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9
반민특위 해체한 이승만과 친일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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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반민특위 해체한 이승만과 친일파[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38회] 반민특위활동을 제약시키려는 친일경찰의 집단사표 소동 벌여
19.03.11 16:19l최종 업데이트 19.03.11 16:19l
김삼웅(solwar)
▲ 반민특위의 재판.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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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상실한 채 오랫동안 독재와 부패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친일파들에 의한 반민특위의 해체를 꼽는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22일 국권침탈기에 일제에 협력하여 민족반역 행위를 했던 친일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공포했다. 헌법 제101조에 의거한 특별법의 제정이었다.
▲ 2.8독립선언을 주도한 김상덕 선생. 해방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다.
ⓒ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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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고, 국회는 독립운동가 출신 김상덕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데 이어 특별재판부ㆍ특별검찰부ㆍ사무국 등이 구성되고, 각 시ㆍ도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화신재벌 박흥식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는 최린ㆍ이종형ㆍ이승우ㆍ노덕술ㆍ박종양ㆍ김연수ㆍ문명기ㆍ최남선ㆍ이광수ㆍ배정자 등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 특히 친일경찰 출신의 경찰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친일경찰은 이승만에 구명을 기대하는 한편 반민특위 해체 음모를 꾸몄다.
▲ 반민특위 당시 체포됐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미군정 하에서 다시 살아나 좌익계열 인사들을 무지막하게 고문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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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자 공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친일세력은 3.1혁명의 성지 탑골공원과 반민특위본부에까지 몰려와서 특위의 해체를 주장하고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6월 2일에는 친일세력의 사주를 받은 유령단체들이 국회 앞에 몰려와 특위요원들을 온갖 욕설로 헐뜯고 체포된 반민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반민특위는 6월 3일 시위자들이 특위본부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에 경비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이를 외면하였다. 경찰의 방치 속에서 동원된 시위대는 특위본부를 포위하고 사무실까지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특위의 특경대들이 공포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그제서야 경찰이 나타났다.
특위의 특경대는 친일경찰 출신인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6·3반민특위활동 저지 시위의 주동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한 데 이어 선동자 20여 명을 연행하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였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사찰경찰의 집단사퇴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위활동을 제약시키고 이에 대항하려는 친일경찰의 조직적인 책략이었다.
서울시경 산하 전사법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해산 등을 요구하며 집단사직서를 내놓고 있을 때인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밤늦게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자신들의 음모를 전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를 얻어냈다.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터니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켜라,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라고 이승만의 사전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 반민특위 반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반대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당시 신문기사입니다.
ⓒ 주철희 역사학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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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심야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와 '윗어른'의 양해를 받은 이들은 반민특위 습격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짰다. 행동책임자는 반민특위의 관할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이 맡기로 하였다. 윤기병은 새벽 일찍 중부경찰서 뒷마당에 전서원을 비상소집하여 차출한 서원 40명을 2대의 드리쿼터에 태워 중구 남대문로의 특위본부로 출동시켰다.
윤기병이 직접 지휘한 습격대는 특위본부 뒷골목(현 한전빌딩)에 도착하여 20명은 주변경계에, 나머지 반은 정문과 비상구, 각층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오전 8시경에 출근하는 특위직원들을 모조리 붙잡아 드리쿼터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특위 검찰관 차장 노일환 의원과 검찰관 서용길 의원도 이들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다. 뒤늦게 출근하다 사태를 목격한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불법으로 헌법기관인 특위를 점거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분노를 터뜨렸으나 경찰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특위사무실의 점거사실을 전해들은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인 권승렬이 현장에 달려왔지만 오히려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고 출입조차 저지되었다.
현직 검찰총장의 휴대용 권총까지 빼앗는 경찰의 무지막지한 행동은 법질서나 위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만행이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불법행동의 이유로 댔다. 검찰총장의 상부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배경은, 이승만이 직접 김상덕이 거처하는 특위관사를 두 차례나 찾아와 악질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공권력을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이날 오후 열린 제13차 본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 의원이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이승만의 전언을 공개하였다.
특위습격사건이 이승만의 직접 명령이라는 발표에 의원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다 사건 경위보고에 나선 장경근이 "특경대는 내무부가 인정한 국가경찰관이 아닌데도 특위가 임의로 임명하여 경찰관 호칭을 사용, 신분증명서까지 소지하고 경찰관 임무를 불법적으로 행사했다"고 말하고, "내무부가 누차 그 불법성을 지적, 해산을 중용했으나 특경대의 경찰권 행사가 더욱 늘어나 부득이 강제해산시켰다"고 변명하였다.
반민특위 간부들의 일괄 사퇴서를 받은 국회는 새로운 후임 위원을 선출하여 김상덕은 조국남 · 조규갑 의원과 함께 특위위원으로 재선출되었으나 끝내 사임하였다.
▲ 반민특위 기습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 반민특위 기습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
ⓒ 정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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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에 놀란 국회는 다음날 내각 총사퇴와 압수한 반민특위의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 찬성 89, 반대 59로 통과시켜서 분노의 일단을 표시하고, 정치적인 수습 방안을 모색하였다.
협상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 · 조응선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키로 하였다. 석방된 특경대원 중 부상자 22명은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협상'으로 악질적인 친일경찰이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하여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노일환 의원 등이 체포됨으로써 특위활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곽상훈 의원에 의해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하자는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다.
반민특위 검찰관인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지지부진하니 반민법 제29조 중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자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모든 공소시효를 중단해도 좋을 만큼 업무수행을 거의 끝냈다"고 엉뚱한 이유를 댔다.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시효기간을 크게 단축시킨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은 표결에 부쳐져 74대 9로 쉽게 가결되었다.
▲ 반민특위에서는 자체 "인지"는 물론 투서를 받아 피의자 검거에 나섰다. 사진은 반민특위 전남 조사부에서 설치한 투서함. 반민특위에서는 자체 "인지"는 물론 투서를 받아 피의자 검거에 나섰다. 사진은 반민특위 전남 조사부에서 설치한 투서함.
ⓒ <격동기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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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반민특위위원장에는 법무장관 시절부터 반민법의 모순을 지적하며 반민특위활동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이인이 맡게 되었다. 이인은 특위직원을 새로 임명하고 결원된 특별검찰관 및 재판관들을 보강하여 7월부터 잔무처리에 들어갔지만 특위는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다.
새 진용의 반민특위는 반민행위자들의 자수기간을 설정하여 체면치레라도 하고자 한 것이 예상외로 13명이 자수하여 겨우 체면유지를 시켜주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본래의 취지와 정신이 상실된 채 잔무처리나 하다가 시효만료로 문을 닫았다. 이로써 민족정기는 굴절되었으며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친일반민족 세력이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민특위는 해방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기대를 모으며 1949년 1월 8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6.6사태 전날까지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승만과 이에 기생하는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도발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두 차례의 조작된 두 차례의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의 상징 김구 암살사건 등 정치적 외압과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친일세력의 반격과 음해를 견디지 못하고, 공소시효 기간이 단축되는 등 반신불수의 상태를 겪은 끝에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좌초되었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곧 민족양심과 사회정의, 나아가서는 민족정기의 패배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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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민특위, #이승만, #반민특위해체, #친일파, #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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