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4

이나경- 황교안과 김종인이 한국 의료보험 시작은 박정희때부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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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March at 13:14


황교안과 김종인이 한국 의료보험 시작은 박정희때부터라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거짓이다.

1968년 5월 13일 장기려박사가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란 캐츠플레이즈로 정부의 의료보험제도 시행보다 9년 앞서 세운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이 한국 의료보험의 시작이다.

1977년 박정희가 의료보험 만든것은 북한의 무상의료 선전선동에 대응한 방안이었다. 500인 이상 기업을 시작으로 의료보험 체계를 도입, 1979년 공무원·교직원으로 확대하지만 임의가입방식이였기에 가입자가 거의 없었다.
이어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에 노태우가 공약을 지키며 1988년 농어민, 1989년 도시 자영업자 등에 순차적으로 확대되었다.
그후 김대중대통령때 여러개로 나뉘어져 있던 의료보험을 하나로 통합, 현재의 국민건강보험체계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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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간 내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한 나라. 우리 건강보험에 대한 평가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500인 이상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을 시작하여 12년만인 1989년에 전국민의료보험을 달성했다.

건강보험의 역사 속엔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담겨 있다. 특히,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되고 1977년 의무보험이 시작 될 때까지 비록 적은 숫자였지만 전국에 걸쳐 임의 의료보험조합들이 운영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고 장기려 박사가 주축이 된 자발적 자영자조합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야말로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1960년대 우리 사회는 한국 전쟁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당시 장기려 박사는 농촌운동가였던 채규철 선생으로부터 서구 의료보장제도를 소개 받고 가난때문에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위한 조직을 만들고자 하였다.
우선 부산지역 성경 연구 모임인 '부산모임'에 의료보험제도와 조합의 취지를 설명하고 부산 시내 100여 교회에 취지문을 보낸 결과 23개 교회의 대표자들이 조합에 참여 의사를 밝혀 왔다. 그렇게 1968년 5월 13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다. 명칭은 미국의 기독교 정신으로 시작된 의료보험제도인 '청십자운동(Blue Cross Movement)'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 100원 정도였는데, 보험료는 비교적 저렴한 1인당 60원으로 책정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보험료 부담에 회의적이었고, 의료보험에 대한 낮은 인식과 경험 부족, 재정난 등으로 가입자 모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무진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의료보험의 취지를 설명하며 참여를 독려하고 소식지 '청십자 뉴스'를 만들어 조합원 가정에 발송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했으나 조합의 사정은 쉽게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회복지사 김영환 선생, 기폭제를 마련하다

당시 스웨덴 아동구호연맹(SSCF, SWedish Save the Children Fedreation)에서 한국 총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김영환 선생은 장기려 박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즉,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의 피보조자(Client)를 중심으로 1969년 2월에 설립된 '부산의료협동조합'과 통합하고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이를 통해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만 4,000명의 조합원이 확보되었고 그 후 자영자 의료보험 시범기관으로 지정받아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안정적 운영을 해 나가게 되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와 사회복지사의 선구자 김영환 선생, 두 사람의 만남이 기폭제가 되어 조합은 한층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김영환 선생은 당시를, "가가호호 방문을 하면서 보험 가입을 독려하고, 또 보험금을 징수 했어요.
겨울이면 들어오라고 해서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고, 더운 여름엔 시원한 물 한 잔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들었지만 보람도 느끼며 일했지요"라며 회상한다.
1975년 8월 조합 직영병원인 '청십자병원'을 개원하면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청십자병원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대지 100평, 건평 200평의 병원을 짓는 데 5,000만 원 정도가 들었어요.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에서 절반을 지원해 주었고, 나머지는 조합에서 조달 했어요. 조합원들은 '내 병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진료비를 감액해주기도 해 재정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자체적으로 진료비를 청구 받아 심사하는 '자체 진료비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적정 진료 및 효과적인 보험급여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진료기관과의 신뢰관계도 돈독히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부산청십자의료보험의 성공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청십자조합을 모델로 한 지역 의료보험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해 서울, 광주, 인천, 수원, 제주,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조합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부산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20년 동안 조합원들이 힘을 합쳐 한결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부의 축적이나 명예의 추구, 가시적인 실적 등에 매달리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할 일에 매진한 결과, 1989년도 조합을 해체하기 직전에는 무려 23만 명의 조합원이 있을 정도였지요."

1989년 7월 1일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비롯한 여러 민간조합의 경험은 고스란히 정부로 넘겨지게 되었다. 장기려 박사는 기꺼이 나라가 하는 일에 동참하고자 조합의 해산을 선언했고, 23만 명의 조합원들도 그 뜻을 받아들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http://m.nhis.or.kr/webzine/201307/sub01_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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