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뚜이부치>-사과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다 - 주간경향
[만화로 본 세상]<뚜이부치>-사과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다
만화 <뚜이부치>의 실존 인물 아즈마 시로가 보여준 사과의 행위에는 당장의 성가심을 피하려는 몸짓도, 상황을 빨리 수습하려는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주말,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한 빌딩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늘 그랬듯이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지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앞쪽의 사람을 피하려 몸을 돌린다는 것이 뒤쪽 사람을 스쳐 세면대 앞에 서 있던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통화 중인 데다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아 별일 아닌 듯 손을 씻으려는데, 옆에서 “부딪쳤으면서 왜 사과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자기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황급히 “죄송해요”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사과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빌딩 밖으로 나와서 우연히도 저만치 앞에서 걷고 있는 ‘그 사람’을 보았다.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화가 났는지 흥분을 했는지, 그냥 기분이 들떴는지 알 수 없었지만 큰소리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좀 전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는 사과를 받으면서도 그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마지 못해 혹은 귀찮아서 하는 사과라는 것을 안다는 얼굴이었다. 아마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예의 없는 어떤 ‘한 인간’에 대하여 실컷 욕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사과는 분명 피해를 당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할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못을 한 나 스스로의 곤란함을 빠르게 모면하려는 행위였다. 평소라면 사과를 하고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상대에 대한 불평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투덜거리는 대신에 일상의 사과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위한 행위라는 상념에 잠길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최덕현 작가의 만화 <뚜이부치>에서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벌이는 장면. / 최덕현 작가 제공
난처한 상황 피하고 싶어 사과한 문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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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불거진 이슈에 ‘사과’가 따르는 경우를 자주 본다. 가까이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문회에 출석하여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로 많은 문화예술인은 물론 국민께 심대한 고통과 실망을 야기한 점에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국회의원들조차 불쾌한 마음을 풀 수 없는 사과였다. 장관은 난처한 상황을 우선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내 마음처럼. 2년 전, 메르스 사태를 맞아 ‘사과의 정석’이라는 칭찬을 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과문도 생각이 난다. 변명이나 핑계 없이 깔끔한 언어에 다시 한 번 고개 끄덕이게 되지만, 이후 어떤 조치와 노력이 뒤따랐는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혹시 그날 내가 속으로 되뇌었듯이 ‘당신이 화가 난 것은 내가 모르지 않으니 이제 그만하시오’라는 귀찮음의 속내가 진심은 아니었을까.
사과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해준 만화 <뚜이부치>를 소개하고 싶다. 2006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 대상을 받았고 2007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10여년이 흘러 2016년이 되어서야 1인 출판의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만화는 1937년 12월, 일본군에게 30만명이 목숨을 잃은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실존 인물의 수기를 참고하여 창작되었다. 주인공인 일본군 장교 아즈마 소위는 중일전쟁에 참전했으나 일본군이 포로와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한 학살과 유린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자신이 생각하던 천황의 군대, 일본군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에 번뇌에 빠진다.
아즈마는 한 중국 여성을 겁탈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지만, 이후 포로로 수용되는 대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와 일하고 있는 그 여성을 발견하고는 평정심을 잃는다. 여성을 탈출시켜 난징 내 국제 안전구역으로 데려가리라 마음먹지만 전투와 학살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난징을 가로지르는 길은 험난하다. 일본군과 중국인 모두로부터 피하기 위해 숨고 걷기를 반복하던 상황 속에서, 잠시 아즈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일본 군인들이 은신처에 들이닥치고 여성은 겁탈과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격분해 이성을 잃은 아즈마는 결국 폭행죄로 중대장 자격을 박탈당하고 포로 담당 소장으로 전임된다. 그리고 아즈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목을 베는 처지가 된다.
1인 출판된 만화 <뚜이부치>의 표지. / 최덕현 작가 제공진실된 사과의 기본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50년이 흘러 노인이 된 아즈마는 중국 여행을 떠나게 된다. 중국을 향하려니 그 여성의 얼굴이 떠오르고 마음이 괴롭다.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중국어 “뚜이부치”를 비행기를 탄 내내 연습한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 앞에 서 있던 아즈마는 공을 주우려 달려가다 넘어진 중국 꼬마아이의 상처를 닦아주며 말한다. 그 여성에게, 다른 모든 중국인 희생자에게 하고 싶던 말을. “뚜이부치.”
주인공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아즈마 시로는 난징 대학살 당시 직접 중국인 10명을 참수한 병사였다. 당시 상황을 일기로 남겨두었고, 50년이 지난 1987년에 <아즈마 시로 일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에 등장하는 전우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지만 아즈마 시로가 실제 중국을 방문하여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감명 받았다고 한다.
만화 <뚜이부치>와 실존인물 아즈마 시로가 보여준 사과의 행위에는 당장의 성가심을 피하려는 몸짓도, 상황을 빨리 수습하려는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잊지 않고 있었다. 중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서 50년 전에 하지 못한 말을 상기했다. 구하려 했으나 고통만 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실존인물 아즈마 시로는 스스로의 잘못을 일기로 남겨 기억하였고, 50년이 지나서도 잊지 않고 책으로 세상에 알렸다.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 진실된 사과의 기본이다. 우리 기억 속에 사라진 수많은 사과들은 아마 갈등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요식적 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쉽게 잊혀졌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오히려 곤란에 처해버린 중국 여성에게 미안함을 행동으로 옮겼다. 불행한 결말이었지만 구하려 애썼다. 결국은 실패했지만 포로를 참수하지 않으려 저항도 해보았다. 아즈마 시로는 책을 내며 온갖 비난과 위협을 무릅썼다. 전우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도 패소했다. 사과의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한 법이다. 사과를 했을 때 상대방이 바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면, 역시 상대방을 위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꾀하였을 뿐이다. 사과는 하지만 행동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안타깝지만 만화 속 진심 어린 사과로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현실은 어떠한가.
일상의 삶에서,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상에서 오늘 하루도 수많은 사과를 경험한다. 물론 형식적인 사과도 서로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우리 문화는 이를 예의범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원만한 인간관계와 평온한 사회 유지를 위한 큰 가치로 삼고 있다. 하지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이 사과를 통해 주변의 비난과 당혹스러움을 우선 넘어갈 수 있는 만큼, 피해를 입은 상대방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행동해 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실수로 부딪쳐 놓고 사과를 제때 하지 않아 불평을 듣고, 억지로 사과를 하고서도 ‘억울하다’며 투덜거리는 중년의 모습은 볼썽사납지 않은가. 사과의 말을 전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무엇에 근거한 액수인지 모르지만 돈으로 보상을 했으니 상처 자체를 떠올리지 말라며 타국을 압박하는 일국의 총리의 모습 역시 볼품없다. 영향력 큰 분들일수록 ‘사과’의 의미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신재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1161750031&code=116#csidxae957b12ebcd23e8890dc0044d0a698
사회적으로 불거진 이슈에 ‘사과’가 따르는 경우를 자주 본다. 가까이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문회에 출석하여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로 많은 문화예술인은 물론 국민께 심대한 고통과 실망을 야기한 점에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국회의원들조차 불쾌한 마음을 풀 수 없는 사과였다. 장관은 난처한 상황을 우선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내 마음처럼. 2년 전, 메르스 사태를 맞아 ‘사과의 정석’이라는 칭찬을 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과문도 생각이 난다. 변명이나 핑계 없이 깔끔한 언어에 다시 한 번 고개 끄덕이게 되지만, 이후 어떤 조치와 노력이 뒤따랐는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혹시 그날 내가 속으로 되뇌었듯이 ‘당신이 화가 난 것은 내가 모르지 않으니 이제 그만하시오’라는 귀찮음의 속내가 진심은 아니었을까.
사과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해준 만화 <뚜이부치>를 소개하고 싶다. 2006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 대상을 받았고 2007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10여년이 흘러 2016년이 되어서야 1인 출판의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만화는 1937년 12월, 일본군에게 30만명이 목숨을 잃은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실존 인물의 수기를 참고하여 창작되었다. 주인공인 일본군 장교 아즈마 소위는 중일전쟁에 참전했으나 일본군이 포로와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한 학살과 유린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자신이 생각하던 천황의 군대, 일본군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에 번뇌에 빠진다.
아즈마는 한 중국 여성을 겁탈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지만, 이후 포로로 수용되는 대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와 일하고 있는 그 여성을 발견하고는 평정심을 잃는다. 여성을 탈출시켜 난징 내 국제 안전구역으로 데려가리라 마음먹지만 전투와 학살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난징을 가로지르는 길은 험난하다. 일본군과 중국인 모두로부터 피하기 위해 숨고 걷기를 반복하던 상황 속에서, 잠시 아즈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일본 군인들이 은신처에 들이닥치고 여성은 겁탈과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격분해 이성을 잃은 아즈마는 결국 폭행죄로 중대장 자격을 박탈당하고 포로 담당 소장으로 전임된다. 그리고 아즈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목을 베는 처지가 된다.
1인 출판된 만화 <뚜이부치>의 표지. / 최덕현 작가 제공진실된 사과의 기본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50년이 흘러 노인이 된 아즈마는 중국 여행을 떠나게 된다. 중국을 향하려니 그 여성의 얼굴이 떠오르고 마음이 괴롭다.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중국어 “뚜이부치”를 비행기를 탄 내내 연습한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 앞에 서 있던 아즈마는 공을 주우려 달려가다 넘어진 중국 꼬마아이의 상처를 닦아주며 말한다. 그 여성에게, 다른 모든 중국인 희생자에게 하고 싶던 말을. “뚜이부치.”
주인공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아즈마 시로는 난징 대학살 당시 직접 중국인 10명을 참수한 병사였다. 당시 상황을 일기로 남겨두었고, 50년이 지난 1987년에 <아즈마 시로 일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에 등장하는 전우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지만 아즈마 시로가 실제 중국을 방문하여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감명 받았다고 한다.
만화 <뚜이부치>와 실존인물 아즈마 시로가 보여준 사과의 행위에는 당장의 성가심을 피하려는 몸짓도, 상황을 빨리 수습하려는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잊지 않고 있었다. 중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서 50년 전에 하지 못한 말을 상기했다. 구하려 했으나 고통만 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실존인물 아즈마 시로는 스스로의 잘못을 일기로 남겨 기억하였고, 50년이 지나서도 잊지 않고 책으로 세상에 알렸다.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 진실된 사과의 기본이다. 우리 기억 속에 사라진 수많은 사과들은 아마 갈등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요식적 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쉽게 잊혀졌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오히려 곤란에 처해버린 중국 여성에게 미안함을 행동으로 옮겼다. 불행한 결말이었지만 구하려 애썼다. 결국은 실패했지만 포로를 참수하지 않으려 저항도 해보았다. 아즈마 시로는 책을 내며 온갖 비난과 위협을 무릅썼다. 전우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도 패소했다. 사과의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한 법이다. 사과를 했을 때 상대방이 바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면, 역시 상대방을 위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꾀하였을 뿐이다. 사과는 하지만 행동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안타깝지만 만화 속 진심 어린 사과로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현실은 어떠한가.
일상의 삶에서,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상에서 오늘 하루도 수많은 사과를 경험한다. 물론 형식적인 사과도 서로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우리 문화는 이를 예의범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원만한 인간관계와 평온한 사회 유지를 위한 큰 가치로 삼고 있다. 하지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이 사과를 통해 주변의 비난과 당혹스러움을 우선 넘어갈 수 있는 만큼, 피해를 입은 상대방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행동해 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실수로 부딪쳐 놓고 사과를 제때 하지 않아 불평을 듣고, 억지로 사과를 하고서도 ‘억울하다’며 투덜거리는 중년의 모습은 볼썽사납지 않은가. 사과의 말을 전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무엇에 근거한 액수인지 모르지만 돈으로 보상을 했으니 상처 자체를 떠올리지 말라며 타국을 압박하는 일국의 총리의 모습 역시 볼품없다. 영향력 큰 분들일수록 ‘사과’의 의미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신재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1161750031&code=116#csidxae957b12ebcd23e8890dc0044d0a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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