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0

Namgok Lee - 요시다 쇼인과 6년 먼저 태어나고 5년 늦게 사망한 최제우



(5) Namgok Lee - 같은 시대를 살다 간 두 인물을 검색해 보았다. 요즘 많이 거론되는 요시다 쇼인과 6년 먼저...

Namgok Lee
1 hr ·

같은 시대를 살다 간 두 인물을 검색해 보았다.
요즘 많이 거론되는 요시다 쇼인과 6년 먼저 태어나고 5년 늦게 사망한 최제우다. 둘 다 각각의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는 전혀 다른 길을 밟았고, 두 사람이 끼친 영향도 두 나라의 운명만큼이나 달랐다.
역사는 돌고 돈다.
미래를 열어갈 큰 설계는 오히려 실패한 것으로 보인 최제우에게서 그 씨앗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큰 설계가 이 땅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그 설계 속에는 한국, 북한, 일본, 중국, 타이완 등이 하나의 연방으로 되는 것이 포함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질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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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1830년 하급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때 숙부 아래에서 독립해 군사학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850년 병법을 연구했고, 이듬해에는 서양 학문과 군사학을 배웠다.
1854년 미군 함선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여 국법을 어긴 죄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1858년 다시 체포되어 1859년 처형되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요시다 쇼인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 그의 문하에서 세 명의 총리와 여섯 명의 장관이 배출되는 등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이 탄생하여 그의 사상을 실현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7조약 을 체결한 후 쇼인의 무덤에 이를 고했으며, 2006년 아베 신조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을 꼽을 정도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치계에 그가 끼친 영향력은 그 누구보다 크다. 그의 위패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신위 제1호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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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1824년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게 살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 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열 살 무렵이 되어서는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고 한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까지 여의자 그는 3년상을 마친 뒤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비참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는 어떻게 하면 많은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1860년 4월 깨달음을 얻고,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포교를 시작하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인간평등 사상을 내세운 동학은 신분 제도 속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이나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1864년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달성공원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40의 나이였다.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며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주창했다. 
신분 계급제인 양반 사회를 부정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가지고 만민평등의 큰 뜻을 전파했다. 
또한 평민들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주체로 승격할 수 있다는 자주적 평등의 민족 사상을 국민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왕조 사회의 쇠망을 예언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이상향을 제시하였으며, 당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척양왜(斥洋倭)’의 자주적 저항 의식을 서민들의 마음속에 불어 넣었다. 그의 민본주의 사상은 그가 순교한 후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나날이 번창해 동학농민혁명에서 3·1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대 민족사의 정신적 주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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