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8

일본책임론에서 벗어나기 : 네이버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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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책임론에서 벗어나기




글도출판사



2018.12.31. 14:0366 읽음










또 내재적발전론 이야기다. 미안하다.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문제여서 한동안은 이 이야기를해얄 것 같다.
내재적발전론의 핵심은 그 ‘내재성’이다. 그래서 ‘내재적발전론’이라 하는 거다. 여기서 ‘내재성’이란 ‘자본주의’, 넓게는 ‘근대’의 맹아가 조선의 내적 전개과정 안에 잉태되어 있었고 이미그 싹이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한민족 자존이라는 측면에서 이건 매우 긍정적 관점이다. 자기비하에 빠진 사람보다 자기확신에 빠진 개인이 성공하기 마련이다. 민족이라는 거대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재적발전론은 민족이라는 거대차원에서 자기확신, 자기긍정을 심어주는 발상이다. 그런 점에 ‘내재적발전론‘의 긍정성이 있다.
그러므로 ‘내재적발전론’은 그 ‘내재성‘이 본질이며 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게 골자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내재적발전론‘은 지금까지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그 본질적 작업에는 소홀하고 다른 지엽적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책임론’이다. 한국의 ‘내재적발전론’은 한국의 ‘내재성’이 일본의 침략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발전해오던 그 과정에 균열이 생기고 결국 그로인해 근대성이 외래에서 주입되어지게 된 것으로만 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이해한다. 즉, 일본에 의하여 한국의 내재적발전이 종결되고 불가능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재적발전론’이 주장하는 ‘일본책임론’에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30년 넘게 이민족의 식민지배에 노출되었는데, 식민지배를 당한 조선의 삶이 왜곡되고 굴절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상식에 반해도 지나치게 반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식적 수준을 넘어 ‘일본책임론’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게 가(可)하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식선을 넘어 ‘일본책임론’에 매달리려면 내재적발전론이 주장하는 그 ‘내재성’이 일본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어 화학적으로 변화되었어야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정말 일본에 의하여 이식된 근대는 내재적발전론의 그 ‘내재성’을 완전 말살시키고 변질시켜 괴물화시켜 버렸을까?
내재적발전론을 떠나 다른 이름의 연구성과를 한번 살펴보자.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일단 근대의 맹아를 품은 조선의 ‘내재성’이란 것이 극히 소략했음을 살핀다. 그리고 그 ‘내재성’이 일본이 이식한 근대성과 충돌하여 변질되어버렸다는 내재적발전론 관점과는 달리 오히려 그로 인해 맷집을 불리고 맹아에서 벗어나 근대성다운 근대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즉, 조선이 지닌 맹아로써의 ‘내재성’은 일본이 이식한 근대와 충돌하는 게 아니라 외려 이를 매개삼아 그 세를 확장하고 ‘내재성다운 내재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타당하냐 아니냐는 여기서는 논외다. 허나 이것이 시사해주는 한 가지 중요한 관점은 있는데, 맹아로써의 그 ‘내재성’이 일본에 의하여 이식된 근대와 결코 반목하고 충돌하는 것일 수만은 없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이 진정한 ‘맹아로서의 내재성’인 한 이것은 저것과 충돌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완적 양태에 놓인 것이었을 가능성에 무게중심을 둔다.

‘내재적발전론’의 골자는 타이틀에서부터 물씬 풍기는 것처럼 그 내재성이 본질임에도 ‘내재성’에 대한 탐구는 없고 있다 하더라도 거의 형식적이고, 오로지 ‘일본책임론’에만 매달리는 반일론에만 함몰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늘날 ‘내재적발전론’은 일본책임론이고 반일론에 지나지 않는다. ‘내재성’에 대한 탐구는 없고, 이를 왜곡시키고 짓밟았다고 하는 일본책임을 묻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내재적발전론’이 ‘내재성’에 대한 탐구는 없고, 이를 왜곡시킨 일본책임론에만 시선과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그 ‘내재성’을 신화의 영역에 감금시켜버렸다는 의미, 정확히 그것이 된다.
탐구해야 할 것은 탐구하지 않고 ‘신화’의 영역 속에 감금시켜 놓은 채 이를 입증하기 위한 이야기만 탐구하고 발굴하는 행태는 학(學)의 타락이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조선에서의 맹아로써의 ‘내재성’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인가. 찾아도 별로 눈에 띄는 게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맹아로써의 ‘내재성’이란 일본책임론을 전개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나. ‘내재적발전론’의 전개과정을 보면 선과 후 본과 말이 뒤바뀌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내재성’은 명분이었고 실질적 목적은 일본책임론 즉 반일론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성’은 신화 안에 갇혀 있는 게 맞고 그래야만 하게 될 것이다.




‘내재적발전론’은 학으로써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학이라고 굳이 주장한다면 매우 사악한 학(學)이라고 할 밖에 없다. 내재적발전론은 표면적으로는 끊임없이 일본책임론을 발굴해냄으로써 한민족공동체에 물을 주고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듯하지만 이면으로는 그 ‘내재성’을 신화의 영역 속에 감금시켜 놓음으로써 이를 사실이 아닌 거짓, 조작으로 환원시키는 심각한 우(憂)를 범하고 있다. 이 잘못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뇌관이 터지기만 하면 한민족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을 만큼 파급력이 큰 것이다. 물론 정신적인 측면에서다.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초토화가 일어난다면,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초토화도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내재적발전론’의 본질은 그 ‘내재성’이고 일본책임론은 그 말단이다. 말단을 위하여 본질을 ‘신화’의 영역 속에 감금시켜 놓는다는 것은 학으로써의 본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게다가 ‘신화’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학문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일본책임론을 접을 때가 됐다. 신화 속에 유폐된 ‘본질’을 살리는 게 증오와 저주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책임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는 데에 눈을 떠야 한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도 그러하고, 이는 꼭 해내야 할 필수적인 일이다.



#대한민국#일본#책임#내재적발전#식민지근대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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