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이 조선왕조를 비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마르크스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인이야 이걸 알고 있으니 자기 세대의 학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마르크스주의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개탄하는 것이겠지만. 이영훈은 굉장히 충실하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테제를 따르고 있으며 그 자장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는 그가 지향하는 “자유로운 개인이 협력하는 신뢰가 넘치는 공동체”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공산주의적 이상향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와 겹친다. 나는 사람들이나 자타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의 연구인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에 보다 더 주목해야 한다고 예전부터 주장해왔다. 적어도 넘고 가야 한다.
이영훈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고 전근대 사회에서의 토지소유는 정치와 경제가 통합된 형태, 즉 정치적 지배가 토지지배를 통해 관철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마르크스의 문헌을 연구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지는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선왕조 이해가 지니고 있는 이론적 난점도 이 때문에 생겨난다. 아무튼 그가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견해는 국가적 토지소유(=정치적 지배)와 사회 내에서의 사적 토지소유(=경제적 지배)가 서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에서는 자본주의 맹아론 같이 경제적•사회적 계급(=지주)에 의한 생산자의 지배가 주요한 연구주제로 이해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의 주류에게 조선왕조(와 전근대 한국사회)는 서구와 같은 “계급사회”로 이해된다. 그렇기에 서구사회와 동일하게 자본주의 맹아가 형성되고 근대로의 지향성을 갖고 있다고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은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지배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테제에서 보이듯이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것이고, 유럽에서도 영주에 의한 토지지배가 농노에 대한 인신적 지배와 함께 나타났는데 한국에서는 유럽에서의 영주와 같은 특권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애당초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를 동등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는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전근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적 지배가 우선적이었으며 그에 따라 한국 사회를 사적 토지소유가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김용섭, 허종호 등의 역사학자들의 인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나 송 이후의 중국사회에 유럽의 봉건영주나 일본의 사무라이 같은 특권적 토지소유자 집단이 존재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영훈은 국가, 국가에 의한 토지소유와 그에 따른, 신분제로 대표되는 인간지배를 국가적 토지소유의 차원에서 영주적 토지소유와 대비해 이해한다. 이후의 그의 노비 연구, 궁방전 연구 등은 모두 유럽의 영주에 의한 농노에 대한 인신적 지배에 대비되는 한국사에서의 인신적 지배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토지소유에서 인간지배적 특질을 벗어나지 못한 조선왕조와 그 유제를 이어받은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납득가능한 비판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미야지마 히로시의 소농사회론을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야지마의 소농사회론은 한국사의 주류 연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사 연구의 주류는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소농사회론으로 이행했으며, 이들의 문제의식에서는 조선왕조의 토지지배가 내포하고 있던 인간지배적 특질, 즉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지배가 분리되지 않아 인간에 대한 지배가 여전히 이뤄지고 있는 “신분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조선왕조를 동시대의 일본이나 중국 사회에 견주는 식으로 옹호하는 민족주의에 포섭되어 있다는 게 이영훈의 한국사 연구의 주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표현은 과하지만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미야지마 히로시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그렇다. 미야지마의 조선토지조사사업 연구에 따르면 그는 조선왕조의 토지소유가 인간지배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영훈이 국가적 토지소유에 민전民田과 국가 간의 관계를 넣었던데 반해 미야지마는 그 부분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주류 연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마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그는 소농사회론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야지마는 이영훈이 국가적 토지소유라 인식하고 있던 것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또한 궁방전 등의 존재양태를 문제시하며, 그것이 수조권적 지배의 잔재라 인식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에 있어서의 국가적 토지소유는 수조권적 지배, 더 정확하게는 국가의 수조권의 분배가 점차로 사라지게 된다. 그 최후의 형태가 과전법이며, 그 이후에는 왕족의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궁방전 등의 형태로 잔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제국에 의해 이뤄진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완전히 일소됨으로써 한국사에서의 국가적 토지소유가 일소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영훈과 국가적 토지소유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정리해보자면 한국사 연구의 주류가 사회계급의 경제적 토지지배(정치1/경제1)로 나눠서 이해하고 있다면 이영훈은 국가적 토지지배(정치1=경제1)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해, 미야지마 히로시는 궁방 등의 토지지배(정치2=경제2) - 국가적 토지지배(정치1/경제1)이라는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미야지마는 국가적 토지지배에서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는데 반해 수조권적 지배인 궁방전 등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결합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이해의 차이일 뿐이지, 미야지마가 토지소유에 부착된 신분제 문제를 도외시한 건 아니라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영훈의 논지가 지니는 의의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론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매우 풍부하다. 그러나 그는 이론가가 아니다. 이 점 때문에 그의 연구가 지니는 난점이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적 토지소유는 궁방전 등에서 궁방 - 지주 - 농민이라는 중층적 구조를 지니며 관철된다. 그는 이 동일한 구조가 국가 - 지주 - 농민 혹은 주호 - 협호라는 관계에도 투영된다고 이해하며 양자의 구조적 동일성을 주장한다. 그 사례적 다양성과 풍부함은 높게 평가 받아야 하지만, 그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난점이 생겨난다. 그는 분명히 국가적 토지소유가 19세기에 이르러 해체되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지주적, 농민적 소유의 발전에 따라 점차로 지양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한국사의 전개를 보면 그가 국가적 토지소유와 등치시키는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분명 고려왕조, 조선 초기를 거치며 국가로 일원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서 국가적 토지소유는 농민적 토지소유와 함께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논지가 모순되게 된다. 국가적 토지소유가 해체된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강화되는 차원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국가적 토지소유를 궁방전 등과 같은 국가의 수조권적 지배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나게 되었다. 궁방전 등의 왕가에 의한 토지지배는 국가(=왕조)의 자체의 재생산의 한 양태로 바라보는 게 더 낫다. 이론적으로 보아도 그가 국가적 토지지배라고 하는 것은 국가 - 농민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관료 및 왕족 등과 농민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적 토지소유를 이론적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일단 국가 - 농민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즉 국가와 그것의 구성원의 재생산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형태의 신분제로 나타날 수 있으며, 당연하게도 국가가 자신을 재생산하는 와중에 사회적으로 자신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것이 앞선 국가 - 농민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국가적 토지소유를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군역의 부과와 같은 것은 사회 내에서의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이론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상향上向의 방법론을 이용해 더 구체적으로 아시아적 토지소유를 이론화 해야 할 필요성을 항상 느끼고 있는데, 이영훈의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전근대적 소유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론은 본디 굉장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규정을 더하며 상향의 방법을 이용해 보다 체계적으로 조선왕조의 총체성을 드러내며 비교사를 전개해 아시아적 토지소유를 이론화를 해야 한다. 이영훈의 연구는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그 단초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연구이다. 어차피 다들 관심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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