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폭력(減暴力)’을 위해 평화“들”을 이야기하자
기사승인 2018.12.03 19:3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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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평화사상』 기획한 이찬수 교수를 만나다
분량만해도 두 권 9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 출판되었다. 『한국인의 평화사상』 1권과 2권이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종교인와 지식인들의 평화사상을 오롯이 담아냈다.
1권은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원효에서 안중근까지”를 담아내 근대 한국 사회의 평화사상을 드러냈다. 그리고 2권은 “유영모에서 김대중까지”로 현대 평화사상의 흐름을 집어낸 책이다. 이 외에 또 어떤 인물의 평화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을만큼 망라된 것이다.
이 책을 기획·편집한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만났다. 한국 사회 평화의 상징처럼 세워져 있는 명동성당 앞 작은 카페에서 이 교수를 만나 인터뷰 했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기존 평화담론과의 차별성이 기자에게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평화가 아니라 평화“들”이다
한국 사회의 편향된 평화사상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기자의 귀를 울렸던 말은 영어에서 평화를 뜻하는 대문자 “P”eace가 아니라 소문자로 “peaces”로 평화들을 강조하는 이 교수의 주장이었다. 평소의 성품대로 조용했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지금 청와대는 물론이거니와 김정은도 트럼프도 다들 평화 얘기해요. 그런데 세상은 별로 평화롭지 않잖아요? 도리어 갈등하죠. 왜냐하면 저마다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예요. 그래서 현실에서 평화는 어떻든 여러 가지, 즉 복수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대문자 단수로서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길은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대화, 타협을 통해 합의해나가는 길 밖에 없어요.”
저마다 주장하는 평화라는 단수의 폭력성을 벗어나 각자의 평화를 이야기 하고 함께 평화를 만들어보자는 대화와 소통의 평화를 강조하는 이야기였다. 신선하다는 느낌보다는 깨달음의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그간 한국사회나 아니 인류가 가지고 있던 평화가 오히려 폭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았다.
‘감폭력(減暴力)’, 과정으로서의 평화
또한 이 교수는 ‘감폭력(減暴力)’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어를 소개했다.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폭력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평화라는 개념 자체가 “‘폭력을 줄이는 과정’으로 규정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에서 만들어낸 개념어라고 했다. 즉 평화는 어느 순간에 딱 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 가는 과정 자체를 강조한 것이었다.
▲ 『한국인의 평화사상』 1, 2권을 기획하고 출판한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단 하나의 평화라는 폭력성이 아니라 다양한 평화“들”을 이야기하며 대화와 소통을 강조했다.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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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말부터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남북평화에 대한 그리고 평화통일에 대한 장밋빛 미래가 어느 새 잿빛회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평화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하지만 이루어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이 교수의 평화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그 과정을 감내하고 끝까지 평화를 향해 가는 길 자체가 평화임을 강조하는 것. 한국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다음은 이찬수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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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국사상들에는 평화개념이 충만하다
- 책을 보내주신 걸 보니까, 이 질문을 먼저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담론이 어마어마 하게 쏟아지고 있는데요, 이 책이 다른 책과 이런 점이 다르다. 이렇게 만드시고 쓰시고 나서 나는 이런 점에 중점을 뒀다. 이런 소개 해주실 만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요새 평화라는 말은 많이 하는데, 대체로 평화를 수식어로만 쓰는 경향이 있어요.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며, 평화라는 낱말은 많이 쓰지만, 무엇이 평화인지,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 책은 일단 한국인은 오랫동안 평화에 해당하는 가치를 어떻게 상상해왔는지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들 22인의 생각을 정리한 책입니다.
근대 평화학이 서구에서 만들어져 수입되다시피 했는데, 이 책을 보면 서구 시각의 평화학자들이 추구하는 평화의 내용이 원효부터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이 천오백년 이상 추구해온 내용과 다르지 않거나, 때로는 한국의 평화론이 그 이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평화는 근대어이고, 한국의 옛 사상가들이 평화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요새 얘기하는 ‘적극적 평화’, ‘소극적 평화’와 같은 개념이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 안에서 통용되고 있었다는 거예요.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 22명의 평화론을 정리한 이 책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은 처음 나온 것 같아요.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한국사회 평화통일의 문제가 앞으로 다가올 것이고 그런 데 있어서 이 책이 기여할 수 있는 점은 어떤 것일까. 그게 제일 궁금한 점입니다.
‘평화’라는 말이 120여년 전 일본에서 영어 peace에 대응하는 언어로 만들어졌고, 한국도 따라 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적 평화론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설령 평화라는 말은 안 썼다고 해도 그에 해당하는 언어는 풍성하고 깊었지요. 이 책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어요.
- 우리 사회의, 민족 내의 이미 그런 사상이 있었다면 평화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우리 민족은 평화란 말 대신 어떤 말은 쓴 건가요?
대표적으로는 ‘논쟁의 조화’를 의미하는 원효의 ‘화쟁(和諍)’을 들 수 있어요. 화쟁은 단순히 모든 것을 다 긍정하는 논리가 아니에요. 부당한 권력의 폭로와 그로 인한 아픔의 치유까지 포함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 잘 밝히고 있어요.
신라시대 최치원이 말하는 ‘포함삼교’(包含三敎)에서의 ‘포함’도 평화학적 함의가 큽니다. 포함삼교는 삼교, 그러니까 다양성을 화학적으로 녹여낸다는, 이른바 다양성의 조화를 의미해요. 정조대왕은 정치적으로 탕평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준론탕평’이 오늘날의 평화학자 갈퉁이 말하는 ‘소극적 평화’에 해당한다면, ‘대동탕평’은 ‘적극적 평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해월 최시형이 말한 ‘인오동포(人吾同胞)’, ‘물오동포(物吾同胞)’는 일종의 평화적 사해동포주의이고, 전봉준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은 폭력 없는 국가, 안전한 백성을 의미하니까, 근대 평화학에서 얘기하는 전형적인 평화 실천의 사례들이죠. 만해 한용운은 ‘균형’을 강조했구요. 이런 것들이 모두 한국적 평화에 해당하는 얘기들입니다. 예를 계속 들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요.
- 그러면 서구에서 발달되고 근대에 일어나면서 평화사상이 정착되긴 했는데, 우리나라의 내용들과 차이점들은 없나요? 외국에서 발달된 평화 담론과 우리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이 책을 엮은이의 입장에 보면, 한국의 평화사상과 서구의 평화사상의 차이는
- 서양의 유일신론적 혹은 신-인간 이원론적 사유와 동양의 비이원론적 사유의 차이와 같은 것 같아요.
- 서양의 평화는 정의(正義) 문제와 연결되고 정의 문제는 법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법은 항상 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거예요. 서양에서 더 발달한 법에는 우열을 판단하는 잣대가 있는데,
- 동양은 그게 상대적으로 두루뭉술하달까요.
- 동양에서는 정확히 이게 맞고 저거는 틀렸어 하는 방식보다는, 원칙론적인, 그러니까 다름을 인정하면서, 전체를 조화롭게 인정해 가는 게 옳다는 식의 자세가 더 큰 것 같아요.
- 평화를 법과 정의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서양적 사고방식과에 비해서는 포용과 조화를 좀 더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이건 평화뿐만 아니라 동양 사상의 전반적인 모습이기도 하지요.
기울어진 평화 개념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 책의 목차만 보더라도 꽤 오랜 시간 기획하신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준비를 하신 건가요?
생각은 한 3년 전부터 했고, 그 뒤 2년 정도에 걸쳐 1년에 2차례 총 4번의 학술회의를 했고, 학술회의 결과를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에서 내는 저널 『통일과 평화』에 게재한 뒤 개별 저자들이 그걸 다시 수정해서 단행본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기획부터 출판까지 3년 쯤 걸린 거죠.
- 3년전이라면 흔히 쓰는 말로 엄혹한 시절이었는데, 이걸 기획하실 때는 어떤 생각을 하신 건가요?
엄혹한 시절이라는 말까지 갈 건 없을 것 같아요.(웃음) 제가 일하고 있는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은 원래 서울대 통일연구소로 시작했고 지금도 통일연구 경향이 강해요. 북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오고 있지요.
그런데 북한 혹은 통일 관련 연구는 대체로 국제정치적, 외교적, 그리고 다소 단기적 차원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빨리빨리 변하는 현실정치 차원에는 중요한 접근법이죠. 그러나 국제정치적 접근법이 중요한 만큼 그 정치가 이루고자 하는 평화의 내용에 대한 공감대를 국민적 차원에서도 만들어가야 해요. 그런데 그 공감대를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의 오랜 역사와 지혜에서 찾으면 좋을 테고요.
▲ 이찬수 교수는 평화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완성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폭력을 줄여가는 ‘감폭력(減暴力)’으로서의 과정을 중요시 했다.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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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그동안 근대적 의미의 평화에 대응하는 언어를 무엇이라 생각했고 어떻게 체화시켜왔는지를 봐야 하는데, 그런 건 전형적인 인문학적인 접근법이지요. 그런 공감대가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정치적 현실에서 다양한 견해들을 모으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던 차에 학교 동료였던 국제정치학자 서보혁 선생이 한국인의 평화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는 학술회의를 하면 어떻겠냐 제안했고, 인문학자인 제 생각을 서로 나누었죠.
서로 의논해 한국의 대표적인 평화 사상가를 선정했고, 관련 분야 전문 연구자를 섭외했고, 실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고, 결국 이렇게 두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기본적으로는 평화 담론을 좀 더 한국적으로 확장시키자는 의도가 컸고, 사회과학적 언어와 인문학적 언어를 융합시킬 필요성에 대해 서로 공감했던 거죠.
- 그때 3년 전이면 한국 사회 박근혜 씨가 통일대박론, 이런 얘기하면서 한국사회 이상한 통일론이 휩쓸고 있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혹시 그런 것들에 대한 대항담론으로도 생각하신 건가요?
흔히 통일이라는 말로 어느 날 갑자기 남북의 정치체제가 통합되는 것처럼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고 위험한 일이예요. 통일은 과정예요. 지속적인 교류의 과정을 거쳐서 서로 간에 만나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공감의 과정이 통일의 과정이죠.
그런데 박근혜씨가 그런 공감의 과정도 전혀 없이 그리고 느닷없이 통일대박론이라는 말을 던져놨지요. 북녘 동포여 남쪽으로 오시오 하는 식의, 수십년 전 냉전시대 대결구도에 익숙한 군인이나 할 법한 언어를 구사하면서요. 통일대박론에는 방법론이 들어있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좋게 얘기하면 한국인들에게 통일에 대한 상상을 확장시킨 계기는 되었어요.(웃음)
그런데 흡수통일을 연상시키는 이런 구호는 도리어 한반도에 갈등을 조장하는 첩경이잖아요. 통일담론을 확장시키는 데는 기여했지만 방법은 허접했어요. 통일이라는 것을 과정적으로, 평화적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건강한 평화 담론을 먼저 확장시켜야 해요. 통일도 결국 평화의 과정이어야 하니까요.
당연히 평화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고. 우리는 역사적으로 평화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알아야 하는 거죠. 이 책에 담긴 22명 사상가들의 평화론을 곰곰 생각해보면 대체로 한국인이라면 공감할만한 언어이고 내용들예요. 우리의 관념 속에 알게 모르게 녹아 있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런 걸 표층으로 끌어올려서 깊이 있고 실속 있는 통일담론으로 이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서로의 평화를 이야기 하자
- 선생님께서 좀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서구가 가지고 있는 담론 자체는, 정오가 분명하고, 기독교의 영향이 큰 부분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한국 기독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기독교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책인 것 같은데요, 이게 실질적으로 기독교가 이런 것들을 수용하고, 그래서 기독교가 다양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걸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궁금하네요.
제가 강남대 있다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으로 옮겨가게 된지 7년째인데요. 최근에는 기독교 공부는 별로 안하고 그나마 평화 관련 공부를 조금은 했다는 뜻입니다(웃음). 제가 낸 책 중에 『평화와 평화들』이란 책이 있는데, 평화를 대문자 단수(Peace)가 아니라 소문자 복수(peaces)로 이해해야 한다는 게 요지예요.
지금 청와대는 물론이거니와 김정은도 트럼프도 다들 평화 얘기해요. 그런데 세상은 별로 평화롭지 않잖아요? 도리어 갈등하죠. 왜냐하면 저마다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예요. 그래서 현실에서 평화는 어떻든 여러 가지, 즉 복수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대문자 단수로서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길은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대화, 타협을 통해 합의해나가는 길 밖에 없어요. 화쟁이 ‘쟁’의 ‘조화’이듯이, 결국 대립을 넘어 ‘화’로 가야만 해요.
물론 화쟁은 옳지 않음을 옳지 않음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눈을 가지고, 그리고 옳지 않음이 무슨 피해를 불러일으켰을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대화를 통한 합의, 이를 통한 더 큰 평화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기독교인이 하느님을 단번에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알고 따라야 할 대상이기도 하고, 신앙도 평생의 과제일 수밖에 없듯이, 평화도 정말 하느님의 나라라는 거대한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과정예요. “평화를 만드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예수께서 얘기했는데, 중요한 것은 실제로 평화를 이루어가야 거잖아요. 평화는 결국 공감대의 확보이기도 할 텐데, 이 책을 통해 한국인의 평화론, 평화적 공감대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이런 질문을 왜 드렸냐면 데리다가 『법의 힘』이라는 책을 통해서 법 너머에 정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기독교 사유와 거의 맞물려 있습니다. ‘법 너머에 야훼가 있다. 법을 보장하는 건 야훼고, 법을 뛰어넘는 것이 야훼의 말씀이니, 법보다는 야훼 말씀을 믿어라, 인간사회의 법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야훼의 말씀이지, 인간의 법이 아니다’, 이런 뉘앙스로 책입니다. 이런 서양의 전통에서 굳어진 것들이 한국사회에서도 굳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의 개념들이 한국사회에서 이미 그런 평화의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무리 우리의 사상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지금 현대인들에게 잘 소화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을 기획하면서 필자들에게 주문한 내용이 있어요. 옛 언어를 답습하지 말고 가능한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보자는 거였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조의 평화사상을 다룬 글에서는 정조의 탕평책을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와 연결 지은 것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준론탕평은 전쟁하지 않도록, 갈등과 싸움이 없도록 제어하는 장치에요.
그에 반해서 대동탕평은 결국 구조적 차원의 폭력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폭력을 없애가는 과정이거든요. 온 사회가 대동의 상태, 즉 ‘큰 하나됨’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과정이지요. 이런 식으로 풀면 아무리 서양적 언어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을 거예요. 어떻든 좋은 얘기들이기도 하고...
기독교인도 가능한 자신의 선입견을 괄호에 치고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조상들의 옛 언어가 현대 서양인의 언어와 그다지 다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 얘기처럼,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결국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이 책을 통해 성경도, 신앙도 다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서양은 지도자나 기관, 조직의 청렴성이 요구되는 반면에 동양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 같아요. 서양은, 구약성서의 사사기 같은 경우에, 사사들이 잘 심판하고 왕들에게도 잘 판결해라 하는데 동양에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평화가 온다는 그런 사상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책임, 평화에 대한 추구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민혁명을 통해 수직적 신분사회를 타파하고 아래로부터 참정권도 획득하고 민중이 정치와 경제의 주체로 등극해 왔어요. 시민의식은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선구적으로 발전했지요. 얘기하신대로 사회를 비교적 체계화했고, 사람들은 그 체계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서양에서 먼저 보여주고 있지요. 이에 비해 동양은 아주 좋은 사상과 가르침이 있었지만 일부 엘리트들의 사상으로 머물렀고, 민초들이 역사의 주체로 등극하는 과정은 서양에 비해 늦었어요.
물론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우리도 동학혁명 같은 역사적 경험을 했어요. 이 때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혁명의 과정에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며 ‘불살생’의 원칙을 지키려 애썼어요. 일본이 조선을 유린하려 하는 상황에서 무력적으로 궐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군과 관계없는 사람이나 농민의 생명은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려 했어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통찰과 폭력을 거부하는 용감한 정신이 돋보입니다.
그 정신을 수많은 농민군도 따라 실천하려 했으니 놀라운 사건입니다. 일본의 다나카 쇼조 같은 이는 전봉준을 존경해마지 않았어요. 한국이 근대 이래 서양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살고 있고 또 여전히 배울 것이 많지만, 한국도 서양의 가르침 이상을 발전시켜왔고, 또 실험해보기도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 이제 이 책이 출판되고 2권으로 나오기까지 힘드셨거나 아쉬웠던점이 있을까요?
22명을 선정한다는 게 어려운 문제였어요. 책 나온 거 보고 왜 저 사람은 빠졌는가 하며 SNS를 통해 의견을 내는 분들도 있거든요. 어떻든 엮은이 두 사람이 대화하고 외부에 자문도 구하면서 한국 사상가들 가운데 어떻든 꼭 소개되어야 할 사상가를 선정해본 겁니다.
- 두 권이 나오고 다루어진 사람도 있으니, 차후에 보완되면 좋겠는 점이 있을까요?
이번 책이 한국인의 평화 사상이라면, 제가 기획해서 출판을 준비 중인 『세계평화개념사』라는 책도 있어요. 이 책은 전 세계 14개 국가 또는 지역에서 평화에 해당하는 개념은 무엇이었고, 어떤 변천사를 겪어왔는지 정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시아에서는 남한과 북한, 일본, 중국, 인도, 유럽 지역에서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을 다루고 있고, 그 밖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중미의 과테말라, 아랍 이슬람권에서 평화란 무엇이며 어떤 개념의 역사를 가져왔는지 정리하고 있는 방대한 책입니다. 아마 내년 초에는 출판될 거예요. 한국에서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없는 책이지 싶어요. 그 때도 소개 부탁드립니다.(웃음)
- 저런 책 자체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점이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이 책도 출판되면 뿌듯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념사’라는 언어가 어려워서인지 필자들도 집필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어떻든 『한국인의 평화사상』과 쌍을 이루는 책입니다. 출판되면 영어나 일본어로도 번역되면 좋겠다 싶어요. 저는 전체를 기획하고 관리하면서 “일본 평화 개념의 역사”를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 두 책, 특히 한국인의 평화사상은 일반 시민들도 읽고, 기독교인들도 읽을 건데, 기독교인들이 유의해서 읽을 점이 있을까요?
한국 기독교는 미국에서 들어왔고, 사상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스라엘에까지 연결되잖아요. 그러다보니 극우 집단, 가령 태극기부대가 나름의 시위를 하면서 성조기나 이스라엘 국기를 들기도 하는 것은 기독교의 원조를 미국이나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기독교를 지역이나 공간 차원에서만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그 근간은 공간이나 문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평화로 수렴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기독교의 평화와 한국인의 평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하나는 틀렸어 라고만 생각한다면, 결국 평화의 이름으로 갈등과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겠지요. A라는 평화는 맞고 B라는 평화는 틀렸어 하는 순간 A라는 평화도 평화가 아니게 돼요. 평화는 결국 대화를 통해 상호 공감하고 이해하고 합의해가는 과정이니까요. <한국인의 평화사상>은 한국적 평화론과 기독교적 평화론이 심층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 다양한 평화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평화라는 개념 자체의 숙고를 강조하는 이찬수 교수 ⓒ이정훈
폭력을 줄여가는 ‘감폭력(減暴力)’으로서의 평화
- 진보·보수를 떠나서 보통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평화사상이 뚜렷한 것 같습니다. 북을 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의 기준이 너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보면 평화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힘들게 느껴집니다.
제가 여러해 전에 논문을 쓰면서 “평화학은 세속화한 시대의 신학”이고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평화학에서는 하나님이니 부처님이니 하는 말은 잘 안 쓰지만, 평화학이 정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 구조와 내용이 거의 같아요. 그런 점에서는 평화학자가 이 시대의 신학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평화라는 것을 사전에서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폭력이 없는 세상은 사실상 하나님 나라나 다름없잖아요. 게다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폭력을 줄여서 폭력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할텐데, 그러려면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이 있어야 폭력이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있을 테고요.
그래서 저는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폭력을 줄이는 과정’으로 규정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봐요. 한자로 줄일 ‘감’자를 써서 ‘감폭력(減暴力)’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어요. ‘비폭력’ 보다는 ‘감폭력’이라는 말이 더 평화를 잘 설명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폭력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폭력으로 인해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피해를 당하고 상처를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평화학은 폭력의 피해자를 우선시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의 아래에 처한 거나 다름없는 북한의 상처에 대해 조금은 더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상처를 줄여가도록 애쓰는 일이 평화운동가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북한이 쌀이 떨어졌는데도 핵무기를 결국 만든 것은 자신을 기울어진 운동장의 끝부분으로 몰아넣은 세계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북한의 핵무기도 결국은 없애야 하지만, 핵무기 파기 못지않게 북한을 운동장 아래로 밀어 넣는 세계적 구조도 개선해야 해요. 그것이 국제적 차원에서의 평화학자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평화가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면 응당 그래야하죠.
게다가 평화를 만드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예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기독교 얘기가 별로 나오지 않는 <한국인의 평화사상>에서도 복음적 메시지를 충분히, 오히려 신선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익환의 평화사상’ 등 신학적 언어를 직접 다루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원효나 최치원, 전봉준이나 최시형, 윤이상이나 조봉암 같은 분들의 평화론에서도 기독교적 메시지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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