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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의 퍼스펙티브] 개별 관광 추진은 대북 정책을 수렁에 빠뜨릴 뿐이다
신문A24면 1단 기사입력 2020.02.27.
개별 관광 시도는 큰길 막혔다고 샛길 찾는 꼴
미국을 우회하는 비핵 평화는 득보다 실이 커
대북 제재 ‘정신’ 아닌 결의문 ‘자구’를 따지면
한·미 갈등만 깊어지고 비핵도 평화도 멀어져
대북 정책의 큰길과 샛길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개별 관광이 한·미 갈등을 깊게 하고 한반도 평화도 멀어지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해 6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기념 촬영하는 중국 관광객들. [연합뉴스]대선 일정에 들어간 트럼프의 입에서 북한이 사라지고 있다. 북한은 그렇게도 원하는 제재 해제를 들어주지 않자 ‘새로운 길’로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우리 정부는 남·북 관계의 숨통을 위해 대북 개별 관광이라도 열어보자고 한다. 큰 길이 막혔으니 샛길이라도 찾자는 것이다.
사정이 이처럼 궁색하게 된 데는 두 개의 뿌리 깊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북한 정권의 생존 본능이다. 정권과 체제의 안전이 철저히 보장될 때까지는 핵 능력의 핵심 부분을 끝까지 품에 감추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화당·민주당을 초월한 미국의 대북 여론이다. 핵 포기 행동 전에는 제재 해제 같은 보상을 먼저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둘은 비껴가기 어렵다.
북·미 대립으로 남·북 관계가 막힐 때 샛길로 눈을 돌리는 현상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2005~2007년 소위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 사건’으로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의 이행이 막혔을 때도 그랬다. 정부 일각에서는 급한 마음에서 후유증만 불러일으킬 샛길로 가려고 했다. 심각한 토론 끝에 큰길을 택했기에 협상의 문을 다시 열었다.
코로나19로 대북 관광을 당장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15년 전 일을 꺼내는 이유는 남·북 관계와 국제 정세를 보는 현 정부의 시각이 그때의 그림자와 겹쳐서다. 정부는 지금 여러모로 마음이 바쁠 것이다. 북핵 능력은 진화하고 있고, 평화는 모래성처럼 허술하다. 그렇다고 유엔 안보리 제재를 피해 개별 관광 같은 샛길로 들어서면 대북 정책이 수렁에 빠질 위험이 더 커진다.
첫째, 한반도 비핵 평화는 미국을 우회해서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런 시도는 득보다 실이 크다. 개별 관광이 유엔 제재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이다. 서울과 워싱턴이 안보리 제재의 ‘정신’이 아니라 결의문의 ‘자구’를 따지기 시작하면 비핵도,평화도 멀어진다. 북한 입장에선 한·미 갈등의 반사이익을 기대할 것이다.
샛길 유혹 피해 통일 이룬 독일
둘째, 북한은 한반도 문제를 북·미 구도로 해결해야 한다는 억지로 일관해 왔다. 유엔 제재로 개성공단과 금강산은 열지 못하니 개별 관광이라도 열어보자고 할 경우, 돈이 급해 별수 없이 미국에 굴복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게다가 샛길 손님은 김정은이 심혈을 기울이는 관광 프로젝트들을 하찮게 보이게 할 것이다. 북한이 극도로 거부하는 이미지들이다. 개별 관광 시도는 기껏해야 “평양이 계속 밀면 서울이 뭔가를 만들어 온다”는 잘못된 인식만 굳힐 것이다.
우리 정부의 개별 관광 제안에 대해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미국과 협의가 필요하다”고 하자 조선 총독같이 행세하려 든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통일부는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고 했다. 해리스 대사는 “한·미가 비핵화와 남·북 관계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통일부도 ‘주권’ 운운할 건 아니었다.
이런 불편한 논쟁의 배경에는 북한의 대미 집착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은 물론 남한의 상당한 사람들이 주창해온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제대로 살린다면 미국이 주권 문제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남·북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서울과 평양이 비핵화의 구체 방안을 합의해서 미국을 설득한다면 사정을 바꿀 수도 있다. 특히 한국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방안이면 미국도 수용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과만 협상하겠다고 하니 미국은 북한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다. 핵을 막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돈도 막으려니 남·북 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북한은 ‘조선반도의 주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직접 미국과 해결해야 한다는 모순에서 벗어 나본 적이 없다. ‘우리 민족끼리’는 선전구호일 뿐이다.
대북 정책 큰길은 탈정치에서 시작
큰길은 늘 어렵다. 그렇다고 샛길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독일 통일 1년 전인 1989년 6월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서독의 수도 본을 방문했다. 콜 총리는 라인강을 가리키면서 “이 강물을 막으려 해도 결국은 둑이 넘쳐서 바다로 갈 것이다”며 통일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서독의 역대 정권은 샛길의 유혹을 피해 어떤 둑도 넘칠 만큼 강물을 불려 통일의 기회를 잡았다.
지금 한반도와 주변 지형은 30년 전 독일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는 크게 다르다. 통일은 커녕 평화 공존마저 허용치 않는 각박한 환경이다. 그런데도 정권들은 단기간의 업적 과시에 매몰된다. 정권마다 등장하는 대북정책은 마치 신도시 개발 현장에 나부끼는 부동산 깃발 같다. 강물을 불리기보다는 그때그때 퍼다 쓰기에 급급했다.
북한은 2018년부터 핵을 정치적으로 본격 사용 중이다. ‘사실상의 핵 국가 지위’를 배경으로 상대의 행태를 바꾸려는 것이다. 한국이 그 최전선에 있다. 북의 ‘새로운 길’이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큰길을 가야 한다. 북한과 미국 모두를 상대로 정면 협상하고, 그래도 안 될 경우의 대책을 강구해 두는 것이다.
대북 정책의 큰길은 탈 국내 정치에서 시작된다. 코로나19 대책이나 남·북 관계나 ‘국내 정치 바이러스’부터 떨쳐내야 길이 열린다. 과거의 기록들을 직시하면서 정권을 넘어 지속가능한 정책을 펴기 바란다.
샛길로 빠질 뻔했던 BDA 사태의 교훈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 본사. [중앙포토]2005년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그런데 다음날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을 돈세탁 우려 은행으로 지정했다. 북한이 달러 위조와 마약 밀매 등으로 조성한 불법 자금을 이 은행에서 세탁했다고 판단했다. 북한 자금이 동결됐다. 북한은 돈을 평양으로 송금해줘야 비핵화 이행 협상에 나설 수 있다고 버텼다.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관계가 진전될 것이라는 기대에 먹구름이 끼었다.
남·북·미·중 사이의 긴 협상 끝에 2007년 초 마카오 금융당국이 일단 돈(2500만 달러)은 풀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행동에 합의해야 불법 자금 딱지를 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어느 나라도 자국 금융망의 오염을 우려해 북한 돈은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해에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던 한국은 마음이 급했다. 정부 내에는 시간이 없으니 샛길이라도 찾아보자는 주장과, 힘들더라도 북한에는 비핵화 행동을, 미국에는 제재 해제를 다그쳐 정상적 경로로 가자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전자는 개성공단에 개설된 한국 금융기관을 통해 북한으로 송금하자고 나왔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핵심 요구는 돈이 미국 중앙은행을 통과함으로써 국제금융망에 다시 진입하는 것이었다. 설사 개성공단의 은행을 통해 우회 송금하더라도 북한의 국제금융이 정상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부 토론 끝에 이 방안은 중단됐다. 만약 실제 시도됐다면 한국의 은행만 불법 자금에 오염되고 사태는 더 엉켰을 것이다.
사건 발생 21개월만인 2007년 6월 영변 핵 시설의 가동 중지와 검증이 시작되고 북한의 돈도 미국 연방준비은행과 러시아 중앙은행을 거쳐 북한으로 송금됐다. 그해 10월 남북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도 열렸다. 샛길이 아닌 큰길을 택한 결과였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비핵화보다는 남·북 관계와 국내 정치에 무게가 쏠린 것은 유감이었다. 다음 정권에서 정상회담 합의의 이행을 좌절시키는 구실이 됐기 때문이다.
송Publish Post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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