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찬수 - "교황 방문의 명암"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주는 의미와 효과는 남달랐다. 가톨릭의 교황이 아니라...
이찬수
30 September 2014 ·
"교황 방문의 명암"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주는 의미와 효과는 남달랐다. 가톨릭의 교황이 아니라 마치 '한국교'의 교황이기도 한 냥, 종파를 불문하고 크고 작은 아픔에 시달리던 많은 이들이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위로를 받았고, 어떤 이들은 교황을 보며 삶의 방식과 한국 사회의 지향점, 그리고 정치의 존재 이유를 되물었다.
교황은 권위를 내려놓고 소박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민중 지향적 행보를 보였다.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간접적이었지만 민중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직접적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밀양과 강정 주민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 탈북자 등 우리 사회의 폭력적 속살을 드러내주는 사건의 피해자들을 초청해 미사를 집전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고, 진정성 있는 위로를 전했다. 남북 간의 화해를 위해 기도했던 것은 차라리 의례적 언사에 가까울 정도로 교황은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고통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한 마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어떤 이가 세월호 참사에 공감하던 교황의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교황이 했던 답변의 일부이다. 노란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고 다니자 어떤 사람이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묻길래 교황이 그렇게 답했다는 것이다. 지도자다운 심성을 잘 보여준다.
세월호의 침몰 자체를 정치적 사건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 정치성이 잘 드러난다. 리본을 다는 행위보다는 리본을 다는 행위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이 더 정치적이다. 그러한 정치적 행위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타자화’할 뿐더러 고통을 그대로 남겨둔다. 인간의 고통과 함께 하지 못하는 정치가 어찌 정치이겠는가. 중립을 지킨다는 미명 하에 사실상 고통을 외면하는 종교가 어찌 종교이겠는가. 민중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에 직접 반응하려는 교황의 심성과 언행은 그가 지닌 영성의 크기를 잘 보여준다.
물론 교황에 대한 찬사들에 가려진 교황 방한의 어두운 면들도 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아쉽고 맘에 걸리는 부분들이 제법 된다.
예산 집행의 문제가 특히 맘에 걸린다. 이번 교황의 방한은 외형적으로는 한국 가톨릭의 행사이지만, 한국 가톨릭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부분의 비용은 국가에서 보통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했다. 기획재정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해보지 않은 터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문화체육관광부, 지방자치단체들, 경찰청 같은 공적 단위에서 지불한 금액에다가, 국내 이동 경비 및 귀국 경비를 부담한 코레일, 대한항공 등에서 정부의 요청으로 지원한 금액 등을 합하면, 총 비용이 수백억원대는 족히 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보니 가톨릭이라는 특정 종단의 행사일 뿐더러 결국은 가톨릭에 유리하게 작용할 각종 행사들을 위해 국가가 공적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종교편향적인 행위가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온 종교간 대화 분위기를 해칠세라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교황 방문과 관련해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단에서 내온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언론들의 성찰 없는 일방적 조명도 문제였다. 가령 ‘시복식(施福式)’이라는 가톨릭 중심적인 용어와 세계관이 공중파를 통해 공적 언어가 되고, KBS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거의 모든 의례를 생중계하면서, 특정 종교 언어에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실어주었다. 수백년 이상 한국 정치의 중심지였던 광화문에서 비가톨릭인이 낸 세금으로 가톨릭적 행사를 하도록 한 이유를 두고 비판적 목소리, 볼 멘 소리들이 여전하다. ‘서소문 성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방송을 탔고, 실제로 서소문 성역화 관련 작업에 세금 수백억원이 투입될 것이라 한다. 교황이 다녀간 다른 가톨릭 공간들도 공적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들 모두, 다소 부정적으로 분석하면,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려는 한국 가톨릭과 가톨릭의 세계적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한국 정부의 속셈이 맞아떨어지면서 진행된 일이다. 세속화한 시대의 탈종교적인 국가가 실제로는 특정 종교의 확산에 일조하고, 국가의 힘을 빌어 종교 행사를 했으니, 모두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만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밝음 속에 가려진 어두운 부분마저 챙겨 더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사가 진행되었더라면, 양식있는 이들에게 더 진심으로 존경받았을지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어찌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행보가 교황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한계를 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황 한 사람으로 인해 가톨릭 전체의 면모가 일신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티칸이나 가톨릭 전체가 바뀌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해방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며 민중의 아픔을 우선시하는 교황의 행보는 바티칸의 성격상 파격에 가깝지만, 파격에 가깝다는 말 자체가 지속성을 한편에서는 유지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혁은 교황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보수적인 전임 교황들이 임명한 보수적 주교들이 바티칸뿐 아니라 전 세계에 포진해 있어서 교황의 개혁성 혹은 진보성이 현장에까지 도달되기는 힘든 상황이다. ‘순명’을 강조하는 가톨릭의 구조상 주교들이 외적으로는 교황을 거스르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서까지 순명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진보적’ 교황을 이용해 여러 가지로 지탄받아오던 바티칸의 수세적 국면을 전환하고 보수적 성장으로 견인하려는 시도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교황 방문을 환영하거나 교황 개인을 찬양하기만 할 수 없는 이유도 이런 데서 찾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방문이 한국 사회에 던진 의미는 크고 화두도 강력하다. 교황으로 인해 종교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반성력도 일부 커지겠지만, 특히 공감과 위로, 용서와 화해와 같은 인간다운 가치가 담론화할 가능성도 일정 기간이나마 커지거나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웃의 아픔은 남탓 또는 사회탓으로 돌리고, 용서와 화해에의 시도는 나의 손해로 돌아온다는 경계심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에서, 막대한 권위를 내려놓고 소박한 인간적 공감의 길을 걸어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인의 삶, 사회의 지향, 정치의 변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보여준 실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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