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8

김윤식과 내재적발전론(內在的發展論) : 네이버 포스트

김윤식과 내재적발전론(內在的發展論) : 네이버 포스트

김윤식과 내재적발전론(內在的發展論)

글도출판사
2018.11.25.





김윤식씨가 사망했다고 한다. 요즈음은 한국신문은 보지를 않아 잘 몰랐는데, 우연히 저녁식사를 같이하다가 조카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그럴 나이가 되었으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한때 국문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써 감회가 느껴지는 소식이었다.

김윤식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말하자면, 서울대 국문과 교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문학판에 ‘내재적발전론’이라는 엉뚱한 관점을 심은 그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1974년인가 나왔던 김현과 함께 공저한 ‘한국문학사’라는 책자에서였다. 이 책자는 한국근현대문학사에서 꽤 중시여겨지는데,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내재적발전론’이 김윤식이 고안하고 개발해낸 그의 고유한 이론은 아니다. 이미 한국 역사학계에서 식민사관에 대항한다는 차원에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특히 김용섭씨의 역할이 컸다. 김윤식은 그것을 문학사에 차용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긴 하더라도 ‘내재적발전론’ 관점에서 한국문학사를 재해석해내고 한국문학사의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가 희석되는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

김윤식의 그러한 작업 이후 한국문학사는 ‘내재적발전론’적 관점에서 기술되어지기 시작했고, 이후의 한국문학판을 틀짓고 형성해내는 기본틀이 되었다.

그러나, ‘내재적발전론’이 식민사관에 대한 대항사관 입장에서 한국역사학계에서 개발되고 보급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이 그러한지는 여럿 의문점이 남는 일이다. 여태껏 이 점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논의를 진행해온 논고가 하나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재적발전론’의 안티로 나왔다가 잠깐 유지되고 사그라져가버린 ‘식민지근대화론’에서조차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하긴 ‘식민지근대화론’이 식민사관의 일환이라는 비판을 엄청 받았어서 그런 입장에서 ‘내재적발전론’을 비판할 여유가 없어서였을 수는 있다. 식민사관의 일환이라고 비판받는 입장에서 ‘내재적발전론’이야말로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비판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게 틀림없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한국 역사학계가 주체적으로 개발해낸 ‘내재적발전론’은 그 원본이 일본에 있는 것이었다.
일본은 해양국가여서인지 일찍부터 서구문명과의 접촉이 있었고 17세기에 들어서면 이미 서양학문을 도입한 난학(蘭學)이 유행하고 어느 정도 상업이 활성화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일정량 벗어나는 듯한 양상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맹아가 자신들의 역사 속에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의 맹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은 분명 근대문명이 자생적으로 자라나올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와같이 되었다고 하는 입장을 취할 만한 명분이 있었다. 일본식 ‘내재적발전론’이었다. 이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막부시대를 서구사회의 과거, 봉건제시대와 비슷한 봉건제가 운영되었던 시기로 보고 이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나올 여건이 동양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내재적발전론’은 일본의 그것, 일본의 ‘내재적발전론’에서 온 것이었던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가지뿐이다. 조선에도 근대문명, 즉 자본주의의 맹아가 자라나고 있었고 가만 놓아두었으면 자생적으로 성장해 일본처럼 자생적 근대문명을 이룩하였을 텐데, 일본의 식민지화되는 바람에 그 자생적 길이 막혀버리고 지체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일본책임론’이다. 그것만 빼면 한국의 ‘내재적발전론’과 일본의 ‘내재적발전론’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의 ‘내재적발전론’이 일본의 ‘내재적발전론’의 복사판이라는 것은 근대문명의 맹아라고 할 만한 것이 조선에는 실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확화된다. 한국사학계는 실학을 그에 버금가는 것으로 높게 치켜세우지만, 객관적으로 과연 그러한지는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다. 그건 그저 ‘박씨전’과 같은 것이었던 것뿐이다. 소설 ‘박씨전’의 학계판이었다고나 할까.




자기 문화를 너무 폄훼하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 삼아야할 것은 그게 아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내재적발전론’의 종국이 어디였는지 알고 있느냐 하는 거다. 일본의 ‘내재적발전론’의 종국은 다름 아닌 ‘대동아공영권론’이었다. 문명을 자생적으로 형성해낸 일본은 이제 서구근대문명과는 다른 초근대로 나아가야 할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이고, 그게 바로 탈근대, 초근대로서의 ‘대동아공영권’이었던 것이다. 이 대동아공영권론에 입각해 일제는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수천만의 생령들이 목숨을 잃었고, 일본은 원자탄 두 개를 맞고 비로소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그럼, 일본의 복사판인 한국의 ‘내재적발전론’은 어디에 이르게 될까. ‘대동아공영권’처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값할 만큼의 ‘전체주의’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즈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진행과정은 정확히 그 지점을 예기한다. 일본의 ‘내재적발전론’이 갔던 그 길 말이다. 역사의 파국 말이다. 일본은 그나마 근대문명의 맹아라는 그 실체가 조금이나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데, 그런 실체가 조금도 없었던 한국이 그 길을 가고 있다면, 그 파국은 더 끔찍할 게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김윤식류들이야말로 진정한 친일파였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대동아공영권론’을 신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학계 전체가 그와 같은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식민사관으로부터 벗어나자고 하면서 주체적으로 카피해 개발해내었던 ‘내재적발전론’이 결국 ‘대동아공영권’으로 흐르는 역사관이었다니....

김윤식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미 저승으로 갔으니까. 그러나 김윤식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여전히 있다. 그가 보급한 ‘내재적 발전론’의 종국이 어디였는지를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몰랐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파렴치한이었다고 할밖에 없는 일이다.


#김윤식#한국문학사#내재적발전론#식민지근대화론#대동아공영권#전체주의#크리스마스#산타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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