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박사 “북녘의 교회를 찾아가다”를 출간하며
최재영 박사 “북녘의 교회를 찾아가다”를 출간하며
구약성경(민수기)...여호수아와 갈렙, 가나안 땅의 실체적 진실을 하느님의 관점과 시각에서 제대로 보고
2019-03-22
“북녘의 교회를 찾아가다”를 출간하며
“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북의 인민들이 왜 서양 기독교, 특히 미국식 기독교를 철저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지, 왜 민족주의적인 기독교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강조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은 역사적, 문화적 성찰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최재영 박사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원장/NK Vison2020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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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국에서 대북사역과 통일운동을 펼치던 중에 해방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던 2015년을 전후해 약 4년 동안, 현존하는 이북의 교회들을 골고루 참관하였으며 그 결과를 정리하고 자료화하여 한국은 물론 미국과 해외동포들을 대상으로 강연활동과 집필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러나 북측의 종교 실태를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종교자유와 기독교 실태에 대해 남측과 서방세계에서는 아직도 터무니없는 낭설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북에 대해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는 비참한 현실속에서 이번에 동연출판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책이 출간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은 분단 이후 최초로 현존하는 북측의 교회공동체들을 집중 탐방한 실록이다. 평소 북측 기독교를 탐방하고자 갈망했던 나는 특별한 명분이 없던차에 광복 70주년을 전후해 민간차원의 대북 프로젝트를 세워 이를 성사시킨 후 몇 년에 걸쳐 틈틈이 방북 길에 올라 면밀히 조사하며 돌아보았다. 북측 영토내에 있는 모든 개신교 교회들과 기관들은 물론 가톨릭교회와 러시아정교회도 돌아보았으며 정통 개신교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한 통일교와 몰몬교, 안식교까지 빠짐없이 참관하여 실태를 알아보았다. 북측의 개신교중에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직접 주도해서 설립한 교회들도 있고 남측이나 해외측에서 설립한 교회들도 있었고 현재 설립을 추진중인 교회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를 지닌 북녘의 교회들과 자생적인 5백여 가정교회와 처소교회 공동체들에 대한 실태 파악이 수면위에 드러났으며 동시에 남측과 해외에서 북측 영토에 세운 교회들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들이 그동안 펼쳐왔던 북한선교의 민낯도 여과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 책은 실록의 의미를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과 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이며 통일 조국을 갈망하는 모든 남과 북의 기독교 공동체들을 향한 하나님 섭리의 나침반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가 볼 때 분단 이후 남북문제로 인해 발생한 남녘사회 내부 갈등의 본질은 좌우 이념대립이라기 보다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였다. 그러기에 북에서 체험한 다양한 기록들과 다면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사실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제는 이념이 아닌 진실의 차원에서 북의 현실에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측의 보수기독교 세력들은 그동안 북에 대한 종교적 상황에 대해 너무 큰 증오와 편견을 불러 일으켜왔다. 북미간의 적대적 대결구도와 남북간의 첨예한 대치상태가 빚어낸 왜곡된 자료들과 의도적으로 생산한 정보들을 토대로 무조건 북을 맹목적으로 매도하고 비난해왔다. 보수 목회자들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친일친미반북 성향의 극단적 행동을 하면서 마치 교회강단을 반공강연장처럼 활용하며 자신을 반공투사인양 반북적이고 반통일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북을 악마화하는데 앞장서왔다. 그러나 그 악영향과 후유증은 고스란히 교인들의 몫이고 더 나아가 진정한 자주통일을 바라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몫으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올해로 광복(해방)과 분단이 된지 73년이 흘렀고 6.25전쟁이 끝난지도 어언 65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북녘의 인민들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종교문화나 사상을 쉽게 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단 이후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자생적인 사회주의기독교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교문화와 독특성을 무시하고 한국교회와 서방교회는 자기들이 믿는 방식이 아니라고 무조건 폄하해왔으며 북측의 교회들을 향해 “대남선전용, 대외과시용, 홍보용, 외화벌이용의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겉은 진짜교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짜교회다”라고 매도했고 신자들을 향해서는 “교인들은 모두 가짜이고 대부분 노동당 당원이나 그 가족들이며 실제로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동원된 사람들이다”라며 모함을 해왔다.
그러나 북녘의 인민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지켜온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의 바탕위에 주체문화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들을 이끌어왔고 몇몇 교회당들을 건축하며 예배를 드려왔다. 내가 북녘의 교회공동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주체문화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착화되었으며 기독교의 정체성은 주체문화와 공존하며 민족종교화 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라는 거대하고도 세계적인 종교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민족종교로 정착시킨 유일한 국가는 지구상에 이북사회 뿐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전후 이북에서 생성된 자생적 처소교회나 가정교회들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곳이 바로 옛날 하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평양칠골지역 신앙공동체였는데 그들은 전쟁의 비극적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의 동역자들과 신자들 위주로 삼삼오오 소그룹으로 모여 지속적으로 예배를 드려왔다. 그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변함없이 수 십 년간 꾸준하게 예배를 드리며 신앙의 그루터기 역할을 해 오던 중 1988년 11월에 평양봉수교회당, 1989년 말에 평양칠골교회당을 건축해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에 드러냈고 새로운 터전을 삼은 것이다.
미국이라는 외세가 개입한 6.25전쟁으로 인해 3.8선 이북지역에서만 희생당한 숫자는 120만 명(1,231,540명)이 넘는다. 이런 엄청난 생명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을 직접 경험한 북녘의 신자들은 미국의 실체를 제국주의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은 철저한 민족주의로 뭉쳤다. 그래서 이북의 기독교 신자들은 민족정신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종교적 전통보다 우선시 되었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이전에 조선인이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 속에 살아왔다. 나는 북녘의 교회들이 지닌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일반 인민들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기독교 문화와 정서를 비교하면서 북의 신자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사회주의적 교회들과 가정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북의 인민들이 왜 서양 기독교, 특히 미국식 기독교를 철저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지, 왜 민족주의적인 기독교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강조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은 역사적, 문화적 성찰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이해와 접근이 배제된 채 선입견만으로 무차별적 오해와 비난을 일삼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그런 관점과 심성으로는 예수의 복음을 타문화권의 어느 누구에게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또 다른 이름의 공허한 증오일 뿐이다. 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 북측의 신자들도 한국교회나 미국교회가 믿는 방식대로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성과 신앙색채만 다를 뿐 교회로서의 본질은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필자가 북측교회들을 탐방해보니 이북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자국민에 대한 종교를 핍박하거나 억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 권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국과 첨예하게 대결하는 상황이고 남북관계가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다보니 자신들이 지켜온 자주성과 국가의 생존을 침해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리고 종교라는 명분으로 선교와 포교활동을 빙자해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거나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외부 기독교 세력들을 유동성있게 제한할 뿐이다. 마치 한국교회가 이슬람교가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집중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북교회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를 조용히 묻고 싶다. 또한 한국교회가 그토록 미워하는 북측을 향해 북한선교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한 묻고 싶다. 사회주의 국가들중에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 여기서 종교가 아편이라는 비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는 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민중의 아편이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종교’가 침략의 종교로, ‘섬김의 종교’가 군림의 종교로, ‘평화의 종교’가 잔혹한 종교로, ‘나눔의 종교’가 착취의 종교로, ‘평등의 종교’가 억압의 종교로 둔갑할 때 그 종교는 이미 신자들과 민중들의 피를 말리며 그 사회를 황폐시키는 독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내부적으로 부패한 한국교회가 철저한 자기 개혁없이 선교의 허영에 들떠 맹목적으로 북한선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청정지역인 이북사회를 오염시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구약성경(민수기 13:25-33)에는 가나안 땅으로 밀파된 12명의 정탐꾼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중 10명의 정탐꾼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그 탐지한 땅을 악평(나쁜 보고서, bad Report)하여 가로되(22절)” 였다. 반대로 나머지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두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실체적 진실을 하나님의 관점과 시각에서 제대로 보고했다. 결국 10명이 제출한 잘못된 보고서의 결과는 참혹했다. 10명의 당사자들은 물론 모든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잘못된 보고와 평가에 대한 댓가로 40년 동안 사막에서 방황하는 신세가 됐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한국사회는 북에 대한 진실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허무맹랑하고 날조된 이야기들을 사실인양 믿고 북을 매도하고 악평하고 있다. 그 결과 남한은 온통 반통일적 반북적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니 통일의 날을 요원하기만하다.
왜곡된 반북 보도를 일삼는 친일친미 사대주의성향의 수구언론매체들과 미국의 시각에 의해서 해석된 날조된 대북정보들을 제공해온 역대 정권들은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그동안 북을 철저히 악마화했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중에는 학교교육과 언론보도로 인해 수십 년동안 주입된 반북적인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이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들이 있을 것이다. 감히 이 책이 돌덩이가 깨지기 직전에 서서히 금이 가는 역할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로스엔젤레스 서재에서 다운타운을 내려바보며
최재영 목사
올해로 광복(해방)과 분단이 된지 73년이 흘렀고 6.25전쟁이 끝난지도 어언 65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북녘의 인민들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종교문화나 사상을 쉽게 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단 이후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자생적인 사회주의기독교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교문화와 독특성을 무시하고 한국교회와 서방교회는 자기들이 믿는 방식이 아니라고 무조건 폄하해왔으며 북측의 교회들을 향해 “대남선전용, 대외과시용, 홍보용, 외화벌이용의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겉은 진짜교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짜교회다”라고 매도했고 신자들을 향해서는 “교인들은 모두 가짜이고 대부분 노동당 당원이나 그 가족들이며 실제로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동원된 사람들이다”라며 모함을 해왔다.
그러나 북녘의 인민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지켜온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의 바탕위에 주체문화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들을 이끌어왔고 몇몇 교회당들을 건축하며 예배를 드려왔다. 내가 북녘의 교회공동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주체문화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착화되었으며 기독교의 정체성은 주체문화와 공존하며 민족종교화 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라는 거대하고도 세계적인 종교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민족종교로 정착시킨 유일한 국가는 지구상에 이북사회 뿐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전후 이북에서 생성된 자생적 처소교회나 가정교회들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곳이 바로 옛날 하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평양칠골지역 신앙공동체였는데 그들은 전쟁의 비극적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의 동역자들과 신자들 위주로 삼삼오오 소그룹으로 모여 지속적으로 예배를 드려왔다. 그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변함없이 수 십 년간 꾸준하게 예배를 드리며 신앙의 그루터기 역할을 해 오던 중 1988년 11월에 평양봉수교회당, 1989년 말에 평양칠골교회당을 건축해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에 드러냈고 새로운 터전을 삼은 것이다.
미국이라는 외세가 개입한 6.25전쟁으로 인해 3.8선 이북지역에서만 희생당한 숫자는 120만 명(1,231,540명)이 넘는다. 이런 엄청난 생명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을 직접 경험한 북녘의 신자들은 미국의 실체를 제국주의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은 철저한 민족주의로 뭉쳤다. 그래서 이북의 기독교 신자들은 민족정신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종교적 전통보다 우선시 되었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이전에 조선인이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 속에 살아왔다. 나는 북녘의 교회들이 지닌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일반 인민들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기독교 문화와 정서를 비교하면서 북의 신자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사회주의적 교회들과 가정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북의 인민들이 왜 서양 기독교, 특히 미국식 기독교를 철저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지, 왜 민족주의적인 기독교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강조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은 역사적, 문화적 성찰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이해와 접근이 배제된 채 선입견만으로 무차별적 오해와 비난을 일삼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그런 관점과 심성으로는 예수의 복음을 타문화권의 어느 누구에게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또 다른 이름의 공허한 증오일 뿐이다. 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 북측의 신자들도 한국교회나 미국교회가 믿는 방식대로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성과 신앙색채만 다를 뿐 교회로서의 본질은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필자가 북측교회들을 탐방해보니 이북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자국민에 대한 종교를 핍박하거나 억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 권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국과 첨예하게 대결하는 상황이고 남북관계가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다보니 자신들이 지켜온 자주성과 국가의 생존을 침해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리고 종교라는 명분으로 선교와 포교활동을 빙자해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거나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외부 기독교 세력들을 유동성있게 제한할 뿐이다. 마치 한국교회가 이슬람교가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집중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북교회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를 조용히 묻고 싶다. 또한 한국교회가 그토록 미워하는 북측을 향해 북한선교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한 묻고 싶다. 사회주의 국가들중에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 여기서 종교가 아편이라는 비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는 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민중의 아편이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종교’가 침략의 종교로, ‘섬김의 종교’가 군림의 종교로, ‘평화의 종교’가 잔혹한 종교로, ‘나눔의 종교’가 착취의 종교로, ‘평등의 종교’가 억압의 종교로 둔갑할 때 그 종교는 이미 신자들과 민중들의 피를 말리며 그 사회를 황폐시키는 독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내부적으로 부패한 한국교회가 철저한 자기 개혁없이 선교의 허영에 들떠 맹목적으로 북한선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청정지역인 이북사회를 오염시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구약성경(민수기 13:25-33)에는 가나안 땅으로 밀파된 12명의 정탐꾼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중 10명의 정탐꾼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그 탐지한 땅을 악평(나쁜 보고서, bad Report)하여 가로되(22절)” 였다. 반대로 나머지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두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실체적 진실을 하나님의 관점과 시각에서 제대로 보고했다. 결국 10명이 제출한 잘못된 보고서의 결과는 참혹했다. 10명의 당사자들은 물론 모든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잘못된 보고와 평가에 대한 댓가로 40년 동안 사막에서 방황하는 신세가 됐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한국사회는 북에 대한 진실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허무맹랑하고 날조된 이야기들을 사실인양 믿고 북을 매도하고 악평하고 있다. 그 결과 남한은 온통 반통일적 반북적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니 통일의 날을 요원하기만하다.
왜곡된 반북 보도를 일삼는 친일친미 사대주의성향의 수구언론매체들과 미국의 시각에 의해서 해석된 날조된 대북정보들을 제공해온 역대 정권들은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그동안 북을 철저히 악마화했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중에는 학교교육과 언론보도로 인해 수십 년동안 주입된 반북적인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이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들이 있을 것이다. 감히 이 책이 돌덩이가 깨지기 직전에 서서히 금이 가는 역할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로스엔젤레스 서재에서 다운타운을 내려바보며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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