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31

[제350호]호떡집에 불지른 수치의 역사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제350호]호떡집에 불지른 수치의 역사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호떡집에 불지른 수치의 역사

제350호
등록 : 2001-03-13 00:00


일제 계략에 빠져 화교 학살한 만보산 폭동… 우리가 가해자였던 사건은 왜 기억하지 않나


사진/만보산 사건이 보도되자 전국이 반중 감정에 휩싸였다. 평양 시민들에 의해 파괴된 중국인 거리.
우리는 무슨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호떡집에 불났냐”는 말을 쓰곤 한다. 이 말이 언제 생겼는지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아마 1931년 7월 초순 이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해 7월3일부터 9일 사이에 조선에 있던 호떡집 대부분이 불에 탔기 때문이다. 이때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떡집에 불난 것을 한꺼번에 본 적은 없었다. 불이 난 것은 호서방네 호떡집만이 아니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의 포목점도, 장서방의 이발소도, 주서방네 청과상도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이란 상점은 전국에서 대부분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최소 백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대적인 반중국인 폭동이 1931년 7월 초순의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군 것이다.



<조선일보>의 빗나간 특종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은 자기들이 정착한 나라에서 대개 상권을 장악하거나 최소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남과 북을 합친 우리나라에서 화교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화교의 역사는 120년에 달하고 해방 전에 인구가 최대 10만에 달했지만, 지금 그 수는 2만여명에 불과하다. 이들 2만명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증가한 외국인노동자와는 구별되는 우리 사회 안에 오랜 기간 정착해 온 소수민 집단이다. 이들 화교에게 가해진 압박과 차별과 불관용의 역사는 단일민족사회를 표방하는 우리의 배타적 민족주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남아의 화교들과는 달리 이 땅의 화교들이 기껏해야 자장면 정도밖에 팔 수 없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이유가 있다. 이 땅의 화교들의 고달픈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그리고 우리의 인종주의가 낳은 가장 부끄러운 사건은 역시 1931년 7월의 반중국인 폭동이다.


이 폭동의 계기가 된 만보산(萬寶山) 사건은 교과서에도 나오고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이에 뒤이은 반중국인폭동은 일반인은 물론 한국사 전공자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만보산 사건이란 1931년 5월 하순부터 장춘 근교의 만보산 삼성보(三姓堡)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 문제를 둘러 싸고 일어난 분규이다. 6월 초순 중국경찰이 개입하여 조선농민을 몰아내자, 일본의 영사경찰은 조선농민들이 법적으로 일본신민이라며 이 분규에 개입했고, 조선농민들은 일본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공사를 강행했다. 몇차례 충돌 끝에 7월1일 중국농민 200여명이 조선인들이 만든 수로를 파괴하자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중국농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는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것이 만보산 사건이었다.

만보산에서 조·중 농민 간에 처음 충돌이 발생한 이래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는 모두 3번 이 사건을 보도한 반면, 1927년 이래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주도해 온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모두 16차례나 보도했다. 1920년대 후반 이래 중국관헌들이 재만동포를 박해하고, 또 중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조선인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의식이 퍼지면서 조선에는 반중국인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 반중국인감정에 불을 당긴 것은 1931년 7월2일 밤과 3일 새벽에 <조선일보>가 이례적으로 두 차례나 발간한 호외였다. 호외는 ‘중국관민 800여명과 200동포 충돌 부상/ 장춘 일본 주둔군 출동 준비/ 대치한 일ㆍ중관헌 1시간여 교전/ 급박한 동포안위/ 기관총대 급파/ 전투 준비 중’ 등 당시의 상황을 다급하게 전했다. 더구나 기사의 내용은 동포 다수가 부상이 아니라 살상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참혹한 폭동, 사망 100여명






사진/만보산 폭동 이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재만동포위문단’.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급보는 오보였다. 오보도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주침략의 길을 닦으려는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허위정보에 속아 넘어간 역사적인 오보였다. 이는 민족주의적 언론 - 당시의 <조선일보>는 지금처럼 망가지기 전으로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지였다 - 이 제국주의에 이용당한 불행한 사례였다. 조선일보 특파원 김이삼(金利三)은 장춘의 일본영사경찰서가 제공한 만보산 사건에 대한 허위정보를 현장확인을 거치지 않고 타전하였고, 경성(서울)의 <조선일보> 본사 역시 특파원이 다급하게 송고한 내용을 그대로 호외로 발행했다. 이 호외의 여파는 의외로 컸다. 호외가 뿌려진 직후인 7월3일 새벽부터 인천에서 중국인 가옥과 상점에 대한 투석이 시작되는 등 전조선에서 반중국인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7월4일 폭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서울 서소문의 중국인 거리에는 5천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중국인 상점의 물품을 끄집어 내어 파괴하고 중국인들을 닥치는대로 구타했다. <정감록>의 참언도 폭동이 악화되는 데 한 몫을 했다. <정감록>에 ‘魚羊亡於古月’이란 구절이 있는 데 魚羊을 합치면 조선의 鮮이 되고 古月을 합하면 중국을 의미하느 胡가 된다. 즉 조선이 중국에 망한다는 뜻이다.

폭동은 평양, 진남포, 부산, 전주, 대구, 개성,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청주, 공주, 이리, 군산, 안주, 재령, 신의주, 의주, 선천, 수원, 청주, 춘천, 마산, 선천, 운산, 해주, 안변 등 전국으로 번져 모두 400여회 이상의 습격사건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심지어는 재일조선인들이 일본 내의 중국인들을 습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당시 중국인들은 도시 뿐 아니라 농촌의 중심지에도 깊숙이 들어가 음식점이나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중국인이 있던 곳에서는 모두 폭동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전국의 중국인 거리는 문자 그대로 피비린내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참혹한 폭동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총독부 경무국의 발표로는 사망 100여명에 부상자 190명,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자료에 의하면 사망 122명, 부상 227명,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에 의하면 사망 127명, 부상 393명, 재산피해 250만원이었고, 중국쪽 자료에 의하면 사망이 142명, 실종 91명, 중상 546명, 재산손실 416만원, 영사관에 수용된 난민이 화교 전체 인구의 1/3에 육박하는 1만6800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자만 1800여명이었고, 사형 1명을 포함하여 벌금 이상의 처벌을 받은 자만 해도 1011명에 달했다. 총독부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교도소 가건물을 지어야 했다.

폭동 직전인 1930년말 화교의 총인구는 6만9000여명이었으나, 폭동과 그에 뒤이은 1931년 9월18일 일제의 만주침략의 여파로 중국으로의 귀환자가 속출하여 1931년 말에는 5만6000여명, 1933년 말에는 3만7000여명으로 급감했다. 1992년 4월29일 코리아타운을 휩쓸고 지나간 LA폭동 당시 한국인 희생자가 1명, 그것도 폭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경비를 서던 사람들끼리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한 것에 비한다면 1931년의 반중국인폭동이 얼마나 과격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평양의 폭동은 ‘검은 손’이 움직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사회지도층들은 즉각 진화에 나섰다. 만보산 사건에 관한 결정적인 오보로 폭동을 촉발하게 된 <조선일보>는 재만동포의 옹호를 위해서는 재조선 중국인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보산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신중하게 보도한 <동아일보> 역시 이 사건에는 조ㆍ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려는 음모가 숨어 있다면서 흥분한 대중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특히 재조선 중국인들에 대한 습격에 분노한 중국인들의 보복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재만동포들은 정말 우리를 생각한다면 중국인들에 대한 박해를 즉각 중단해달라고 호소했다. 한용운(韓龍雲), 안재홍(安在鴻), 송진우(宋鎭禹) 등 민족주의자들은 조선각계연합협의회를 결성하여 이 불상사가 조선민족 전체의 의사가 아님을 천명하며 두 민족의 우의를 증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보산 사건으로 재만동포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오보임이 밝혀지고, 민족지도자들의 폭동 자제 호소가 먹혀들어가 7월7일부터 폭동의 기세는 꺾여 7월10일에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 폭동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엄청난 인명피해가 평양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1923년 평양의 화교인구는 779명으로 서울의 4107명, 신의주의 3641명, 인천의 1774명에 비해 훨씬 적었다. 그런데 폭동이 가장 먼저 발생한 인천에서 화교가 피살된 것은 2명이고, 규모 면에서 가장 큰 반중국인시위가 있었던 서울에서는 중국인 사망자는 없이 조선인 1명이 살해당한 것에 비해 평양에서만 경무국 발표의 전국 사망자 100여명 중 절대다수인 94명(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의 자료로는 평양에서만 216명)이 살해당한 것이다.

왜 전국적으로 발생한 반중국인폭동이 유독 평양에서만 집중적인 살상극으로 발전했을까? 전국에서 희생자가 고루 발생하였다면 모르지만, 유독 평양에서만 집중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평양의 폭동에 ‘검은 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컸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일본, 특히 만주의 관동군과 연결된 조선 주둔 일본군이 만주침략을 앞두고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당시의 언론 역시 평양시내의 모든 자동차가 관에 의해 징발된 상황에서 3천여명의 군중 속을 한대의 트럭이 백기를 달고 수십명의 사람을 태우고 폭동을 선동하며 다닌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평양의 화교지도자들은 평양에서의 참사를 ‘어떤 흑수(검은 손)가 군중심리를 이용한 것’으로 단정지었다.



재만조선인 보복은 없었으나






사진/만보산의 조·중 농민간의 충돌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중국의 언론들도 반일감정이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평양에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했는데 일본인으로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들어 이 폭동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했다. 중국의 신문들은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조선인들의 반일시위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진압한 일본경찰, 조선사람이 셋만 모여도 감시하고 해산하는 일본경찰이 인천, 서울, 평양에서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파괴와 방화와 살인을 일삼는 것을 방치한 것은 분명 계획적인 음모에 따른 것이었다고 보았다. 더구나 일본경찰은 조선의 민족단체나 지식인들이 폭동의 자제를 호소하는 전단을 배포하거나 강연회를 개최하려는 것은 철저히 막았다. 또 중국으로 급히 귀환한 화교들은 일본인이 조선옷을 입고 폭동을 선동했다고까지 증언하기도 했다. 평양에서 귀환한 화교들은 일본인들이 돈을 주고 조선인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파괴 살육에 앞장서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쪽은 일제 당국이 이 폭동을 방임한 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발동하고 지휘한 것이 아닌가 혐의를 두었다.

다행히도 임시정부나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지도자 등 재중 조선민족주의자들의 호소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중국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조선의 반중국인폭동이 재만조선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1931년 7월20일 국민당 간부 채원배(蔡元培)는 <만보산사건과 조선의 배화참안(排華慘案)>에 대한 보고에서 조선에서 중국인들이 박해를 받았다고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보복을 가하면 일본인들이 군대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의화단(義和團) 사건 때의 외국인 배척운동이 제국주의의 개입을 가져온 것 같은 비극적인 사태를 피하기 위해 재만조선인들을 원수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을 반중국인 폭동이 휩쓸고 지나간 두달 뒤인 1931년 9월18일, 일제는 만주에 대한 무력침공을 강행하여 만주를 점령했다. 만주침략의 음모를 꾸미던 일제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펴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아가 일제는 조선에서의 반중국인폭동이 재만조선인들에 대한 보복을 불러 오면 이를 기화로 군대를 출동시킬 명분을 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일제의 기도를 간파한 중국과 조선 두 민족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재만조선인들에 대한 큰 보복은 없었지만, 이 폭동으로 조선인과 중국인 간에 깊은 감정의 골이 패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만주를 강점하고 괴뢰 만주국을 세운 뒤 관동군 사령관은 일본인 관리에게 “조선인과 중국인의 사이는 소원해야지 친밀해서는 안된다. 두 민족이 충돌할 때, 시비가 동등한 경우에는 조선민족의 편을 들어 한민족을 억누른다”라는 비밀지령을 내려 이간책을 계속했다. 이 감정의 골은 1930년대 전반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손잡고 싸우는 데 큰 장애를 주었다.

1931년 7월의 불행하고도 부끄러운 반중국인 유혈참극은 우리 민족의 순진한 동포애와 출로를 잘못 찾은 민족주의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이용당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자주 분노한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해 분노하고, ‘일본군 성노예’(정신대) 만행에 대해 분노하고, 또 재일동포들에 대해 가해지는 차별에 대해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해자가 되었던 사건들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낳고 자라고 뼈를 묻어도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화교들의 처지를 보면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에 분노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화교, 등이 굽은 물고기…






사진/폭동 당시 일본군의 호위 아래 이동하고 있는 중국인들.일본은 철저한 ‘이간책’을 구사했다.
어느 시인은 고향을 등이 굽은 물고기들이 사는 한강에 비유했다. 등이 굽은 새끼들을 낳고 숨막혀 헐떡이며 그래도 떠나지 못하는 서울의 시궁창. 그 떠나갈 수 없는 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예가 이 땅의 화교들이다. 그러나 1931년의 폭동에도 살아남은 화교들은 1970년대 중반 이래 이 땅을 떠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3만5천여명이던 화교는 이제 2만 남짓하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화교자본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 화교 수가 계속 줄고 있는 나라”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1961년의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과 1963년의 화폐개혁 등 굵직한 시책에서부터 참 치사했던 1973년의 중국음식점의 쌀밥판매금지령에 이르기까지 화교에게 가해진 무궁무진한 차별이 그 질긴 화교들을 손들게 만들었나 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우리가 당한 비극이 기록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비극의 역사가 피해자들만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떡집이란 호떡집에 모두 불이 난 사연, 이것이 어찌 화교들만의 불행한 역사일 수 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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