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이병한 선생 강연장에서 지정토론자 토론이 있은 후 사회를 맡은 박인규 대표가 “이 방면 담론에 앞장서 온” 내게도 한 마디 해 달라고 해서 이런 취지로 말했다.
몇 해 전 이 선생을 알게 된 후 무척 좋아하고 아끼게 되어 이 선생 책 내는 것도 내 단골 출판사에 권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 관계자들이 내가 권하는 태도가 극진한 것을 보고 어째 그렇게 정성스럽게 권해 주십니까, 묻기에 나는 이 선생을 내 아바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 해주는 아바타로 여겨서 아낀다고 했지요. 사실 아바타란 말도 좀 듣기 좋게 표현한 것이고, 깨놓고 얘기하면 나는 이 선생을 내 탐사로봇으로 여깁니다.
문명교섭사는 긴 시간과 넓은 공간을 다루는 공부인데, 나는 책상머리에서 그 공부를 하려니 현지답사가 아쉽지요. 그런데 이 선생은 다니기 힘들고 위험한 곳을 다 다니면서 내 가설을 확인해 주니까 얼마나 보물 같은 로봇입니까. 그런데 로봇 성능이 시원찮아서 수시로 미션 프로그래밍을 추가해줄 필요가 있는데, 이번에는 이런 프로그래밍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의 중심에 놓아보라는 겁니다. 문명이란 원래 자연에서 벗어나는 성향을 가진 것이지만 자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과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관리해 나가는 메커니즘을 갖춰야만 어느 정도의 지속가능성을 갖고 ‘문명’이라는 현상으로서 역사 속에 의미를 가지는 겁니다. 나는 소위 ‘근대문명’이라는 것이 그런 지속가능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서 하나의 ‘유사문명’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선생은 여러 문명권에 과거 존재했던 ‘제국’을 ‘제국주의’와 대비시켜 말해 왔지요. 전통시대의 제국이란 문명의 체화(體化)였습니다. 지속가능성을 가진 문명이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구조를 취할 때 ‘제국’의 형태가 나타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제국은 문명이 자연과의 모순을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갖는 것처럼 내외의 여러 반발 요소와의 모순을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갖는 겁니다. 근대 제국주의에서 나타난, 힘만으로 억지로 버티는 제국은 근대문명이 유사문명인 것처럼 하나의 ‘유사제국’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도(人道)’가 사라졌을 때 ‘인도주의’가 나타난 것처럼 ‘제국’이 사라졌을 때 ‘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 문명권의 옛날 제국체제에서 발견하는 균형감각에 개별적인 찬탄을 느끼기보다, 인류문명이 오랜 세월 발전시켜 왔다가 3백 년 전부터 혼미해진 문명의 기본 원리를 여러 문명권이 공유하던 요소로 확인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작업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석에서 발언을 요청받아 이만큼 정리된 이야기는 못 되었지만 이런 취지였다. 이 선생이 나중에 들어와 보고 작업명령서 접수를 정확히 하기 바란다.
멀쩡한 연구자를 로봇 취급하는 무례는 지정토론을 맡은 김상준 교수가 이 선생을 “도반(道伴)”입네 뭐네 하도 곱게 치장해 주는 것이 비위에 역해서 반발심으로 나온 것이다. 치과에 막 다녀와 마취가 덜 풀린 상태의 고약한 심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도 기분 좋은 일은 이 선생이 알파고가 이세돌 이긴 일을 들어 내 못지않은 무례로 맞받아쳐 준 것이고, 이후 발언에서 어디 갔단 말 할 때마다 “인도를 탐사할 때...” 식으로 “탐사”란 말을 굳이 써서 청중을 거듭거듭 웃게 만든 것이다.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1621?category=272887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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