무엇보다 1공수 부여단장과 관련자의 진술과도 불일치한다. 당시 박희도는 30단에 있었기 때문에 부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으며, 부여단장인 이기룡은 비상상황에서 1공수여단이 계엄군에 배속되기 때문에 정병주 사령관의 지시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병주 사령관의 지시로 인하여, 육군본부로 직접 이동하여 지시를 받기 위해서 제1한강교를 건넜기 때문에 당시 부대에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곧 제2한강교에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헌병이 하차시켜 연금[19]하였기 때문에 1공수여단은 박희도가 부대에 복귀한 13일 00:00까지는 지휘 공백이 있었다.

육군본부의 대응과 보안사령관으로서의 전두환의 대응[편집]

육군본부 입장에서는 1공수여단이 먼저 육군본부를 공격하는 입장에서 이에 대하여 9공수를 출동시키고, 30단을 공격을 시도하는 대응을 하였으며, 보안사령부 입장에서는 합법적인 절차없이 30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보안사령관의 권한으로 대전복작전을 수행한다. 결국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날이 밝을 때까지 병력을 출동하지 말도록 미8군 벙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까지 종용하였다.[16] 서울시내는 무슨 군부대가 어디를 점령했으며 국방부에서 총격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통령은 결재가 불가능하며 국방부 장관 결재가 없으니 국방부 장관을 데려오라고 요구한다.[17]

13일 밤 2시가 되어 전두환이 몇 번씩 결재를 요구하는 가운데 9사단 병력에 움직임이 보고되어 대통령은 사단장 노태우 소장한테 원대복귀를 명령한다.[17]

군 통수권으로 진압군 저지[편집]

그렇게 우선적으로 내란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양측의 접촉을 총리공관에서 연락하여 막아 놓는다.[17] 그런 이후에야 연합사로부터 국방부에 도착한 장관과 연락이 되는데 국방부장관은 대치 상태를 이유로 총리공관으로 가기를 거부한다.[17] 사태가 급박해지자 국방부 장관한테 다시 연락하여 총리가 가면 오는 것으로 대통령은 확답을 받는다.[17] 노태우 소장은 자신이 지휘관이던 9사단 29연대를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다.

1공수특전여단은 제1한강교에서 차단되어 회군하지만[18]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달려갔다.[12] 얼마 후, 1공수특전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하여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체포,[26]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을 사살한 후[14]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국방부 대공포의 대응 사격으로 총탄이 빗발치니 상사 계급의 1공수 부사관이 국방부 진입을 반발하였으나 현장을 지휘하던 1공수 소령에게 크게 혼나며 묵살된다.[12] 이 과정에서는 총격전으로 국방부 건물 앞은 유리문 등이 부서지고 선혈이 낭자하였다.[17] 국방부에서 모두 1명이 사망, 10명이 중경상을 입는다.[16]

진압군 측의 주도력 상실[편집]

한편 3공수특전여단은 3여단의 영내에 있던 특전사령부 본부에 3여단 15대대장이 이끄는 10여 명의 체포조가 투입되어[27]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사살,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해간다. 3공수에서 차출된 정예 병력이 특전사령부 지휘통제실에 1주일 가까이 상주하며 특전사령부의 기능을 정지시킨다.

새벽 3시30분경 국방부 청사에 도착한 총리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데리고 갔다.[17]

새벽 4시30분경 보안사는 수방사 장태완 사령관을 연행하며 수방사 영내 육군본부 지휘관들은 집으로 귀가시킨다.[28] 수방사 사령부 영내에서 1명이 중경상을 입는다.[16]

새벽 5시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관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결국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미군에 일출 이후 진압 의도의 좌절[편집]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으로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월 14일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29]

미국 측 판단[편집]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2.12 사태 발생 8일 후인 12월 20일 작성한 `남한내 불안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는 특별 상황판단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30]

또한,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평시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 간의 합의를 위반한데 대해 백악관과 미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대한민국의 민간정부만을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신군부 세력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보름 뒤 신군부 세력에 대한 비판 어조는 다소 누그러져, 군부 내 반란을 사실상 묵인했다.[31]

반란군 측 의견[편집]

진압에 관한 부정적 정세로 분석[편집]

12월 12일부터 다음날까지 총리 공관에는 반란군 측에서 육군참모 총장 공관에서 총장을 납치한[32] 이후로 반란군 측의 지휘관들 중에 일부가 들어와 있었다.[17] 서울 시내는 어느 군부대가 장악을 하고 전방 사단이 서울로 이동 중이며 국방부에서 총격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반란군 측의 그 지휘관들은 이제 내란 상태를 막을 길이 어려워 지겠다는 의견을 국군 통수권자의 공관에서 계속해서 낸다.[17]

반란 이후[편집]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 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5.17 쿠데타)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2개 정보기관장 겸직[편집]

전두환은 보안사 사령관과 중앙정부 부장으로 2개의 정보기관장에 겸직 임명 된다.[17] 12월 20일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과 1980년 1월 21일 2심에서 박 대통령 시해 혐의로 체포된 정보부장과 정보부 박선호 의전과장을 비롯한 직원 6명은 사형을 선고 받는다.[33]

군부의 정권장악에 도구화[편집]

19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가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준비가 갖추어졌다.[34] 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은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다.[35]

쿠데타 수뇌 대통령 선출[편집]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5월 24일 김재규 등 박정희 피살 관련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됐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8월 27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36]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처벌[편집]

진압군[편집]

육군본부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은 1군사령관으로 전보 된다.[16] 병력 동원에 가장 적극적이던 수경사 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3개월을 복역후 이등병으로 강등[37]되어 강제 예편되고 가택연금을 당하며, 유일하게 휘하 부대를 동원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은 보안사 취조실을 거처 강제 예편되고 가택연금을 당한다.[16]

반란군[편집]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38]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시작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기까지에 이른다. 1994년 12월 검찰은 12·12 사건은 군사반란이 맞지만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여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12.12 사건 기소 유예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1995년 1월 20일 12·12사건 기소유예처분취소청구에 대하여 각하 및 기각 결정을 내렸다.[39] 1995년 7월 검찰은 5ㆍ18 사건은 전두환의 정국 장악 의도에 진행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하지 않았다. 이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발견되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결국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2월 28일 12·12 사건에서의 반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2·12, 5·18 사건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고등법원에서는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으로 감경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게 반란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사면[편집]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반란군(전두환 측)과 진압군(정승화 측)[편집]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 핵심 인물(전두환 측)[편집]

국군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 이진백 인사참모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조홍 헌병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장세동 제30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선 작전보좌관 겸 상황실장 (중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최석립 제33헌병경호대장 (중령) (제33헌병경호대는 대통령 경호실 배속부대이나,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본부장:전두환)에 임시로 배속됨)
  • 신윤희 헌병부단장 (중령)
  • 박윤관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일병)-의무복무군인
육군본부 및 국방부
  •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 우경윤 범죄수사단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연행에 직접 관여)
  •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 변규수 보안부대장 (준장)
사단 군단 및 여단 제군 사령부
  • 차규헌 육군 수도군단장 (중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김성환 육군 수도군단 참모장 (준장)
  • 황영시 육군 제1군단장 (중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최동수 육군 제1군단 헌병대장 (대령)
  • 백운택 육군 제71방위보병사단장 (준장)
  • 박준병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박희모 육군 제30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송응섭 육군 제30보병사단 90연대장 (대령)
  • 노태우 육군 제9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구창회 육군 제9보병사단 참모장 (대령)
  • 이문섭 육군 제9보병사단 28연대장 (대령)
  • 이필섭 육군 제9보병사단 29연대장 (대령)
  • 김봉규 육군 제9보병사단 30연대장 (대령)
  • 정호용 육군 제50보병사단장 (소장)
  • 이상규 육군 제2기갑여단장 (준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특전사령부
  •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기룡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 (대령)
  • 김경일 제1공수특전여단 1대대장 (중령)
  • 백남석 제1공수특전여단 헌병대장 (대위)
  • 권대포 제1공수특전여단 작전참모 (소령)
  • 박덕화 제1공수특전여단 5대대장 (중령)
  •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박종규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 (중령)
  •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정룡 특전사령부 보안부대장 (대령)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신우식 특전사령부 작전참모 (대령)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병구 특전사령부 작전처장 (대령)(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대통령경호실
  • 고명승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군사 반란 당시 계엄사령부 측 인물(정승화 측)[편집]

장태완 수기에 따르면 대세가 반란군 측으로 기울자 정병주, 김진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배신했다. 이와 달리 신윤희 중령은 많은 장교가 장태완 사령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그의 무리한 명령 (즉, 아군 특히 대통령 경비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0][41]. 수경사 참모장이던 김기택은 수경사 검문소에 1공수를 그대로 통과시키도록 명령했고, 현병부단장 신윤희는 육본 측 장성들에게 총을 돌려 그들을 체포했다.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

사단 및 군단 사령부

  • 이건영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중장)
  • 최영구 육군 제5군단장 (중장)
  • 강영식 육군 제6군단장 (중장)
  • 배정도 육군 제26보병사단장 (소장)
  • 손길남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한미연합사령부, 국방부

  • 노재현 국방부 장관
  • 김용휴 국방부 차관
  • 김종환 합동참모의장 (대장)
  • 류병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대장)
  •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 (대장)
  • 에반 로젠크랜스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직무대리 (중장)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대장)
  •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중장)
  • 문홍구 합동참모본부 본부장 (중장)
  •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준장)
  •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 안종훈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소장)
  • 천주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소장)
  • 황의철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소장)
  • 채항석 육군본부 교육참모부장 (소장)
  • 정정택 육군본부 예비군참모부장 (소장)
  • 김시봉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소장)
  • 이정랑 육군본부 통신감 (준장)
  • 구정길 육군본부 헌병경호대장 (중령)
  • 신정수 육군본부 민사군정감 겸 계엄사령부 참모장 (준장)
  • 이범진 국방부 소속 (소장)
  • 김광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비서실장 (중령)
  • 박종곤 해군본부 헌병감 (준장)
  • 황관영 육군본부 본부사령관 (준장)
  • 황원탁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령)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대장)
  • 김인선 육군참모총장 경호대장 (대위)
  • 이재천 육군참모총장 부관 (소령)
  • 정선엽 육군 국방부 헌병대 (병장)

기타[편집]

평가[편집]

부정적 평가[편집]

  • 신군부 세력은 이미 조사해 정승화 총장이 10.26 관련 무혐의라고 발표했던 전적을 뒤집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이던 정총장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42]
  • 최규하 대통령은 사건 직후 김종필 여당 총재를 만나 합수본부장 전두환 소장과 몇몇 장군들이 결재를 요청하며 지난 밤에 난리를 피워서 죽을 뻔했다고, 억양이 이상한 충청도 사투리로 일종의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한다.[43]
  • 신현확 전 부총리는 조사를 목적으로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는 것은 순수하게 그 사건 조사를 목적으로 그랬다기보단 군 내부의 의견이 틀린 계통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전군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렇게 했다고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심은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7] 그래서 신 부총리는 군의 움직임을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 전과는 다르게 지켜보았고,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 체제, 제도상 총리가 관여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헌법과 법률을 대학에서 가르치던 법학교수이기도 하였던 신 부총리가 일종의 군 견제 차원인지 중앙정보부장 임명에 관여하는 일까지도 생긴다.[17]
  • 노재현 전 국방장관은 처음엔 결재할 생각이 없었다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이 사건이 더 확대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고, 이미 다 일어난 상황이기 때문에 결재를 늦게 하거나 빨리 하거나 해도 문제 자체가 합리화 되지 않을 것이다고 생각했다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국회에서 증언했다.[16] 노재현은 보안사에서 새벽 4시 40분까지 약 30분간 전두환을 면담한 후에 정승화 체포 동의서에 결재하기로 결심을 하고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찾은지 10시간 만에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고 KBS방송에서 소개되었다.[16]
  •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은 체포된 12월 13일 서빙고 보안사로 끌려가서 수십일 고생하다 1980년 2월 5일 면담실에서 전두환을 만났다. 여기서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있으나 조사에 불응하므로 육군참모총장 직함을 내려놓고 집에서 6개월 정도 쉬면 대사나 장관 이상에 자리를 보장해 준다며 총장을 설득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44] 장태완 장군은 그때 “이 친구들이 쿠데타 계획을 치밀하게 짰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44]
  • 이 날 반란군측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라고 재조명된 바 있다.[45]
  • 12월 13일 새벽 상황이 반란군의 승리로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수도경비사령부가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반군 사령부로 그 결정을 통보한지 반시간은 경과하였고, 사령관실의 합동참모본부 근무 인원들을 체포하러 온 체포조가 총격을 가하며 접근하여 당시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총상을 입는다. 이들은 당시 총격 현장에선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라고 설명을 하였는데, 애초에 이 체포조 수장이 장태완의 직속 부하인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이었기 때문에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당연히 이것을 군기 문란죄로 판단했고 기가 막혀했다.[18]
  • 김수환 추기경은 훗날 마치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았다며,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 든 사람이 이기라더라는 말을 새해를 맞아 1980년 정월에 인사를 온 전두환 사령관의 면전에서 전했다.[46]
  • 탄허 스님은 평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인연이 있었는데, 서빙고분실에 강제 연행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스님께서 강설한 화엄경을 보내달라 한다고 측근이 방문하니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소. 나와 한 약속을 어찌하여 지키지 못했느냐고 묻더라고 전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47] 이때 두 사람이 한 구체적인 약속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탄허 스님은 이런 쿠데타 상황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 조갑제 전 조선일보 기자는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이 12·12 군사 반란에서 승부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다고 발표했다.[48] 하지만 그는 1공수여단장이 이미 장태완 수경사령관에 의해서 사살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 임기상 CBS노컷뉴스 기자는 진압하러 출동했다가 회군한 제9공수여단이 12·12 쿠데타의 분수령이라고 보도한다.[49] 기동성이 좋은 9공수여단[48]이 먼저 육군본부에 도착해 방어태세를 갖추었을 경우 쿠데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49]

긍정적 평가[편집]

  •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은 대법원 재판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불법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합동본부수사기관장은 대통령의 허가가 없어도 자체 판단에 의해(?) 상대를 연행, 수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 외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동원한 것이 아니라 장태완 장군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자 ‘살기 위해’, 임무 수행 차원에서 동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5공 주역들은 (반란군으로 규정되어) 훈장, 연금을 몰수당했고, 온갖 수모와 시련을 견뎌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반란군, 진압군 양측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으나, 역사적 평가까지는 '정치 재판'의 결과와 같다고 믿을 수는 없으므로 최소한 훗날에는 제대로 된 역사적 기술이 이뤄지리라 확신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50] 물론 현실은 이후에도 군사반란으로 쭉 규정짓고 있다.
  • 신윤희 전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도 허화평 주장과 비슷한 12.12쿠데타는 군사반란이 아니란 취지의 책을 장태완이 사망하고 2년이 지난 2012년 출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수사관과 경호관들이 충돌한 것 외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총장을 구출하기 위해 수경사 사령관, 육군본부가 대응 조치한 것 때문에 일이 커지고 꼬이기 시작했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28]

논란사항[편집]

  • 1공수특전여단의 최초 출동시간은 언제였는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장태완, 윤성민 참모차장은 1공수특전여단이 12일 21시 50분 경 먼저 출동[25]했으며, 이것이 막히자 나중에 행주대교를 건너서 육군본부로 진군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12.12 사태에 대한 진압군 측의 문헌을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육군본부에서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공수특전여단이 육군본부를 향해 출동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13일 0시가 지나서이다. 이러한 오보는 12.12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1공수가 육군본부를 향해서 출동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육군본부는 9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을 명령[25]하고, 육군본부 지휘부는 수경사로 이동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감청이 되지 않는 미군 영내로 이동한다[25]. 또한 후에 장태완은 1공수특전여단이 먼저 진격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30단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고, 이 공격명령에는 사실상 1공수 지휘관에 대한 사살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18]. 박희도는 자신이 사살 대상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16] 그가 경복궁에서 1공수특전여단으로 복귀할 때 그는 육군본부측이 반역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16]. 또한 1994년 2월 22일 이기룡의 진술에 의하면 이 사살 명령으로 인하여 1공수여단의 부여단장인 이기룡은 제2한강교에서 체포되어 있었으며, 항의할 경우 사살될 위험이 있었다[20].
  • 쿠데타 진압과 대전복작전의 차이, 합수부측과 육군본부 측에서는 서로 상대방이 반역자라고 부르고 있다. 육군본부는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재가 없이 연행한 것이 쿠데타라고 말하는 반면, 합수부는 조사를 위해서 연행한 것은 불가피하며, 최소한 쿠데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후 장태완의 공격명령에 대해서도 장태완은 먼저 합수부측에서 1공수여단을 출동시켰다고 하지만, 반대로 합수부 측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며, 이것은 오보였으며, 오히려 육군본부가 먼저 30단을 공격하려는 명령을 내렸고, 30단 공격 명령은 대통령의 허가가 필요한 사항인데 이것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반역자라고 주장한다. 육군본부의 주장의 근거는 1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이 먼저라는 것인데 이는 육군본부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22:00 경에는 1공수특전여단은 출동한 기록이 없다. 1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이 13일 0:00시 이후라고 한다면, 먼저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은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육필수기에서 12일 10:50분에 수경사 장교 450명 중 잔류한 60명에게 "역모자들을 체포 사살하라고"명령했다고 서술했다[18]. 뿐만 아니라 실제 출동시간은 늦지만, 육군본부에 의해서 9공수여단의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21:50분 1공수가 출동했다는 오보가 알려진 직후이다[24].
  • 육군본부 측은 대통령과 통화를 시도했는가? : 윤성민 참모차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으나 최광수 비서실장이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끊었다고 주장했으나, 최광수 비서실장은 윤성민 참모차장과 직접 대화한 적이 없다고 법정에서 진술[51]했으며, 이어서 윤성민 참모차장은 대통령과 대화가 되지 않아서 신현확 국무총리와 통화했으며, 신현확은 "피해없이 지혜롭게 수습"하라고 했다고 주장[25]했지만, 신현확 국무총리는 자신은 윤성민 참모차장과 통화한 적이 없으며, 만약에 통화했다면 옆에 있는 대통령을 바꿔주었을 것이라고 진술[52]하였다. 최광수와 신현확의 진술을 볼 때, 윤성민 참모차장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뿐만 아니라 최광수와 신현확의 진술을 보면, 당시 육군본부와 통화를 합수부측에서 차단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장태완의 30단 공격 명령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않고 대통령의 경비부대를 공격한 것이 반역이라는 전두환 합수부측의 주장과 일치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12·12군사반란(十二十二軍事叛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4월 20일에 확인함.
  2.  《12·12 사태,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 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3.  군사세계, 유용원의. “12.12 는 정당한 법집행 이었다.”. 2024년 2월 9일에 확인함.
  4.  이, 상호 (2023년 11월28일). “12·12에 대한 영화와는 다른 각도의 ‘기억’”. 《펜엔마이크》. 2024년 2월 6일에 확인함.
  5.  “金載圭 단독계획 犯行”. 동아일보. 1978년 11월 6일.
  6.  “신군부의 등장과 집권 공작”. 자유언론실천재단. 2022년 9월 28일.
  7. ↑ 이동:       "총구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 정승화 전육참총장이 말하는 「12·12사태」”. 중앙일보. 1987년 11월 11일.
  8.  재향군인회, 12.12 5.18 실록
  9. ↑ 이동:      “(22) "「슈퍼살롱」을 찾아라" 긴급명령”. 중앙일보. 1987년 11월 14일.
  10.  http://www.nocutnews.co.kr/news/1148681
  11. ↑ 이동:    ““軍에 법을 무시하는 오점 남겨””. 시사저널. 1990년 1월 21일.
  12. ↑ 이동:   《639회 군사반란, 26년만의 증언》. PD수첩. MBC. 2005년 6월 21일.
  13.  “<정승화씨 12.12관련 증언요지>...(1)”. 한국경제. 1993년 6월 26일.
  14. ↑ 이동:  고나무·김선식 (2013년 5월 21일). “잊혀진 죽음, 정선엽·박윤관 두 사병도 기억하라”. 한겨레. 2016년 2월 2일에 확인함.
  15.  ““수십년 ‘정치군인’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은 건 기적””. 한겨레신문. 2015년 12월 6일.
  16. ↑ 이동:            《12.12 2부 승자와 패자》. KBS 다큐멘터리극장. KBS. 1993년 12월 12일.
  17. ↑ 이동:             “신현확 육성증언(上), 12.12 밤에 정승화 체포 재가 끝까지 반대”. 펜앤드마이크. 2019년 1월 10일.
  18. ↑ 이동: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진압 실패 10시간)”. 시사저널. 2006년 5월 16일.
  19. ↑ 이동:  "12.12" "5.18" 9차 공판 중계(1)”. 1996년 5월 23일. 2024년 2월 12일에 확인함.
  20. ↑ 이동:  “5. 12.12의 육군본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2009년 11월 20일. 2024년 2월 6일에 확인함.
  21.  "12.12" "5.18" 9차 공판 중계(1)”. 1996년 5월 23일. 2024년 2월 6일에 확인함.
  22.  김민철 (1994년 10월 29일). “-(3)”. 2024년 2월 12일에 확인함.
  23.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제2권 8개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상)》. 343쪽.
  24. ↑ 이동:  “드러난 12.12사태 진상-검찰이 밝힌 전모”. 1994년 10월 29일. 2024년 2월 9일에 확인함.
  25. ↑ 이동:     조선일보 (2020년 8월 16일). “[공판중계] 윤성민 "합수부측 행동은 명백한 반란". 2024년 2월 7일에 확인함.
  26.  “촛불집회 진압 병력, '12.12 군사쿠데타' 부대와 똑같았다.”. 아이엠피터뉴스. 2018년 7월 9일.
  27.  김, 준철 (2009년 12월). “12.12군사반란과 어리석은 군인 김오랑” (PDF).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8. ↑ 이동:  《"상관·부하를 쏴죽여라" 명령한 장태완 / 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부단장 출연 [제5공화국 역사의 증언]》. 펜앤드마이크TV. 2021년 12월 3일.
  29. (12.12 군사 반란 이후) 전두환이 쪽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라고 적혀 있기에 불쾌해서, '누구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느냐'고 화를 내었더니, 유학성이 제 손을 잡아끌고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총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여 맡았다.
     
    — 이희성 (1924년), 이희성
  30.  美, 12.12 당시 北 군사행동 가능성 `50%' 판단
  31.  "美 12.12직후 신군부에 불만..보름뒤 묵인"(종합)
  32.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전 수도경비사령관”. 월간조선. 2010년 1월.
  33.  “[10·26 40주년]① 궁정동의 총소리…엇갈리는 평가”. 매일경제. 2019년 10월 25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4.  이계성 (1993). 《지는 별 뜨는 별: 청와대 실록》. 한국문원. 280쪽.
  35.  이계성. 《지는 별 뜨는 별: 청와대 실록》. 296쪽. 12·12 군사 반란 직후 보안사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나왔던 한 예비역 장성의 말이다. "내가 보안사에 붙잡혀 들어가자 집사람이 생각다못해 전두환 장군의 부인 이순자씨를 찾아갔다고 한다. 집사람은 이씨와 아우 형님 하면서 잘 지내온 사이였다. 집사람이 '어떻게 남편을 살릴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하자, 이씨는 '우리 형편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인정을 안해줘 남편의 일이 실패해서 졸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전장군은 위컴 사령관이 12·12 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인사를 통해 분명히 전해오자 크게 상심했다는 말을 나도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36.  일명 장충체육관선거, 한국 현대사의 치욕 중 하나
  37.  “비운의 장군 장태완 '당신은 정말 떳떳한가?'. 충청일보. 2017년 3월 25일.
  38.  전쟁과 독재에 울고 혁명·올림픽에 웃다
  39.  헌재 1995.01.20, 94헌마246, 판례집 제7권 1집 , 15
  40.  “청와대 탱크 진격명령 내린 만취 사령관”. 2012년 1월 17일. 2024년 2월 9일에 확인함.
  41.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12. 12 사건은 쿠데타도, 군사반란도 아니다”. 2024년 2월 9일에 확인함.
  42.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제3호 보고서 5페이지
  43.  “최규하 “총재님, 어젯밤 죽을뻔 했시유” … 상기된 목소리로 JP에게 하소연했다”. 중앙일보. 2015년 9월 4일. 2022년 10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10월 24일에 확인함.
  44. ↑ 이동: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전 수도경비사령관”. 월간조선. 2010년 1월.
  45.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1회 "1979 서울점령 : 운명의 레이스" SBS 2021-03-11
  46.  “[참성단]"서로 사랑하세요". 경인일보. 2019년 2월 15일.
  47.  “[왜냐면] 기미년, 탄허 큰스님과 정승화 / 원행 스님”. 한겨레. 2012년 12월 10일.
  48. ↑ 이동:  “공수 1여단, 한강을 건너다!”. 조갑제닷컴. 2016년 6월 28일.
  49. ↑ 이동:  “12.12 쿠데타의 분수령 "9공수여단의 回軍". 노컷뉴스. 2013년 8월 19일.
  50.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허화평 前 대통령 정무수석 (上)”. 월간조선. 2012년 3월.
  51.  “12.12 5.18사건 18차공판 지상중계”. 2024년 2월 9일에 확인함.
  52.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4년 2월 9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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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쿠데타 粛군크데타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숙군 쿠데타
12.12
기재표기
한글  :12(십이)·12(십이)군대
12(십이)·12(십이) 숙군 쿠데타
한자  :12(12)·12(12) 군사 叛亂
12(12)·12(12) 군군 쿠데타
발음  :시비시비 쿤사  팔랑  시비
수쿤 쿠데타
일본어  로:12 (주니) · 12 (쥬니) 군지 한란
12 (주니) · 12 (쥬니) 슈쿠 군쿠
RR 공식  :시비시비 군대 발란
시비시비 숙군 쿠데타
MR식  :시비시비 쿤사 팔란
시비시비 수쿤 쿠데타
한국어  :12월 12일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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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쿠데타  (슈쿠군 쿠데타) 또는  12.12 경찰에서  (-군지 함란)은  1979년  12월 12일  에  대한민국  (한국)에서 군내의 주는  사건  입니다.

후의  한국 국무부  (제11·12대)에서 엑스박스  국군 보안 사령관  전두환  군인  과  마찬가지로 후의 한국 국무부(제13대)에서 보호 제  9 국무장관 의사당  노태우 군 등   기준   으로 한군 내부의 비밀 결사 '  하나회  '(단회) 또는 일심회)가 주도해  쿠데타를  실행기 전두환이나 하나회 그룹과 역할을 하는   셀카계엄 사령관  정승화 사무장  을   대행합니다 .

외계인러스의 최규하는 군에 배치할 수 있으므로 밀어넣을 수 있는 경우, 다음 1980년 5월 17일의 놀라운 계엄령 확대(  5·17계엄령 확대 시작  )에 전두환 등 전두환 그룹은 권한을 부여합니다. 을 경우. 사실은 정상해 동일 달 광주에서 멤버들의 민주화 운동을 제외하고는  광주 사건  하자 8월 최팩트에 압력을 가해 사임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전두환이 트럼프로 있었다. 사건까지 포함하면 세계사 광주상이 가장 모험적인 쿠데타로 살아있습니다.

배경  편집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북극곰 이  경호  실장   모두  사라지고 있다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 부장  김재규  에 의해 재능있는   (  박정희 기뻐있는 사건  )들崔圭夏국무총리가 권한 대행 에 함께 함과 동시에  제주도를 대행  하여 한국 전토에 흥계엄령이 발령되어  12월 6일  에는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사랑을 받았습니다.   10대 트럼프로 축하드립니다.

최규 여름  은 어디까지 나 유신이 의 틀에 있을 것인데, 대행 정도 정도인 11월 10일에 존재하는 것과 신헌법에 외계인 같은 외계인을 말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다화를 낸다 ] 또한 돌연변이는 유일하게 다화를 인준다 12 8일에는 긴급 조치 9호 [2] 의떠와 이 자물쇠로 소수민족의 선박범 68명을 탈출했습니다 [3] 함과 동시에 김대중 의 자택 휴가를 떠나는 것부터 독재를 가지고 놀기를 기대합니다 부풀어 서울의  이라들이 모여서 대두했습니다.

박정희  소속된 사건 수사과정에서 군엄사령관의 임무인 정승화 SS참모총장과 합동수사본부장임임임에 연결됨 국군 보안사령관 전두환 의원 의사록에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5] . 또한, 총장 전두환과 제9 사단장 노태우 의원이 심장이 포함된 비밀 조직 ' 하나회 ' 관계자가 군내 요직(임모권 각 부대)에 우대되고 있음이 문제시하고 측정하고 관리하고 하나회를 대신하려고 하려고 했습니다. 규격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제1군 동해 안경비사령부 [6] 로 전임하도록 계획을 세우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수 본부 교육 참모부 차장 장태완 군을 수도 사령관은  하나회를 참조해야 합니다(장소 잔  슈사학교  가 아니라 다양한 군 합행정학교를 위해 하나회의 인맥 스스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등의 행동이다.

그러나 정총현은 언급한 민주화 분위기에 대해 존중 군의 독립성을 "군은 정치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어디에 나 지금까지의 유신까지 종지부를 치려고 하였는가  [7]  . 그러므로 하나회의 구성원은 물론 박 전 트럼프의 총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감도 사는 결과가 있었습니다. 독점적인 군기지에 적용되는 박 대통령의 영향은 절대였기 때문에 군인들의 군인들은 유신헌법에서 민정으로 되돌려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대표의 경애하는 박 전 트럼프와 동일한 수법으로 그들의 '이상'을 관철하려고 한 전두환과 하나회 그룹이야말로 동지로 간주하여 박로선을 수치로 목표로 삼아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은 차례차례로 전두환 측에 있고, 후의 쿠데타 결론짓에는 전두환 측이 유리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정총의 생각은 물론 실제로 군 내부에 확장된 정보망을 구축하고 하나회가 있는 장소에 있었다. 예를 들어 문민정권 발족 후 1993년  중앙일보  가 정승화에 대해 설명한 인터뷰에서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전두환 전임계획을 요청한다고 합니다(이는 보안사령관은 조직상위의 직속의 부끄럽기 때문이다)  [8 ]  . 노재현은  김용우  조선어판  )  국방부 차관의 연락에서 이 사실을 전했지만, 김 차관은 전두환에게 이 계획을 기대하기로 했습니다  [9]  . 더 이상 일각의 유예도는 용납하지 않도록 구축 전두환과 같은 하나회 그룹이 마침내 선수를 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쿠데타 경과  편집  ]

12월 12일  저녁, 하나회회 기초 지식인  장세동  대령  이 단장을 칭찬하는  서울  경복궁  입니다 수도경찰 사령부  제30 경비단 사령부에 전두환은 하나의 핵심 핵심 구성원들  [10]  및 그 협력자 인兪학성 [11]  ,  차규헌  조선어판  )  [12]  ,  황영시  조선어판  )  [13]  등 3장군들이 집결하고 국하의 허락을 받아 쿠데타를 기다립니다. 보안사령부 인사 처장  허삼수  와 소련 범죄수사 대장의 윤경부 양대령이 합동수사본부 에 끼하 제3헌병대  [14]  의헌병명을 하겠군 참모총장 공저로 향하게 , 공저에 있다는 정 챕을  받을  것입니다 보안 사령부에 연행  되어야 한다고, 내란환조의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엄사령관 정총의 권한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두환은 최경여 트럼프에게 본인이 승인한 형태로 재가를 주려고 하지만 “국방부 장관의 권한은 없어도 결정을 재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15]  ”라고 하고 있습니다. , 이 행위는 행위를 행위로 하는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하의 기관인 이상 정총장은 전두환에게 직속상관에 해당하기 때문에 범위통의 축하상 함부로 보관할 수 있고 더 나은 관계에 있는 장관과 트럼프의 재가를 처음으로 합법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전술한 과정 중에도 군인병과의 쏘는 발생이 발생하고, 사상 또 자기를 빼기 때문에 일이 커져, 전두환 등 하나회 그룹은 이상과 같은 상황을 예기하고 있지 않고, 숫자 더 많은 전투에서 공저에 등장한 노재현은 존재합니다. 도 범위 참모총장 공저의 총  공산  게릴라  에 의해 보호와 오인해 가족과 함께 피난하기 때문에 전두환 표시 노수색을 시작했습니다.

참모총장 공저가 있어서는 보도를 수용하고 경찰과 경찰은 상황의 상세정보가 알 수 없는 채 현장에서 흐트러져 공저가 있는 한남동이나 경복궁 일대에서 총격전이 확대되어 한강으로 경계하는 11개의 다리도 차단되었습니다. 나중에 사관 납치의 '범인' 저격수 본부의 우경 대령이 있는 것, 또 당대령이 합동 수사 본부에 일하는 중이 되는 것이 그들에게, 당 사건이 보안 사령 부의 행동과 그 주모자가 전두환인이 됩니다 분리됐다.  군인 사령부  (최고 인원 참모 총장이 있기 때문에, 참모 차장의  윤성민  조선어판  )  중장  이 대리로 최고를 보고하고 있었다)는 즉시 '진도견  1  '(특급의 경계 경계 경보)를 발령, 정 총장 파인 특수전사령관의 정  횟수 주소  장이나 수도 세력사령관의 장태완 군인도 쿠데타 진압을 시도하지만 하지 않습니다  [16]  .

그것에 대해 전두환 측은  미한 연합사령부  의 통제할 수 없는 사실을 해당하는 옥외 배치부대도 출력동을 알리십시오 제9사단과 제2기갑여단의 일부만이 개별 노태소장과 황영시 중 장의 독단 명령에 의해 서울로 진군해  중앙청  을 노력하려고 하는 등의 공격은 한 쫓겨나기 시작하면 내전을 발발로 움직이는 것에 따라 발전하지만  [17]  , 이후 하나회 기초인  박희도  조선어판  )  준장  [18] ]  제하의  특수전사령부  1공수전여단의 ​​신속한 행동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별도로 노재현 국방부 장관도 '확보'됩니다. 또 거의 비슷한 소수의 전사령부도 전두환의 의향을 불러 제3공수특전여단의 ​​​​병력에 급습당해  [19]  정정주소 장은 자신의 도망에서 하나회 멤버  최세창  조선어판  )  준장  [20]  흐하의 제3공수 특전여단 제15대대(대대의  박빈규  조선어판  )  중령  도같은 하나회 질문임)에 의해 청빙되었습니다. 정소장의 부관  김고로  조선어판  )  소령  은을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응답했지만, 대립 무세하고 감히 사라서(정소장도 자신이 왼팔에 총탄을 받아들인다고) 몇 살 정도 '직직접'의 경우 가버렸어요  [21]  . 그 환영, 장태완 장교 등 수도 인사 사령부의 셔츠면과 접촉을 하기 쉽도록 힘을 모아 사 본령부로 이동하고 연결된 슈팅 유닛의 수도, 麾下 부대의 수도 사령부 헌병단의 부단장으로 전두환에조한  신루희  어 )  )  나카사의 허락에 의해 승인되었습니다.

노재현은 전두환 등의 압력에 굴복하여 바로 계계엄사령관을 의지하고 최규 여름 트럼프에게 재가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최圭夏는 노재현의 행동의 참가자들과 군엄사령관 존재하는 권한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崔圭夏 자신이 군부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인하지 않을 수는 없더라도 참고 자료에 재가시각인 '12  월 13일  오전 5시 10분'으로 표시해 재가하며 정총장의 극이 당당한 증거를 인정한다. 어쨌든 이 결과 정총은 군법회의에서 제외 10년형을 명령받은 후방 대장으로부터 이등병으로 강격되어 예비역편입이 되어 정무늬주 특수전 사령관이나 장태완도 감시사령관은 80년 1월 20일자로 대신하여 반입했습니다.

쿠데타의 이후와 광주 사건  편집  ]

이렇게 보안사령부와 하나회를 공산주의로 한 숙군 쿠데타는 성공하고 정총장의 후임이 전투참모총장 컴계엄사령관에게 KCIA부장 대리의 이어  성  조선어판  )  군 중장  [22 ]  가 대장에게만 후임이었다. 그리고 노재현 국무장관도 언급한 혐의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다음  12월 14일로  사임, 후임은 전두환인맥의  주영복  전 작곡가를 불러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쨌든 전두환이나 노태우들 하나회를 중앙으로 한  '신군부'  [23]  가 군부의 실권을 싫어하는 것처럼 주국방 장관과 이총 잔 특별한 장식에 있습니다. 그 이후 전두환 등 하나회 의향의 인사임면과 관련하여 이동하는 허브에 대해 거의 일절 샐러드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민첩한 동시에 반쿠데타측의 염색체에 대한 회유책도 취해지고 있어, 예를 들면 군인 참모 차장 있음 명목상 반쿠데타 작전의 최고 은감의 플레이어에 선윤성민 중장은 일단 보안 사령부에 연행되지만, 전 두환이나 천학성 등의 제1군 사령관 대리(후에 의해 제1군 사령관)에 제안을 접수했습니다  [24]  .

여기까지의 단계에서는 쿠데타라고 하지만 사실은  군 내부의  것이고, 전두환 측에 말하자면 사실상 숙군 」이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정권을 탈취한다'는 의미에서 쿠데타에 해당하는 내용은 이후 1980년 5월  광주 사건  에 처리 과정  이다. 이에 따라 최규여름을 사임에 밀어넣고 하나회 그룹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실권을 뺏어가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시대와 유사한 군부독재를 옹호하는 신군부 항의해 학생시위가 발생했으나  1980년  5월 17일 쿠데타  에 의한  군대의 군사 확대와 저항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하다탄압(  광주 사건  ), 같은 해 8월 최규 여름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 규정 사임,  9월 1일  에는 전두환 군인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회 제11대 트럼프가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10월 22일 개헌에 대한 찬반을 가지고  국민투표  가 90% 이상 찬성으로 인증, 10월 27일 신헌법이 주장, 제4공화국은 끝을 고했다. 그리고 1981년 2월 25일에 사랑받았던  대통령  에 입후보한 전두환이 군대 이득표로 당선. 3월 3일에 제12대 대통령에 맞서,  제5공화국  (5공)은 독립을 시작합니다.

김영삼 작전 하에서   전두환·노태우들은 광주 사건과 조정탈취의 수모자로 수사 대상이 되어 형사재판에 체포되었으나 형법에서는 시효가 원용돼 전두환·노태우는 내란 죄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캠프에 군 숙부 쿠데타가 전두환 군인들의 군형법에서 배상죄에 해당한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관련 작품  편집  ]

키친
  • 서울의 봄  한국어판  )  - 2023년 한국영화. 서울의 봄이 충격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된 숙군 쿠데타를 그린다.
TV 드라마
  • 제4 공화국  :  문화방송이  제작한 TV 드라마에서 제5화와 6화에서 숙군 쿠데타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 제5공화국  : '제4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문화방송이 제작한 TV 드라마에서 4-9화에서 숙군 쿠데타를 자랑합니다.

각주  편집  ]

  1. ^  빠른 전투 기간내 전투 토트 코트 코트 시일내로서 살아남기 殘餘任期Daan woo고월 10일자 1면  연결불가  ]
  2.   1975년 5월 13일에 포고된 긴급조치. (1)유언 베어의 네츠조나 유포, 사실의 편집을 금지하는 것. (2) 사용자나 참가자, 신문, 방송, 기지국 단위로 할당하는, 소수이나 관계자를 청원하는, 추적하는 주체의 행위입니다. (3) 수업이나 연구 등의 사전에 해당하는 경우를 대상으로 학생의 줌나 참가자 또는 참여자들의 조치를 취합니다. (4) 동 조치에 관한 비방의 금지. (5) 해당 행위 행위를 승인하는 내용을 방송이나 전달, 그 부분까지 포함하거나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판매, 소유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등으로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에는 귀하의 영장 제한 없이 압수할 수 있으며, 수사를 하는 것이 가능하며, 1년 동안만 조치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3. ↑  정부인사 68명 대피 문익환 함세웅  씨 둥  포함  1978년 12월 8일자 1면
  4.   박정권에서는 국군 보안사령부에 KCIA·대통령 경호실에 있는 선 3대 중추 기관 중 하나이며, 서로 견제하는 것과 같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재능 있는 사건 후 KCIA는 최고의 재능이 있는 것, 트럼프 경호실은 최고의 재능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5. ^  익명의 보안사령관은 사령관의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기소된 데다 다른 정보 기관을 한손에 맡겼습니다. 그 때문에, 전두환이 능력은 단번에 확장해, 핸들링의 능력자로서 그 이름이 확장해 가게 됩니다. 전두환은 각 부처의 차장을 소집해 처리를 하거나 배금을 움츠러들기 위해 보내려고 하기 때문에 정승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6.  현재  제3군  제7기동군단  의 전신. 지금이야말로 공격하고 전선으로만 구성하는 한국 군인의 군대군단으로 많은 기계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숙군 쿠데타 맥은 소수의 실전 부대와 훈련 부대를 바닥에 있을 만큼의 스쿠터 부대와 한직으로 존재했습니다.
  7. ↑  『역사군상 No.91 “계엄령하에서 발발한 유혈의 반정부 소란·광주 5.18 사변”』 Gakken, 2008년 10월, 163쪽.
  8. “  “12·12는 군형법상 받아들여야 합니다”/당시 육참총장 정승화 씨 인터뷰  ”. 중앙일보(중앙일보) (1993년 5월 14일).  2024년 1월 22일  열람.
  9. “청와대-백악관 X파일(25) "전두환  제거  할테니 미국이 지지달라" 30여명의 장성들 역  쿠데타   보기.
  10.  쿠데타 발생시, 하나회 지식으로 쿠데타에 참가한 것은 전두환·노태우·장세동 외, 수도경찰 사령부 제33 단군 장  김진영  조선어판  )  대령(쿠데타 후에는 수도경찰 사령부 작전부장,  수도 기계화병사  , 전투 3 육군사관학교장, 모드 방위 사령관, 미한연합 사령부 부사령관, 제29대 전투군 제모 총을 역임), 특수 전 사령부 제1공수 특전 여단장의  박희도 준장, 3공수특전여단장의 최세창준장, 동제5공수특전여단( 현 국제평화지원단)장  장기창  조선어판) ) 준장(퇴역 후 총무처(현  정부 안전부  )  ) 장관 등을 역임), 제20사 대장의  박준병  조선어판  )  장군(나중에 군 보안사령관을 떠나, 퇴역 후에는 국회의원도 당선했다) , 제71방위사 대장의 백雲澤조선어판  )  준장(뒤에 제9보병사 대장, 제1군 대장을 재능은 또한 제1군 대장 재직중에 병으로 죽었습니다)이었습니다.
  11.  소속군 수차관보. 쿠데타 후에는 제3군 사령관,  국가보위 놀이대책위원회 위원회  직 위원을 역임한 것 외, 대장에서 예비역 편입 후에는 중앙 정보부장 및 그것을 개편한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역임하고, 제13· 14대목의원도 대처하다.
  12. ↑ 멕시코  는 수도군단장. 나중에 육군사관학교장, 소련참모차장,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대장에서 예비역편입 후 운수부 위장 사냥군 민주정당 고문을 받다.
  13. ↑ 미국  은  제1군단장  . 쿠데타 후에는 소련참모차장, 제3군사령관, 소련참모총장을 역임하고, 대장에서 예비역편입 후  감사  원장 , 민주정당 고문 등을 다한다.
  14.   셀은 수도사 사령부에서 파출해 트럼프 경호실 배속하의 부대이지만, 박정희 재능 있는 사건 발생 후, 수사 실행상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합동 수사 본부 전속했습니다.
  15.   컨퍼런스엄령의 경우에는 트럼프이 총 책임이 있는 경우, 부분계엄령의 경우에는 장관이 장관에게 제공됩니다. 수출 발령된 계엄령은 제주도를 반발하는 부분계엄령이었기 때문에 별이 발사되었습니다.
  16.  쿠데타 멕시코, 특수전 사령부 국하의 공수 특전 여단은 4개 여단(제1·제3·제5·제9)이  수도권  에 주둔하고 있는데, 그 중 제1·제3·제5 의 3개 여단의 여단장이 하나회 그룹의 구성원이고, 수도경찰 사령부도 소수 부대인 제30·제33의 양 이동단의 단장 및 헌병단의 부단장도 하나회 그룹의 멤버이다 이상, 모두가 쿠데타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군이 필요했기 때문에, 반쿠데타 반대하에서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단번에 거절당했습니다. 그 외, 보안사령부의 「본무」는 대스파이·대반란이므로, 전군 통신 보안에 의해 각 유닛에의 허용 권한을 가지고 있어, 반쿠데타측은 작전 계획에서 실제의 경향까지 모두 거의 가 보안사령부의 도청에 의해 중요한 통통이 일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17. ^  역으로 반쿠데타측은  남북  의 동향도 필요로 하며, 남침의 세력권에 참여하는 것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플러스는 출동에 맡기는 쿠데타 진압은 서투른 수도인 서울이 국군이 상격하는 조치가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쿠데타 진압을 시도하는 SS 본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결국 반 쿠데타를 쿠데타 진압의 기를 적절하게 하나회에 의해 쿠데타 성공을 하게 됩니다.
  18.   후에 특수전 사령관, 제3군 사령관, 소련 참모총장 등을 역임합니다.
  19.  특수전 사령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고, 제3 공수특전 여단의 주둔지 내에 사령부를 찾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제3 공수특전 여단이 쿠데타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불가능하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약했습니다. 이반성과 서울올림픽대회에 따르면 대테러작전 대응의 필요성에 따라 1982년 사령부 직속부대인  제707특수임무대대가  창설이 일어났습니다.
  20.  후방 모드 사령관, 제1군 단장, 합동 참모 본부를 역임한 외, 뒤역 뒤에는 별을 쳐다  보네요  .
  21. ↑ 그  후, 김소령의 시신은 특수전 사령부의 엉덩이산에 가매장되었으나, 쿠데타의 발현인 12월 13일, 새로운 보호령관을 가지고 임한   정호 제50보병사 대장은 숙명군 쿠데타와 대구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의 군단으로 부대이기 때문에,  국립 서울 현충원  의 거리 안치소로 돌아와(1980년 2월 말에 없었습니다). 또 정소 장은 최준장에게 총격전으로 발전한 곳에 고언을 빼고고 합니다.
  22.  1979년 10월 맥은 군인 참모 차장군, 박정희 소수 사건 발생 후부터 본 쿠데타까지의 사이는 김재규의 후임 사건 KCIA 동맹 대리를 떠났습니다. 그 인스턴스  광주 사건  에서 계엄사령관도 계속 유지했습니다. 1981년 12월 황영시를 소련참모총장의 후임으로 보냈습니다. 소방서 후에는 섬유 협회 회장, 운수부 장관, 주택 공사 이사장을 역임하고, 소수화 후반 종료부터 광주 사건의 유혈진압력을 묻고 7년을 허용할 특사로 참여합니다.
  23.  「신군부」라는 명칭은  5.16 군사 쿠데타  에서 제국을 탈취한 군부 「구군부」로서 대비할 목적으로 붙인 것입니다. 관측여에 오해의 여지가 「신군부=하나회」가 아니라, 「하나회가 신군부의 네트워크」 라고 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신군집회가 가동되는 가동식 비하나회 구성요소도 포함됩니다.
  24.  「병력 출력을 반대하고 윤차장 덕분에 국군끼리의 전면 충돌이 효과가 있었다」라고 하는 신군부의 생각으로부터 그 「공적」에 대한 대우받는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윤중 장 다음 1980년 5월 순조로 대장으로 인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 합동참모본부를 위해 역임한 후 퇴역한 후에는 장관도 함께 했습니다.

참고문헌  편집  ]

  • 윤경철『분단 후의 한국정치 : 1945~1986년』기鐸社, 1986년 11월 30일.  NDLJP  :  12173192  .
  • 금용권 편저 『조선·한국 근현대사사전 1860-2005(제2판)』 일본평론사 

관련항목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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