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31

손민석 - 청년 담론에 대한 분석 이경훈의 <오빠의 탄생>



(13) 손민석 - ‘45세’ 이상의 중장년층조차도 “청년”이라 포장하는 한국 정치지형 속에서 청년 담론에 대한 분석은 의미도...







손민석
19 hrs ·



‘45세’ 이상의 중장년층조차도 “청년”이라 포장하는 한국 정치지형 속에서 청년 담론에 대한 분석은 의미도 없거니와 계급적 문제를 사장하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주변의 청년 담론 연구하는 이들에게 비싼 밥 먹고 그런 걸 하냐고 뭐라 했다가 싸운 적도 몇 번 있다. 그렇게 격하게 얘기할 정도로 청년 담론에 대한 언급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데 엊그제 헤겔의 <정신현상학>, <미학강의> 등과 이경훈의 <오빠의 탄생>을 읽다가 조금 생각에 변화가 오고 있다.

이경훈은 <오빠의 탄생>에서 근대 한국 문학의 정신세계를 오빠 - 여동생 간의 관계로 독해한다. 부모 세대의 전근대성에 반발하며 새롭게 근대성을 체현하고 실현하려는 주체로서 오빠 - 여동생 간의 ‘동지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지적은 꽤나 흥미로웠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오빠와 여동생 간에 “청년”이라는 세대 담론이 개재해 있다고 지적한다. ‘오빠의 친구’이자 ‘여동생의 연인’으로서의 “청년”이라는 존재가 근대성을 체현하고 실천하면서 진보를 추동하는 주체로 상정된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를 ‘새로운 매체’ 사용에 익숙한 근대성의 체현자이자 전파자로 상정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안티고네를 분석하며 크레온과 안티고네 모두 ‘인류성’을 지니고 있지만 안티고네의 인륜성이 보다 나은 것이라 주장한다. 크레온은 국가의 원리로 가족의 원리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에 입각해 개별성을 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는데 반해 안티고네는 가족의 원리를 국가의 원리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개별성에 입각해 보편성으로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둘다 나름의 인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둘 모두 보편성과 개별성 간의 관계를 망각한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렇다면 헤겔의 입장은 양비론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크레온의 인륜성은 자신의 뿌리, 핏줄을 망각하며 보편성이 다른 인륜성으로 나아갈 길을 막아버린데 반해 안티고네는 자신의 핏줄에 기초해 있고 더 나아가 그러한 핏줄과의 관계 속에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인륜성이 내재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오빠에 대한 안티고네의 입장은 자연적 공동체가 사회적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인륜성의 한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레온보다 높게 평가될 수 있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가족을 다루면서 부부 간의 결합을 타자의 의식 속에서 자신을 직관하는 것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헤겔에게 있어 사랑은 굉장히 모순적인 것인데 상대가 없으면 내 삶 또한 의미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불완전성과 내가 상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성이 모순적으로 얽혀 있는 감정적인 상태이다. 상대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불안정하다. 언제든지 해소될 수 있다. 그렇기에 가족관계는 그 산물인 자식과 공동의 재산을 통해서 유지된다. 이러한 물적 기반이 없는 가족관계나 사랑은 언제든 쉽게 해체될 수 있는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나 사랑도 사실 이런 우연성과 자연성을 극복하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만큼이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는 비대칭성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부 간의 사랑의 산물인 자식들 간의 관계는 자연성에서 사회성으로 나아가는 한 계기가 된다. 분명 자연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 남매 간의 관계는 분명 이성간의 관계이지만 부부관계나 연인관계와 같은 자연적인 관계가 아니다. 남매 사이는 여성과 남성으로서의 자연적 사랑이 극복되고 서로가 서로를 개별체로 인정하는 인륜적 관계의 한 계기로 헤겔에게 인식된다. 이것은 자연적 결속에 대한 충실한 감정상태로,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민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와 신에 대한 충실한 감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인륜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오빠와 여동생이라는 남매 관계는 이경훈의 주장과 겹치는 지점이 많다. 주지하다시피 헤겔에게 있어 남성은 보편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적 개체이다. 반면에 여성은 그런 남성을 가정 내에서 보좌하고 남성이 다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끔 가족 내부의 일을 처리하는 개체적 존재이다. 오빠라는 남성은 사회적 개체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자연적 근원인 가족을 담당하는 주체로 여동생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여동생 또한 오빠를 가족의 통일성 속에서 형성되어 사회로 나아가 보편적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적 개체로 인정한다. 둘 간의 이러한 인정 속에서 가족 구성원은 가족이라는 자연적 결합체에서 벗어나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고 더 나아가 국가라는 인륜의 현실태를 통해 자유를 세계사적 규모에서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 대한 설명이 다소 길었는데, 이경훈의 <오빠의 탄생>에서 언급되는 오빠 - 여동생 간의 관계 또한 헤겔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근대성을 체현하고 식민지 사회의 전근대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오빠와 그런 오빠를 뒤따르고 지지해주는 여동생, 가족 내부의 전근대성으로부터 여동생을 보호해주고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게끔 지지해주는 오빠, 하지만 그런 여동생의 지위는 여전히 오빠를 지지해주고 오빠의 동지인 ‘청년’의 연인에 위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헤겔의 표현처럼 가족이라는 자연적 근원을 벗어나는 일이 여동생에게는 잘 허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오빠 - (청년) - 여동생이라는 구도는 근대적 개인이 ‘진보’라는 근대성의 핵심을 실천하기 위한 정신세계를 표현한 도식이 아닌가 싶다. 식민지 사회라는 특수성이 발현되는 게 아니라 근대사회라면 식민지 사회든 어디든 어디서나 나타나는 정신세계가 아닌가. 이런 보편적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적 개체로서의 남성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개체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구도가 오빠 - 여동생에서 연인 혹은 남편 - 아내로 청년 - 중장년 - 노년이라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역사적으로 청년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 이것저것 뒤지고 있는데 넘쳐나는 청년담론은 전부 다 현세대의 20대, 특히 남성을 그 주요한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 역시나 청년담론은 쓸데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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