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사랑인가 - 1909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사랑인가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사랑인가
저자: 이광수

1909 <백금학보>


분키치는 시부야로 미사오를 찾아갔다.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이 그의 가슴에 넘치고 있었다. 도중에 한 두 벗을 방문한 것은 오직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다. 밤은 이슥하고 길은 질퍽거렸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분키치는 미사오를 방문한 것이다.

그가 대문에 다다랐을 때의 심정이란 실로 뭐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기쁜지 슬픈지 부끄러운지 심장은 방망이질 치 듯하고 숨은 거칠었다. 아무튼 그때 상태는 삼 분간도 그의 기억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문으로 들어가 격자문 쪽으로 나아갔지만 가슴 두근거림은 더욱 빨라지고 몸은 벌벌 떨렸다. 벌써 자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제 겨우 아홉시를 조금 지났을 뿐이다. 그리고 시험 중이니 아직 안 자고 있을 터이다. 아마 호젓한 데여서 일찍 문단속을 한 것이리라. 문을 두드릴까? 두드리면 열어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등신같이 숨을 죽이고 우뚝 서있다. 왜일까? 왜 그는 멀리 벗을 방문하면서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가? 두드렸다고 꾸지람을 듣는 것도 아니며 그가 두드리려는 손을 제지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는 두드릴 용기가 없는 것이다. 아아, 그 사람은 지금 내일 시험 준비로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지금 여기에 서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그 사람과 나는 오직 이중의 벽에 가로막혀서 만 리 밖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아, 어떻게 할까? 모처럼의 희망도 기쁨도 봄날의 눈과 같이 스러졌다. 아아, 이대로 이곳을 떠나야 하는가? 그의 가슴에는 실망과 고통이 끓어올랐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발을 돌려 슬그머니 그곳에서 물러섰다. 우물가로 나오는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고 꼬꾸라 학생복은 마치 얼음에 담근 것 같다. 그가 후 하고 한숨을 쉬니 여름 밤바람이 가볍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번엔 뒤안으로 돌아갔지만 역시 덧문은 닫혀있었으며 남포빛이 희미하게 어둠 속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이제 끝장이다. 그가 해볼 것은 다 한 것이다. 그는 결심하듯이 한눈도 팔지 않고 썩썩 걷기 시작했다. 그가 대문에서 나와 언덕길로 내려가자니 아까는 아무 고통 없이 쓱쓱 올라온 언덕길이 이번엔 내려가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는 두어 번 비틀거렸다. 반쯤 내려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멈춰 섰다,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좋은 방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 앞 큰길의 전봇대 끝에 외로이 반짝이는 붉은 전등은 여름밤의 고요함을 더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내일 돌아가지 않는가? 내일 돌아가면 다음 학기가 될 때까지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어떻게 할까? 아니! 여기까지 안 만나고 돌아갈 놈이 어디 있느냐? 나는 약하다. 아무리 약해도 이런 일도 못하면 어찌하느냐? 이제부터 조금 굳세지자. 좋아, 이번에는 꼭 문을 두드리자. 물론 들어갔다고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별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사람 얼굴을 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발을 돌렸다. 이번에는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걸음이 가볍고 빠르다. 너무 빨랐기 때문에 그만 대문을 지나쳤다. 우스꽝스럽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서너 발자국 되돌아와서 그는 대문을 들어섰다. 이번에는 부러 징검돌을 밟으면서 쿵쾅 구두 소리를 냈다. 이것은 수단이다. 자기로서는 수단이면서 남에게 알리지 못하는 수단이다. 그는 이 수단에 성공을 기했지만 격자문까지 도달해도 아무런 기척도 없다. 이제 아무리 구두소리를 내려고 해도 장소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체조할 때처럼 제자리걸음을 하겠는가. 아 아, 또 다시 실패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그는 또 계책을 하나 안출한 것이다. 그건 돌아가면서 구두 소리를 더욱 크게 내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방 안의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열어줄지도 모른다. 진실로 궁책이다. 그는 실행해봤다. 그런데 과연 안에서 하녀의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미사오님" 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는 얼마간 성공을 기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죽이고 멈춰서 있었다. 만약 순사가 봤으면 도둑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 그는 최후의 수단을 시도했다. -그렇다, 모험이다. 이번엔 살금살금이 아니다. 그는 당당하게 뒤안으로 들어갔는데 과연 빛이 있었다. 그야말로 암흑 굴 속의 한줄기 광명! 목마른 호랑이에게 맑은 샘!

"누구세요?" 라고 누군가가 툇마루에서 묻는다.

"접니다." 라고 대답한 그의 말소리는 떨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부러 얼굴을 빛쪽으로 돌리면서 "벌써 주무시는 줄 알고......"

"아 당신이셨군. 어두운데, 자 어서 올라오시오."

주인이 권하는 대로 그는 구두를 벗고 올라갔다. 주인이 방석을 권했는데 그는 고마운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시험은 다 끝나셨어요?" 라며 주인은 읽고 있던 잡지는 책꽂이에 꽂으면서 묻는다.

"예, 오늘 아침까지 다 끝났습니다. 근데, 당신네들은?" 이것은 겉으로 하는 인사에 불과하다. 이런 대화는 그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다. 그는 단도직입으로 "미사오군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못한다. 되도록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얼굴은 간자(間者)라, 아무리 태연을 꾸미려 해도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주인이 의아한 듯이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아직 멀었고, 이번 주 토요일까지 해야하니까. 정말 싫증나요."라며 얼굴을 조금 찡그린다. 모기떼가 습격해온다. 땀이 흐른다.

"어쩌지 올해는 특별히 더운 것 같군요."라며 분키치는 "미사오에게 내가 온 것을 알리고 싶다. 그러나 알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직접 알리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미사오는 장지문 하나 격한 옆방에 있다. 분키치는 머릿속에서 미사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제 알만한데. 내가 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오지 않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미사오와 한 방을 사용하는 학생이 들어왔다. 분키치는 왠지 모르게 기뻐서 소리를 높여 "공부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네"라고 대답하고 방에 들어갔다. 아마, 내가 온 것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분키치는 생각했다. 그리고 기뻐했다. 그러나 아무 소식도 없다. 그 사람이 없는 것일까라고 의심해보았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방금 누군가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모른 척하고 시치미를 때는 것일까? 어찌된 일일까?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잔인하다.

그는 벌벌 떨렸다. 그의 몸은 뜨거운 물을 끼얹은 양 숨은 더더욱 거칠어지고 눈은 무시무시해졌다. 주인은 더욱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견딜 수 없었다. 아아, 가슴아 터져라. 피야 쏟아져라. 몸통아 차가워져라. 나는 너를 위해 피를 흘렸다. 너는 나에게 얼굴도 안 내미는 것이냐?

그가 주인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그곳을 나간 것은 열시를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실망, 비애, 분노 때문에 제정신을 잃고 광기가 서려 돌아갔다. 어둑어둑한 동네는 고요하게 잠들고 애달픈 안마사의 곡조 안맞는 피리 소리만이 축축한 여름밤 공기를 흔드는 것이었다.


분키치는 열한 살 때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 세상을 맛보았다. 그는 친척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집이 부유했을 때에나 친척이지 일단 영락한 후에는 아무도 그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몸에 붙어다니는 가난의 신이 그로 하여금 일찍 세상고를 맛보게 한 것이다. 그는 열네 살 무렵 벌써 어른다워지고 홍안에서 천진한 빛이 바래어버렸다.

그는 총명한 편이라,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소학 등을 가르치면서 그의 기억력 좋은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기면서 가끔 가난의 고통까지도 잊고는 했었다. 그가 부모를 여윈 후 이삼년 동안이란, 여기저기 떠도는 실로 불쌍한 것이었다. 순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런 속에서도 그는 친구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 그래서 그 또래의 소년에게 지지는 않았다. 그는 가정의 영향과 빈고의 영향으로 지극히 온화한 소년이었다. -오히려 약한 소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상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어찌해서라도 세상을 한번 놀라게 하고 싶다. 만세 후의 사람이 자기 이름을 흠모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 늘 그의 가슴 깊숙이 숨어 떠나지 아니한 바였다. 이것 때문에 그는 한층 더 괴로워한 것이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때 한 줄기 광명이 그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어떤 고관의 덕으로 동경에 유학하게 된 것이다. 그의 기쁨은 실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상에 도달하는 문을 찾아낸 것같이 껑충껑충 뛰다시피 기뻐했다.

그는 당장 동경으로 나와 시바에 있는 어떤 중학교 삼학년에 입학했다. 성적도 좋은 편이고 남들도 유망한 청년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그는 암흑에서 광명 속으로 나온 셈이다. 그러나 기실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차차 적막 고독의 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날이 몇십 몇백 명이 되는 사람을 만났지만 한사람도 그와 친구가 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한탄했다. 울었다. 비애는 없다는 것이 그의 비애관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친구를 찾았다. 그러나 그에게 오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간혹 없지도 않았으나 하나도 그에게 만족을 주는 자는 없었다. 즉 그의 마음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갈증은 더더욱 심해지고 고통은 더더욱 그 강도를 높일 뿐이었다. 십 육억여 인류 중 내 마음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하고 그는 탄성을 토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약해지고 더더욱 침울해지고 말 좋아하는 그였지만 차차 말을 안 하게 되어 사람을 사귀기도 꺼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일기장에 자기 마음을 털어놓고 겨우 자신을 위로한 정도였다. 그는 단념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 무한한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해가 흘렀다.


올해 일월, 그는 어떤 운동회에서 한 소년을 보았다. 그때 그소년의 얼굴에는 사랑의 빛이 넘치고 눈에는 천사의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그는 황홀해서 잠시 정신을 잃고 자기 마음에 타고 있는 불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 소년이 바로 미사오이다. 그는 이 사람이야말로라고 생각했다.

그는 편지로 자기의 마음을 미사오에게 털어놓고 또 사랑을 구했다. 그랬더니 미사오도 자기가 고독한 것, 그의 사랑을 알아차렸다는 것, 자신도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써 보내왔다. 분키치가 그 편지를 받았을 때이 심정이 어떠했을까. 분키치는 기뻐했다.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나 마음의 번민은 스러지지 않았다. 스러지기는 커녕 새로운 번민이 더해진 것이다. 미사오는 지극히 말이 적은 편이다. 이것을 분키치는 무한한 고통으로 알았다. 분키치는 미사오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 같이 느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냉담한 것같이 느꼈다. 그는 미사오를 의심했지만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단정했다.거기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는 미사오를 목숨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밤낮 미사오를 생각지않을 때가 없었다. 수업 중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는 괴로워했다.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생각한다. 이것이 미사오를 만난 이후의 상태이다. 일월이후 그의 일기에는 미사오의 일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는 미사오의 얼굴을 보면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왜 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인가?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는데." 라는 것이 그의 일기의 일절이다. 그는 미사오를 만나면 제왕의 앞에 끌려나온 것같이 얼굴을 들지 못한다. 말도 못한다. 지극히 냉담한 체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는 또 그 이유도 모른다. 단지 본능적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는 말 대신 붓으로 바꾸었다. 사흘 전 그는 손가락을 찔러 혈서를 써 보냈다.

2학기 시험도 끝나고 내일 귀국도 하니, 오늘 밤 그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미사오를 방문한 것이다.


그는 무감각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죽고싶다. 이제 이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다. 타마가와 전차의 선로구나. 벌써 열 한 시-. 이제 전차는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럼 기차가 있다. 요란한 소리 한 번 울리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도 자살을 멸시한 사람 중의 하나다. 자살 기사를 보면서 늘 침을 뱉고 매도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나 자신이 자살하려고 한다. 묘하지 않느냐. 나는 큰 이상을 안고 있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은 실로 분하다. 내가 죽으면 늙으신 할아버지나 어린 누이동생들은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그러나 이 순간 내 죽음을 막아주는 자가 없으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죽는 것과 사는 것은 전혀 내 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는 시부야의 건널목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어둠 속에서 뚜 기적 소리가 들린다. 이거야 마침 잘 됐다고 뛰어가니 시커먼 사람이 데구루루 나와서 통행을 차단시켰다. 어이없다. 죽을 때까지도 방해하는 신이 달라붙는다. 기차는 무심히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고 지나가버렸다. 그는 선로를 따라 서너 간통 가서 동쪽 레일을 베개 삼아 바로 누워 다음 기차가 오기를 이젠가 저젠가 기다리면서 구름 사이로 비치는 별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십팔 년 간의 내 목숨은 이제 끝이다. 부디 죽은 후 스러져버려라, 그렇지 못하면 무감각한 것이 되어라. 아아, 이것이 내 마지막이다. 작은 머리에 안고 있던 이상은 지금 어드메? 아아, 이것이 내 마지막이다. 아아, 외롭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 아아, 한번이라도 좋으니. 별은 무정하다. 기차는 왜 안 오나? 왜 얼른 와서 내 이 머리를 부숴주지 않는 것인가? 뜨거운 눈물은 끝없이 흐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