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1)가난·모친의 멸시 극복한 작가…“문학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 경향신문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1)가난·모친의 멸시 극복한 작가…“문학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설과 영화, 연극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영화 <연인>과 뒤라스가 시나리오를 쓴 <히로시마 내 사랑>의 한 장면(왼쪽 사진부터).
네이버 영화 제공
장영은2019.03.19 21:21 입력
마르그리트 뒤라스
글 쓰는 여성은 강하다.
오랜 성차별과 억압, 가난 등을 딛고
자신의 인생을 용기있게 열어간 많은 여성들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기 삶을 꺼내어 예술로 승화하고
시대의 온갖 부당함을 끊임없이 고발하며
사회변혁을 이끌기도 했다.
이들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삶과 글을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에 담아
격주로 연재한다.
“나는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의 영화 판권으로 이 집을 샀다. 내 소유, 내 이름으로 된 집이다. 이 집을 사고 나서 미친 듯이 글을 썼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 같았다. 집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이 집은 나를 유년기의 아픔들로부터 달래 주었다.”
글을 써서 집을 사고, 그 집에서 다시 ‘미친 듯이’ 글을 쓴 이 여자,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부럽다. 게다가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는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 아닌가?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완성하고, 그 작품으로 집을 사서 글쓰기에 몰두했다니 나는 그녀가 그저 존경스럽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대체로 멋진 일들은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작가라는 직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글을 쓰다 굶어죽을 뻔했던 여자 혹은 굶어죽은 여자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 때문일까? 나는 글을 써서 생활의 기반을 닦은 여성들을 언제나 칭송해왔다. 그 기원을 누구로 둘까?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 가난한 여자에게 글쓰기는 “허세”
박경리 선생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뒤라스가 태어난 해로도 등단한 시기로도 살짝 선배인 듯하다. 소설 <연인>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기도 한 뒤라스는 1914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수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1918년 풍토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뒤라스 가족에게 가난과 슬픔은 일과가 되었다. 불행하다고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뒤라스의 어머니는 살아갈 방도를 나름대로 찾아보려 애썼다. 교사 월급으로 삼남매를 키우기 빠듯해지자 뒤라스의 어머니는 엉뚱한 사업에 투자했고 이내 파산했다.
그 엉뚱한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에 고스란히 나온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장이 된 뒤라스의 어머니는 피아노 개인지도, 무성영화관의 피아노 반주 등 온갖 일을 억척같이 해내면서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토지를 불하받는다. 하지만 조수가 밀려오면 모든 경작물이 다 휩쓸려 가는 땅이었다. 경작 가능한 땅을 받기 위해서는 땅 가격의 두 배 이상을 담당 관리자에게 뇌물로 바쳐야 하는 현실을 어머니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가산을 던졌다.
식민지 베트남서 태어난 프랑스인
유년기, 부친 사망·모친 파산 겪어
뒤라스의 어머니에게도 젊은 시절 꿈이 있었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공부를 아주 잘했던 그는 프랑스 북부의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면사무소 앞을 지나가다가 “젊은이들이여, 식민지로 오십시오. 행운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적힌 광고 포스터를 보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었던 청년과 결혼했고, 부부는 식민지의 교사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행운은 연이어 이들을 비켜갔다. 남편은 갑작스럽게 죽고, 전 재산을 부은 땅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파산 이후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욱 집착하고 딸을 학대했다. 자녀들 가운데 유일하게 똑똑한 딸이 하루빨리 직업을 가지길 원했다. 딸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가 나타나면 그 남자의 재력부터 점검했다. 딸은 어디에서든 주목을 받았다. 뒤라스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식민지의 백인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열두 살짜리 백인 소녀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수시로 전염병이 돌아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나가곤 했다. 뒤라스는 질병과 죽음, 가난과 고독에 몸서리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 공포는 잠시 사라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하며 뒤라스는 글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뒤라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딸이 꿈꾸는 삶을 끝까지 모른 척했다. 심지어 드러내놓고 멸시하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물었다. 뭘 쓰겠다는 거니? 나는 책들, 소설들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학 교사 자격증부터 따고 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난 그따위 일에는 관심 없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허세에 불과해.”
어머니의 말을 따르자면, 가난한 여성에게 글쓰기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허세에 불과한” 글쓰기라는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자들이었다. 명민한 뒤라스는 거꾸로 생각했다. 부자들만 글을 쓸 수 있다면 반대로 글을 써서 부자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 뒤라스는 좋은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작가가 되어 어머니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리라고 결심했다. 어머니에게도 분명 피에르 로티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청춘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재능 있는 딸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자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질투가 뒤엉켰다. 만약 저토록 뛰어난 딸이 작가로 성공하면 우리를 떠나지 않을까? 딸이 적당하게 자리를 잡아 자기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질투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만약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멋지게 사는 딸을 보게 되면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뒤라스가 좀 더 용감했다.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았지만, 뒤라스는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한 마르그리트 뒤라스.
■ <철면피들> 쓰며 뒤라스로 재탄생
딸 향한 어머니의 외면·질투 극심
그럼에도 ‘걷고 싶은 길’ 개척 나서
소설 ‘연인’ 공쿠르상 수상 등 성공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뒤라스의 삶이 늦어 버린 이유는 나이 많은 중국 부호가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구애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방탕하고 무능한 큰오빠가 수시로 뒤라스를 때리고 파산한 어머니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 딸에게 있는 듯 행동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뒤라스는 생물학적 나이를 완전히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는 글을 쓰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자기 삶이 되는 황홀한 체험을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1933년 프랑스로 돌아간 뒤라스는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후, 식민지청에서 잠시 근무했지만 이내 사직서를 제출한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뒤라스라는 위대한 작가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때까지 세상에 뒤라스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3년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철면피들>을 출간하며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필명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박금이가 박경리로, 천옥자가 천경자로 되는 순간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었다. 뒤라스에게 삶은 오직 두 시기, 작가가 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레지스탕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이었고, 여러 차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기도 했지만 뒤라스는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은 오직 글쓰기뿐이었다. 생존과 글쓰기는 뒤라스에게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듯 뒤라스에게도 죽음은 예외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뒤라스의 마지막 순간을 채운 사건이었다.
글로 집 사고, 그 집서 미친 듯 집필
그녀에게 글쓰기는 ‘생존’이었다
1980년 혼자 글을 쓰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뒤라스는 자신의 오랜 독자인 얀 앙드레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뒤라스의 표현처럼, “내 인생에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60대 후반의 여성과 20대 남성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은 함부로 이야기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에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했다.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는 글쓰기와 사랑만이 죽음의 반대말임을 알려주고 있다. 뒤라스가 병상에 누워 직접 쓸 수 없게 되자 뒤라스를 대신해 그녀의 말을 얀이 글로 정리했다. “난 삶을 사랑해. 비록 여기 이런 식의 삶일지라도.” 식민지 베트남에서 태어난 가난한 프랑스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글쓰기로 극복했다. 사랑을 감추지 않았고,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깊은 시선으로 인간을 응시했다. 1993년 뒤라스는 “문학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에게 글쓰기가 생애 전부였음을 시인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뒤라스는 세상을 떠났다. 1995년 출간된 <이게 다예요>는 뒤라스의 유서이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당당하게 외쳤던 뒤라스가 옳았다. 뒤라스의 어머니는 참으로 부질없는 걱정을 했다. 문학과 연극, 영화를 넘나들며 뒤라스는 글 쓰는 여자가 얼마나 눈부시게 매 순간 성장할 수 있는지 제대로 증명해냈다. 과연 글 쓰는 여자는 빛난다.
■ 필자 장영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장영은2019.03.19 21:21 입력
마르그리트 뒤라스
글 쓰는 여성은 강하다.
오랜 성차별과 억압, 가난 등을 딛고
자신의 인생을 용기있게 열어간 많은 여성들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기 삶을 꺼내어 예술로 승화하고
시대의 온갖 부당함을 끊임없이 고발하며
사회변혁을 이끌기도 했다.
이들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삶과 글을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에 담아
격주로 연재한다.
“나는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의 영화 판권으로 이 집을 샀다. 내 소유, 내 이름으로 된 집이다. 이 집을 사고 나서 미친 듯이 글을 썼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 같았다. 집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이 집은 나를 유년기의 아픔들로부터 달래 주었다.”
글을 써서 집을 사고, 그 집에서 다시 ‘미친 듯이’ 글을 쓴 이 여자,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부럽다. 게다가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는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 아닌가?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완성하고, 그 작품으로 집을 사서 글쓰기에 몰두했다니 나는 그녀가 그저 존경스럽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대체로 멋진 일들은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작가라는 직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글을 쓰다 굶어죽을 뻔했던 여자 혹은 굶어죽은 여자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 때문일까? 나는 글을 써서 생활의 기반을 닦은 여성들을 언제나 칭송해왔다. 그 기원을 누구로 둘까?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 가난한 여자에게 글쓰기는 “허세”
박경리 선생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뒤라스가 태어난 해로도 등단한 시기로도 살짝 선배인 듯하다. 소설 <연인>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기도 한 뒤라스는 1914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수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1918년 풍토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뒤라스 가족에게 가난과 슬픔은 일과가 되었다. 불행하다고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뒤라스의 어머니는 살아갈 방도를 나름대로 찾아보려 애썼다. 교사 월급으로 삼남매를 키우기 빠듯해지자 뒤라스의 어머니는 엉뚱한 사업에 투자했고 이내 파산했다.
그 엉뚱한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에 고스란히 나온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장이 된 뒤라스의 어머니는 피아노 개인지도, 무성영화관의 피아노 반주 등 온갖 일을 억척같이 해내면서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토지를 불하받는다. 하지만 조수가 밀려오면 모든 경작물이 다 휩쓸려 가는 땅이었다. 경작 가능한 땅을 받기 위해서는 땅 가격의 두 배 이상을 담당 관리자에게 뇌물로 바쳐야 하는 현실을 어머니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가산을 던졌다.
식민지 베트남서 태어난 프랑스인
유년기, 부친 사망·모친 파산 겪어
뒤라스의 어머니에게도 젊은 시절 꿈이 있었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공부를 아주 잘했던 그는 프랑스 북부의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면사무소 앞을 지나가다가 “젊은이들이여, 식민지로 오십시오. 행운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적힌 광고 포스터를 보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었던 청년과 결혼했고, 부부는 식민지의 교사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행운은 연이어 이들을 비켜갔다. 남편은 갑작스럽게 죽고, 전 재산을 부은 땅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파산 이후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욱 집착하고 딸을 학대했다. 자녀들 가운데 유일하게 똑똑한 딸이 하루빨리 직업을 가지길 원했다. 딸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가 나타나면 그 남자의 재력부터 점검했다. 딸은 어디에서든 주목을 받았다. 뒤라스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식민지의 백인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열두 살짜리 백인 소녀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수시로 전염병이 돌아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나가곤 했다. 뒤라스는 질병과 죽음, 가난과 고독에 몸서리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 공포는 잠시 사라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하며 뒤라스는 글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뒤라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딸이 꿈꾸는 삶을 끝까지 모른 척했다. 심지어 드러내놓고 멸시하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물었다. 뭘 쓰겠다는 거니? 나는 책들, 소설들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학 교사 자격증부터 따고 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난 그따위 일에는 관심 없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허세에 불과해.”
어머니의 말을 따르자면, 가난한 여성에게 글쓰기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허세에 불과한” 글쓰기라는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자들이었다. 명민한 뒤라스는 거꾸로 생각했다. 부자들만 글을 쓸 수 있다면 반대로 글을 써서 부자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 뒤라스는 좋은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작가가 되어 어머니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리라고 결심했다. 어머니에게도 분명 피에르 로티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청춘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재능 있는 딸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자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질투가 뒤엉켰다. 만약 저토록 뛰어난 딸이 작가로 성공하면 우리를 떠나지 않을까? 딸이 적당하게 자리를 잡아 자기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질투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만약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멋지게 사는 딸을 보게 되면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뒤라스가 좀 더 용감했다.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았지만, 뒤라스는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한 마르그리트 뒤라스.
■ <철면피들> 쓰며 뒤라스로 재탄생
딸 향한 어머니의 외면·질투 극심
그럼에도 ‘걷고 싶은 길’ 개척 나서
소설 ‘연인’ 공쿠르상 수상 등 성공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뒤라스의 삶이 늦어 버린 이유는 나이 많은 중국 부호가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구애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방탕하고 무능한 큰오빠가 수시로 뒤라스를 때리고 파산한 어머니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 딸에게 있는 듯 행동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뒤라스는 생물학적 나이를 완전히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는 글을 쓰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자기 삶이 되는 황홀한 체험을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1933년 프랑스로 돌아간 뒤라스는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후, 식민지청에서 잠시 근무했지만 이내 사직서를 제출한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뒤라스라는 위대한 작가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때까지 세상에 뒤라스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3년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철면피들>을 출간하며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필명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박금이가 박경리로, 천옥자가 천경자로 되는 순간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었다. 뒤라스에게 삶은 오직 두 시기, 작가가 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레지스탕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이었고, 여러 차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기도 했지만 뒤라스는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은 오직 글쓰기뿐이었다. 생존과 글쓰기는 뒤라스에게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듯 뒤라스에게도 죽음은 예외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뒤라스의 마지막 순간을 채운 사건이었다.
글로 집 사고, 그 집서 미친 듯 집필
그녀에게 글쓰기는 ‘생존’이었다
1980년 혼자 글을 쓰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뒤라스는 자신의 오랜 독자인 얀 앙드레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뒤라스의 표현처럼, “내 인생에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60대 후반의 여성과 20대 남성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은 함부로 이야기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에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했다.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는 글쓰기와 사랑만이 죽음의 반대말임을 알려주고 있다. 뒤라스가 병상에 누워 직접 쓸 수 없게 되자 뒤라스를 대신해 그녀의 말을 얀이 글로 정리했다. “난 삶을 사랑해. 비록 여기 이런 식의 삶일지라도.” 식민지 베트남에서 태어난 가난한 프랑스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글쓰기로 극복했다. 사랑을 감추지 않았고,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깊은 시선으로 인간을 응시했다. 1993년 뒤라스는 “문학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에게 글쓰기가 생애 전부였음을 시인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뒤라스는 세상을 떠났다. 1995년 출간된 <이게 다예요>는 뒤라스의 유서이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당당하게 외쳤던 뒤라스가 옳았다. 뒤라스의 어머니는 참으로 부질없는 걱정을 했다. 문학과 연극, 영화를 넘나들며 뒤라스는 글 쓰는 여자가 얼마나 눈부시게 매 순간 성장할 수 있는지 제대로 증명해냈다. 과연 글 쓰는 여자는 빛난다.
■ 필자 장영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