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지어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것들
박강수 승인 2021.06.30
계간지 리뷰_『역사비평』(135호, 2021.여름)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부정하고 학문의 이름으로 역습을 감행했던 하버드대 교수 존 마크 램지어의 이름이 포털을 온통 뒤덮던 시절로부터 세 달이 넘게 지났다. 논문이 아직 철회되지 않았고 학술지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으니 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중간 정리와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역사비평』은 여름호 기획의 두 꼭지를 ‘램지어 사태’에 할애했다.
첫 번째 글 「’램지어 사태’-일본군’위안부’ 부정론의 추가사례」에서 김창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은 램지어의 역습이 “학문적으로는 한 달여 만에 진압되었다”고 썼다. 이 신속한 판정승은 기본적으로 램지어 논문이 최소한의 학문적 자격조차 갖추지 못하고 링에 오른 탓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역사부정론을 상대해 온 시민사회와 학계의 글로벌 인프라를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난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전 세계 학자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기획의 두 번째 글 「미국 시민사회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인식과 램지어 논문을 둘러싼 논란」에서 김지민(미국 캘리포니아 인권단체 CARE)은 설명한다. 이견이나 비판적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군이 직접 설치·관리·운영한 전시 위안소에서 여성의 보편인권을 유린하는 잔혹하고 조직적인 성 착취가 자행됐다는 사실에 학자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들의 ‘합의’는 유엔 국제법률가위원회(1994)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1994), 인권위원회(1996), 인권소위원회(1998), 고문방지위원회(2007), 국제노동기구 전문가위원회(1996)를 통해 수차례 확인 받아왔으며 국제기구의 판단 이전에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1993)를 통해 공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위안부’ 시민운동이 일군 평화 네트워크
국제적인 공감과 합의의 기반을 떠 받치는 또 다른 축은 당사자들을 비롯한 현장 활동가들이다. 김지민은 “’위안부’ 문제가 시대를 초월한 사안임을 알아본 미국 여성 운동계, 80~90년대 미국 내부에서 성장한 아시아계 커뮤니티의 풀뿌리 조직,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단한 증언 운동을 벌인 생존자 할머니들”을 미국에서 ‘위안부’ 역사를 널리 알린 동력으로 꼽는다. 이들은 반전·평화·인권 운동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멀게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부터 가까이는 미투 운동까지 유연하게 연대하며 미국 시민사회에 ‘위안부’를 흡수시켰다. 2011년 천 번째 수요시위를 기념한 뉴욕행사에서 마주한 홀로코스트와 ‘위안부’ 생존자들,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시에서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적극 지지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그 대표적 풍경들이다.
‘램지어 사태’는 이 네트워크를 작동시켜 그 위력을 다같이 확인한 사건이기도 하다. 김창록은 “2020년 9월 독일 베를린시에 세운 ‘소녀상’에 대한 일본의 범국가적 공격이 오히려 영구 설치라는 결과를 낳은 것처럼, 램지어 논문은 일본군’위안부’ 부정론의 실체를 전 세계의 보다 많은 연구자와 시민에게 확인시켜주었다”고 평했다. 더 나아가 김지민은 “미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예상보다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역설적이게도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부정 운동이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예컨대 2007년 미국 연방 하원에 ‘위안부’결의안이 제출되자 일본 의원들은 <워싱턴포스트>에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은 광고를 냈다. 일본의 개입은 오히려 미 하원을 자극해 ‘위안부’결의안의 만장일치 채택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승부를 본다, 극우의 전략
두 필자의 평가는 일본 역사부정 세력의 중요한 동선 하나를 아울러 일러준다. 이른바 ‘역사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일본이 낙점한 ‘주전장(主戰場)’이 한국도, 일본도 아닌 미국(과 국제사회)이라는 점이다. 일본에서 과거사의 오명으로부터 국가를 구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들이 규합해 ‘일본회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같은 극우 단체로 세력화한 것은 9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들은 아베 신조 내각의 출범과 함께 일본 정치의 메인스트림에 진입했고, ‘위안부’와 관련해 내부적으로는 ‘고노 담화’ 지우기,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전쟁터로 삼은 역사 외교전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김지민은 “미국 대중이 ‘위안부’를 여성에 대한 폭력, 인권 문제로 이해하는 데 반해 극우 세력은 극히 국가주의적 목표와 방식을 펼치고 있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2014년 방한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김일출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재임시절 내놓은 '무라야마 담화'는 '고노 담화'와 더불어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의 대표적인 책임 및 사죄 표명이다. 사진=연합
다만 그 실체적 효과와 별개로 역사부정론자들이 일본 정치의 중심부에 결집해 또 다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스럽다. 미국을 ‘주전장’으로 삼겠다는 선언은 뒤집어 말하면 일본 내부는 이미 전열 정비가 마무리됐다는 뜻이다. 얼마 전 스가 내각은 ‘종군 위안부’라는 말이 국가가 관여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면서 그냥 ‘위안부’로 공식 용어를 바꿨다.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12종 중 ‘위안부’의 강제성을 설명한 판본은 하나뿐이다. 램지어를 질타하는 가장 치명적인 논박 일부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일본 언론들은 ‘램지어 사태’에 대체로 침묵했다. 이 징후들은 일정한 방향성 위에 있어 보인다. 김창록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일본 정부가 전면에 나선 일본군’위안부’ 지우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갔고, 그 결과 일본은 한국 및 국제사회와 더 멀어졌다. 일본은 진정 ‘아집과 확증편향의 섬’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박강수 기자 pps@kyosu.net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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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교수 사태 관련 발언들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로스쿨)가 쓴 한 편의 논문이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단순히 논문게재냐 철회냐를 떠나 학술지 시스템, 연구윤리, 인종주의, 지식생태계 등 다방면에서 논란이 진행 중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과학적 논문을 지향하는 학술지가 논문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교수신문>은 학술적 관점에서 '램지어 사태'를 살펴봤다.
램지어 교수의 강연 모습. 하버드대 로스쿨 유튜브 강연 캡처
※ 인물 사진은 각 대학교 학과 참조.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와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澤あかね) 일본 릿쿄대 교수는 연합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지난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전 세계 학자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기획의 두 번째 글 「미국 시민사회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인식과 램지어 논문을 둘러싼 논란」에서 김지민(미국 캘리포니아 인권단체 CARE)은 설명한다. 이견이나 비판적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군이 직접 설치·관리·운영한 전시 위안소에서 여성의 보편인권을 유린하는 잔혹하고 조직적인 성 착취가 자행됐다는 사실에 학자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들의 ‘합의’는 유엔 국제법률가위원회(1994)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1994), 인권위원회(1996), 인권소위원회(1998), 고문방지위원회(2007), 국제노동기구 전문가위원회(1996)를 통해 수차례 확인 받아왔으며 국제기구의 판단 이전에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1993)를 통해 공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위안부’ 시민운동이 일군 평화 네트워크
국제적인 공감과 합의의 기반을 떠 받치는 또 다른 축은 당사자들을 비롯한 현장 활동가들이다. 김지민은 “’위안부’ 문제가 시대를 초월한 사안임을 알아본 미국 여성 운동계, 80~90년대 미국 내부에서 성장한 아시아계 커뮤니티의 풀뿌리 조직,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단한 증언 운동을 벌인 생존자 할머니들”을 미국에서 ‘위안부’ 역사를 널리 알린 동력으로 꼽는다. 이들은 반전·평화·인권 운동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멀게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부터 가까이는 미투 운동까지 유연하게 연대하며 미국 시민사회에 ‘위안부’를 흡수시켰다. 2011년 천 번째 수요시위를 기념한 뉴욕행사에서 마주한 홀로코스트와 ‘위안부’ 생존자들,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시에서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적극 지지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그 대표적 풍경들이다.
‘램지어 사태’는 이 네트워크를 작동시켜 그 위력을 다같이 확인한 사건이기도 하다. 김창록은 “2020년 9월 독일 베를린시에 세운 ‘소녀상’에 대한 일본의 범국가적 공격이 오히려 영구 설치라는 결과를 낳은 것처럼, 램지어 논문은 일본군’위안부’ 부정론의 실체를 전 세계의 보다 많은 연구자와 시민에게 확인시켜주었다”고 평했다. 더 나아가 김지민은 “미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예상보다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역설적이게도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부정 운동이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예컨대 2007년 미국 연방 하원에 ‘위안부’결의안이 제출되자 일본 의원들은 <워싱턴포스트>에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은 광고를 냈다. 일본의 개입은 오히려 미 하원을 자극해 ‘위안부’결의안의 만장일치 채택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승부를 본다, 극우의 전략
두 필자의 평가는 일본 역사부정 세력의 중요한 동선 하나를 아울러 일러준다. 이른바 ‘역사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일본이 낙점한 ‘주전장(主戰場)’이 한국도, 일본도 아닌 미국(과 국제사회)이라는 점이다. 일본에서 과거사의 오명으로부터 국가를 구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들이 규합해 ‘일본회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같은 극우 단체로 세력화한 것은 9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들은 아베 신조 내각의 출범과 함께 일본 정치의 메인스트림에 진입했고, ‘위안부’와 관련해 내부적으로는 ‘고노 담화’ 지우기,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전쟁터로 삼은 역사 외교전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김지민은 “미국 대중이 ‘위안부’를 여성에 대한 폭력, 인권 문제로 이해하는 데 반해 극우 세력은 극히 국가주의적 목표와 방식을 펼치고 있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2014년 방한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김일출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재임시절 내놓은 '무라야마 담화'는 '고노 담화'와 더불어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의 대표적인 책임 및 사죄 표명이다. 사진=연합
다만 그 실체적 효과와 별개로 역사부정론자들이 일본 정치의 중심부에 결집해 또 다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스럽다. 미국을 ‘주전장’으로 삼겠다는 선언은 뒤집어 말하면 일본 내부는 이미 전열 정비가 마무리됐다는 뜻이다. 얼마 전 스가 내각은 ‘종군 위안부’라는 말이 국가가 관여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면서 그냥 ‘위안부’로 공식 용어를 바꿨다.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12종 중 ‘위안부’의 강제성을 설명한 판본은 하나뿐이다. 램지어를 질타하는 가장 치명적인 논박 일부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일본 언론들은 ‘램지어 사태’에 대체로 침묵했다. 이 징후들은 일정한 방향성 위에 있어 보인다. 김창록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일본 정부가 전면에 나선 일본군’위안부’ 지우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갔고, 그 결과 일본은 한국 및 국제사회와 더 멀어졌다. 일본은 진정 ‘아집과 확증편향의 섬’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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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로스쿨)가 쓴 한 편의 논문이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단순히 논문게재냐 철회냐를 떠나 학술지 시스템, 연구윤리, 인종주의, 지식생태계 등 다방면에서 논란이 진행 중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과학적 논문을 지향하는 학술지가 논문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교수신문>은 학술적 관점에서 '램지어 사태'를 살펴봤다.
램지어 교수의 강연 모습. 하버드대 로스쿨 유튜브 강연 캡처
※ 인물 사진은 각 대학교 학과 참조.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와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澤あかね) 일본 릿쿄대 교수는 연합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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