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광주사건
광주사건의 중심지가 된 전라남도 구도청 조선어판 ) 전광장.
목적쿠데타에 대한 항의
발생 현장대한민국의 국기 한국 전라남도 광주시(현 : 광주광역시)
기간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
죽은 자154명 내지 198명(군 발표 숫자) [1]
부상자3028명
광주사건
각종 표기
한글 :광주사건
5(오)·18(일팔) 광주민중항쟁
한자 :광주사건
5(5)·18(18) 광주민중항쟁
발음 :광주
사공 오 일팔 광주 민준 한젠
일본어 읽기:고슈 지
켄고 이치 하치 고슈 민슈 코우 소
RR 공식 :광주 sageon
O ilpal 광주 minjung hangjaeng
MR식 :광주 sagŏn
O ilp'al 광주 minjung hangjaeng
영어 :May18 Kwangju(Gwangju) Uprising
템플릿 보기

광주사건 [2] [주석 1] (고주진, 광주지켄)은 1980년 5월 18일 부터 27일 에 걸쳐 대한민국 (한국)의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시 (현 : 광주광역 시 )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에 의한 군사 정권 에 대한 민주화 요구의 봉기이다 [1] [2] .

제2차 대전 후 1948년 건국 이후 발생한 ' 제주도 4·3사건 '과 ' 보도연맹 사건 '과 마찬가지로 한국군이 자국민을 대량 학살한 사건 중 하나이며, 군에 의한 일제 사격 등으로 일반 시민에게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 [1] [2] . 이 광주 사건에서는 시민 측의 목적인 민주화 달성과 군사 정권을 쓰러뜨릴 수 없었지만, 7년 후 1987년 군사 정권 측이 ' 6·29 민주화 선언 '을 내고 언론의 자유 와 대통령의 직접 선거를 인정했다 [1] .

전사 편집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의 암살 후 '서울 의 봄 '이라 불리는 민주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유신 체제 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상층부와 박정희에 돋보이는 중견 간부 세력 ‘ 하나페 (하나회·일심회)’와의 대립이 표면화했다.

1979년 12월 12일 , 하나페의 중심인물인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 소장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 총장을 박정희 암살 사건의 공범 혐의로 체포해 하나페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의 실권을 장악했다( 숙군 쿠데타 ). 박정희의 후임 대통령이 된 최규 여름은 대통령 대행 취임 직후보다 조기 헌법 개정과 민주화를 약하고 있었지만 취임 직후 군부를 장악하지 못해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숙군 쿠데타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반군부 민주화 요구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주도하에 1980년 5월 17일 에 전국에 계엄령이 포고되어 ( 5·17 비상계엄) 영 확대조치 ), 집권의 전망이 있는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 김대중 과 구군부를 대변하는 금종 비를 체포·연금했다 [1] . 김대중은 전라남도 출신으로 광주에서 인기가 있어 그의 체포가 사건 발생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진압부대의 공수부대도 한때는 한국군의 엘리트 부대였지만 전두환의 경호부대적인 위치에 격하되어 병사들에게는 울분이 쌓여 있었다.

개요 편집 ]

5월 18일 광주시에서는 계엄령에 항의하는 학생이나 시민에 의한 시위가 일어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군의 공수부대가 대학을 봉쇄하면 봉쇄에 항의한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다. 군부대·기동대의 진압활동은 점차 에스컬레이트해 진압봉에 의한 폭력이나 일제사격 등의 잔학행위를 반복하여 사살된 시민이 다수 나왔기 때문에 데모 참가자는 약 20만명으로 까지 늘어나 목포 를 비롯해 전라남도 일대로 확대했다.

또 다음 19일에는 시위의 주체도 그동안 학생들로부터 격렬한 시민으로 바뀌어 가고, 21일에는 시민들은 버스나 택시를 쓰러뜨리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각재나 철 파이프, 화염병 등 으로 응전했다 그 외 향토예비군 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하여 이에 맞서 군과의 총격전으로 적어도 54명이 사망한 것 외에 500명 이상이 부상한 [1] 말에 전라남도청을 점령 해 계엄군을 일시적으로 시외로 후퇴시켰지만 계엄군은 광주시를 봉쇄(도로·통신을 차단) 포위했다.

한국 정부는 저항하는 광주 시민을 ' 스파이 로 선동된 폭도'라고 했다 [5] . 한국 언론은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도했다 [6] . 해외미디어는 뉴욕타임스 의 헨리 스콧스토크스 도쿄 지국장을 비롯해 김대중은 ‘처형해서는 안 된다’는 사설을 내세워 ‘민주화운동의 투사’라는 지지를 가졌다 [7] . 또 독일 공공방송 (ARD) 도쿄 거주 특파원이었던 서독 인 기자 유르겐 힌츠페터 [8] 가 사건을 보도했다.

현지 유력자 등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 측과 협상하더라도 타결에 이르지 않았다. 시민들은 무기를 손에 넣자 한국군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여 전라남도청을 점령 했다 [6] . 지도부는 투쟁파와 협상파로 나뉘어 분열했다. 5월 26일 , 시민군은 기자 회견에서 미국 이 개입하면 유혈 사태는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동지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9] . 결국 일부 투쟁파를 남기고 자주 무장해제를 해 이 정보에서 시민에게 점거된 전라남도청에 대한 진압명령이 내려졌다. 5월 27일 시민군의 선두에 서서 무기창고를 공격한 윤상원 [9] 등이 사살됐지만 한국군·경찰대도 사상자를 내면서 진압작전은 종료했다.

최종 희생자 수에 대해 군측은 14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1980년 5월 31일 계엄군 사령관 발표) 실제 죽은 자수는 그 몇 배나 올라가면 시민측은 주장한다 [1] . 광주시에 투입된 총병력수는 2만5천명에 달했다 [6] . 1980년 9월 17일 , 김대중 에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10] .

당시 사건은 '북한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여겨졌지만 끈끈한 진상규명의 움직임의 결과 1997년에 국가의 기념일이 되어 2001년에는 사건 관계자를 민주화 유공자로 하는 법률이 제정 [11] . 한국의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의 하나, 그리고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된 1987년 6월의 6월 민주 항쟁 의 원동력이 되었다 [11] [6] .

2004년 1월 29일, 내란 ​​음모로 사형 판결이 내려진 김대중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후술) [12] .

2010년대 이후의 움직임 편집 ]

2015년 8월 김대중을 당시 지지하고 있던 전 뉴욕타임즈 도쿄 지국장의 스토크스는 산케이신문 의 취재에 대해 “광주사건은 김대중이 일으킨 자작자연의 '폭동'' 대통령이 될 것을 노리고 폭동을 했다"고 말했다 [13] .

2010년대 에 있어서도 한국에서는 당시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관여가 있었다고 하는 복수의 보도가 이루어져,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많이 올랐다(후술). 그러나 2017년 1월에 기밀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 (CIA)의 기밀문서에서는 북한의 관여를 부정하는 등 사건의 원인에 대해 대립하는 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14] [5] [15 ] .

2017년 8월 독일 공공방송연맹 도쿄 특파원인 유르겐 힌츠페이터 등을 모델로 하여 사건을 그린 한국 영화 ' 택시 운전사 약속은 바다를 넘어 '가 공개. 대히트를 기록해, 같은 해에 가장 많이 보인 한국 영화가 되었다 [16] .

2021년 5월 27일, 아사히 신문 은 동지의 오사카 본사 사진부원과 사회부원의 2명의 기자가 사건 당시 광주에서 촬영한 컬러 사진을 포함한 사진 필름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17] .

나중에 민주화에 미치는 영향 편집 ]

5.18 민중항쟁추모탑
5.18 기념공원에 서는 기념비

당시 한국 국내에서는 전두환이 사령관을 맡는 보안사령부가 언론 등의 정보도 모두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 사건의 실태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에 의해 서서히 그 비참한 실태가 밝아지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됐다. 이 시기의 민주화운동세대는 광주세대라고도 불리며 그들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흐름은 대통령 직접 선거제를 요구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 (1987년)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전두환이나 노태우 등 운동을 탄압한 신군부세력의 중심인물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라도의 반경상도 감정이 강화되어 민주화 후 한국 정치를 좌우하는 지역 대립 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18] .

사건 중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던 주한 미군 의 존 A. 위컴 사령관이 한국군 부대의 광주 투입을 승인하고 미국 정부도 질서 유지를 이유로 이를 묵인했기 때문에 미국 으로 의 비판이 일어나 한국인의 대미관이 크게 재검토되게 되었다 [19] .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는 사건 당시 진압군 사령관들을 추궁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희생자·부상자에 대한 보상금이 지급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광주사건을 '5·18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각종 기념사업 실시를 선언했다. 1995년 에는 한국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특별법) 및 '헌정질서파괴범죄 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가결되어 광주사건 및 군사반란 등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이 특별법을 근거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실형 판결 및 추징금을 선고했다(동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

김영삼 , 김대중 노무현  이어지는 문민정권에서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국가적 성지가 됐다. 현재 광주시내에는 5·18기념묘지, 5·18기념공원 등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시설과 기념비 등이 시내 곳곳에 점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은 대통령 취임 직후에 행해진 2008년도 기념식전이야말로 출석했지만, 2009년 이후의 위령제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20] .

2004년 1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3부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1980년 내란음모로 사형판결이 내려진 김대중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2] . 재판부는 “피고인의 내란 음모 사건은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 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것으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재심계속부분은 형법 제20조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다'는 것을 밝혔다. 판결을 받아 김대중은 재판부의 신속하고 공정한 대응에 감사를 드리며 5·17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에 대해 “신군부의 반민주적인 행동이었습니다”라며 “신군부에 반기를 했다( 나의) 행동에 대해 무죄를 결정해준 것은, 국민과 역사가 승리한다는 것을 재차 깨닫게 해 주었다」 「자유적인 사법부와 독립한 사법부가 건재해야 한다 이런 잘못된 재판이 우리 나라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 주기를 바란다 .

2017년 5월 18일 자신도 광주 사건 경험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서 "신정부는 5.18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바라보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복원합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에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엽니다. 합니다. 또한 대통령 선거활동 중 헌법전문에 광주사건의 민주화운동 정신을 담는 것을 공약하고 있었다 [21] [22] [23] .

2020년 5월 17일 ' 서울역 회군'에 참가했기 때문에 5월 18일 당일 청량리 경찰서 에 수감된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문화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학생회장단 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서울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군이 투입되는 구실을 제공했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퇴각할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광주시민은 정말로 고립되어 계엄군에 맞서게 되었다”고 아직도 큰 죄악감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24] . 또한 당시 '서울역회군'에 참가하여 이후 정치가가 된 것은 문 대통령 이외에 야나기 시민 (당시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 의장)과 침재철 (당시는 서울대총학생회장 ) 등이 있다 [25] .

사건 경과 편집 ]

1979년

  •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 된다( 박정희 암살 사건 ).
  • 10월 27일 최규 여름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한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
  • 12월 6일 최규 여름 국무총리가 통일주체 국민회 의 대의원 선거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
  •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본부장을 맡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 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내비밀결사 ‘ 하나페 ’ 멤버가 지휘하는 부대가 육군특수전사령부, 육군본부 및 국방부 를 습격하고 국방부 장관의 노재현 을 구속한다. 노장관은 전두환의 압력에 굴복해 정총장의 체포를 결재하고 군부에 희미했던 최규 여름 대통령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를 재가한 것으로 전두환과 하나페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지만 한국군 전군을 장악한다( 숙군 쿠데타 ).

1980년

  • 4월 14일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재직인 채 중앙정보부장을 겸임.
  • 4월 중순 근로자와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격렬해진다.
  • 5월 14일 서울 에서 5만 학생이 계엄령의 해제와 조기개헌을 찾아 데모.
  • 5월 15일, 10만 학생이 서울역 앞에 집결하지만 시민의 호응이 적고, 학생지도부는 당국에 학생의 의사가 전해졌다고 대학으로 돌아오는 결정을 한다(서울역 회군).
  • 5월 16일 광주시에서 5만 학생·시민이 참가하여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한 횃불 대회'(민주대성회)가 열린다.
  •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비상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
  • 5월 18일 계엄사령부  김대중 , 문익환 , 김종비 , 이후경 등 26명을 소련 뒤 조종이나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해 김영삼 을 자택연금했다. 정치 활동 정지, 언론·출판·방송 등의 사전 검열, 대학 휴교 등을 담은 계엄포고를 발표.
  • 이날 미명 광주시 전남대 와 조선대학 에 육군 제7공정여단 삼삼대대와 삼오대대가 배치된다. 아침, 전남 대학의 교문 앞에서 이 공수 부대와 학생이 충돌. 배제된 학생은 광주역 앞에서 자세를 다시 세워 금남로를 시위 행진해 기동대와 충돌. 오후, 공수 부대가 시내 각처에 투입되어 학생을 진압. 400명 이상의 학생이 연행되어 80명이 부상.
  • 5월 19일 육군 제11공정 여단이 급파된다. 시위의 주체는 시민으로 바뀌고, 각재, 철 파이프, 화염병 등을 사용해 대항.
  • 5월 20일, 군집은 20만명 이상으로 부풀어 오르고, 대치한 군·경찰은 3만명, (계엄군의 성명을 전하고 있었다) MBC 광주 문화 방송 의 사옥이 시위대에 의해 방화되었다. 버스나 택시를 쓰러뜨리고 바리케이드 를 쌓는 등 육군 부대와의 시가전의 양상을 드러냈다.
  • 5월 21일 시민은 아세아자동차(현·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와 군수관계공장, 예비군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장갑차 등 차량이나 총기나 TNT 폭약 등도 탈취해 전라남도 청 를 점거했다. 광주에서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시외로 향하는 시위대의 일부가 그 도중에 있던 광주 감옥의 계엄군으로부터 감옥 탈취라고 오인되어 총격을 받았다. 군은 일시 철수한 후 광주시와 외부 철도, 도로 및 통신회선을 차단했다.
  • 5월 22일, 육군 부대가 광주시 의 포위를 완료.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군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나 항쟁대 지도부는 군과의 타협에 반대하고 광주시민 측에도 '사태수습파'와 '항전파'의 의견 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시민에게 한층 더 항쟁을 두려워한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한다.
  • 5월 23일, 5만명의 시민 대회 개최.
  • 5월 24일, 수만명의 제2차 시민 대회, 비 속에서 개최.
  • 5월 25일, 5만명의 제3차 시민 대회 개최. '광주민주민중항쟁지도부'가 항전파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 김대중 의 석방',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했다.
  • 5월 26일, 육군 부대가 전차 로 시내에 침입 개시.
  • 5월 27일, 수천명의 부대가 전차와 함께 시 중심부에 진출해, 시내 전역을 제압. 항쟁파를 중심으로 시민에게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다.
  • 5월 28일, 몇 명의 시민이 체포·구류된다.
  • 9월 17일 보통 군법회의에서 김대중에 내란예비죄·음모죄·반공법 위반·국가 일급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하는 사형 판결이 전해졌다 [26]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사망자와 부상자 편집 ]

당초 정부 발표에서는 사망자 수는 170명(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관 4명), 부상자 수는 380명이었다. (1980년 5월 31일 · 계엄 사령부 발표)

5.18 기념재단에서 지급한 보상금의 내역을 제시한다.

분류신청자 수취하자기각 수인증수지급액
백만원 )
비고
(중복 인원)
합계7,7161302,5265,060229,732(698)
사망240167015417,042
행방불명40918317709,048
부상5,019501,7613,028172,775(12)
기타2,052483781,62830,867(686)
출처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한 경우, 실제 인정 인원수는 4,362명

한국에서의 명칭의 변천 편집 ]

사건 당시 국군은 광주폭동 (광주폭동)이라 불리며, 이후 정부·여당측은 광주사태 (광주사태), 광주사건 (광주사건), 야당측은 광주항쟁 (광주항쟁), 광주 민중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  애 (광주의거) 등으로 호칭했다 . 1988년 이후 광주민주화운동(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정착했다 [28] . 1988년 노태우 가 대통령에 당선한 후 설치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재정의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라고 부르겠다고 제안했다 [29] [ 30] [31] . 그리고 1995년 김영삼 정권에서 '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 ko )이 성립되어 공문서에서도 널리 사용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2] .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 극우층에서는 오늘날에도 광주사태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지만 좌우 불문하고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요출전 ] 한국 국내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5.18'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명칭 편집 ]

북한 에서는 광주사건을 군사파쇼집단 압정에 반대하는 인민항쟁이라는 관점에서 ' 광주인민봉기 '( 광주인민봉기 )라 불린다 [33] [34] . 조선의 음성방송 에서는 ' 광주대학살 [35] '이라는 호칭도 사용되고 있다.

사건 발단에 대한 토론 편집 ]

1988년 한국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는 5월 21일 13시에 도청 앞에서 열린 군중에 발포를 누가 명령했는지가 큰 쟁점이 되었다. 요출전 ] 전두환이나 당시 진압부대인 공수부대를 밑 아래에 두고 있던 특수전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현용 등은 이를 부인하고 있으며, 발포가 군상층부의 사전 승인 에 의한 것인지, 현장의 지휘관의 판단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요출전 ] 18일부터 19일에 열린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이 시위 군집뿐만 아니라 여성과 노약자를 포함한 시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도 규명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요출전 ] 사건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도 정부 발표와 제단체의 주장에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요출전 ]

또한 후술하는 바와 같이 현재 광주사건에 대하여 왜곡, 날조하거나 허위사실의 유포는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관여설 편집 ]

사건의 발단이 된 시위가 순수한 시민운동이 아니라 북한이나 그 심파가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때때로 제기되지만, 주장의 근거가 약하고, 2020년대 기준으로는 우파 정당으로부터 도 배척되고 있다.

북한 관여설을 주장하는 논객은 이케만원이지만 , 그가 5.18에 투입된 북한군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속 인물(소위 북한 광수)이 지금도 한국에 아직 살고 있기 때문이다 . 광주에서 북한군이라고 주장한 사진 속 인물들은 대다수가 당시 광주시민이며 북한 탈북자들도 다수 섞여 있다. 이 중에는 탈북한 황장엽 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 최고위층이었던 인사가 당시 광주에 왔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주장하는 리스트를 보면 사진만을 봐도 타인인 것을 알 수 있어, 1980년 당시 4세의 아이였던 탈북자, 북한 수용소에 갇혀, 고문되고 있던 탈북자까지 리스트 에 들어 있다. 이처럼 무리한 주장을 해보니 탈북자 단체까지도 2019년 이케만을 명예훼손으로 법원에 고소했다. [36]

2006년 조선일보 는 대대규모 북한군이 잠입해 광주 사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는 북한의 전 ​​군인의 증언 [37] 을 보도했다. 이에 대해 광주사건 관련 단체는 전 군인들의 증언과 증거에 대해 반론 [38] 했다.

전 한국 육군 대령의 이케만 전 은 자저로, 광주 사건은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 사건이라고 한 1980년의 판결에 동의한 뒤, 사건에 대해 김대중이 일으킨 것으로 북한 특수부대의 공작 이었다고 주장. 2008년 시민단체로부터 명예기손으로 호소됐지만 2012년 12월 한국 대법원 은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법적·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이므로 이케씨가 게재했다 게시물을 통해 5·18 민주유공자나 참가자에 대한 기존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게시물이 5·18 민주유공자 등 개개인 의 명예를 훼손할 정도로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며 연못을 무죄로 한 1심과 2심의 판결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리고 연못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39] [40] [41] . 사쿠라이 요시코 는, 이 재판에 의해 광주 사건이 북한 특수부대의 공작이었다고 하는 주장은 올바르다고 인정되었다고 하고 있다 [41] 하지만, 판결은 연못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고, 18민주화운동이나 5·18민주유공자·참가자에 대한 기존의 확립된 사회적 평가가 연못의 저작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어렵다고 하여 5·18민주유공자 등 개개인 의 명예를 훼손할 정도로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여 명예손죄의 성립을 부정한 것에 불과하다 [42] .

또 연못은 사건으로 살해된 시민의 70%가 한국군이 사용하고 있던 M16 자동소총이 아닌 총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특수부대에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41] ] 가 1995년에 국방부가 실시한 사건의 재조사에서는 카빈총에 의한 사망자가 많다고 한 1980년의 조사는 잘못되어 희생자의 대부분은 한국군의 M16 라이플이라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으며, 주장에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43] .

2013년 5월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 조선어판 )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 과 함께 특수부대를 보냈다는 글을 쓴 이케만 전에 대해 죽은 자 명예 손해의 죄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탈북자의 수기는 출소나 증언자가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대중과 김일성의 공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고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고 판단했다 [44] . 판결을 불복으로 하는 이케만 전은 당일 상고함과 동시에 북한의 관여한 도시 게릴라 작전이었다고 하는 문장을 인터넷에 게재했다 [44] .

광주 사건 당시 현장 취재를 시도했기 때문에 해직 [45] 된 보수계 저널리스트 조갑제 는 사건 당시 취재와 상황 판단을 바탕으로 사건을 '반공민주화운동'으로 평가 [46 ] ] . 게다가 일부 우파계에서 제기된 북한인민군의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론하고, 이들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좌파를 이리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47] . 그리고 1980년 사건 직후에 행해진 계엄사령부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청문회, 1995년~97년 5.18재판, 2012년 국가정보원이 실시한 비공개 조사에서도 북한이 대대 규모로 들어갔다는 증거나 상황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것. 사건에 대한 시위대는 반정부적이어도 친북한이 아니라 '김일성은 오판하지 말라'는 슬로건이 항상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48] .

2013년 5월 탈북자 전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장교 임정영 [주석 2] 은 한국 TV조선 과 채널A 프로그램에서 600명의 북한 게릴라와 함께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 했다 [49] [50] . 이에 대해 한겨레, 중앙일보는 네츠조라는 입장을 취했다 [51] [50] . 민주당 은 프로그램 내용의 심의를 요구하고, 법적 대응도 검토한다고 했다 [52] . 그 후 TV조선과 채널A는 방송내용이 사건 관계자·광주시민·시청자의 심정을 상하게 했다며 잇달아 사과방송을 했다 [53] [54] . 보수계 저널리스트인 조갑제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광주 사태를 기회로 보고 긴급하게 400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 선박에서 목포 인근 해안까지 침투하는 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개입에 대해 반론하는 문장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55] . 또 북한군 출신의 복수의 탈북자로부터도,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서는 「주목을 모으고 싶은 탈북자가 전한 황당 무익한 이야기다」 「주목을 모으고 싶은 일부의 관계자가 잘못했다 발언을 하고, 광주시민들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으며, 북한군 출신 망명자 중에서도 개입설은 확립된 견해로는 되어 있지 않다 [56]

1980년 5월 광주 사건 전후에 작성되어 2017년 1월 기밀해제된 CIA의 기밀문서에서는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을 구실로 하고 싶은 군사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김일 나루는 한국에게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가 되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한국의 사태에 개입하지 않을 것” 5·18 기념재단의 김양레 상임이사는 “보수단체가 주장하고 있는 5·18 북한 개입설을 완전히 반론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문서의 의미를 강조했다 [15] .

2019년 2월에는 국회 에서 '5·18 진상규명'이라는 이름의 공청회에서 보수계야당인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광주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희생자를 ' 종북좌파가 만든 괴물”이라고 발언해 유족단체, 시민단체 뿐만 아니라 여야당 국회의원으로부터도 비판을 받고 사과하고 당징계를 받는다.

문재인 정권의 여당인 모두 민주당 은 광주사건에 대해 부정·중상·왜곡·날조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0만원 이하의 벌금 에 처하는 '5·18역사왜곡처벌법'을 금회에서 제정할 것을 밝혔다. 이 법안은, 앞의 국회에서도 발의되었지만, 폐안이 되어 있었다 [57] . 한국의 국회는 12월 9일 야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5·18역사왜곡처벌법’을 여당 단독으로 강행채결해 성립시켰다 [58] .

광주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편집 ]

스토리에 광주 사건을 도입한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영화
TV드라마
소설·만화
음악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일본에서는 광주사건 이라고 불리고 있다. [3] 한국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 광주민중항쟁 등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2] .
  2. ^ 중앙일보는 단정적으로 쓰고 있지만 한겨레는 '이라는'을 붙이고 있다.

출처 편집 ]

  1. g 2022년 1월 29일 방송, NHK 어나더 스토리즈 "그 때, 시민은 군과 싸웠다~ 한국의 새벽 광주 사건~"
  2. d 이토 아인+ 오오무라 마스오 + 타카 사키 소지+다케다 유키오+요시다 미츠오+카지 무라 히데키
  3.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KBS World Radio 2015-06-09
  4. ^ "군의 일제 사격은 100분 가까이 계속되기도 했다"
  5. ↑ b 종합편성 채널 잇따르는 「5·18북이 개입」되는 보도는 「전두환의 주장의 반복」 한겨레 2013.05.18
  6. ↑ d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KBS World Radio 2015-06-09
  7. ↑ “NY 타임즈도 속은 ‘가짜’” . 산케이 신문 . (2015년 8월 1일)
  8. “'독재폭압' 전세계에 고발('독재폭압' 전세계에 고발)” . 한겨레 . (2003년 11월 28일) 2013년 3월 3일 열람. [:ko]
  9. b 그때 거기서 그 사람들(3637자) 한겨레 21 2010.05.21 제811호
  10. ↑ 김대중 사건 사형 판결에 대해 일본 변호사 연합회
  11. ↑ b 5·18사건일지(5·18사건일지)
  12. c “DJ 내란음모 사건, 재심서 '무죄 선고' 법원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 수호에 대한 정당한 행위" 을 위해 정당한 행위”)” . 오마이 뉴스 . (2004년 1월 29일) 2015년 8월 21일 열람.
  13. “<“가짜(페이크)”인 것은, 아내 아키코씨가 최초로 간파했다>” . 산케이 신문 . (2015년 8월 1일)
  14.  「광주 사건에 북한이 개입」… 역사 악곡 둘러싼 논의 퍼진다
  15. b “5.18 북한군 개입설' CIA 기밀문서가 박살냈다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 돕는 결과 가져올 것 알고 있었다" , 전두환 도울 결과 가져다 줄 알고 있었다 ")” . 프레시안 . (2017년 1월 20일) 2018년 4월 23일 보기.
  16. ↑ “ 'A Taxi Driver' surpasses 8 mln in attendance, becoming most-viewed film this year ”. Yonhap News Agency (2017년 8월 14일). 2017년 8월 15일에 확인함.
  17. ↑ 다케다 肇 (2021년 5월 27일). “민주화 탄압의 현장, 대량의 필름에 광주 사건 41년” . 아사히 신문 2021년 5월 28일 열람.
  18. 출수 가오루 “민주화 후의 한국 정당제” “APC 아시아 태평양 연구” 제8호(2001년 1월) 재단법인 아시아 태평양 센터, 20페이지
  19.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Norton, 1997.
  20. ↑ “광주 사건 30년, 이 대통령 “성숙한 민주주의를”” . 연합뉴스 . (2010년 5월 18일)
  21. ↑ “ 전역 5.18 민주화 운동 37주년 기념사(2017년 5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 The Korean Politics (2017년 5월 18일). 2018년 5월 27일 열람. 출처 무효 ]
  22. ↑ “문재인 대통령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광주 사건으로부터 37년(성명 전문)” . 허프포스트 코리아 . (2017년 5월 19일) 2017년 6월 3일 열람.
  23. ↑ 청와대(한국 청와대) 공식 웹사이트
  24. 한겨레 (2020년 5월 18 일 . 브라우징.
  25. ↑ 쿠라모치 카즈오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3): 전두환 시대」 「도쿄 여자 대학 기요 논집」 제69권 제2호, 도쿄 여자 대학, 2019년 3월, 85-119페이지, ISSN  0493 -4350 , NAID 120006605690 . 
  26. 김대중 사형선고(김대중 사형선고) PDF ) . 동아일보 1980년 9월 17일자 1면 왼쪽
  27. 박은정 (박은정), 한인섭 (한인 섭),《5·18, 법적책임과 역사적책임》 (『5・18, 법적 책임과 歷史的責任』) . 1995, ISBN 9788973002740 , 133쪽.
  28.  한국사사전 편찬회·금용권 [편]『조선한국 근현대사사전 제3판』, 일본 평론사 , 2012년 6월 15일 -58618-5 , 482 페이지.
  29.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미래 화합의 출발점 되길”("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미래의 화합의 출발점이 되는 것을 " )  . 년 8월 9일 열람.
  30. ↑ “ 80년이후 항쟁일지(80년 이후 항쟁일지) ”. 광주광역시 518기념문화센터. 2015년 8월 9일 열람.
  31. ↑ “ 88년이후 항쟁일지(88년 이후 항쟁일지) ”. 광주광역시 518기념문화센터. 2015년 8월 9일 열람.
  32. ↑ “ 1995년 대한민국 중요일지 ”. 아시아경제연구소. 2015년 8월 8일 열람.
  33.  “ 광주항쟁 28년 노동신문 논설 “이정권, 북남관계에 장애”” 2008년 8월 26 일자 신보
  34. ↑ “ 광주인민봉기(광주인민봉기) ”. 우리 민족끼리 (2013년 5월 18일). 2015년 8월 16일 열람.
  35. ↑ “ 광주대학살행위의 진상규명과 살인주범의 처벌을 요구 ”. archive.org. 2019년 1월 15일 열람.
  36. “ [특파원 리포트 탈북민 대표들 “하지만 원 씨 고소할 것...5·18정신은 북한으로 흘러 가야”]” ( 조선어 ) . 브라우징.
  37. ↑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 . 조선일보. (2006년 12월 21일) 2008년 4월 26일 열람.
  38. “사진에 나온 시체는 모두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사진에 나온 시체는 모두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 (조선어) . 26일 열람.
  39. “ "5·18은 DJ가 일으킨 내란" 주장 하지만 원 '무죄 ' 확정 일) 2015년 8월 16일 열람.
  40. “대법, '5ㆍ18은 DJ가 일으킨 내란' '보수론객 이케 만 전 무죄 이케만 전 “민주화운동과 굳어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내전'이 바로 5·18”)” . Lawissue(법률신문) . 년 8월 16일 조회.
  41. ↑ c 북한에 모략전에서 패한 것이 한국의 괜찮은 국조를 방해하고 있는 사쿠라이 요시코 주간 다이아몬드 2013년 3월 30일호
  42. “ "5·18은 DJ가 일으킨 내란" 주장 하지만 원 '무죄 ' 확정 일) 2015년 8월 16일 열람.
  43.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125-12(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125-12).
  44. b “ “북한 특수 군이 광주학살” 지만원 항소심도 유죄 ) 2015년 8월 9일에 확인함.
  45. ↑ 「인물연구」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인물연구」전 월간조선대표 조갑제) 주간 경향
  46. “좌파를 돕는 극성우파들(좌파를 돕는 극우파들)” .趙甲濟.com . (2007년 3월 16일) 2015년 8월 9일 열람.
  47. ^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 북한 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 은 믿을 수 없다!) ” 년 8월 9일 열람.
  48. ↑ '조갑제 칼럼' 신념보다 사실이 항상 중요하다 , 뉴데일리(2013년 5월 22일) 2015년 8월 11일
  49. ↑ “종합편성 채널 잇따르는 “5·18북이 개입”되는 보도는 “전두환의 주장의 반복”” (일본어). 한겨레 . (2013년 5월 18일) 2015년 8월 9일 열람.
  50. ↑ b 「광주 사건에 북한이 개입」…역사 와곡 둘러싼 논의 퍼진다
  51. ↑ '광주사건에 대한 북한군 개입' 보도는 간과할 수 없는 한겨레 2013.05.23
  52. ↑ “"5·18은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한 무장폭동" TV조선 시사프로그램 출연자의 망언” (일본어). 한겨레 . (2013년 5월 16일) 2015년 8월 9일 열람.
  53. ↑ “[속보] 채널A, '5·18 북한 개입보도 '공식사죄방송” (일본어). 한겨레 . (2013년 5월 22일) 2015년 8월 9일 열람.
  54. ↑ “TV조선도 '5·18 북한군 침투설' 방송 사죄” (일본어). 한겨레 . (2013년 5월 23일) 2015년 8월 9일 열람.
  55. ^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 사태 개입 주장은 이래서 말이 안 됩니다! 2015년 8월 11일
  56. “5·18 북한군 개입설?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 “허황된 얘기” 일축(5·18 북한군 개입설 ? 뉴스) . (2013년 5월 21일) 2017년 3월 27일 열람.
  57. ↑ “한국 여당 “5·18 왜곡 처벌법을 만든다”…조사위에 강제조사권 주는 안도 추진” (일본어). 한겨레 . (2020년 5월 19일) 2020년 6월 7일 열람.
  58. “공수처, 5·18 처벌, 대북 빌라 금지… 여당은 일방적 처리해 놓고 ‘역사적 성과’” (일본어). 조선일보 . (2020년 12월 15일) 2020년 12 월 16일 열람.
  59.  시네마코리아 한국영화정보 『5월 - 꿈의 나라』[1]
  60. 광주 사건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BTS(방탄소년단)로부터 일본과 세계를 바라본다(3) | 연재 델퀴 | WEB 세계

참고 자료 편집 ]

  • 분쿄수「한국 현대사」, 이와나미 서점, 2005년, 138-147쪽.
  • T·K생과세계」편집부 「군정과 수난 ―제4・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이와나미 서점, 1980년, 185-230쪽 「다시 어둠에」.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