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3
[김조년] 언제까지 ‘고난의 역사’는 지속돼야 하는가?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언제까지 ‘고난의 역사’는 지속돼야 하는가?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언제까지 ‘고난의 역사’는 지속돼야 하는가?
금강일보 기자
승인 2019.03.11 18:08
한남대 명예교수
1928년 스물일곱 살의 청년 함석헌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하였다. 조국의 역사를 참 역사로 가르치기 위하여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연구할수록 ‘왜 내가 역사교사가 되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리 파고 찾아도 일본제국주의의 강제통치 아래에서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거리가 없었다.
점점 더 국어는 일본어를 말하고 국사라면 일본역사를 뜻하는 기운이 짙어갈 때 우리 말로 우리 역사를 말한다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부끄럽게만 보이는 우리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위대한 역사로 가르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지금 현실이 어렵고 구차하다고 할지라도 희망스러운 앞날을 꿈꿀 무언가를 주고, 힘있게 자기 삶을 꾸미려는 기운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당당하게 출발’한 나라의 기운이 한없이 졸아들다가 급기야는 국권을 빼앗기고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를 어떻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힘을 가지고 누르는 일본 세력이 곧 우리의 조국이라 가르치라는 강요를 따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국권을 잃은 것도 사실이고, 어렵게 고통을 받는 것도 사실이면서, 그러한 굴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 역시 사실이 돼야 할 희망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하고 의미를 넣을 것인가를 고심하여 나온 결론이 ‘우리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죽어라고 ‘고난’만을 뜻없이 무릎꿇고 살다가 가라는 그런 역사란 말인가? 여기에서 그는 한 단계 비약하는 일종의 계시와 같은 생각에 이른다. 예수의 수난과 우리 역사의 고난이 겹쳐서 바라보였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예수의 수난과 중첩되는 조국의 수난이 겹쳐서 등장한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고난은 곧 인류구원을 위한 필연의 길로 해석하고 믿는다. 바로 이것처럼 우리의 고난의 역사는 곧 세계를 구원하는 비약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 때부터 함석헌은 우리의 역사를 뜻으로 보기 시작한다. 사건들의 사실 기록의 역사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주는 의미를 찾는 역사연구를 시작한다. 그래서 민망하고 슬픈 맘으로 우리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왜 고난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이었을까? ‘자기 자신을 잃은 것’에서 왔다는 것이다. 제맘, 제정신, 제몸을 가지지 못하고 남의 것들을 마치 자기 것처럼 여겨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나 나라는 제자신이 될 때 제구실을 한다. 사람이나 나라나 사회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다. 바다가 낮은 곳에 있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데 신비한 자기 자신의 역동에 의하여 삭히고 맑히듯이, 사람과 나라와 사회도 사실은 온갖 것을 다 받아 자기 것으로 삭히고 녹여 제삶의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 일종의 살아 있는 정신작용이다. “정신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독특으로 하는 것이다.” 아무리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사람이요 사회요 나라라고 하지만, 스스로 독특한 자기 자신을 세울 때 그 관계는 정상관계가 된다.
그런데 나라가 망할 때도 스스로 나라를 버린 것이 아니었듯이, 우리의 해방 역시 아직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의 전쟁의 결과로 찾아왔다. 제힘으로 찾지 못한 나라의 ‘해방과 독립’은 스스로 제나라를 만들지 못하고 갈라지고 말았다. 물론 갈라질 때도 남의 세력이 강력하였고, 그것에 내부의 욕심 사나운 것들이 동조하여 이루어졌다. 전쟁도 그렇게 하였고, 나라 안의 이념갈등도 그렇게 일어났다. 외세와 이념이라는 허깨비들에 의하여 우리는 그냥 놀아난 것이다.
동구권의 변화로 이차대전 이후에 세계를 지배하였던 냉전은 사라졌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내면의 냉전이 아주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제정신 차리지 못하고 허깨비장난에 놀아나고 있단 말이다. 남북문제를 풀고, 북미문제를 부드럽게 하여 보려는 노력은 일종의 자기 세움의 한 작업이라고 나는 본다. 이것들은 남이 해 주는 떡을 받아먹는 식으로는 해결될 가능성이 없다. 설령 그렇게 하여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노예의 삶, 자기 삶이 아닌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삶을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북미문제나 남북문제는 이제는 우리 자신을 세우는 차원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우리들의 힘으로 하려는 노력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고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고 본다.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이 많이 꼬여서 더 복잡한 국면으로 가는 것이지만, 70여 년 적대관계에 있던 것이 한두 번 만남으로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것은 너무 소박한 소망이었다. 이제는 되지 않을 일을 해결한다는 맘으로 우리 정부나 정치권이나 일반 시민들은 새로운 각오로 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핵문제나 남북문제, 북미문제 따위가 북한을 향한 미국과 유엔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있지만, 그것들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한 가지 임시조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벌이는 영구평화의 기운으로 깨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제재의 틀을 깨는 파격이 나와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너무 조심스럽게만 가지 말고, 좀 더 과감한 평화창출의 발걸음을 걷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이념논자들이나 억지를 부리는 야당들은 제정신을 찾을 필요가 있다. ‘고난의 역사’는 제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인류사회의 사명을 이루려는 노력이 없이는 그 극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힘의 논리에 따른 낡은 국제관계가 아니라,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만드는 새로운 사명을 완수한다는 차원으로, 그렇게 하여 ‘고난의 역사’를 스스로 극복한다는 차원으로 힘있게 나갈 때 일은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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