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 FELIVIEW
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2016년 4월 2일
무산된 반민특위 사진. 가운데는 경성방직과 삼양사 사주 김연수(김성수의 동생)와 왼쪽은 민족대표 33
인 중 한 명인 최린이다.
반민특위는 결국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경찰의 공격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렇
지만,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반민특위가 성공했으면, 흔히 말하 듯, 민족정기(民族精氣)라는 것이 만
일 그런 것이 있다면, 바르게 세워졌을까? 이제 와서 친일 청산을 하면 된다는 생각은 대학 입학 시험
원서 접수를 하러 가는 학생이 지금이 고3 1월이라면, 아니면, 고등학교 입학 때라면, 아니면, 초등학교
입학 때라면 정말 열심히 공부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와 다를 바 없는거 아닐까.
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휴머니스트, 2007.
식민지 근대 혹은 식민지 근대성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많은 사람이 나에
게 윤해동을 추천했다. 읽지는 못했지만, 『식민지의 회색지대』, 『식민지 공공성: 실체와 은유의 거리』,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지배와 자치』, 그리고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까지. 책을 구할 때 이
미 절판된 것들도 많아 헌책방을 뒤지기도 했다.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수많은 논의를 헤매다 보니 쉽사
리 손이 가지 않아서, 미루어 두고만 있다가 드디어 꺼내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에 몹시 실망스
럽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저자라 간략하게 써두려 한다.
「나의 근대 – 연관된 아이러니의 세계」라는 첫번째 글은 식민지 조선인의 두 가지 모습에서 시작한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있는 식민지 조선인 군속의 흔적, 이들중 여럿이 전범으로 처형을 당했다.(23)
윤해동은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포로학대를 이유로 A급 전범으로 처형당한 조선인은 홍사익 중장이며,
그는 영친왕이 일본 육사에 진학할 때, 돌보는 역할로 따라갔다가, 일본 육군 중장이 되었던 사람이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과 동남아시아 인들의 기억에 의하면, 거칠고 고압적인 일본인을 따라하는 새끼
제국주의자.(26)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거로 식민지 근대의 분열증을 드는데, 그 근거는 동일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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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동원이다.(27-29) 윤해동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일본식 생활방식에 익숙한 어머니가
일본인의 식민 통치나 교육방식이 한국인에게 악랄하고 차별적이면서도 일본인은 정직하고 근면했다는
식의 설명을 이율배반적이라고 보면서,(30-31) 이것이 식민지 근대인에게 내면화된 ‘공공성’이라고 말
한다.(32) 일본 근대화의 3각 동력은 자본주의 산업화의 달성, 근대국가의 건설, 제국주의의 실현이었
다.(33) 만주국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모순을 해소하고, 일본의 모순을 전가하는 장소인 동시에 각종
정책의 실험실이었다.(36) 그리고 1930년대 초반 조선에 만주붐이 일었다.(37) 윤해동은 제국과 식민
지가, 식민지와 식민지가 영향을 주고 받는 혼종성, 잡종성에 주목하면서, 제국사라는 문제의식을 가져
온다.(38-39) 그리고 식민지와 해방 이후 사회가 연속성을 가졌기 때문에,(40) 해방 이후 사회도 분열
적이며, 민족사에서 저항의 역사가 강조되고,(41) ‘기억의 국민 총동원’, ‘작위적인 동원’이 일어난다.
그리고 미소양국의 분할점령으로 인한 분단과 내전으로 이어진다.(43) 한국인들은 국민국가라는 폐쇄
회로에 빠져들었으며, 두 개의 국민국가의 ‘적대적 의존’ 상태에 근거하고 있다.(44) 식민지 총력적 체
제는 해방 후 한국에서 동원형 사회를 형성했고,(45) 고은의 말처럼, “전쟁이 그들의 운명을 만들었
다.”(46) 이제 식민지 근대는 양면성의 세계를 넘는 아이러니의 세계, 근대는 스스로의 믿음에 의해 소
외당하는 아이러니의 세계가 되었다.(47)
나로서는 이글의 주장을 하나하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글의 내용은 평소 내가 서평을 쓰거나 메신저
로 친한 이들과 투덜거리거나, 벗들과 전화를 할 때, 가끔 주고받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글은 딱 그 지점에서 그친다. 이점이 문제다. 윤해동의 글은 관념적이다. 이 책 전체에서 그런 관념
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를 들면 가볍게 툭치고 넘어가는 동화의 강제라는 한 가지 주장 안에도, 동화
를 정말 하려고 했는가, 어떤 식으로 동화를 시도했는가, 실제 동화가 되었는가, 말로만 동화였지 차별
구조가 아닌가, 정신적으로만 동화, 동화를 주장하는 데 대해 사람들은 어떤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심층적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동남아시아에서 조선인 군속의 활동에 대해서도 나는 그의 결론은 동
의한다. 조선인 군속은 꽤 많이 동원되었고, 전범으로 처형되거나 처벌받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
인 전범들에 대해서 재판기록을 뒤져가면서 연구한 것은 없지 않은가. 돌아온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
적조사한 것도 없지 않은가. 그냥 동남아시아인 몇몇의 기억에 의존해서 스케치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만주국에 대해서도 이시하라 칸지의 이야기 몇 조각과 만주국 출신의 몇몇 협력자들의 이야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만주국 연구는 산더미 처럼 많다. 일본인에 의한 연구도, 한국인에 의한 연구, 미국인에 의
한 연구도, 인도인에 의한 연구도 있다. 만주국 문제만 해도, 일본의 식민지 모순과의 관계, 관동군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 전후 미소 냉전과 위성국 형성과의 관계, 한국 근대화 과정과의 관계에 대한 수많
은 연구들이 있고, 또 나와야 한다. 엊그제 출간된 한석정의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체제의 기원』
(문학과지성사, 2016)이 그 하나이긴 하지만, 원래 한석정은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을 쓴 만주국 전문
가로, 프라신짓트 두아라의 만주국 연구서 『주권과 순수성』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나카미 다사오, 야마
무로 신이치, 윤휘탁 등 만주국 문제만 간단히 정리하려고 해도 자료가 태산이라, 손을 대지 못하고 있
을 뿐이다. 윤해동은 모든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핵심인 차별, 분열, 균열의 중층 구조에 대한
정밀하고, 중첩적인 이해는 결여되어 있다.
“식민지 공공성’이라는 개념은 식민지기 저항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근대 사회가 분화
하면서 근대적 ‘공공 영역’이라는 문제 영역이 부상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공공성의 체현자로서의 국가
공권력이 사적 영역을 장악해가는 과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
권력에 의해 회수되지 않는 ‘공적 영역’의 존재는 중요하다. 식민 지배하 저항과 협력이 교차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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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정치적인 것’으로서 ‘공적 영역’이 존재하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식민지기 저항의
의미를 새로이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저항운동의 특권화는 곧 탈식민화 이후 새로운 제국주의
지배의 열망을 저항운동의 특권화를 통해 내면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55-56)
“협력이란 제국주의 지배하에서 형성된 근대 주체 구성의 한 양식으로서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
다. 일제 말기 협력자의 주체 구성의 세 가지 양태는 민족부르주아적 · 사회주의적 · 근대초극적인 것으
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저항적 주체의 형성과 아울러 근대 한국의 주체 형성의 중요한 특성을 구성한
다고 할 것이다.”(59-60)
“일제의 식민 권력, 즉 총독부 권력은 ‘식민국가’로서 근대국가의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식민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며, 이것을 자양분 삼아 식민지의 근대적 경제를 분리시키고 사회적 분화를 추동함으로써
사회적 합리성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신분제적 하위 지배와 지역 지배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시장의
물신화에 바탕을 둔 상품경제는 국가로부터 경제를 분리하여 이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적 분화를 가속화했다.”(61-62)
“식민지 조선에서도 합리성이 확대되었고, 이른바 ‘근대인’이 창출된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였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이미 전지구적인 근대적 ‘동시성’이 관통되고 있었다. 최근 식민지에서의
‘부드러운 근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식민지의 도시화 과정 속에서 부드러
운 근대는 관통되고 있었다. 또한 근대적 에토스의 차원에서 보면 농촌이나 산간벽지도 예외일 수는 없
었다. 규율 권력화된 근대인은 근대를 욕망하는 존재로서 식민지 전체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62-
63)
“식민 지배하에서 사회적 합리화가 진전되고, 근대적 사회의 분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일까? 이런 동일시에 대한 의구심이야말로 지금까지 한국 근대 연구자들에게 내
면적 검열 기제로 작동해 온 것은 아닐까? 식민 지배의 ‘문명화 법칙’이란 명제는 한국 학계에서도 이미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한국의 식민 지배에는 그런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60)
“민족 형성은 대중의 창출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대중의 형성은 사회적 합리성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사회적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식민 지배하의 사회적 합리성은 식민정책의 전개, 즉 근대적 관료
행정의 시행과 자본주의의 제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이것을 수용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리성은 그 식민지적 특수성을 구성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의 주요한 속성을 구성하게 되
는 것이다. 즉 사회적 분화와 ‘합리성의 폭발적 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중은 형성되고, 대중의 재주
술화를 둘러싸고 식민지 권력과 식민지민의 저항운동은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68) “식민지 근대는 식
민지에서 서구 근대를 대상화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서구 근대는 식민지에 언제나 내부화되어 있지만
항상 외부화될 수밖에 없는 내부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전유하고자 하는 발상을 식민
지 근대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70)
식민지 공공성, 합리성, 협력, 식민국가, 근대인, 사회적 합리화, 대중의 형성. 나는 이런 주장들 중 그
어느 것에도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만약 이런 생각을 적용하거나 입증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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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보다 신중해져야 한다. 윤해동은 식민지 근대를 주장하다보니, ‘식민지’는 수
사적 표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식민지 근대라고 할때, 그 합리성, 합리화, 공공성은 매우 제한적으로
소수 협력자나 엘리트, 상류층, 자산보유계층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 향유하는 과정과 포섭
의 구조 역시 차별적이고, 중층적으로 제한적이다. 더욱이 식민국가가 근대국가적 특성을 가지려면, 무
엇보다 동의의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자치정부도 없는 식민지에서 어떤 식으로 동의의 구조를
발견할 것인가. 소수로 형성된 ‘중추원’에서 아니면, 학교 제도에서. 요지는 이것이다 비판의 단초에 불
과한 내용들이 충분한 근거도 없이 확대해석되었고, 부분이 전체인양 확대 되었다. 나의 평소 모습을 보
는 것같아 낯부끄러웠다.
윤해동은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책의 곳곳에서 ‘저항의 특권화’, ‘친일 단죄’의 문제 등을
언급한다. 특히 마지막 결론은 「친일과 반일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 이후 과거 청산으로서의 친일파 청산에 대해 윤해동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신념 윤리 차
원에서 이루어지는 친일파 청산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친일-반일의 이항대립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231-232)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온적인 친일파
청산은 잘못 끼운 첫 단추로 ‘정의’롭지 못하고, 부패하고 일그러진 사회를 구축하는 원형이자 주범이
되었다는 비판을 반박하고 싶은 것이다.(232) 과거가 청산될 수 있다는 개념에 동의하지 못하고, 매국
노, 협력자, 전범, 민족 반역자 등 친일 용어가 광범위하게 혼용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234)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가 주도의 ‘정형화된 기억’의 구조 속에서 적극적 망각과 소극적 망각의 협업이
이루어졌다.(235-236) 동화의 동일성 이데올로기부터 협력이 이루어져서 행정관료적 영역, 경제적 영
역, 종교적 영역, 문화적 영역, 집합적 운동의 영역, 하위 지역적 영역에서 협력이 이루어졌다.(240-
242) “제국주의 지배하의 ‘협력’ 이란 사회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정치적 행위의 한 양태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243) 그는 책임을 주체에 대한 책임,
협력에 대한 책임으로 보고, 협력 책임을 실정법을 위반한 법적 책임, 정치적 행위를 둘러싼 정치적 책
임, 도덕적 책임, 그리고 형이상학적 책임을 들고 있다.(244-245)
“‘친일파’ ‘청산’이 ‘민족’ 이라는 모호한 대상에 대한 귀속의식과 충성 서약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일
상’ 적인 ‘협력’이 현대 한국 사회의 식민주의적 상황을 재생산하고 있는 주범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
는가? 그렇다면 ‘협력’ 행위에 대한 ‘청산’은 더욱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또다시 청산이
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그 청산은 ‘책임’의 문제로 귀속되어야 한다. 이렇듯이 친일-반일의 이항을 대립
시키는 도식은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무릇 어떤 개념화의 방식이 신화로 기능할 때 그
신화로서의 기능을 재생산하기 위해 치러야 할 부(負)의 부담은 항상 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화에
는 그 정당화를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정당화를 위한 희생의 제의를
더 이상 끌고나가는 일은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247)
생각해 보면, 맨 마지막 문단이 윤해동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친일파 청산이나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이 의미 없을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 앞의 모든
이야기는 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였던 모양이다. 친일-반일 이항대립의 도식을 거부하고, 친일 청
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려니, 이 모든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시기에서 발
견되는 여러가지 장점이나 근대적인 측면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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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적이고, 한 쪽 구석에서 벌어진 일을 확대해서 말하게 되기도 했고, 그럴 법하지만, 증명하기 어렵
거나 아직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것도 모두 주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근거나 설명은 없고 주장
으로 가득한 책이 되었다. 태산이 움직이는 듯 했지만, 나는 그것이 너무나 아쉽다.
그런데, 친일-반일 이항대립을 극복하고, 친일 청산의 마녀 사냥을 벗어나려면, 식민지 시기를 정당화하
거나 합리화하는 일이 꼭 필요했을까?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일까? 그 자체가 이미 도
식에 빠져든 것이 아닐까? 상대방이 친일 행적을 문제삼고, 친일을 폭넑게 해석하여 문제 삼고 친일 청
산을 주장하자, 이번에는 식민지 시기에 근대성, 간단하게 말해서 식민지가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에 대
해서 말하면서, 친일-반일 이항대립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옳고 그름
에 대한 가치 평가가 필요하고, 그것이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 후손들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이
야기다. 이런 발상은 너무 단순한 환원론적 발상이 아닐까.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과격한 이데올로기
대립, 전쟁, 산업화와 남북대결의 험난한 시대를 지나온 오늘 식민지 시대에 얻은 것, 그리고 식민지 시
대에 잃은 것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지나친 단선론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친일 청산
과 민족 정기를 연결하는 이들이나 식민지 근대성 논의를 통해 여기에 물을 좀 타보려는 사람들이나 똑
같이 식민지 환원론, 일제시대 환원론에 빠져 있는 셈이다. 나는 왠지 대입 시험을 눈앞에두고, 초등학
교 3학년 때 구구단을 못외웠던 과거를 떠올리는 고등학생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주박에 걸려 있는 것은 식민지 시기 그 자체가 아닐까. 식민지 시기에 벌어진 모든 일들은 그
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오늘날의 관점에 비추어 가치평가를 받게 된다. 역사가
현재와의 관련성 속에서 설명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만, 식민지 시기에 경우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선
명한 평가와 함께 지사적 태도가 엮이고, 현재의 기득권 세력과 저항이 모두 교차된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현재의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가 된다. 그러면 그럴 수록 식민지 시기에 대한 객관적
연구는 요원해지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성 문제가 해명되지 않고, 해결책을 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연구의 문제다. 협력자 연구가
활발해지고, 연구성과가 충분해져서 살았던 사람들을 다시 복원해 낸다면, 식민지 시기의 여러 모습들
이 주박에서 풀려나 살아움직이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식민지 시기에 대해 과거에 대해 이야
기 할 수 있게 되고, 현실 정치에 대해서도 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 모
든 사건에 대한 현재 정치적 가치판단을 부과하는 일은 현실 정치를 대하는 우리의 책임 방기일런지도
모른다.
2016. 4. 2.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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