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30

"내가 장일순 평전을 쓰는 이유" 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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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6호] 무위당자취를 찾아서 "내가 장일순 평전을 쓰는 이유"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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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일순 평전을 쓰는 이유

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김삼웅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무위당 장일순 평전’의 1회차 글입니다. 2019년 2월 1일 총 69회로 완결 됐고, 향후 책으로 엮어 출판될 예정입니다.



시대구분의 편의상 해방후사를 현대사로 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현대사 70여년은 다른 나라(민족)의 700년에 달하는 격변과 격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한반도)처럼 변화와 변혁이 극심한 나라도 찾기 드물 것이다.

해방과 함께 분단과 미 군정, 단독정부 수립과 백색독재, 군부독재와 민주화, 경제발전과 사회불평등구조, 냉전ㆍ열전ㆍ신냉전ㆍ탈냉전 구도의 남북관계, 미ㆍ소에 이어 미ㆍ중의 각축지역, 환경파괴와 이상기온현상, 출산률 저하와 인구노령화 등 수직적 변혁(화)을 겪고, 수평적 관계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변화 중에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분야도 크지만, 문명사적 문화사적인 변혁도 적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세계사적 조류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유한 경우도 포함된다. 변혁의 시기에 다양한 인사ㆍ인재들이 등장하고 활동하였다.

시대정신에 따라 정도를 바르게 걷는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시대흐름에 역진하거나 반동 또는 게걸음으로 횡보하는 군상도 수없이 많았다.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인사들은 뒤처지고, 낡은 이데올로기와 독재자의 주술에 북치며 추종하는 부류가 주류가 되었다. 그런 세월이 7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어느 시대나 선각자ㆍ선지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예리한 시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비전을 제시한다. 일반 지식인들이 당대사에 그치는 반면에 이들은 짧게는 한 세대, 길게는 한 세기를 내다본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흔치 않다.

나는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폭압 시대에 비판적인 매체에서 일하며 재야ㆍ종교계 등 각계의 양심적인 인사들을 두루 만나 인터뷰하거나 원고를 청탁하였다. 모두 내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그런데 한 분을 놓쳤다. '놓쳤다'는 표현은 '나중에' 찾아뵙기로 미루다가 그 분이 뜻밖에, 너무 일찍 하세함으로써 이승에서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그 '죄책감'에서 이 평전을 쓰게 되었다고 할까.

유신‧5공시대에 민주인사들의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이 분의 함자가 거론되었다. 각종 시위의 배후인물인 것 같았고, 주모자인 듯도 하였다. 종합하면 독재세력에 쫓기는 자들의 피신처 또는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구원자 그리고 당시만 해도 생소한 생태주의자, 생명운동가였다.

선생은 엄혹한 시대를 절망하면서도 '길이 없는 길'을 찾으면서 후학들에게 이를 제시하고, 양심수들을 위로하고, 청년들에게 미래의 눈을 틔운 구도자 또는 경세가의 모습으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서기를 꺼리고, 지도자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중층적인 모순이 겹겹이 쌓인 채 독재자와 추종자들의 언설이 민중의 이성을 가리던 시절, 선생은 어디에도(무엇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시대를 내다보는 심원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민중(족)의 앞길을 제시하였다.



▲ 논길 옆 무위상 장일순 선생 묘소 ⓒ 박도

그래서 혹자는 선생을 20세기를 산 '21세기형 인물'이라 평한다. 리영희 교수가 장일순 선생의 영전에 쓴 조사의 한 대목이다.

삼가 고 일속자 장일순 선생의 영전에 바치나이다.
병든 시대가 반기기에는 선생께서는 너무나 올곧은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사악하고 추악한 것들은 목에 낀 가시처럼 선생님을 마다하고 박해하셨습니다.

그럴수록 선생님이 계신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920번지는
인권과 양심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의에 몸 바치려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니,
하나의 작은 성자였습니다. 진정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한 시대를 변혁한 그토록 큰 업적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한 알의 작은 좁쌀을 자처하며 사셨습니다.
원주시 봉산동의 한 누옥에서 오로지 먹과 벼루와 화선지를 벗 삼아,
한낱 이름없는 선비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참으로 고결한 삶이었습니다.

(<한겨레신문>, 1994년 5월 24일자)

그 자신 폭압의 시대에 '사상의 은사'로 불리며 힘겨운 삶을 사셨던 리영희 선생의 추모사라면 당사자의 위상이 어떠한 지를 짐작하게 된다.

무위당 선생께서는 도저한 언변으로 시대를 비판하고 미래상을 제시하는 많은 연설, 인터뷰를 하였지만, 한 편의 글도, 책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글의 씨'가 되는 글씨(휘호)는 (특히 양심수들의 후원금 모금용으로) 수없이 많이 썼으나 글은 쓰지 않았다.

하긴 공자ㆍ예수ㆍ석가ㆍ소크라테스 등 성인들도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사상ㆍ철학ㆍ신앙을 수천년 동안 인류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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