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과 '근대'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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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서울 종로에 전봉준 동상이 세워지고, 주말연속극도 나왔군요. 많이 수정, 보완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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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또는 농민란을 이 정부가 선양, 현창하려 한다. 또 하나의 "민주화운동"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를 반대하는 논자들의 초점은 동학란이후 그들이 일진회를 중심으로 친일로 갔다는 점이다.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것으로는 정부와 그 지지자들에게 반론, 황당한 움직임을 저지하기에 근본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사후에 친일이 있었다고 해도, “반제 반봉건” 저항운동, 근대를 지향하는 “시민혁명”이었다고 우기면서 지금 국민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힘입어 저들은 끝까지 밀어부칠 것이다.
농민, 정확히는 小農(소작농이 아니며, 영어로는 peasant, farmer는 현대 기계화된 가족농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의 본질이 근대, 또는 근대시민혁명과 무관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마르크스는 이 농민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래서 러시아 상황으로 말년에 골머리를 썩다가 결국 부하린 등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마르크스에게는 농업 자본가를 포함한 부르조아, 농업노동자 등 프로레타리아, 지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미스 또한 농민=소농을 분석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영국 농업에서 자본주의적 자본-임노동관계가 중심이었으므로, 다른 나라 농민들도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나 자본가가 되고, 농업에서 "삼분할제"(노동자, 농민, 지주)가 성립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자유로운 소농경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결여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혁명전략에서 농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당면한 중대 과제로 설정한 이는 레닌이었다. 그가 {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전} 등에서 ''농민층 양극분해''라는 억지를 부린 것도 기실 농민문제가 그렇게 중요했음음 반영한다. 당시 러시아에서 근로대중 다수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레닌의 주도 하에 결국 노동자계급이 농민과 손을 잡고(노농농맹) 일차 부르조아 혁명을 수행하고, 그 뒤에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어 제2차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레닌의 분석과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실천적으로 혁명의 시급성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농민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 최초로 이론적 분석을 행한 이는 러시아의 A. V. 차야노프였다. 그는 농민을 자본가겸, 노동자겸, 경영자겸, 지주(땅을 가진 경우)라고 보았다. 그로 인해 그들의 경제적 행동원리는 근대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농업집단화'', ''집단농장''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농민을 ''푸대 자루속의 감자''와 같이 푸대에서 쏟아지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로 묘사한 레닌도 ''농업집단화''만큼은 최대한 미루고자 했다.
농민문제를 고민해본 적 없는 스탈린은 달리 생각했고, 레닌 사후 집권하자 바로 급격한 농업집단화, 집단농장을 급속도로 추진하였다. 농민은 저항했지만,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농민들 손바닥만한 텃밭에서 나오는 감자가 집단농장의 생산량을 압도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나타났다. 인간본성에 반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차야노프는 집단화와 함께 바로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사망시기와 장소조차 알 수 없다.
정치, 이념적으로 농민은 “농민적 평등주의” 또는 “농민적 공산주의”로 성격지울 수 있다. 토지에 대해서는 "농민적 균분주의"가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에릭 울프의 {농민}, {20세기 농민전쟁}나 농민전쟁에 대한 여러 논저를 참고할 수 있다.
독일농민전쟁, 중국 태평천국의 난, 러시아 농민의 사회주의 혁명 참여, 프랑스 농민의 시민혁명 참여 등, 이 모든 것이 농민적 평등주의 내지 농민적 공산주의에 기반한 것이며, 농민반란은 그때그때 내외 상황에 따라 휩쓸렸다. 그 흐름은 자체적 동력에 의해 추동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외 상황에 따라 부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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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근대나 근대시민혁명과 본질적으로는 무관했다. 세계사 전체로 볼 때, 농민의 이념과 그에 따른 봉기는 자신의 생존이 위협되는 상황, 기아와 착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서면 항상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었다. 동학 또한 19세기 후반의 경제위기`생존위기에 대한 반응이었고, 그 시기가 조선왕조의 붕괴 직전이었을 뿐이다.
동학농민전쟁을 근대와 관련시키고 근대시민혁명으로 해석하고자 본격 저작물을 내기시작한 것은 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이태진이다. 이러한 이해는 경제사 측면에서 김용섭 등의 자본주의맹아론과 명실상부한 짝을 이루었고, 지금도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통설은 교과서 서술의 뼈대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동학농민전쟁을 근대 시민혁명에 근사한 무엇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국민적 착각과 환상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파급에는 그렇게 주워들은, 내재적 발전론이나 역사의 단계적 발전이라는 사회주의적 역사의식에 깊이 침윤된, 활동가`비활동가를 불문하는 586세대들이 큰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그렇다.
연구자들이 동학농민전쟁에 주목한 데는 이해할 만한 구석도 없지 않다. 그런 대규모 농민반란이 한국사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은 근대나 근대시민혁명과 본질적으로 무관했다. 오히려 주나라 시대 정전제 등, 유교의 전근대적, 토지 균분주의적 "개혁" 사상에 가까웠다.
절대왕정을 부정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유재산절대와 계약자유를 원칙으로 삼는 자유시장경제, 그것을 국기로 삼는 대한민국과 전혀,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그에 반하는 성격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을 '근대'와 관련지우려는 이 정부의 또 하나의 우민화 시도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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