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31
(5) 손민석
(5) 손민석
손민석
Yesterday at 00:18 ·
본인이 마르크스나 레닌이 아닌데 그들처럼 말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한국사회 비평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건 이런 이유 때문. 풍부한 지식조차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비평태도를 버려야 한다.
손민석
30 May 2018
나는 마르크스를 매우 좋아하고 그의 역사해석이나 역사이론이 갖는 깊이와 함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의 인물평 특히 동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평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뛰어난 지성이 형편없는 인격과 편향성으로 인해 망가졌다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동시대의 정치가들에 대해 그는 철저하게 계급론적 입장에서 비난을 퍼붓는데 급급해 그 정치가들 나름의 선의나 해당 국가 및 사회에서 그네들의 정치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마르크스가 역사학자로서 능력이 부족해 그런 부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그의 저작들을 잘 살펴보면 그는 정치가들의 행위가 지니는 의미 자체는 충분히 이해하고 의미를 분석하지만 정치가들 자체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붓기 바빠 그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제3공화국을 건립한 티에르에 대한 마르크스의 평을 보면 티에르의 모든 행동은 그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는 조국의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호주머니만 챙긴 파렴치한 악한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티에르의 이런 개인적인 비리를 들춰내며 비난한 뒤에 그를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한다. 물론 이런 그의 지적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티에르는 확실히 부르주아의 입장에 서있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하였고 그의 이런 입장을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프랑스에 공화국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공화국과 혁명이 결부되어 있던 기존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사적 소유권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주장함과 동시에 혁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공화국과 혁명간의 관계고리를 끊었다. 그가 세우고자 했던 정치체제는 부르주아적 공화국이었으며 그 공화국에 프롤레타리아트나 사회주의자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이 부분은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충분히 납득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나 티에르도 그 나름대로의 열정과 조국에 대한 헌신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본디 왕당파였으나 나폴레옹3세 치하의 프랑스가 내전 직전의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심지어 생각지도 않게 후진국이라 치부한 독일제국에게 패배하는 상황까지 겪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독일제국과 같은 후진국에게 패배한 이유를 사회분열 및 약화에서 찾았으며 파리코뮌에서 볼 수 있듯이 내전의 전면화 가능성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왕당파가 집권해 왕조로 회귀한다면 내전은 피할 수 없으며, 내전으로 조국이 쪼개지면 다시 독일제국 등의 외부세력에게 침략을 받을 수 있다는 다급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서둘러 파리코뮌을 제압하고 공화국을 안착시켜 내전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아직도 왕정복고를 노리는 왕당파를 정치적으로 거세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왕당파임에도 공화주의자들과 손을 잡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공화파였던 감벳타에게 정권을 넘겨준다. 의회의 80% 이상이 왕당파였으며 지주들로 구성되어 마르크스에게 “촌놈들의 의회”라고 조롱받았던 보르도 의회를 공화국을 지지하는 의회로 바꾸는 데 티에르는 분명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비스마르크스의 강경하고도 오만한 태도에 조국인 프랑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며 눈물 흘릴 정도의 애국심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독일제국에 비굴하게 굽신거려 얻어낸 군대로 노동자들을 살해하기 위해서이기는 했지만.
계급적인 입장에서 충분히 비난이 가능하지만 어찌됐든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정당하게 인식하고 있었듯이 프랑스 사회는 1871년 파리코뮌을 기점으로 더 이상 기존의 혁명방식이 통용되기 어렵게 된다. 이제 혁명의 모델은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의 사회민주당으로 바뀌었으며,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투쟁방식을 이용해야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모델이 파리코뮌이라 열렬하게 찬양하기는 했으나 파리코뮌과 같은 방식의 혁명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국가의 방위력이 너무 강해져 일반 시민들의 바리케이트로는 도무지 정부군을 상대할 수가 없으며, 프랑스의 경우 그나마 인민과 연결되어 무기를 소유하고 있던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더 이상 인민들이 폭력을 사용하기 쉽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민과 폭력이 연결되어 있었던 기존의 프랑스식 혁명은 이제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네들이 보기에도 프랑스의 역사는 1871년을 기점으로 분기하게 되며, 그 분기점을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티에르였다. 이 역사적 분기는 국내에서 내전을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정착시켜 각각 지주와 금융을 대표하여 왕조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부르주아지들간의 다툼 또한 종식시키고 새로 나타난 소상공인 계층과 농민들을 국가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티에르 - 감벳타의 공화주의 기획이 성공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티에르와 감벳타를 그저 자신들의 호주머니나 챙기는 파렴치한들로만 묘사하면 온당한 평가라 할 수 있을까. 굉장히 가볍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 항상 아쉽다. 영국의 수상과 외무상이었던 글래드스턴과 파머스턴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난 및 인식도 그런 지점에서 동일하게 아쉬움을 자아낸다. 글래드스턴은 분명 여성의 피임조차도 신에 대한 모욕이라 여길 정도로 신실한 신자였고 개인적으로도 강한 보수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으나 어찌됐든 아일랜드의 자치화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 확신했으며 도덕에 기반해 영국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기에 자유당을 이끌며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자유주의적 정치를 행한 정치가였는데 그저 부르주아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버린다. 그러면 글래드스턴이라는 정치가가 영국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가 무엇이 되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런 식의 계급론적 해석은 해당 사회의 특수성을 무시하여 본인들이야 뛰어난 역사가적 능력으로 어느정도 해석의 빈곤함을 채웠을지 모르지만, 후대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빈곤함을 정당화해주는 기제로 작용한 것 같아 매우 아쉽다.
해당 정치인과 그 정치인의 역사적 행위가 해당 사회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또는 그 당해 사회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특수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혁명이든 정치적 변혁이든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론적 해석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게 되거나 음모론적이게 된다. 사실 이건 둘 다 같은 의미이다. 추상적으로 된 계급론적 해석은 음모론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것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치환해 해석하여 공적인 영역이 사라져버린 천박한 사회의 성립에 어느정도 기여했다며 비판적으로 보는 김우창의 주장도 가끔은 곱씹게 된다. 이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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