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 편집 ]
5·18 광주민주화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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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의 일부 | |||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탑 | |||
날짜 | 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 | ||
위치 | |||
표적 | 민주화 | ||
결과 | 정부가 전면적인 진압에 나섰고 사건은 유혈 사태로 끝났다. | ||
분쟁당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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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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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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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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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 |
속담 | 5·18 광주민주화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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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5·18 광주민주화운동 |
문학경제부 | 오일팔 광주민주화운동 |
말레이 스타일 | 오일팔 광주 민주화운동 |
한국어 표준 별칭 | |
속담 | 광주사건 광주민중항쟁 |
한자 | 광주사건 광주민중항쟁 |
문학경제부 | 광주사건 광주민중항쟁 |
말레이 스타일 | 광주사건 광주민중항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언어 명칭 | |
속담 | 광주인민봉기 |
한자 | 광주 사람들이 떼지어 일어섰다 |
문학경제부 | 광주인민봉기 |
말레이 스타일 | 광주인민봉기 |
5·18 광주민주운동 ( 한국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 5.18 광주민주운동 ), 일명 광주사변 , 광주사변 , 5·18 광주사변 또는 광주인민항쟁 ( 한국어: 광주민중항쟁 / 광주인민항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의해 광주인민봉기 ( 한국어: 광주인민봉기 / 광주인민봉기 ) 로 알려진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남서부 광주 와 광주 에서 일어났다. 전라남도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행사입니다 . 당시 군사권을 쥐고 있던 육군 중장 전두환이 무력을 동원해 진압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과 학생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가 촬영한 영상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 [ 3 ] 전두환 대통령 임기 동안 당국은 이 사건을 공산주의 동조자들과 폭력배들이 선동한 반란 으로 규정했다 . 그러나 한국 정치 의 발전과 함께 이 사건은 1990년대에 들어 마침내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5] [6] [7] .
봉기는 계엄령에 항의하는 전남대 학생들이 국군의 총격, 살해, 강간, 구타를 당하면서 시작됐다. [8] [9] [10] 한국 정부는 이번 학살로 165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학살에 관한 학계 연구에 따르면 희생자는 600~2,300명으로 추산된다. [11] 전두환 군사 독재 치하 에서 남한 정부는 이 봉기를 '광주 폭동'이라고 부르며, 이 봉기가 북한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동조자들과 깡패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주장했다. [12]
1997년 5월 18일을 광주사변 기념일로 지정하고 국립희생자묘지가 건립되었습니다. 이후 조사에서는 군대가 저지른 다양한 잔학 행위가 확인되었습니다. 2011년 광주항쟁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는 보수와 극우세력이 광주사태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14] [15]
배경 [ 편집 ]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장관 김재규가 수년간 독재 하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 했다 ( 박정희 암살 ). , 김재규가 체포됐다. 박정희의 18년 독재 통치가 갑작스럽게 종료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하고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촉발되었습니다. [16] 대한민국 헌법 절차 에 따라 [[ 최규하 ]]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한민국의 반군 공격 을 막기 위해 10월 27일 오전 4시부터 전국 대부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인민군은 기회를 이용해 남침을 시도한다. 계엄령 기간 동안 모든 정부 기관, 주요 단체, 언론 기관은 군사 통제를 받습니다 . 의회 이외의 모든 정치 활동은 금지됩니다. 모든 종류의 파업 , 집회 , 시위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 .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인 정승화 장군 도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규하는 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갖지 못했고, 민주화 시위와 노동자, 학생 시위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국군보위사령부 사령관이자 계엄사 합동수사부장이기도 한 전두환 육군 소장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쌍십이사령관을 출범시켰다. 쿠데타로 정승화(鄭聖河)를 체포하고 최고 군사력을 장악했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와 국가 민주주의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3월 새학년이 시작되면서 민주화 활동을 이유로 제적되었던 교수들과 학생들이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민주화, 인권, 노동권, 언론자유를 지지하는 학생회를 결성했다. [17] 이러한 시위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10만 명이 참석한 계엄령 반대 시위로 정점에 달했다.
1980년 5월 17일 중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계엄령 전국 확대를 선언했다 . 계엄령이 다시 확대되면서 모든 정치활동과 의회 활동, 국가원수에 대한 비판이 금지됐고, 김대중 ·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이 체포됐고, 대학들은 수업을 중단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여전히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 전두환이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해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때 광주의 두드러진 배경은 체포된 김대중이 전남 출신 으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같은 해 12월 전두환은 엄격한 선거를 통해 당선돼 7년 단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광주와 전라남도는 늘 발전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사람들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지역민들은 무자비한 탄압과 혼란스러운 정치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항의운동을 이어나갔고, 민주항쟁의 역사적 장소로 자리잡았다. 이 지역은 동학당봉기 (1894~1895), 광주학생독립운동(1929), 여순천사변 (1948)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후 [ 편집 ]
1980년 5월 초, 시위의 물결은 더욱 커졌고, 사람들은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다.
5월 15일, 수도 서울 ( 현재의 서울)에서 5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16일 광주에서는 3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은 17일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대학을 폐쇄하고, 국회 소집을 금지하고, 국가원수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고, 김대중 , 김영삼 등 민주당과 학생을 체포했다.
5월 18일 광주에서 국군 제7공수여단 제33대대와 제35대대는 학생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 와 조선대 기지로 트럭을 몰고 1,500명의 학생들이 교문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했다. 80명 이상의 학생이 체포됐고 80명 이상이 경미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19일 광주가 봉쇄됐다. 육군 제11공수여단은 증원을 위해 급히 광주로 이관됐다. 시민들은 쇠창살과 소이탄을 이용해 공수부대에 맞서 싸웠다.
20일 이른 아침, 제3공수여단 3개 대대는 서울을 출발해 광주를 향해 남쪽으로 향했다. 이날 시위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고, 수백 대의 버스와 택시가 앞장서 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런데도 라디오 방송국은 '광주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에 시민들은 크게 분노해 광주MBC 에 불을 질렀다 .
광주시민들은 21일 예비군 군공장과 무기고를 약탈하고 장갑차 무기와 TNT 등을 약탈했으며 전라남도 청을 점거해 군경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광주시와 외부를 잇는 철도와 도로, 통신선이 끊겼다. 이날 전두환은 상황을 진압하기 위해 실탄 사용을 진정으로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5월 22일, 김대중은 선동 혐의로 기소되어 수천 명의 군인들이 광주를 포위했다. 광주에서는 '시민청소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정부와 협상이 시작됐다. 위원회는 무기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저항군 지도부는 이를 반대했다. 이날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인 수준열 소장(전북·남도계엄국장)이 교체됐다. 자신의 입장을 무시하고 탄압 정책을 계속했다.
5월 23일부터 사망자 신원 확인이 시작됐다. 무기 회수에 관한 논의를 계속합니다. 15만 명의 시민이 미래 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5월 24일, 10만 시민이 빗속에서 두 번째 집회를 열었습니다.
5월 25일, 5만 명의 시민이 모여 세 번째 회의를 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돈과 헌혈을 하셨습니다. 논의 끝에 '광주민주항쟁 영도부'가 결성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5월 26일에는 시민들이 탱크를 막기 위해 도로에 누워 있었지만, 수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탱크는 계속해서 시내로 진입했다. 국군이 도시로 진입해 도시를 습격할 것으로 예상한 저항군은 '시위지도부' 인원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머물렀던 200여 명 가운데 친척과 친구들이 살해당해 잔류를 결정한 여학생 10명 이상, 고등학생 60여 명도 포함됐다. 한국은 광주에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고, 수천 명의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들어와 대부분의 시위자들은 결국 저항을 포기했습니다.
28일에는 도시 전체를 수색해 수천 명의 시민을 체포, 구금했고, 민주 지도자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받았다(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한국군의 진압작전체계 [ 편집 ]
다음은 한국군의 광주사태 진압 당시 관련 부대 및 인물이다 [18] .
- 국가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취안두환 (Quan Douhuan ) 중장, 조율사단장 리허펑(Li Hepeng ) 대령)
- 광주505경비대(대위 이유 이유)
- 육군 본부/계엄 사령부(참모총장 리시싱 , 부참모장 황용시 )
후속 조치 [ 편집 ]
피해자 단체 [ 편집 ]
전두환은 '광주사변'을 진압하고 대통령이 되었고, 이 사건은 '친공 김대중이 주도한 내전음모'로 규정됐다. 그리고 정부는 '광주사건'에 대한 모든 댓글과 여론, 출판물을 금지했습니다. 대통령이나 관료들이 서울에서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피해자 가족들은 감시를 받고 가택연금을 당한다. 시위와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민주당은 구타와 탄압을 당한다.
사망자와 부상자, 부상자의 유족들은 '구금자가족회'(1980년 결성), '5·18광주민자경피해자회'(1980년 결성), '5·18부상동지회' 등 여러 단체를 결성했다. ." (1982년 결성) 등 이들 단체는 매년 5월 18일 정부의 개입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추도식을 개최하려고 노력하며 점차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자 배상'을 요구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광주사변'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항의 조치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81년 2월 18일 전두환이 광주에 도착하자 유족들은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광주사건'에 대한 공개적 논의와 추도식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피해자 단체들은 당국의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5월 18일에도 평소대로 추도식과 시위를 벌였다. 50명이 검거됐다. .
- 1984년에는 추도식 후 시위를 하다가 80명이 체포됐다.
- 1985년에는 '5·18 희생자 추모비 건립 및 추모활동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5·18 추도식과 추모미사가 거행됐다.
- 1986년에는 1000여 명의 희생자 가족과 대학생들이 추도식과 시위를 펼쳤다.
- 1987년 노태우 신임 대통령은 희생자 가족들에게 공개서한을 써서 “광주사건은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동의했다.
학생, 종교단체, 사회운동가 [ 편집 ]
대학생들은 정부의 '광주사건' 은폐 시도를 폭로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82년 광주에 거주하던 작가 황서영 과 전남대 대학생 여러 명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한 ' 당신을 위한 행진곡 '은 이후 '광주사변'의 상징이 됐다.
특히 일부 종교단체는 매년 추도식을 열고 있다. 특히 '광주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는 탄압 이후 당국에 학살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광주에 대한 정보 봉쇄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직자들은 서울로 파견돼 '광주사변'에 대해 연설했고, 로마에는 교황청에 한국의 학살 중단을 촉구할 것을 촉구 했다 . 1987년 협회는 처음으로 '광주사변' 정보집과 사진집을 발표하고, 창립 7주년을 기념하는 활동을 펼쳤다. 천주교 정의의 구현사제단은 반정부 성명을 내고 독일과 일본에서 가져온 '광주사변' 영상을 상영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많은 시민과 사회운동가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수개월간 시위와 행진을 벌였다. 이러한 민주적 분위기 속에서 정부 관료들도 금기를 깨고 '광주항쟁'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관련 서적과 정기간행물이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아직도 불법이지만).
1980년과 1985년 두 노동자가 '광주사변' 진압의 진상을 요구하기 위해 분신했다 .
문재인 정부 [ 편집 ]
2017년 5월 18일,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은 광주사태 37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사건을 재조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37년 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다.” 슬픈 순간…이 피해자들은 한때 누군가의 친척, 이웃, 일반 시민, 학생이었지만… 피해자들에게 대통령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며 "새 정부는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신원을 밝히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라고 명령한 사람이다." [19 ]
콴두환 [ 편집 ]
2016년 5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두환 회고록'을 완성하고 자신의 역사 지식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7 년 늦봄 회고록 1권이 출간된 뒤 논란이 되는 내용이 나왔고, 특히 1980년 광주사건에 대한 언급 이 나왔다 . 군대는 확실히 "민간인들이 지나갔다", "이 사건은 북한 특수부대가 봉기 현장에 침투한 흔적이 있는 것 같다", " 북한 이 선동한 폭도들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군이 싸울 것"이라고 총구를 겨누지 않았다. 정당 방위로 돌아왔다” 등 논란이 많은 발언은 전두환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갔음을 보여준다. 오 씨는 군에 시위대 진압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회고록이 공개된 뒤 곧바로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피해자 단체와 생존자들의 불만을 담아 신속하게 정보를 수집해 2017 년 6월 12일 대한민국 광주 지방법원 에 제출했다. 광주피해자 명예 침해'라는 글을 게재하며 논란이 된 단어 33개를 삭제했다. 2017년 8월 4일, 대한민국 광주지방법원은 회고록 관련 논란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으며, 해당 논란의 내용이 회생 수사 및 배상소송에도 영향을 미쳐 피해자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광주사건 생존자들. 따라서 회고록의 출판 , 배포, 복제 , 광고 , 판매 등을 전면 금지 하며 , 위반사항이 있을 경우 신고당 500만원 의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판결했다 .
재활 [ 편집 ]
1987년, 전두환은 7년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면서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1월 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경찰의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6월 9일에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 씨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 7월 5일 부상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었고, 포괄적인 민주화를 촉구했고, 6월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한국은 점차 민주화로 나아갔고, 전두환이 권력을 넘겨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광주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점 거세졌고, 정부도 금기를 깨고 '광주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광주사건'은 기존의 '공산내란음모사건'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나 '민족민주화운동의 일부'로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문제가 제기됐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보상 [ 편집 ]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 쿠데타와 '광주사변'을 처음으로 '내란사건'으로 규정했다. 사건".
'5·18기념재단'은 1994년 설립됐다. '5·18' 보상금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설립된 관련 법률단체다. 동시에 시위 피해자들은 전두환을 비롯해 당시 군 주요 인사 총 35명을 고소하고 법적 소송에 나섰다.
정부는 1995년 7월 조사 끝에 '시민 불안을 진압하려는 노력은 처벌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해 대중의 비난을 샀다. 지난 5월 18일에는 관련 단체들이 장기 농성을 펼쳤습니다. 지난 10월에는 전두환을 도와 '광주사변' 진압에 나섰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전직 대통령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1월에는 노태우가 구금되어 투옥되었다.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검찰은 11월 30일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다시 수사에 나섰다. 12월 3일에는 관두환(Quan Douhuan)도 구금되어 투옥되었습니다.
1996년 2월 28일 전두환 ,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6명이 기소됐다. 재판부는 지난 8월 26일 이들에게 '군 내란 및 내란', '내란 목적 살인' 혐의를 인정했다. 전두환은 '내란과 내란의 주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노태우는 '내란과 내란의 주범죄'로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광주사변'은 법적으로 입증됐다.
12월 16일 관두환과 노태우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 결국 관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벌금 2628억원을 선고했다. 5월 18일을 처음으로 '국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정부 주도로 처음으로 새 묘지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 12월 22일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김영삼 대통령과 국민통합을 위한 사면 , 정권 복귀, 전두환 노태우 석방 에 합의했다. 1998년에는 '광주사변' 관련 단체들이 하나로 뭉쳐 5·18을 '문화제'로 지정했다.
1999년에는 '광주사변' 피해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추대하고 해당 시위자들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했다. 동아시아민족폭력피해자회는 5월 광주사건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광주사건은 인권과 평화, 시민자치공동체운동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5·18기념관'과 '5·18기념광장' 건립을 추진하고, 피해자치료센터 건립을 권고합니다. 2000년에는 처음으로 광주사변 추모식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로자 특별법 제정을 약속했다. '5·18기념재단'은 국내 인권단체나 인권운동가에게 수여하는 '광주인권상'을 제정했다. 시위 과정에서 해고된 교사(약 200명)와 교수(약 10명)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사상자 [ 편집 ]
정부는 당초 사망자가 191명이라고 발표했다. 5 ·18기념재단이 보상금 지급 내역을 밝혔다 .
분류 | 지원자 수 | 실행 취소 | 포기 횟수 | 인증번호 | 결제 금액 (백만 원) | 비고(중복인원) |
총 | 7,716 | 130 | 2,526 | 5,060 | 229,732 | (698) |
고인 | 240 | 16 | 70 | 154 | 17,042 | |
없어진 | 409 | 18 | 317 | 70 | 9,048 | |
부상당한 | 5,019 | 50 | 1,761 | 3,028 | 172,775 | (12) |
그 너머에 | 2,052 | 48 | 378 | 1,628 | 30,867 | (686) |
※ 반복 수신인원은 698명입니다. 실제 인식된 인원은 4,362명이다.
영향 [ 편집 ]
광주사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한국 국민의 요구가 수십 년 동안 억압된 끝에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민주화 요구를 유혈진압하고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당시 한국 정부의 독재와 민주주의 발전의 부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광주사태는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군사 쿠데타로 인해 전두환은 인기를 잃었고, 광주가 시위대와 맞서기 위해 특수부대 낙하산병을 파견하면서 그의 통치의 정당성이 위협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후반 한국정권에 민주개혁을 강요한 다른 민주화운동보다 먼저 일어났다.
광주사변의 옹호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촉진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민주화운동 지도자 이후 ",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대중은 야당 후보 중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했다.
1997년 한국 정부는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로 지정했고, 22) 광주는 인권과 자유의 '성지'가 됐다. 매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회의가 열린다. , 무료 국제학술회의 및 관련 미술전시회, 콘서트, 성지순방(묘지순회) 등을 통해 항쟁을 기념하고 [23] , 광주사건도 기념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24] . 그러나 단속 과정에서 총격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총격을 가한 사람이 누구인지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하며, 관련 단체에서는 앞으로도 철저한 진상 규명과 진실 공개를 요구할 예정이다.
미국의 입장 [ 편집 ]
사건 이후 미국 정부 의 태도 는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광주 사람들은 전두환의 광주 파병이 미국 정부의 위장 지원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1950년대 체결된 한미동맹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주한 미군 에 있기 때문이다 . 사건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 장군 과 라 이천휘 주한 미국대사 의 역할도 논란 이 됐다 . 마침내 수천 명의 군인들이 탱크를 도시 안으로 몰아넣었고, 이를 막기 위해 도로에 누워있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탱크는 여전히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고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국군은 도교당을 점거하고 도교본관 대피를 거부한 학생과 시민 20여명을 마지막으로 총살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잔혹한 탄압으로 끝났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는 미국 정부가 실제로 이 사건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26] . 실제로 한국군은 평시에는 본부가 지휘하며, 전시에는 주한미군과 나란히 싸우며 ' 한미연합사 '의 지휘를 받는다.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의 내부 병력 동원에 관한 정보를 이해하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미국이 진압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미주의 [ 편집 ]
1980년대는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된 시기로, 이는 전두환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와 광주항쟁 진압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광범위하게 추적됩니다. [27] [28]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에 따르면, “광주는 더 보수적인 한국인들의 구세대가 생각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운동이 워싱턴의 지원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미에 직면했다는 것을 한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확신시켰습니다. 레이건의 전두환 지지에 항의해 미국 문화원 이 불타고 학생들이 분신했다. ” 미국의 감정은 전두환의 부상과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공모에서 비롯됩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뉴욕 타임즈에 보낸 서한에서 미국이 한국군 제20사단에 광주를 탈환하고 계엄령을 회복하도록 승인했다고 밝혔 습니다 .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미국은 줄곧 파병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며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행동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말해 왔다. [32]
관련 매체 작품 [ 편집 ]
- 한국 영화
- 내 아들의 이름으로 , 2021년 한국영화
- 다시 시작된 여고생의 괴담: 모교 , 2020 한국 영화
- 1980년 광주사변 , 2019년 한국영화
- 1987년: 새벽이 오는 날 , 2018년 한국 영화
- 굴삭기 , 2017 한국영화
- 나는 택시운전사일 뿐 2017년 한국영화
- 2013년 한국영화 디펜더
- 26년 , 2012년 한국 영화
- 화려한 휴가 , 2007년 한국 영화
- 박하사탕 , 1999년 한국영화
- 한국 TV 시리즈
- 2021년 5월의 청춘 한국 드라마
- 2019년 한국 TV 시리즈 호텔 델루나 11화의 404호실에서 시간 배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응답하라 1988 , 2015년 한국 TV 시리즈, 청보라가 참여한 학생운동 행사의 원형
- 2005년 한국 TV 시리즈 제5공화국
- 모래시계 , 1995년 한국 TV 시리즈
- 노래 또는 MV
- 광주사건의 대표 추모곡인 당신에게 바치는 행진곡은 서영은 , 안지환 , 윤민석 등 가수들이 커버했다 .
- 그건 내 잘못이야, 2013 SPEED 의 드라마틱한 MV Part1
- 끝났다, 2013 SPEED 의 드라마틱한 MV Part2
- 아이유 , 서태지 - Zhaogdong (소격동) 2014년 서태지 9집 'Quick Night' 수록곡
- The Quiett - Youth in the Box (상자속젊음) (feat.paloalto) 2001년 The Quiett 1집 앨범 'Music' 수록곡
- 몬스타엑스 - All in MV 줄거리
- 방탄소년단 - Ma City (멤버 제이홉 가사)
- SUGA (광택) 제작 - 518-062
[ 편집 ] 보기
- 상무충정작전 ( 광주사변 당시국군행진
- 국립5·18민주묘지
-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 4·19혁명
- 6월 민주화운동
- 한국민주화운동
- 1986년 학생 봉기
- 천안문 광장 사건
- 228 사건
- 아름다운 섬 사건
- 들꽃학생운동
- 동독 6·17 사건
- 포즈난 사건
- 1956년 헝가리 혁명
- 1989년 루마니아 혁명
- 틀라텔롤코 학살
- 더러운 전쟁
- 베네수엘라 시위_(2014년~현재)
- 2021년 미얀마 쿠데타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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