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3
이광수 그의 자서전 1 어린적
목차
1 어린적
2 소년시대
3 교원생활
4 방랑의 길
5 북간도
6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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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적
우리 집은 삼각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어떤 농촌이다. 지금 내 눈에 조선이라는 것이 한 점으로 밖에 아니 보이기 때문에 무슨 도, 무슨 군이라고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아니한다.
그뿐더러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요, 내게 관계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집의 위치를 밝히는 것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내 자서전을 읽는 여러분은, 제목에는 「그」라고 하고 본문에는 내라고 하는 이 사람이 당신네 동네, 당신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그만일 것이다. 사람의 생활이란 어느 곳에를 가거나 대개 비슷한 것이니까 내 생활이 곧 당신의 생활이 아닐까. 이것이 실례되는 말이면 용서 하라.
조선 사람의 조상들이 다 그러하였던 모양으로, 내 조상도 뒤에 산 있고 앞에 갈아 먹을 들이 있고 개천이 있고, 그리고 사방이 폭 싸인 곳에다가 터를 잡았었다. 그리고 뒷산에 는 선영이 있고 솔밭이 있고 밤나무가 있고, 울안과 집 근처에는 사오 명절과 제사에 쓰기 위한 배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며 아이들이 먹기 위한 살구나무,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집도 그러한 집이었다.
내 집의 호주는 조부였으나, 그는 과거도 보려 아니하고 젊어서부터 시와 글씨와 술을 좋아하고, 중년에는 기생첩을 얻어 가지고 관도 다 벗어 버리고 주막을 내고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풍신이 좋기로, 기운이 좋기로, 풍류 남아로 필객으로, 주객으로 인근 읍에까지 소문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학행이 있다는 선비로 효자 정려를 받은이요, 그의 숙부는 문과로 시간을 지내고 그의 당숙은 문과로 승지 를 지내고, 그의 조부는 문과로 장령, 이러므로 그도 통덕랑으로 정오품이어서 남행으로 가더라도 원한 자리쯤 할 수 있는 문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무지 벼슬이나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다만 술 먹고 친구들과 유쾌하게 노는 것이 소원인 듯하였다. 그가 주막을 내인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다.
내 아버지는 기품에 있어서 조부보다 훨씬 졸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시는 하였으나 대소과에 다 실패하고 역시 술먹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어렸을 때라 잘은 모르지마는, 내 집 재산이 날로 기울어진 것도 아마 이 술 값 때문이 아니었는가 한다. 내 삼촌, 당숙들, 재당숙들도 모두 술 즐기는 패였다. 그리고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내 모든 숙모들도 다 술 빛기에는 선수였고, 일생의 대부분을 술상 보아 내기에 허비하지 않았는가 한다. 한 집도 한 사람도 돈벌이, 농사, 이런 일에는 마음을 쓰는 이가 없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우리 집의 쇠운 머리에 태어난 아버지의 만득자였다.
내 집은 오랫 동안 장손이어서 우리 동네(동네라야 다 당내다)에서 큰집이라는 칭호를 받는 집이었거니와, 내 아버지 형제가 다 사십이 넘도록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내가 난 것이 아버지 마흔 두 살 때, 어머니는 삼취가 되어서 스물 두 살 적이었다.
아들이 늦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 매우 걱정이었더라는데, 그래서 대대로 다니는 T라는 절에 많이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조부의 일기를 보면 아무 달 아무 날 T절에 불공이라는 것이 많이 적혀 있음을 본다. T절이란 것은 조그마한 절이나 덕이 높은 중이 있기로 그때에 유명하였고, 또 그 중은 후일에 내게 깊은 인상을 주기로 기억이 그리운 절이다. 그 이야기는 다시 나올 때도 있을 것이다.
내 아버지가 어느 여름 초저녁에 평상에 누워 잠이 들었을 때에 어떤 조승이 와서 학술 안경 하나를 주고 가는 꿈을 꾸고 나를 보았다 하여 내 애명을 수경이라고 지었다. 목숨 수자, 거울 경자다.
나는 나는 때부터 병이 많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을 새우는 때가 많았고, 살 것을 믿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여러 번 이사를 하였다.
꿈자리가 사나우면 집을 떠나고 풍수가 무에라고 하면 집을 떠났다. 재가 알기에도 세 번 집을 옮겼다.
내가 재 집이라고 기억되는 집은 내가 난 뒤에 세번째 옮아 온 집이었다. 내가 내 집을 처음으로 의식한 것이 네 살 적이라고 기억되는데, 삼 년 동안에 세 번 이사를 한 것이다. 그후에도 세 번이나 이사를 하고는 그만 더 이사할 힘이 없도록 집이 치패하여져서 한 삼 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우리 집이라고 의식한 집은 동네에서 춘추로 고사를 지내는 상황당을 모신 천주산이라는 높은 산에서 남으로 흐른 동구스름한 봉우리 기슭 남향으로 삼태기처럼 생긴 단양한 곳이었다. 우리 집은 안채는 기와, 아래 채들은 초가의 입 구자 집이다. 앞에는 청룡모루라고, 솔밭이 안산이 되고, 그 너머로는 두어 동네와 솔밭 있는 작은 산들을 격해서 자성산이라는 큰 산이 있었다. 이 산에는 봉웃등이라고, 옛날 봉화 들던 데도 있고, 또 할미성이라는 언제 쌓은지 모르는 성도 있고, 그 꼭대기에 올라서면 서울 남대문에 나뭇바리 들어 가는 것이 보인다고 일컫는 산으로, 우리 아이들에게는 신비한 산이었다. 대개 애숭들은 감히 올라 갈 생각도 못하는 높은 산이요, 어른들도 기우제 지낼 때에나 할미성까지 올라 간다는 험악한, 거룩한 산이었다.
우리 집 동네에는 모두 열 두어 집 밖에 없는데 다 우리 집과는 성이 달라서 김해 김씨네들이요, 또는 문벌도 낮아서 우리 아버지는 노소를 물론하고 그 동네 사람들을 보고는 하게나 해라를 하였고, 내 젊은 어머니까지도 「응」, 「응」 하고 반말을 하였다.
우리 집에 달린 협막이 한 집 있어서, 그 집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 집 아이들하고 놀았다.
그중 큰아들은 벌써 더꺼머리 총각으로 큰 지게에 나무도 해오고 밭 갈 때에는 한 사람 구실을 하였으나, 둘째 아들은 여남은 살 된 장난군으로 칼과 낫으로 장난을 하다가는 언제나 손을 베고 옷에 피투성이가 되고는 저의 어머니한테 매를 맞았다. 저의 아버지는 산골로 유기 장사 다니느라고 언제나 집에 없었다.
나도 이 작은 놈이한테 배워서 수수깡 껍질을 벗겨서 안경도 만들고 관도 만드노라고 가끔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고는 걱정을 들었다. 그런 일 저질이가 생기면 작은 놈이는,
『이녀석 다시는 들어 오지 말아.』
하여 어머니한테 쫓겨 달아났으나 얼마 아니해서 또 매를 무서워하는 닭 모양으로 기웃거리고 들어 오면, 어머니는 아까 말은 잊어 버리고 본 체 만 체하였다. 그러면 나는 또 작은 놈이와 함께 솔껍데기로 배를 만들기, 수수깡으로 관 만들기를 하며 놀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순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낮에는 대개 어디를 나가고 없었다. 저녁때에 술이 얼근히 취해서 들어 왔다. 그때에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귀애해 주었는지 그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무서운 아버지라는 기억도 없다. 아마 내성질이 그러한 모양으로 아버지도 뚝뚝하고 재미 없는 이였던 듯싶다. 그러나 내가 앓을 때면 아버지가 동굴 목침을 베었다 하니, 나를 퍽 소중이 여긴 것만은 사실이다. 목침이 구를때마다 잠이 깨자는 것이다.
안방이 방위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어머니와 나와는 마당 서쪽으로 있는 아랫방에 거처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 아마 집이 쇠운이라 그런지 또는 아버지가 무슨 병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거니와, 아버지는 꿈자리가 매양 사나왔고 또 그것을 퍽 괴로와하였던 모양이다. 그것은 「 夢中凶事 璧書大吉」이라는 글을 백지에 써서 아랫목 벽에 붙였던 것을 보아서 알 뿐더러, 그후에도 아버지가 꿈을 이유로 집을 떠나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남달리 귀신을 무서워하는 미신가인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그것은 굉장한 미신가인 내 외조모를 미워하던 것으로 보아서 그렇고, 푸닥거리를 믿지 아니하고 장님을 불러다가 경을 읽히는 것도 반대하던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하다.
본래 우리 집에는 귀신이 많았다. 안방 시렁은 귀신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중에 큰 당즉(고리짝 같은 것)이 「마울님」, 그다음 검은 당즉이 「서천님」, 그리고도 두 서넛 있었으나 이름은 잊었고, 그리고 보꾹에 단 것이 「성주님」, 그리고 과에 모신 것이 「제석님」, 뒤꼍에 핏 섬인가 볏섬에 곱새 덮은 것이 「철륭님」, 그리고 대문간에 오색 명주 헝겊을 너슬너슬하게 늘인 것이 「광대 삼성님」─ 그 밖에도 더 있었는지 모르나, 내가 기억되기는 이런 귀신들이었다. 광대 삼서은 대과한 집에만 있는 귀신이라고 하여 어머니는 그 귀신이 있는 것을 매우 만족해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내 외조모가 아버지 없는 틈을 타 가지고 와서는 목욕 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 입고 마당에는 황토을 깔고 처마 끝에는 생솔가지를 꽂고 시루떡을 해놓고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화식 먹는 인간이 무얼 압니까. 지은 죄는 수수 만만하더라도 물로 씻고 불로 태워 주시옵고 전에 입은 덕은 수수 만만하더라도 새나새덕을 입혀 주시오. 큰 소 잡고 섬떡하고 굿해 드리지요.』
이러한 비난수를 수없이 반복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는 이 고사 퇴물을 뒤꼍으로 가지고가서 벌여 놓고 또 비는데 여기서는 「산신님, 목신님, 산영산」 이러한 귀신의 이름이 불려지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이러한 고사 지내는 것을 구경할 때에 나는 귀신이란 어떠한 것인가, 하고 무서운 생각이 났다.
내 외조모의 말씀에 의하건댄, 우리 집은 고갓집이 되어서 대대로 삼 년에 한번씩은 큰 굿을 하였고, 해마다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했는데, 근년에 와서는 그것을 아니하기 때문에 꿈자리가 사납고 집이 보깨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도 무당을 많이 불러다가 한번 큰 굿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내가 외가집과 동넷집에서 굿하는 구경을 한 까닭인데, 장구와 바 라를 치고 울긋불긋한 옷을 결치고 큰 부채에 방울 단 것을 흘들면서 춤을 추는 것과 또 「나무 아미타불이라」하고 염불하는 것이며, 「어헛구자, 아 검천완, 아 왕님이」 하고 재미 있는 이야기를 노랫가락으로 하는 것을 듣기가 재미 있었던 까닭이다.
『엄마, 우리두 굿해.』
하고 내가 조르면 외조모는 자기의 뜻을 받는 외손자라고 등을 두들려 주고어머니도 굿이 하고는 싶지마는, 스무 살이나 나이가 틀려서 아버지와 같은 남편에게 조를 용기는 아직 나지 아니하였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굿에 대한 정성이 없는 것도 이유여니와, 또 굿을 할 돈의 여유도 점점 더 없어져서 마침내 우리 집에서는 굿을 못하고 말았다.
외조모의 말을 들으면, 내어린 생각에도 이 세상은 모두 귀신 천지인 것 같았고 공중에도 수없는 귀신들이 무서운 눈을 뜨고 날아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사는 양을 보면 모두 귀신을 위하노라고 애를 썼다. 더구나 동네에 마마가 들어서 교통이 차단되고 우두 별성마마 냄을 낸다 하여 지푸라기로 조그마한 오장이를 만들고 거기다가 오색 헝겊을 너슬너슬 단 것을 동구 뽕나무 가지에 걸고 무 당이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 더구나 귀신이라는 것이 무서웠다.
「어린애 죽은 귀신이 제일 무섭다」는 말과 동넷집에서 어린애가 죽으면 길다란 바지랑대에 낫끝을 어린애 죽은 집을 향해서 달아 세우는 것이나, 산 옆에 돌맹이를 무더기로 쌓아 놓은 어린애 무덤을 보면 고개를 도리고 달아나는 것이나 다 귀신과 죽음의 공포를 어린 내 마음에 뿌리 박히게 하였다.
더구나 외가에 가 보면 수백면이나 된 듯한 고가인데다가 넓다란 뒷울안에는 반쯤 말라 죽은 늙은 나무들이 있고, 그 나무에는 종이나 무색 헝겊을 달아서 귀신이 붙어 있다는 것을 표한 것을 보면 몸에 오싹오싹 소름이 끼쳤다.
내가 몸이 약해서 나면서부터 앓는 날이 많았다는 것이 위에 말했거니와, 무슨 병인지 나는 가끔 몸이 짤짤 끓고는 앓았다. 나는 열에 부대껴서 잠이들었다가 빤히 눈을 뜨면 어머니가 나를 안고 앉았고, 아버니는 숟가락에다가 향를 풀어 가지고 내가 잠 깨기를 기다리던 것과, 그 향을 마시면 속이 시원하던 것을 기억한다. 이 향은 조부의 집에 호인이 와서 여러 날을 묵으며 지은 썩 좋은 참향이라는 것으로 그 커다랗던 것이 내 병에 거의 다 깎여 버리고 아서 얼마 안 남은 덩치가 아버지의 뼈 만 남은 손에들려 있던 것을 기억한다.
내 병이 여러 날 되도록 낫지 아니하면 외조모가 와서 무꾸리를 다니고 부당을 불러 오고, 어떤 때에는 몸소 나를 못 견디게 구는 귀신들을 대접하여 물리쳤다. 나를 못 견디게 구는 귀신은 혹은 여귀, 혹은 목신, 혹은 조상 동티 등등이었다. 소반에 밥과 국을 받쳐 놓고, 어떤 때에는 베 석자 세치, 짚세기 세 켤레 돈 몇량도 받쳐 놓고 그리고는 외조모는 혹은 귀신에게 받고, 혹은 위협하였다.
외조모는 사랑하는 외손자를 아무 귀신에게 빼앗기지 아니할 단호한 결심을 귀신들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빌고 위협하고 나서는 식칼 끝을 잡아서 공중에 빙그르 돌도록 던졌다. 그러면 그 칼은 혹은 끝을 안으로 향하고 떨어지고, 혹은 집에서 밖으로 향하고 떨어졌다. 만일 칼끝이 밖으로 향하면 귀신이 잘 먹고 물러 간 것이라 하여 외조모는,
『쉑, 천리 만리로 물러 가서 다시는 이리로 발 그림자도 말라.』
고 호령하고 들어 오지마는, 만일 칼끝이 안으로 향하면 외조모는 또 빌기와 위협하기를 반복해서 몇 번이고 칼을 던져서 그 끝이 밖을 향하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나는 병이 대단이 아니한 때에 어머니 손을 붙들고 나와 서서 솔강불에 비치인 외조모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칼을 던지는 것이 더욱 재미 있었다. 칼끝이 안으로 향하고 떨어지면 젊은 어머니도 내 손을 뿌리치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이러한 일이 있는 동안 아버지는 흔히 사랑에서 담배를 피우고 누워 있었다. 내가 앓을 때에 한해서 아버지는 외조모의 하는 일에 반대를 아니했다. 모르는 체하는 태도를 취했다.
아버지는 이 모양으로 귀신들을 위하는 것은 반대했으나, 조상 제사에는 상당히 정성을 드렸다. 밀 가을 걷이할때가 되면 밀 몇 섬을 뒤꼍에 새 멍석을 펴고 정하게 널어 말려서 사오 명절과 제사에 쓸 제주 누룩을 잡는데 꼭 삼촌이나 당숙을 불러다가 손수 잡았고, 이 누룩 띄우기에 쓰기 위하여 오월 단오에는 평생에 안 드는 낫을 들어서 약쑥을 베었다. 나도 이날은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어느 것이 약쑥이 요, 어느 것이 약쑥이 아닌 것도 배우고 또 노란 약쑥순을 잘라서 씹어 먹기도 배웠다.
약쑥에 밀 누룩을 재울 때에는 그 향기가 썩 좋았다. 누룩은 아랫목에 재우고 뜨뜻이 방에 불을 때면 누룩에 약쑥순과 같은 노란 곰팡이가 덮인다. 이것을 「옷」이라고 부른다. 누룩들에 노랗게 옷이 입혀지면 아버지는 그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이 누룩을 써서 술을 빛는 첫 제사요, 또 우리 집에서 가장 크게 하는 제사는 장령공 할아버지의 제사였다. 제사는 칠월 (무론 음력이다) 보름 바로 백중날이다. 기명을 닦고 집을 소제하고 당숙들과 숙모들과 형들과 누이들과 모두 모여 든다. 다들 명절날 모양으로 머리들을 감아 빗고 새 옷을 입고 닭이나 생선이나 닭의 알이나 녹두나 참기름이나 무엇이나 한 가지씩 가지고 와서, 평소에는 식구가 적어서 쓸쓸하던 우리 집이 해마다 이날이면 북적 끊는다. 그리고 최후로 우리 집에서 한 오십리 떠나서 사는 내 재당숙네 가족 일행이 낯이 볕에 빨겋게 타서 하인에게 햅쌀이며 녹포나 장포며 기타 제물을 두세 짐이나 지워 가지고 도착한다.
이에 모이는 기쁨이 완성 되는 것이다.
이 재당숙 집을 남들은 남궁 시간댁이라 하고일가에서 돌무룻집이라고 한다(아직 미처 말하지 못하였거니와, 내 성은 남궁이라는 두 자 성이다). 이 돌무룻집은 재산도 제일 많고 또 사람들도 잘나서 일가에서 가장 부러워하고 사랑하는 집이기 때문에 그 집 식구들이 오면 특별히 다들 반가와하였다. 나도 이 집을 퍽으나 좋아하면서 그 집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하기도 하였다. 그 집에 는 아주머니들도 많고 누이들도 많고 또 사람들이 모두 귀족적인 것 같었다. 그 집 아들이 바로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며칠 떨어져서 내게는 동생이어니와, 그의 이름은 단(檀)이요, 내 이름은 석(石)이어니와, 단과 나와는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이상한 인연을 가진 삼종 형제다.
부엌에는 새 옷 입은 부인네들이 분주히 들락날락하고 뜰에는 커다란 떡구유(이것은 참 고물이다. 하도 오랫 동안 그 속에다가 떡을 쳐서 살이 엷어지도록 닳았다)에 다가 떡을 치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는 부침개질 하는 기름 냄새가 나고, 숙부들은 혹은 초를 잡고(촛밀을 녹여서 새로 초를 만드는 것을 잡는다고 한다), 혹은 축문을 닦고, 늙은이들은 오늘 제사를 받는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이 손 저 손에 먹을 것을 얻어 들고 끼득거리며 밀려 다녔다. 내가 장손이라고 해서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어린 나도 잘 의식 하였다.
어머니는 장손부요, 이 집 주인이언마는, 나이 젊고 또 원래 칠칠치도 못할 뿐더러, 그렇게 예절 숭상하지 못하는 집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제수 여투는 것을 모두 돌무룻집 숙모에게 맡기고 내 누이 동생인 젖먹이를 안고 오락가락 하기만 하였다. 나는 내 어머니가 그렇게 칠칠치 못한 것이 애가 키이고 가여왔다. 왜 아버지는 저렇게 마르고 두 볼이 움쭉 들어 가서 궁상이 끼고, 어머니는 저렇게 못났을까 하 였다. 이러한 생각이 오랫 동안 나를 괴롭게 하였다.
그래도 그 궁상스러운 아버지와 못난 어머니를 보고 숙부들과 숙보들이 「큰집 형님」「큰집 형님」하고 깍듯이 경의를 표하는 것만은 기뻤고, 또 제사 지낼 시간이 되어서 수십명 재관 중에 아버지가 제일 어른이 되어서 절도 맨 처음에 하고, 잔도 맨 처음에 드리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아버지가 고작인 듯싶어서 좋았다. 아버지는 지극히 정성된 얼굴로 말 없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익숙하게 모든 것을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잔을 드릴 때에는 돌무룻집 맏아저씨가 앙버지의 도복 소매를 위에서 붙들었다. 하얀 위패가 끄물거리는 촛불 빛에 빛났다.
고물인 사기 향로에서 자단향의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는 것이 퍽 좋았고, 정한 모래에다가 데를 조금 심은 강신 그릇도 재미 있었다. 어른어른하게 닦은 옛날 제기들이며, 노란 술이 담긴 놋잔이며 모두 내게는 신령한 무엇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합문한 뒤에 모두들 마당에 나와 서서 달과 별을 바라보는 것이 퍽이나 좋았다. 그리고 머리를 두어 술 파내인 밥과 제사 음식 상을 받으면 나는 그만 곧해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튼날이 되면 왔던 삶들은 다들 가고 집안은 도로 쓸쓸해졌다. 그러면 나는 일조의 슬픔을 느껴서 하루 종일 시무룩했다.
그렇지만 이 제사도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적막하게 되었다. 우리 집 세사가 점점 어려워져서 누룩을 사게 되고, 나중에는 소주를 사다가 제주로 쓰게 되고, 또 얼마 아니해서는 텅 비인 커다란 제상에 놋잔에다 냉수를 따라 놓것을 보고, 나는 어린 마음에도 내 집의 몰락을 슬퍼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하도살기가 어려워지매 아버지는 어디로 나가서 한 달도 있고 두 달도 있는 때가 많게 되매, 제삿날이 오면 어머니와 나와 들이서 물을 떠 놓고 흉내를 내이는 일이 많게 되었다. 내가슴이 이처럼 아팠으면 어머니 가슴은 얼마나 아팠으랴.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집 ─ 천주산 기슭에 있는 과일 나무 많은 이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것은 진실로 내 일생에는 처음 당하는 슬픔이었다. 나는 참으로 이 집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내가 금새에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의식한 집인 까닭도 되려니와, 또 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좋은 집도 되려니와, 그 볕 잘 들고 과일 나무 많은 뒤꼍이며, 집모퉁이에 흐르는 실개천이며, 사랑 앞에 있는 큰 향나무와 대추나무며, 밤나무와 소나무와 자작나무로 보기 좋게 수풀을 이룬 뒷산이며, 잎이 온통 자주빛이 되도록 오디를 따 먹던 뽕나무들이며, 모두 내게는 차마 놓치 못할 것들이다.
이 집을 판다고 나는 아버지를 보고 울며 팔지 말라고 조르던 것을 기억한다. 내게 졸리는 아버지 가슴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하루는 어머니와 나와 있는 곳에서 이렇게 집을 하는 이유를 말했다. ─
『꿈을 꾸었는데 꿈자리가 아주 흉해, 이 집 마당에 물이 가득차 보인단말야. 집에 물 드는 꿈은 아주 흉하거든.』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시는 아버지를 목 견디게 굴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 어머니 어서 가. 이놈의 집 내버리고 새 집으로 어서 가.』
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초롱과 검을 들고 나섰다. 이 초롱은 나무로 네모 나게 짜고 문은 드닫이요, 하얀 종이를 바르고 단단한 나무로 손잡이를 만든 것인데, 나는 밤에 이 초롱에 불을 켜 들고 다니기를 즐겨해서 잘 때에도 머리맡에 놓고야 자는 것이요, 검은 문관이 차는 것이라고 아버지께 들은 것인데, 검은 바탕에 좁쌀알 같은 흰접이 반힌 것이다.
칼날은 작은놈이가 손가락을 베어 가면서 갈아서 번쩍번쩍 하였다. 나는 이것을 메고도 다니고 차고도 디녔다. 이떤 때에 그 칼날을 빼어 들고 내어 둘러서 그것이 볕에 번쩍거리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고, 위태하다고 어머니 한테 걱정도 많이 들은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이 집이 싫어졌다. 무시무시해졌다. 또 생각하면 이 동네는 도무지 살기 어려운 동네였다. 그것은 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을 미워하고 아나꼽게 보아서 도무지 서로 내왕이 없는 까닭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 집은 저희 영토를 빼앗아 들어 온 침입자요, 게다가 젊은 어머니까지 혀꼬부라진 말을 쓰는 것이 얄미웠을 것이다. 그도 우리 집이 부자나 되어서 얻어 먹을 것이나 있으면 모르지마는, 빤히 아는 바에 우리 집은 나날이 쇠해가는 집이 아니냐. 모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과 사귀고 싶은 이유는 하나도 없을 일이었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동안(삼년인가 사년인가) 이 동네 애 들과는 도무지 사귀어 놀지를 아니하였고, 다만 작은놈이네 하고만 놀았다. 얼마 후에 우리 집 아주 가난뱅이 된 뒤에 개울 하나 건너로오막살이를 짓고 와서 밥을 굶고 사는 동 안에는 나는 이 동네 아이들과 많이 섞여서 놀 수가 있었지 마는.
우리가 이 집에서 못 살고 떠나가는 것을 이 동네사람들이 얼마나 고소해 했을까. 나는 내어머니와 대판으로 싸운 일 이 있는 몽득이 할머니가 다 들어라 하는 듯이,
『내 그저 며칠 그 집에서 거드러거리기나 했지.』
하고 빈정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들어 살던 집은 본 래 몽득이네가 대대로 살던 집이어서 몽득이 할머니가 시집 올 때에 열 두 바리나 싣고 이 집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다 가 그 집이 못 살게 되어서 우리 집에다가 팔았기 때문에 우리 집도 저희와 같이 못 살고 떠나는 것이 보게 해달라고 몽득이 할머니가 밤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선황님 께 빈다는 소문이 나서 우리 어머니와 몽득이 할머니가 대 판 싸움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몇 해 뒤에 나는 몽득이와 좋은 동무가 되어서 몽득이 네 집에 놀러도 다녔으나, 드때에는 몽득이 할머니는 부증이 나서 꼼짝 못하고 사년째나 앓고 있었다. 얼마 아니해서 몽 득이 할머니는 평생 소원인 옛집 회복을 못하고 죽었다.
우리는 삼사 년 같이 살던 당말 이웃의 고소해 하는 조롱 속에 절아랫말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큰 살림하던 끝이라, 이삿짐이 많아서 든든한 젊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면서 하루 종일 져 나르던 것을 나는 기 억하고, 또 가마에다가 신주와 홍패며 교지 뭉텅이를 모시 고 풀이 죽은 아버지가 그 뒤를 따라 오던 것도 기억한다.
신주는 웃간이라는 우중충한 방에 모시기로 하였으나, 정문 만은 세울 데가 없어서 돗자리에 싸서 헛간에 매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슬펐다.
새로 떠나 온 집은 방이 셋 밖에 없고 대문간도 없는 초가 집이었다. 뒤란도 없이 집 뒤가 곧 동넷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었다.
『원, 협착해서. 내년에는 새로 집을 지어야.』
하고 아버지는 혼자서도 중얼거리고 인사 오는 동넷 사람 들더러도 변명삼아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생에 다시 사랑간과 정문 있는 집에 살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얼마 동안은 예전 집을 팡아서 지금집을 사고남은 돈으로 (아마) 걱정 없이 살아 간 모양이나, 차차 어려워지는 모양 이어서 병풍이며 책이며 문갑이며 이런 것을 팔아 먹기 시 작하였다.
『집도 좁은데 이것들은 다 두어서 무엇해 ─ 다 낡아 빠 진 것을,』
이렇게 아버지는 중얼거리면서 하나씩 하나씩 내 팔았다.
내 초롱과 검을 팔지 아니하는 동안 나는 그렇게 크게 관심 도 아니하였으나, 그러한 흥정이 있은 뒤에는 어머니는 울 면서 아버지한테 대들었다.
언제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내외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기억 이 없거니와, 필시 전해 오는 세간을 파는 데서인가 생각된 다.
『술을 잡숫지 말구려.』
하고 어머니가 울면서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을 것을 보 아도, 그 싸움의 대부분이 있던 세간을 모조리 내어 팔아 먹지 아니하면 아니 될 생계 곤란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 다.
아버지는 퍽 많이 빛을 진 모양이었다. 세말이 되면 남바 위 눌러 쓰고 수건 동여 매고 두루마기 허리를 새끼로 질끈 동인 빛 받이들이 많이 찾아 왔다. 남들은 떡을 하네, 부침 개질을 하네 하고 분주한 그믐날 어머니는 불도 잘 때지 못 한 방에서 우리 오누이 설빔을 궤매느라고 손을 불고 앉았 노라면,
『초시님 계시우?』
하고 밖에서 발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면서 부르는 소리는 모두 빛 받이의 소리였다.
『안 계세요.』
하는 어머니 대답을 듣고도 그들은 냉큼 가지 아니하고,
『섣달 그믐날도 안 주시면 언제 주신단말요? 물 힘도 없 는 남의 것을 먹기는 왜 먹어.』
하고 볼 부운 소리를 하다가는 할 수 없이 가버리고 말았 다.
「초시님 계시우?」하는 소리는 밤이 깊도록 들렸다. 어머 니는 수없이,「안 계시오」를 반복하였다.
나와 내 어린 누이 동생은 제 옷이 다 되는 것도 보지 못 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잠이 들어 버리고 만다.
아침에 깨어 보면 어버니는 언제 돌아 왔는지 곁에 있었고 그래도, 차례라고 지낸 법하여 아버지는 망건을 쓰고 행전 을 치고 있었다.
가난 고생이 심할수록 아버지 꼴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볼은 더욱 들어 가고 눈까지도 움쑥 들어 갔다. 나는 아버 지가 저러다가 죽지 아니하는가, 하고 근심하던 것을 기억 한다.
나도 새 옷을 입고 행전을 치고 아버지를 따라서 이 동네 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조부 집으로 세배를 간다. 조부집에 들어 가는 동구에는 버드나무가 여남은 그루 있었던 것을 지난 여름에 그 임자가 찍어 버렸다고 해서 아버지가,
『어, 고이한놈들 같으니.』
하고 어른 다니는 길에 나무를 찍은 것을 호령호룡해서 마 침내 잘못했다고 주인에게 사죄를 받고야 만 것이다. 나는 아버지 뒤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을 기억한다.
조부의 집은 조그마한 초가집이지마는 조부의 취미라고 할 까, 어떤 집에를 가 살거나, 그 집을 깨끗하게 거두고 꾸미 는 재주가 있었다. 방은 언제나 깨끗하게 도배를 하고 병풍 을 두르고 보료를 깔고, 그리고 어른어른하는 요강, 타구, 재떨이를 놓고 화류 장농이며 문갑을 놓고 얼른 보아서 부 자집 늙은이같이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얼굴이 붉콰 하게 술이 취하였다.
내 서조모는 지금은 비록 늙었지마는, 그래도 젊어서는 인 근 읍에까지 소문난 명기 옥섬의 자태가 남아 있었다. 내 조부는 이 서조모와 만날 때부터는 일절 큰집에는 발길을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제삿날만 잠깐 참례하고는 곧 가기 때문에 내 조모는 십여 년 간 남편과 말 한마디 해본 일도 없다가 돌아 갔다고 한다. 내가 나기 전에 벌써 조모 는 세상을 떠났었다.
조부는 풍신이 좋았다. 칠십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이만큼 피부가 좋았다. 다만 백발만은 어찌할 수 없었 으나, 그것이 도리어 조부의 풍신을 빛나게 하는 것 같았다.
『거, 원, 왜 그리 약하냐?』
조부는 세배 드리고 난 내 손을 잡고 이렇게 걱정하였다.
주야 장천에 술이나 자시고 해학이나 하고 장기나 두고 골 패나 하고, 이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조부도 내 건강에 대하 여서는 퍽 염려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부에게 무엇인 지 모를 약을 여러 번 받아 먹은 것을 기억한다. 그중에는 주발에 생찹쌀을 담고 거기다가 말끔전 몇 푼을 두고, 그리 고는 자정수를 떠서 일주야를 묵였다는 것을 날마다 마시라 고 하던 것도 기억한다. 나는 그것이 먹기가 싫었으나 조부 의 정성과 또 그가 노열 때에 발하는 호령이 무서워서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잘하고 사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가 난한고?〉 하고 나는 대여섯 살 적부터 이상하게 생각은 하면서 감히 누구에게 묻지는 못하였다. 아버지는 조부에게 대히서 지극 히 효순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도 오십이 다 되었지마는, 조부 앞에서는 전전 긍긍하는 빛이 보였다. 다른 방에 가서 야 서조모가 주는 술과 담배를 먹고 또 편히 앉아서 웃고 말도 하였다. 산수간으로 떠돌아 다니는 내 숙부도 이날은 조부의 집에 왔다. 그는 아무 욕심도 근심도 업ㄱ이 맑은 바람과 안개만 먹고 사는 사람과 같았다. 그는 딸 하나를 시집을 보내고는 상처한 뒤로 재취할 생각도 아니하고 떠돌 아 다녔다. 언제나 의관은 깨끗하였다. 그리고 경치 좋은 데 와, 세상 소식을 많이 알았다. 아버지만이 가난에 쪼들려서 궁상이 더럭더럭하였다.
일 년에 두번 ─ 설날과 조부 생신과 삼 부자가 한 집에 모이는 때에는 내가 보기에도 그 관계가 무척 화평하였다.
아버지는 삼촌 위해 걱정을 하고, 삼촌은 아버지를 위해서 걱정을 하고 또 조부는 딴 바에 앉아서도 큰 목소리로(조부 의 목소리는 참 컸다) 아들들에게 이 말 저 말을 물었다. 이 방 저 방으로 들락날락하는 내가 보기에도 이 삼 부자는 다 선량한 삶들인 것 같았다.
이것은 훨씬 나중에 안 일이어니와,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 기 가난하게 되어서 천주산 기슭에 있는 집까지 판것도 조 부의 빛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부도 모르게 빛을 갚고 빛장 이더러는 조부에게 대해서는 탕감했다고 말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 ㄴ것을 보면 아버지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효성만은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조석 끊일 것ㅇ 없어도 조부한테는 말 말라고 어머니에게 여러 번 당부하는 것을 들었다.
다만 조부나 아버지나 삼촌이나 다 세상에는 아무짝에 쓸 데 없는 인물들이었다. 조상의 유업을 받아 가지고 놀고 먹 고, 그리고 가난해져서 쩔쩔 매는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 들은 밥 굶을 날이 앞에 다닥드리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제 생활에만 무관심인 것 이 아니라, 모든 세상 일에 대하여 다무관심한 사람들이었 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자손이 된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는 어떤 선량한 것, 나로서 는 배우기 어려운 선향한 것이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시대 의 희생인가. 그때 정치가 나쁘고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 선 량한 사람들이 아주 유해 무익한사람으로 끝을 마쳤는가.
나는 내 부여조를 논죄하였다. 이것은 용서 못할 불효 일 것이다. 나는 이 불호의 죄를 대상하기 위하여서 어릴 적의 내 죄를 자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당말 예전 집에 살던 때 일이다. 내 누이 동생이 난 지 얼마 아니해서 누가 날 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 억이 없으나, 내 동생이 협막 작은놉이 동생만큼 잘나지 못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 말을 퍽 분하게 생각하였다. 그 래서 나는 몇 번 협막에 나가서 작은놈이 동생을 보고 내 동생과 비교해 보았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그 사람의 말과 같이 작은좀이 동생이 내동생보다 잘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더욱 분했다.
어느 늦은 여름날이었다. 터 아래 삼이 길이 넘게 자랐을 때니까. 나는 협막에를 갔다. 어른들은 다 일하러 나갔었다.
우리 집이 가난해지매 우리 집만 믿고 살 수가 없어서, 작 은놈이네는 다른 집 땅을 얻어 가지고 농사를 짓지 아니하 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놈이까지도 일터에 나가 고 젖먹이 어린 계집애 하나만을 토당(봉당이라고도 한다)에 누이고 마당에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어린애 허리에 끈을 매어서 문고리에 비끄러매어 놓고는 집을 비우고 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면 어린애는 강아지에게는 핥음을 받고, 닭들 에게는 쪼임을 받고 울다가는 자고, 자다가는 울고 나중에 는 울 기운도 없어서 이몽 가몽 누워 있게 된다. 파리들이 수없이 어린애 눈과 입과 똥 발린 볼기짝에 붙었다가는 어 린애가 꿈지럭거리면 일어났다가는 또 앉는다.
내가 나갔을 적에는 어린애는 자고 있었다. 나는 어린애허 리를 비끄러맨 끈을 끄르고 어린애를 번쩍 안았다. 안고는 삼밭으로 가서 바자 두른 위로 삼밭에 떨어뜨리고는 집으로 뛰어 들어와서 갈퀴를 끌고나갔다. 갈퀴를 거꾸로 들고 갈 퀴 자루로 짓찧어서 작은놈이 동생을 죽여 버리자는 것이었 다. 내가 갈퀴를 번쩍 들어서 바자 너머로 절구질을 하려고 할 때에,
『수경아!』
하고 뒤에서 내 팔을 붙드는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어린애가 삼밭에 떨어질 때에 까르륵 막혀서 우는 소리와 내가 황황하게 갈퀴를 끌고 나가는 것ㅇ 수샹해서 푸새를 하다 말고 뛰어 나온 것이라고 나중에 아버지를 복 말하였 다.
『이녀석 무얼허니?』
삼밭을 들여다 본 어머니는 파랗게 질려서 그 어린애를 꺼 내어다가 제자리에 누이고, 돌아 와서 갈퀴를 들고 우두커 니 섰는 내 볼기짝을 터져라 하고 여러 대를 때리고는 우는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 갔다.
나는 그날 아버지한테도 매를 맞았는지 기억이 없거니와, 하루 종일 뒷담뒤 잎나무 더미 밑에 숨어서 나오지를 아니 하다가 해가 진 뒤에 온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내 초롱에 불을 켜 가지고 찾아 다니다가골아 떨어져서 잠이 든 나를 나무 더미 밑에서 찾아서 아버지가 안아 들여 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자식 살인할 뻔했다고.』
하고 그 큰 눈을 부릅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나는 이때 에 처음 사람 죽이는 것이 살인이란 것인 줄을 배우고 사람 을 죽인다는 것이 어떻게 무섭고 흉악한 일이라는 것을 배 웠다.
나는 작은놈이 누이 ─ 내가 죽이려던 그 불쌍한 계집애가 그후에 어찌 되었는지를 모른다. 우리 집이 떠난 뒤게 그 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어디 멀리멀리 감자와 귀리 농사 지어먹는 곳으로 갔다는 말을 그때에 들었을뿐이요. 그 뒤 에는 도무지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리고 내 누이 동생도 멀리멀리 시집을 따라서 가서 살다가 수십년 간 남매가 서 로만나 보지도 못하고 벌써 세상을 떠나 버렸다.
내가 병을 많이 앓는 것을 보고, 어떤 중이 그것은 전생애 에 살생을 많이 한 업보라고 했거니와, 아마 그건지 모른다.
다섯 살 먹은 놈이 살인을 하러 들었으니, 결코 선업을 닦 은 내가 아닌 즐을 알 수 있고, 또내가 태어나자 내부모가 다 가난하게 되고 또 얼마 아니하여 구몰한 것을 보더라도 내가 어떻게 박덕 박복한 아이인 줄을 알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글을 쓰도록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시로 분외의 행복이다.
나는 절 아래 마을에서 꼭 몇 해를 살았는지 모르거니와, 여기서 글방에 다니기를 시작했다. 천자와 반절은 네 살 적 에 깨뜨렸느니 하고 남들이 말하거니와, 내가 외조모 한테 이야기책을 읽어 드리고는 상급으로 밤과 배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또 외조모가 돌아 갔을 때에 어머니가 끌러 놓은 댕기를 허리에 두르고 장나하던 것을 생각하면 여섯 살쯤인 것 같으니, 한글을 깨뜨린 것은 꽤 일렀던 듯하고, 또 아버 지가 읍내에 가서 달포 병으로 누웠을때에 아버지가 내게로 보낸 편지를 내가 보았고, 도 그 편지 답장을 내 손으로 쓰 고 그 끝에「戊戍 至月 念一日」이라고 쓴 것이 기억되니, 무술이면 내가 일곱 살 적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한문도 몇 자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절 아래 마을 글방에서 처음 읽었다고 기억되는 것은 〈사략〉 하편이라는 책인데, 그러면 〈사략〉초권은 언제 읽었는가 분명치 아니하고 「天星氏以木德王」으로부터 초 권 한 권을 통합독한 것은 생각이 난다. 그리고는 〈無題 詩〉라는 책 ─ 「天長九萬里 地闊三千界 白酒仁人面 黃金 黑士心天淸一應達海闊孤帆澐欲窮天里目更上一層樓」
─ 이런 것들이 적힌 책이었다. 그 다음에는 「馬上 澾寒食 途中屬幕春 可隣江浦望 不見洛橋人」같은 것을 쓴 〈馬上小 詩〉,〈古文眞實前集〉과〈後集〉 같은 것을 읽었는데 아마 줄글은 겨울에 귀글은 여름에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 에 〈孟子〉를 읽던 기억도 있다.
〈맹자〉를 읽던 어느 여름날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선 생을 따라서 산 한 넘어 물골이라고 하는 큰 서당에 향음 주례(鄕飮 酒禮) 구경을 갔던 것을 기억한다. 높은 고개에 올라서 퍼런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골 김씨네의 즐비한 기와집들을 바라보는 것이나, 또 우리 동네 서당이 라고 남의 집 사랑 구석인 것과 달라서, 물골 서당이 산속 경치 좋은 데 지어 놓은 커다란 기와집인 것을 보고, 그 서 당 앞에는 큰 연못이 있어서 고기들이 팔딱팔딱 뛰고 꽃나 무들이 많고 마당이 넓고한데, 큰 차일을 넷이나 연폭해 치 고서 유건 도복 입은 선비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나 다 내 눈에는 신기하고 부러웠다.
선비들이 거문고를 무릎 위에 놓고 징동당동하는 것과 활 을 쏘고 강을 한다. 시를 읊는다, 홀기 부는 것을 따라서 서 로 읍하고 절하고 층계로 오르고 내리고 술을 먹고이런 것 이 모두 이상하였다. 이 서당의 눈혹보기 선생은 학자님으 로 꽤 명망이 높은 이었다. 그 선생이 모인 중에 제일 위엄 이 있어서 그 굴젓 눈까지도 빛이 나는 것 같아서 나는 언 제나 이 눈훅보기 김 선생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때에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산을 타고 넘어 왔다. 그 서당이 부럽고 그 눈훅보기 선생이며 유건 쓴 커다란 선비 들이 부러웠다.
무어야 모두? 우리 서당이란 것은 쌍창도 툇마루도 장판도 없는 임 참봉네 사랑이다. 아이들이라고 모두 코흘리는 것 들, 하늘 천 따 지가 아니면 천황씨 지황씨 하는 것들, 선생 이라고 성은 김 선생이지마는, 거적눈에 말미듬이에 언제나 꾸지레하게 차리고 젊은 아내한테 물벼락이나 맞기로 소문 난 못난이, 이게 다 무어야? 나는 퍽으나 내서당이 불만해 서 아버지를 복 다른 서당으로 가고싶다고 졸랐다.
그러자 임 참봉네가 사랑에 불을 땔 수가 없고 또 거적눈 이 김 선생이 다른 데로 떠나게 되어서 나는 다른데로 떠나 게 되어서 나는 다른아이들 몇과 함께 고개 넘어 자성재라 는 꽤 큰 서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자성재라는 것은 바 로 자성산 기슭에 있는 서당으로서 꿇어 앉는 젊은 학자님 이 선생으로 와 있었고, 이 서당에는 〈시전〉〈서전〉 읽 는 관 쓴 사람도 몇 있고, 게다가 처음으로 애정을 가르쳐 준 심 태섭이라는 아이도 있었다. 나도 점심밥 그릇을 망태 에 넣어 들고 책을 끼고 이런 큰 서당에 다니는 것이 퍽 좋 았다. 지위가 높아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당에 가면 책을 앞에 놓고 절을 하였다. 이것도 거적눈이 김 선생한테서 배울 때에는 없던 법이다. 나는 이 것이 선생을 향해서 하는 절인지 책을 향해서 하는 절인지 몰랐다. 왜 그런고 하면 선생이 자리에 안 계실 때에도 꼭 그와 같이 절을 하였으니까.
꼭 꿇어 앉아서 글을 읽는 것이 고통이었으나 그래도 규칙 이 엄한 것이 좋았다.
『글들 읽어라.』
하는 선생의 명령이 내리면 우리는 모두 꿇어 앉아서 몸을 혹은 앞뒤로 혹은 좌우로 흔들면서 목껏 소리를 내어서 글 을 읽었다. 수십명이 목에 핏대를 돋혀 가지고 악을 쓰면, 집이 떠나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루 종리 글을 읽다가,
『밥 먹으러 가거라.』
하는 선새의 명령이 내리면, 우리는 일제히 글 읽기를 꾾 고 책을 덮고 일어나 절하고 그리고는 신도 미처 못 신고 튀어 나온다. 다른 때에는 오줌 누러를 나와도 문패를 들고 야 나오고 자주 나오면 야단을 만나는 것이었다.
심 태섭이란 아이는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이다. 열 육칠세 는 되었을 것이다. 건반같이 머리를 땋아 늘이고 아주 얼굴 이 동탕하게 잘 생기고 그리고도 점잖았다. 그는 가난해서 아직 장가를 못 들어서 머리 꼬랑질르 닿은 까닭으로 아랫 목에를 못 앉고 관 쓴 사람들 다음에 넷째로나 앉았지마는, 글이나 글씨나 이 서당에서는 으뜸이었다. 그는 도무지 말 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빙그레 웃었다. 나는 대섭이 곁에 앉고 싶었지마는, 글 정도를 따라서 그 담담에 앉았다. 그러 나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해주는 줄을 느겼다. 그가 나를 보 고 빙그레 웃을 때면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의 픔에안 기고 싶었다. 형도 없고 느니더 없는 쓸쓸한 가정에서 자라 나는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퍽 고적을 느꼈는데 내 고적한 혼을 만져 주기 위하여 처음 나타난 사람이 이 심 태섭이었다.
사월 파일이 되었다. 우리는 밥주발에 쌀 한 주발씩을 가 지고 와서 그것으로 화전을 붙여 가지고 자성산에를 오르기 로 하였다. 바라만 보던 자성산, 할미성이 있는 자성산, 서 울 남대문이 보인다는 자성산, 어른들도 올라 간 사람이 많 지 못하다는 이 자성산에 오른다는 것은 내게는 큰 감격이 었다. 왕복 이십리나 넘는 험로이니, 조무라기들은 오지 말 라는 말도 아니 듣고 나는 따라 나섰다. 다른 조무라기들은,
『애, 거기는 호랑이 나온대 얘.』
하고 나를 위협하고 저희들은 떨어져 버렸다.
오늘이야마로 나는 실컷 태섭의 곁에 있을 수가 있는 것이 다. 나는 깎아 드린 비탈길을 태섭의 손에 매달려 오를 때 에 행복 그 물건인 듯하였다. 그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하였 다. 그는 내가 아무쪼록 다리가 아프지 않도록 해 주려고 애를 썼다. 여러 가지 재미 있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기억이 없거니와, 그때에 무척 행복 되던 것만은 아무리 길게 써도 끝이 나지 아니할 것 같았 다.
가며 가며 진달래를 꺽었다. 다른 데는 벌써 꽃이 졌지마 는 자성산 북쪽에는 아직도 빨갛게 피어 있었다.
할미성에 올랐다. 언제 쌓았는지, 무엇하러 쌓았는지 모르 는 성이다. 큰 돌을 썩 잘 다듬어서 오불꼬불하게 아늑하게 쌓은 성이다. 나는 태섭과 함께 단둘이 언제까지나 이 성안 에 있고 싶었다. 성 오붓한 굽이에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오직 하늘뿐이다. 그 굽이는 아마 가장 거룩한 골인 듯한데 넓은 방 한 간만 하였다. 지금 생각하건댄, 아마 이것은 옛 날 우리 선인들이 하늘에 제사 드리던 거룩한 제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으 말에는 천태산 마고할미가 베치마 아홉 죽을 다 꿰뜨리면서 쌓은 성이라고 한다. 안 민세(安民世) 말과 같이 성모 시대의 유적일는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이 거록한 성─ 산꼭대기 하늘 가까운 곳에 있는 성에서 나는 처음으로 애정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것은 우 리가 소나기를 만났을 때에 태섭은 바위 밑에서 나를 꼭 껴 안아 주어서 젖지 않고 춥지 않게 해주고, 그리고 소나기가 그치고 벝이 나서 우리가 바위 밑에서 나올 때에 태섭은 내 목을 꼭 껴안고 입을 맞추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입 의 향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의 향기 였는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에아버지는 절아랫말과 당말과 중간에 새집 하나 를 짓고 그리로 떠났다. 이것이 우리 집이라고 일컬을 마지 막 집이었다. 이 집에서 우리는 가난의 극도를 경험하고 불 행의 극도를 경험한 끝에 아주 집이 없어지고 말았다.
집이라고 부엌 한 간, 방 두 간, 사당 모실 방 한 간, 그리 고는 사랑과 대문간을 포함할 아랫채들은 매년에나 후년에 짓는다고 아버지는 선언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공상뿐이었다. 어디서 돈이 나서 아랫채를 지으랴. 낙수 층 계도 놓지 못하고 헛간 한 변변히 못 짓고 만 것을. 바자문 도 다 썩어 문드러진 뒤로는 수수깡으로 다시 엮어 달 생각 도 못한 것을 어린 내 눈으로 보기데도 이 집은 참 우스웠 다. 커다란 안채 하나만이 덩그렇게 있고, 담도 없고 대문도 없고 그런 집이 천하에 어디 있어! 그래도 이것이 내가 열 한살 되던 가을까지 내 집이라고 부르던 집이었다. 그래도 채마는 조금 있어서 어머니가 오이, 가지, 고추, 옥수수, 호 박, 파, 마늘 ─ 이런 것들을 심었다. 내가 즐겨하는 옥수수, 불때는 아궁이에 구어서 싸리 꼬챙이에 꿰어서 맛나게 먹은 옥수수, 그리고 시큼한 늙은 오잇속, 그리고 강낭콩밥, 이런 것들은 다 이 채마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외가는 큰 농사를 하는 집이었다. 냐 맏외사촌은 공부 를 하였으나, 작은 사촌은 사람들은 두고 큰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농사하던 집에서 자라난 어머니는 농사 하기를 퍽 즐겨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 집에 터전도 많을 시절에 는 내 집 가풍으로 부녀가 나갈 수 있는 곳은 목화밭뿐이 다. 그러다가 이제 할 수 없이 가난하게 되니까, 어머니는 손바닥만한 채마에 평생 소원이던 농사를 지어 본 것이었 다.
어머니는 또 채마에 삼을 심은 일도 있었다. 그것으로 베 한 필을 나아서 내 고의 적삼을 지어 입은 일도 있었고, 누 에를 쳐서 명주도 두어 필 낳았고, 외가에서 목화를 얻어다 가 무명도 열 한 새, 열 두 새 각각 한 필씩을 낳았다. 이것 은 내가 왜 이렇게 소상하게 기억하는고 하면, 이 명주와 무명(그것은 내가 장가 갈 때에 쓰자는 것이었다)을 팔아서 내가 서울 유학 가는 밑천을 삼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벌지 아니하고는 먹고 살 수 없음을 확실히 인식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농사을 지으려니 땅이 없고, 길삼을 하자도 삼밭이나 목화밭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새벽 밝기 전에 어디 가서는 오리나무 가장 귀를 한 임씩 따 이고 오는 것을 알았다. 혹시 비 오는날이 면 낮에도 그렇게 나무를 해 이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럴 적이면 젖은 치마폭에 아주까리 잎에 싼 딸기를 우리 두 남 매에게 주었다. 어디서 나무를 해오느냐고 물으면, 외가집 나무판에 가서 해온다고 어머니는 한숨을 지면서 대답하였 다. 그 나무를 볕에 말리노라면 집에 오는 사람마다 다 이 상하게 보는 듯하여서 어떤 때에는 어머니가, 어떤 때에는 내가 이것은 천주산 외가집 나무판에서 해온 것이라고 변명 을 하였다.
어머니가 나무를 해오는 것을 보고 나도 나무를 해볼 생각 이 났다. 그러나 모두 남의 산이 되어서 풀 한포기 마음 놓 고 벨 데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낫 하나와 새끼한 올을 들 고 돌아 다니다가 마른 풀이며 마른 나무 가 장귀를 따서 조막만하게 한 단을 만들어서 집으로 메고 들어 오면 어머 니는 기뻐하였다. 가을이 되면 솔그럼이와 콩그럼이와 조그 루, 피그루 같은 것을 하루에 두서너 단씩 해왔다.
새 집으로 떠나 온 뒤에는 서당이 없어서 집에서 놀았다.
그리고 쌔끼도 꼬고 짚세기도 삼고 나무도 하고, 이런 일로 그날그날을 지냈다. 아버지는 더욱더욱 집을 떠나는 날이 많았다. 어디로 돌아 다니는지 우리는 몰랐다. 이따금 편지 한 장과 쌀 말, 댕기 감, 마른 물고기 등속을 사람 편에 보 내는 것으로 보아서 집 식구들 먹일 것을 찾노라고 애쓰고 돌아 다닌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게 언젠가, 아마 추석 밑인가, 또는 설 대목인가. 아무려 나 무슨 큰 명절 대목이었다. 어머니와 나와 어린 누이와 셋이서 끊여 먹을 것이 없어서 어쩌나 불도 못켜고 앉아서 서로서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아니할 대에 마당에 사람들어 오는 소리가 났다.
『왜 불도 안 켜고 있어?』
하는 것은 아버지 목소리였다.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 오려 니 생각도 아니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오셨다.』
하고 어머니가 그래도 반가와서 먼저 문을 열었다. 우리도 문을 막아 선 어머니를 비집고 「아버지」소리를 치며 내다 보았다. 어두운 곳에 두 사람의 모양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왜 불을 안 켜?』
하고 아버지는 꽤 호기를 부렸다.
『기름이 있어야 불을 켜지요.』
하고 어머니는 뾰로통했다.
『흥, 기름이 없어? 자, 여기 기름 사왔으니 어서 불을 켜.』
하고 아버지는 어두운방 속으로 고개를 쑥 디빌어서 우리 들을 찾는 모양이었다.
『저녁들이나 먹었니?』
하는 아버지 어서에는 불 켜 달랄 적 호기가 없었다.
어머니는 짐군이 가져온 짐에서 기름병을 받아서 등잔에 기름을 넣어서 성냥이 어디 있나 하고 한바탕 찾아서 등경 에 불을 켜 놓았다. 시로 조그마한 불이언마는 그래도 우리 눈에는 끔찍이 환한 것 같아서,
『야, 불 켰다!』
하고 나와 누이는 소리를 지르고, 갓난이 어린 누이도 좋 아라고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아버지는 만족한 듯이 갓도 안 벗 은 채, 두루막도 입은 채, 그래도 내 집 아랫목 다 떨어진 삿자리에 앉았다.
짐군이 간 뒤에 우리는 짐을 파복해 보았다. 거기는 쌀이 한 말, 암치가 한 마리, 쇠고기 한 뭉텅이, 국수, 떡, 엿, 그 리고 우리들의 옷감이며 댕기며 주머니 끈이며 어머니 신발 이며, 이런 것이 마치 박물 장수 짐을 헤친것과 같았다.
『이거 이렇게 많이 ! 이 돈이 다 어디서 났어요?』
하고 어머니는 마치 일생에 처음 당하는 경사인 듯이 기뻐 하였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부엌으 로 내려 가서 국수 장국을 끊였다. 나는 이때와 같이 맛난 국수 장국을 먹어 본 일이 없다. 누이도 한 그릇을 다 먹고, 젖먹이도 국물을 좀 마셨다. 또 내가 기침을 한다고 해서 나만 따로 기름에 비빈 국수를 주발 뚜경으로 하나쯤 더 먹 었다.
아버지의 설명에 의하건댄, 두무깨 장에서 출통한 만인계 에 남궁 석(南宮石)이란 이름이 삼둥이 빠졌는데 김소저라는 이름과 쌍알이 빠졌기 때문에 삼백냥(엽전을), 둘에 갈라서 일백 쉰냥이 우리 몫에동라 와서그 돈으로 이 모든 것을 사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아버 지는, 그 김 소저라는 애가 우리 수경이허구 인연이 있나보아.』
이런 말을 하고 웃었다.
이날 밤을 새와서 어머니가 내 옷을 지어 준 것을 기억한 다. 또 그 이튼날은 이 새 옷을 입고 내가 의기 양양해서 동넷집으로 돌아 다닌 것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 일백 쉰냥이 언제까지 갈 리는 만무해서 또 우 리들은 밥을 굶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마 만인계란 만 인계는 모조리 따라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백 쉰냥 짜리는 다시는 빠졌단 말을 못 들었다.
그 때에 감사들이 돈을 먹노라고 만인계를 많이 허해 주었 다. 하늘 천자 일호에서부터 십호까지, 이끼 야자 일호에서 부너 십호까지 모두 만장 표를 한 장에 석냥씩에 팔아서 삼 만냥(엽전)을 모아 가지고 제비를 뽑아서 일등에 만냥, 이등 에 천냥, 삼등에 삼백냥, 이렇게 주고는 나머지로 감사에게 바치고 그리고는 주최자가 나눠 먹는 노름이었다. 누구눈 일등이 빠져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둥, 누구는 한꺼번에 천장이나 샀다가 한 알도 안 빠져서 망했다는둥, 이런 소문 이 많았다.
만인계는 각처에 거의 매삭 한번씩은 보이는 모양이었고, 또 천인계라는 것도 있었다, 모두들 꿈을 꾸어 가지고는 표 를 사고, 또 꿈을 팔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만인 계 일등이나 하나 삐졌으면」하고 기다리던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한번은 만인계 사장이 되었으나 그것은 웬일인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아마 나라에서 금령이 내린 때문이나 아닌가 한다.
만인계도 없어지고 아버지의 건강도 점점 쇠하는 듯하였 다. 무슨 병인지 모르나 가끔 누워 앓았고, 어떤 때에는 객 지에서 한 달 이상이나 앓아서 어머니는 젖먹이를 업고 아 버지를 찾아 가고, 일곱 살 먹은 나와 세 살먹이 누이와 단 둘이서 이불을 있는 대로 내려서 두르고 추운 겨울에 밥을 굶고 앉았던 것을 생각한다. 뒷집 사랑채에 사는 무당이 새 벽에 우리 집에 나와서 문을 열어 보고, 우리 둘이 이불을 두르고 오그리고 앉아서 눈만 말똥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그래두 열어 죽지는 않구 둘이 다 살아 있구나.』
하고 밥과 국과 숭어 구운것을 갖다가 주던 것을 기억한 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아버지가 돌아 가시나보다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젖먹이를 업고 도 십리나 되는 기리을 찾아 갔 는데, 그 이튿날 도아 올 때에는 돈을 몇 십냥 얻어 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좀 나으시더라고 기뻐하였다. 「戊戍至月 念 一日」이라는 편지였다.
그때부터인가,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 는 싸리로 그릇도 만들고 저으락 청홀치로 노끈도 꼬고 돗 자리도 치고 발도 치고, 또 끈목도 치고, 또 면에서 하는 호 적들도 베끼고, 이렇게 돈 생길 일을 하려고 애쓰는 모양이 었다. 나도 끈 옥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돈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또 호적 베끼는 일도 도와 드렸다.
그것은 뻘건, 물감으로 목판에 인쇄한 용지에다가 호주의 아비, 조부, 증조부, 고조부, 이렇게 사대의 이름과 벼슬과 배우의 성씨를 적는 것이었다. 이것도 얼마나 돈이 되는 일 인지 몰랐으나, 나는 「幼學」이니「學生」이니「閑良」이 니 증조 무슨 대부니 고조 무슨 대부니 외조 무엇이니 하고 쓰는 것이 재미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 다섯 식구의 입에 풀칠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남겨 두었던 책까지 내 이종에게 팔아 먹게 되었다. 나는 그 책들을 팔 때에 몹시 울었다. 당말 집을 팔 때보다도 슬펐다. 나는 내 집의 몰락이란 것을 더욱 느낄 만하게 철이 난 것이었다.
여러 해 뒤에 내 이모가 나를 보고 내가 그렇게 원통해 하 는 것을 그 책을 가져 가서 아들이 죽었다고 눈물을 흘리면 서 말하였다. 내 이종은 장가를 들고는 곧 죽어 버린 것이 었다.
내가 열 살 되던 해, 즉 임인년 팔월이 되었다. 우리 집은 더할 수 없이 가난하게 되었다. 옷은 다 떨어지고 팔아 먹 을 것은 다 팔아 먹고 꾸어 올 만한 데서는 다 꾸어 오고, 인제는 앞도 절벽, 뒤도 절벽이 되었다. 추석이 내일 모래라 고 하건마는 다례 성묘는 커닝 조석 끓일 것이 없었다. 나 는 아버지가 넉넉한 친구들에게 구걸하는 편지를 쓰는 것을 여러 번 보았거니와 그중에 「 節日在邇百 物 如兒裵號泣干 」, 이러한 귀절이 있던 것을 소상히 기억한다. 나는 그런 편지를 전하는 일도 해보았다. 이러한 궁박한 경우에 가끔 내 종매가 시부모 모르게 혹 쌀말, 혹은 돈냥을 얻어서 심 복되는 애꾸눈이 하인 편에 보내던 것을 기억한다. 그 누나 의 시집은 부자였다. 그러나 그 시부모는 소문난 고림보여 서 아버지는 누나가 보내는 것을 받을 때마다,
『이 애가 이러다가 제 시아비 녀석한테 들키면 어떡 헐양 으로.』
하고 노 걱정을 하였다. 아버지는 누나 시아버지네 일족을 돈만 아는 상놈들이라고 미워하였다.
이때에도 추석이 재이하건만 백물이 소여하여서 혹시나 누 나한테서 애꾸눈이 하인이 오지나 아니하는가 하고 연해 얖 길을 바라보는 것이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나기 는 주룩주룩 오는데 아버지는 꽂을 물건도 없는 산적 꼬치 를 깎고 있었다. 두부도 꽂을 것이 없을....... 그리고는 아버 지는 사다으로 들락날락 하면서 무엇을 치이는 듯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마음에는 봉제사도 못하게 된 자기 신세를 한탄하여 차례도 못 지내는 상당간에 먼지 나 털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효성만은 있었다고 믿어지 는 아버지라, 추석 명절에 제주 한잔 없이 빈 산적 꼬치만 깎는 십정이 기기에 더욱 동정이 된다.
그날 나는 무슨 생각이 나서어머니를 보고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졸랐다. 아마 그해에 내가 여름내 이질을 앓아서 복 궁아나 살구를 도무지 못 먹다가 이날에 불현듯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산적 꼬치를 깎다가 말고 거의 다 저녁때에 두루 마기를 메어 입고 갓을 쓰고 나섰다.
『내 어디 큰골 가서 복숭아 있나 보고 오지.』
하였다.
『술 취하지 말고 오시우.』
하는 것이 어머니의 인사였다.
나는 들락날락하면서 아버지가 복숭아를 얻어 가지고 오기 를 기다렸다.
거의 황혼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 올 길로 얼마를 마중을 갔다. 통통거리고 달음박질을 쳤다.
생이 고개를 바라보는 개천을 건너 서서 밭둑으로 얼마를 걸어 갈 때에 메추라기 한 마리가 포드득 날아 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버지 마중 가던 것도 잊어 버리고 손으로 풀을 헤치며 메추라기 둥지를 찾아서 얻었다. 거기는 알이 세 갠가 네 갠가 소도록히 놓여 있었다. 나는 어미 메추라 기가 반드시 둥지로 돌아 올 줄을 믿고 밭둑에 가만히 숨어 서 기다리고 있었다. 면데 사람이 아니 보일만하게 어뜩어 뜩한 어스름이 땅을 덮고 하늘에만 비 온뒤 저녁 노을이 자 주빛으로 약간 남아 있었다.
안나 다를까. 얼마 아니해서 메추라기가 날아 돌아 왔다.
그는 둥지 있는 곳에서 댓걸음 떨어져서 땅에 내려 앉아서 고개를 되록되록하고 사방을 둘러 보더니, 살살 기어서 제 둥지로 들어 가는 모양이어서 풀대가 간들 간들 흔들렸다.
조그마한 날짐승이 적에게 제 알 있는곳을 모르게 할 양으 로 애쓰는 양을나는 신통하게 생각 하면서 풀대들이 간들거 리지 아니할 때를 기다려서 손에 들었던 돌멩이를 메추라기 둥지를 겨누고 던졌다. 그리고서 놀란 메추라기가 날아 나 가를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발끝으로 사뿐 사뿐 걸어서 메추라기 둥지 있는 곳에 가 보았다. 내가 던 진 돌은 분명히 메추라기 둥지에 떨어져서 그것을 덮고 있 었다.
나는 그 돌을 들었다. 그리고는 나는 두 손을 귀 밑에 들 고 입을 딱 벌리고 한참은 화석한 사람과 같았다. 메추라기 는 알을 품은 채로 내가 던진 돌맹이에 맞아서 으스러져서 내가 돌을 쳐들 때에 두어 빈 날갯죽지를 퍼뜩퍼뜩하는 듯 했으나 죽어 버렸다. 알이 터져서 노란 것이 어지럽게 흩어 져 있었다.
나는 머리가 쭈볏거리고 등골이 소름이 끼침을 깨달으면서 손에 들었던 돌맹이를 내어 던지고 뒤도 아니 돌아 보고 집 으로 달아 들어갔다.
어머니는 젖먹이를 안고 누이를 데리고 집앞 살구나무 밑 에 나와서 아버지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오시든?』
『아니.』
하고 나는 씨근거리며 어머니 곁에 섰다. 나는 어머니가 두 딸을 데리고 또 나까지 데리고 황혼에 섰는 양이 내가 금방 때려 죽인 메추라기와 같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괴로 와서 연해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너 왜 날 그리 쳐다보니?』
하는 어머니의 말씀이 더욱 비창한 것 같아서 주먹으로 눈 물을 씻고 울기를 시작 햇다.
『울기는 왜 울어? 누구허구 싸왔니?』
『아니.』
『그럼 왜 울어? 자, 들어 가 밥이나 먹자. 웬걸 아버지가 저녁 전에 오시겠지? 오늘이야 간 데마다 술이나깐 잠뿍 취 하셨겠지.』
우리는 달 욜라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으려고 토당 에 둘러 앉았다. 이것은 달을 바라보는 것이 목적인것보다 도 방에 불을 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메추라기 죽인 것이 암만 해도 맘이 키어서 못 견디 었다. 어머니 앞에 자백을 하면 다소 마음이 가벼워질것 같 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메추라기 죽인 이야기를 하 였다.
어머니는 손에들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어그머니! 왜 그런 짓을 했니?』
하고 책망하는 눈으로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분명 마 음이 섬뜨레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기운 없이 내 숟가락을 내 작은 밥상 위에 떨어뜨렸다.
『그래, 그 어머 메추라기가 아주 죽었어?』
하는 어머니의 음성은 떨렸다.
『응. 두어 번 퍼뜩퍼뜩하더니....』
『알도 깨지구?』
『응, 알디 깨져서 노란자가 어미 날개쪽지에 모두 묻었 어.』
어머니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우리 집에 무슨 크게 흉한 일이 있을라나보다 ─ 내가 죽은라나?』
하고 몸이 맥이 풀리는 듯했다.
『어머니, 왜 그런 소리를 허우?』
하고 나는 어머니가 죽는다는 말에 몸에 소름이 끼치고 무 서움이 났다.
『네가 어그니 빠져 보이는 꿈을 꾸었다지? 내가 또 부뜨 막에 벌건 쇠고기가 놓인 꿈을 꾸었어. 추석 명절이 되어서 고기를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무려나 우리 집안 에 죽을라면 내가 죽어야지. 다른 식구가 죽어서 되니?』
어머니는 가끔 내가 어린앤 줄을 잊고, 어른과 할 말을 하 는 일이 있었다. 그 서은 어머니가 밤낮 우리 둘만 데리고 있고, 어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는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어머니의 이 말이 크게 불길한 말인 것을 느꼈다. 그 리고 갑자기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다. 일전에 내가 꾼 어금 니 빠져 보이는 꿈, 그리고 요새에 도무지 기운이 없는 아 버지의 모양. 실상 아버지는눈과 볼만 쑥 들어 간것이 아니 라, 얼굴빛까지도 꺼멓게 된 것 같았다. 가난 고생에, 또 여 름내 내가 이질을 앓아서 죽게 되었던 까닭에 그 뇌심에 아 버지는 무섭게 초췌하였다. 내 이질이 어떻게 오래 끌고 또 심하였던지 나는 쑥방석을 깔고 밤낮 누워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꼭 내 곁에 있어서 나를 간호하였다. 어디 나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양식이나 약을 구하러 나가는 일뿐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좀 나아서 일어나 앉을 만해서 는 내가 심심치 않게 하노라고 장기도 가르쳐 주고 바둑도 가르쳐 주고 또 골패 노는 법까지도 가르쳐 주었다.
『사내가 이런 것도 다 알아는 두어야 해. 여기 미쳐서는 못 쓰고.』
아버지는 번번이 이런 훈계를 하였다.
이 모양으로 죽을 뻔한 나를 간호하기에 아버지가 얼마나 상심하였을 것은 내각 어린것들이 앓을 때에 상심해 보고 더욱더욱 절실히 느꼈다. 마흔 둘에 낳은 만들자 외아들인 나, 만사에 무심한 듯한 아버지도 이것을 죽이고는 살 수 없을 듯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일로 몹시 초췌한 아버지의 모양 ─ 더구나 아 까 산적 꼬치를 깎다가 후줄근한 두루마기를 입고 다 낡아 빠진 갓을 쓰고 풀이 죽어서 나가던 아버지의 모양을 생각 하매 나는 누를 수 없이 겁이 났다.
〈만일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 버지 없는 세상 ─ 그것은 열 한살 먹은 나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무서운 세상이었다.
『아버지가 왜 안 오셔?』
하고 나도 살구 나무께를 바라보았다. 벌써 달이 구름에서 나와서 커단 늙은 살구나무가 더 크게 우뚝 솟은 것이 보였 다. 그 살구나무 밑으로서 아버지가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 헤치고 걸어 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
하고 나는 맨발로 마주 뛰어 나갔다. 마치 돌아 가셨던 아 버지가 살아 오는 것이나 같이 반갑고도 소중하였다. 나이 로 말하면 할아버지 나이나 되는 넑은 아버지!
『복숭아는 다 없어져더라. 대추를 좀 얻어 왔다.』
하고 아버지는 종이에 싼 대추 봉지를 내게 주었다.
『저녁 잡수셨소?』
『아니.』
『시장하시겠구려.』
『아까는 좀 허기가나더니 임음이네 집에서 술을 한잔 먹 고 빈대떡을 좀 먹었더니 괜찮어.』
아버지는 취하지는 아니하였다. 근래에는, 내각 이질을 앓 을 때부터는 아버지가 취하는 양을 보지 못했다. 내가 앓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또 술을 자실래야 자실 돈도 없을 것이다. 인제야 누가 우리 아버지에게 외상 를 주며 돈 한푼을 꾸어는 주랴? 꿀 데는 다 꾸고 질 데는 다 진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께 그 좋아하는 술을 실컷 대 접해 보았으면 하고 여러 번 생각 한 것을 기억한다.
더구나 내 병이 점점 더해져서 오늘 내일 하고 죽을 시가 을 찾을 때에, 약값은 없어, 양식은 떨어져, 어머니는 어떻 게 사느냐고 어린것들을 한팔에 하나씩을 껴안고 울고 할 때에 아버지는 발치에 놓였던 칼을 들어서 목을 따려고 하 는 것을 죽어 가던 내가 무슨 기운이 있었던지 뛰어 일어나 서 붙들고 울고 난 뒤에는, 나는 어머니더러 밥주발을 갖다 주고라도 아버지 술이나 좀 사다 드리라고 떼를 쓴 일도 있 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울었다. 그런데 오늘도 어찌해서 취하 지를 아니했을까.
아버지는 상을 받고 두어 술 밥을 뜨더니 속이 편치 않다 고상을 물렸다. 그러고는 뒷간으로 갔다. 나는 웬일인지 가 슴이 덜컥 내려 앉아서 아버지를 따라 갔다. 설사다 ─ 나 는 발을 동동구르고 싶었다.
그해는 괴질이 사람을 휩쓸던 해다. 그러나 팔월에 들어 서면서는 추풍이 나서그런지 뜸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 의 설사가 치명적인 것을 직각하였다.
뒷간에서 돌아 온 아버지 곁에 나는 떨고 서 있었다.
전과 같이 나는 아버지와 한방에서 자리에 누웠다. 나는 얼마 동안 아버지의 동정을 근심하였으나, 별일이 없는 것 을 보고는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거니와, 내가 놀 라서 깨어난 때에는 어머니는 피마주 기르을 입에 물어서 아버지을 항문으로 아주 까릿대로 불어 넣고 있고, 아버지 는 괴로와서 몸을 비비 틀고 있었다.
내 예감대로 아버지의 병은 호열자였던 것이다.
나는 일어나 앉아서 이 광경을 보고는「천우 신조하오, 천 우 신조하오」하고 수없이 부르며 울었다. 아버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는 또 울고 또 울었다.
해가 떠오를 때에는 아버지는 눈이 곧아 돌리지를 못하고 혀가 굳어서 어음이 분명치 못하였다. 그리고 두 다리와 손 이 죽은 사람의 살 모양으로 퍼렇게 되었다.
어머니는 의원을 청하러 간다고 어디로 가고 어린애들은 안방에 소리 없이 있고, 나만 아버지 곁에서 울었다. 그 서 이 설어서 나도 또 울었다.
『수경아, 수경아.』
하는 소리만은 분명히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여 러 번 여러 번 또 하고 또 한 결과로 아버지 말 뜻이, 「내 가 죽어야 네가 잘 돼」하는 말인 줄을 알아 들었다. 그리 고는 나는 아버지의 싸늘한 손을 가슴에 안고 울었다. 아버 지가 돌아 가면 나도 따라 죽을 것만 같았다.
아침 일찍 나간 어머니가 점심때나 되어서야 곽향 정기산 두 첩과 무슨 잿빛 나는 가루약 한 봉지를 가지고 돌아 왔 다.
『내일이 추석이라고 누가 오려야지. 박 의원두, 이 의원두 다 못 오겠다구.』
어머니는 원망스럽게 말하고는 그 가루약을 아버지에게 먹 이고 첩약을 달이러 부엌으로 나갔다.
가루약을 먹인 지 얼마 아니하여 몸의 검은 빛은 가슴까지 올라 가고 아버지는 아주 정신을 잃어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김 의원이나 강 의원을 불러 온다고 뛰어 나섰다. 이 날도 때때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김 의원이나 강 의원은 다 아버지의 친한 친구였다. 그러 나 그들은 다,
『송진을 먹여라. 내일이 추석이니까 나는 못 가.』
『머루 넝쿨을 대려 먹여라. 내가 가도 별 수 없어.』
이렇게 말하고, 내가 아무리 울고 졸라도 와 주지 아니하 였다.
나는 이때에 처음으로 인심이 어떻게 박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의원이 되면 어떤 때에 어떤 사람이 부르더라도 반드 시 달려 가리라고 맹세하고 울고 돌아 섰다.
『떡 먹고 가거라.』
하는 것을 대답도 아니하고 나서서 비를 줄줄 맞으면서 집 으로 향하였다. 논 사이로, 밭 사이로 오불꼬불한 길은 아무 리 걸어도 가지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소나기가 산, 들을 가리우고 눈물은 눈을 가리워서 나는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발을 헛짚어서 논과 도랑에 짜 졌다. 내가 입은 베 고의 적삼은 흙투성이가 되고 물이 흘 렀다.
드렁다라라는 큰 돌다리께 다다라서 비가 그치고 천주산쪽 으로 푸른 하늘이 번뜻 보였다. 나는 길 바닥에 넓적 엎드 려서 수없이 절을 하면서,
『하느님 나려나 봅소사. 서낭님 나려다 봅소서. 아버지 살 려 줍소사.』
하고 빌었다. 그 푸른 하늘 조각이 점점 커질 때에 하느님 은 내가 비는 것을 들으신 것 같았다.
나는 하느님이나 서낭께 절하고 빈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 다.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나 되었나 하고 그것이 궁금해서 줄 곧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하느님, 서낭님.』
하고 중얼거리며 빌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나는 마침내 내가 메추라기 죽인 곳에 다다랐다. 나는 메 추라기 둥지 쪽을 향하고,
『메추라기야, 내가 잘못했다. 우리 아버지 살려 다오.』
라고 메추라기 귀신을 향해서도 빌었다.
살구 나무 밑에 갑작비에 생긴 개천에서 누이가 놀고 있었 다.
『아버지 어때?』
하고 나는 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좀 나았다고 그래.』
나는 아버지 앓는 방으로 뛰어 들어 갔다. 아버지 곁에 앉 았는 어머니는 내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조용히 하라고 손을 내저으면서,
『아버지가 좀 나으신가 보다. 지금 잠이 드셨다.』
하고 안심한 듯이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나는 가만가만히 아버지 곁에 가서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곧 아버지에게 숨이 없음을 깨닫고 코에다가 손을 대 어 보았다. 숨이 없었다.
『아버지 죽었어!』
하고 나는 저도 놀랄 만한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어머니 도 놀라서 내가 하던 모양으로 손을 코에 대어 보았다. 그 리고는 참 이상도 한 일이었다. 어머니나 내나 도무지 울 생각은 없었다. 도리어 나는,
『어머니는 바보야. 죽은 줄도 모르고 앉았어.』
하고 웃기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날더러 아버지 눈을 감기라고 명하고, 내가 그대 로 한 뒤에는 내 머리 꼬랑지를 풀고 어머니도 머리를 풀었 다. 그리고는 홑이불로 아버지의 얼굴을 가리었다, 한팔을 가슴에 엎은 채로, 한 다리를 구부린 채로 그것을 펼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수경아, 어떻게 사니?』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한 마디 던지고는 또 멀거니 앉아 있 었다.
『수경아, 뒷집에가서 창닌이더러 돌꼬리 기별해 달라고 그래라, 아버지 돌아 가셨다고. 중간에서 술도 먹지말고 노 름도 하지 말고 급히 기별을 해달라고.』
어머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명령하였다.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로 뒷집으로 갔다.
『여보 여보, 돌꼬리 좀 갔다 와주.』
하고 나는 대문 안에를 들어 가지 아니하고 소리를 쳤다.
나는 아버지의 돌아 가신 병이 남들이 싫어하는 병인 줄을 알았던 때문이다.
창닌이 어머니가 문으로 머리를 내밀어서 나를 바라보면 서,
『왜 그러니? 아버지 좀 나으셨니?』
하였다. 나는 우리 집에서 그렇게 보꾸탕을 쳐도 들여다 보지도 않은 이 이웃에 대하여서 반감을 느끼면서,
『아버지 돌아 가셨어요. 얼른 돌꼬리 기별이나 좀 해 주 어요. 가다가 술도 먹지 말고 노름도 하지 말구요.』
하고는, 「에그머니나」하는 창닌이 어머니와 무당 마누라 의 놀라는 양을 밉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뛰어 왔다.
집에 와서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어머 니가 젖먹이를 업고 아버지의 시체를 타고 넘는 것이었다.
타고 넘는 그 일에 놀란 것보다는 그때 어머니의 표정에 놀 란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때 처럼 침착한 표정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얼마나 침착한고 하니, 마치 반쯤 조는 사람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빛났다.
『어머니, 왜 아버지 송장을 타고 넘우?』
하고 나는 어린 마음에 그 행동이 하도 수상해서 물었다.
『이렇게 시체를 타고 넘으면 데려 간대. 나허구 애란 이 허구는 아버지를 따라 가야지. 너와 애경이허구는 오래오래 살아야 하고.』
이렇게 말하고 업었던 애란이를 내려 놓았다. 그도 이상하 지. 세 살먹은 애란이가 무엇을 알겠길래 아버지 시체를 보 면은 바르르 떨며 어머니 품에 착 달라붙어서 그 까맣고 다 팔다팔한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것이 마치,
『나는 죽기 싫여. 나는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한량 없이 가여웠다.
『어머니, 왜 그런 소릴 허우?』
하고 나는 울었다. 아버지는 돌아 가셨는데 어머니 마저 돌아 가면 참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만 같았다. 진 정으로 말하면(심히 황송한 말이나), 나는 어머니를 그만큼 소중하게 알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아버지가 혹은 농담으로 혹은 싸울 때에 어머니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노 말씀하는 것을 들은 때문인것 같이 생각 된다. 실상 아버지 나이 이십 년이나 아래요. 게다가 칠칠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머니를 향상 경멸하고 있는 것 이 어린 내 눈에 분명히 보였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는 대 수롭지 아니한 존재로 알고 있었다. 기억은 없으나 어머니 의 훈계나 꾸지람은 내가 귓등으로 들었을 것같이 생각한 다.
그러나 이날에 젖먹이를 업고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고 그 시체를 타고 넘는 모양을 보고는 나는 어머니가 무서운 사 람 같았고, 또 끔찍이 소중한 존재도 되었다. 열 한 살 먹은 나를 머리로 다섯 살, 세 살 되는 세 어린것이 어머니마저 여의면 어떻게 살아 갈까 하면 어린 마음에도 앞이 캄캄하 였다. 나는,
『어머니, 죽지 말어, 잉.』
하고 어머니를 위협하듯이 울었다.
『아니다. 나허구 애란이 허구가 죽어야 너희들이 잘 산다.
수경이가 귀하게도 되고.』
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돌아 간 지 아흐렛만에 어머니도 정말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고 말았다. 그리고 일 년 뒤에는 애란이도 아 버지와 어머니의 뒤를 따라 가고 말았다.
나는 차마 아버지의 시체를 밀짚 거적에 싸서 밭귀에 묻 던, 말과, 어머니가 아버지 돌아 간 뒤에 영 식음을 전폐하 고 아흐렛만에 돌아 간 것이나, 또 내가 가장 사랑 하던 동 생 애란이가 남에 집에 가서 굶어 죽다시피 한 것이나, 또 내 일가 친척들이 어떻게나 무정하게 우리 세 고아를 대한 것이나, 그것은 차마 말할 수도 없고, 또 남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찌 갔든지 나는 이리하여 고아가 되었다. 아버지가 있는 것은 다 팔아 자시고 어머니와 젖먹이를데리고 나허구 다섯 살 먹은 누이 동생 하나만을 알몸으로 세상에 남기고 가버 렸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철이 나서 부 터는, 내가 나서부터 집이 치패하고 또 내가 병을 앓기 때 문에 아버지로 하여금 뼈가 빠지게 해서 늙음과 죽음을 재 촉한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대하여 황송한 마음이 많 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척 못난 어른이란 생각은 지금도 가 지고 있다. 오직 어머니만은 언제 생각해도 불쌍하다. 그는 늙은 남편의 아내가 되어서 굶고 헐벗소, 말년에는 겨울에 도 솜옷을 못 입고 떨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게도 남 처럼 살아 보려고 애를 쓰다가 하나도 소원은 못 이뤄 보고 남편의 뒤를 따라 갔다. 그러나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 죽음은 애란의 죽음이다. 그으 유난히 야드르하게 까만 머 리와 까맣고 반짝거리는 눈. 그는 내가 이 인생에서 처음으 로 깊이 사랑하던 존재다. 애경에게 대해서는 심히 미안한 말이어니와, 나는 이 누이에게 그렇게 정이 없었다. 개경이 가 죽었다는 기별을 들은 때는 내가 오십을 바라보는 때지 마는 애란의 죽음을 아파하던 십분지 일도 아파하지 못하였 다.
나는 어린 적의 기록을 너무 지리하게 쓰기를 원치 아니하 여 이만 그치거니와, 크데 부끄럽고 분개하고 아버지와 어 머니를 위해서 미안하던 일 한 가지만을 더 말하고 싶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식은 땀이 흐르는 일이니, 그때의 아버지의 부끄러움이야 오죽했으랴. 그 일은 아러하 다.
내가 열 살을 넘는 때로부터 어머니는 나를 장가를 들여서 며느리를 얻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여 가끔 아버지를 졸랐다. 그러다가 내가 열 한 살이 되어서 부터 는 어머니의 졸음은 더욱 심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철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이 식구만으로도 굶는 때 가 많은데 또 한 식구를 데려 오면 무엇을 먹이나, 하는 것 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분홍 치마,노랑 저고리 입은 새아씨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며느리를 먹일 걱정보다도 우리 집 에 며느리로 딸을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아니하였다. 무 엇을 보고 딸을 주어? 그러하건마는 어머니의 며느리 소원 은 갈수록 더 간절하여서 아버지를 보고 울고 조르는 때조 차 있었다. 아마 그는 겨울에 솜옷 한 벌도 못 입던 원을 며느리에서나 풀어 보려는 것 같았다.
하기는 나만한 아이로서 상투를 짜고 관을 쓰고 명주누비 바지에 모본단 배자를 입는 아이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앞집 둥퉁이라는 아이는 나이가 스물 두 살이나 먹어서 얼굴에 여드름이 더덕더덕하고 개기름이 뻔지르 돌아도 아직도 굵다란 꼬랑지를 늘이고 있었다. 그 러나 내 어머니는 가난한 집 아들로 나를 생각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갈밭굽이 이모의 아들은 나보다 두 살 위인데도 벌써 커다란 새아씨가 있었다. 이것이 다 어머 니를 자극하는 재료였다.
아버지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퍽 상심하는 모양이었다. 그 러한 결과로 어느 부자 친구에게 말하여 그의 딸이나 손녀 를 며느리로 청하고 볏백이나 더음으로 받아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만일그리 된다면 며느리 생기 고 재산 생기고,이른바 일거 양득일 것이다. 궁한 늙은이가 할 만한 생각이었다. 또 누구든 딸이 먹고 살 것까지 껴주 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물골로 갔다. 물골은 김씨네 들 사는 동네로, 내가 어려서 비 오는 날 향음 주례를 구경 하려 갔던 곳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찾아 간 집은 그 늙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김 정언 집이었다.
김 정언은 소문 난 구두쇠로, 과거한 뒤에도 벼슬도 마다 하고 일생을 돈 모으기에 보낸 사람이었다.
내 아버지의 친구는 이 김 정언으 아들 김 교리였다. 김 정언이 대과를 하게 된 데는 내 종증조의 힘이 많고, 김 교 리가 과거를 한 것도 내 재종증조의 힘이라고 해서 아버지 는 평소에 김 정언 집을 오가 소립인 것같이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아버지는 결코 김 정언을 좋게 말하는 일 이 없고 언제나 경멸하였다. 아마 아버지가 어려서는 김 정 언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세력이 없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에야 정반대가 되었지마는, 아버지는 이 변천 ─ 무상 한 인사의 변천을 승인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비록 헐털뱅이를 입고 구걸을 다닐망정 수천석 하는 김 정언 집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월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김 교리는 아버지한테 눌리는 듯하였 다. 아버지가 김 교리보다 사오 년 연장 되는 까닭도 있겠 지마는, 그렇대야 서로 허교 하는 처지면서도 아버지는 김 교리에게 대해서 마치 선배인 듯한 호기를 부리고, 김교리 는 아버지에게 대해서 다소어른 대접을 하는 태도가 있었 다. 아마 소년 시대에 우리 집에 눌리던 버릇이 오늘날까지 도 남아 있는 것이었다. 아마 이곳이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 한 재산이요 자랑이었을 것이다. 이 자존심만이 ㅡ 아마 아 버지는 한 달이 다 못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것 하나만 은 잃지 않고 갔으리라 믿는다. 거적 송장이 되어서 나가면 서도.
김 교리는 술을 나누어서 아버지를 취케 하였다. 그는 아 마 아버지가 돈이나 양식을 구걸하러 온 줄로 알았을 것이 다. 아버지가 구구한 청을 하러 왔다가도 술이 취하여 호기 가 나게 되면 고담 준론을 하고 운자를 불리고 절귀를 짓노 라고 하다가, 그만 팽창된 자존심에 얽매이어서 구구한 소 리를 못하고 돌아 가는 성미를 아는 부자 친구들은 아버지 에게 술을 대접해서 호기를 뽑내게 하는 것으로 한 방패를 삼는 것이었다. 이 날도 분명 김 교리는 이 수단을 쓰는 것 이었다.
아버지는 연해 기울어지는 갓을 바로 잡고 수염을 내려 쓸 기 시작 하였다. 이것이 취하는 표다. 나는 아버지가 이러한 동작을 하게 되면,
『아버지 가요.』
하고 일어나기를 재촉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 름에 내가 이질을 앓으면서 아버지가 즐기는술도 못 자시고 촐촐하게 지내던 것을 생각하고 좋은 안주에 술이나 실컷 자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서 조바심만 하고 있 었다. 그러면서도 주인인 김 교리의 지르르 흐르는 좋은 옷 과 자신과 자존심 있는 태연한 태도에 비겨서 아버지의 초 췌한 얼굴, 남루한 의관, 그리고 속비인 호기가 도리어 궁상 인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왔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잠잠히 있더니,
『여보게, 나 오늘 자네 한테 청할 말이 있어서 왔네.』
하고 김 교리를 보고 마침내 담판을 개시하였다.
『자 청은 있다가 허구 술이나 들게.』
하고 김 교리는 분명히 돈 말이 나올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자네가 이 청을 들어 주면 내가 오늘 밤새도록 취 할 테고, 만일 자네가 내 청을 안 들으면 나는 지금 곧 갈 테야. 그리고는 다시는 자네 집에 안 올 것일세.』
이러한 말을 하는 아버지에게는 비통한 빛이 있고 듣는 김 교리도 좀 의외인 듯이 들었던 잔을 내려 놓고 놀라는 모양 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 장면 심상치 아니함을 보았다.
김 교리가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고 앉았는 것을 보고 아 버지는 단단히 결심한 듯이 고개를 좀 앞으로 내밀고,
『여보게, 자네 딸 내 며느리로 안 주려나? 내 청이란 그 것일세.』
하는 말에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 가고 싶어서 고개를 푹 수그려 버렸다. 아버지가 왜 이런 어리석은 말씀을 할까. 김 교리가 우리 집에 미쳤다고 딸을 주어, 하고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될 수만 있으면 그 말을 도로 걷어 들이고 싶었 다.
김 교리는 하도 어이가 없는 듯이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 보고, 다음에는 나를 바라보고 말이없었다. 나는 김 교리의 입에서 영원히 말이 아니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 입에서 떨 어지는 말은 우리 부자를 쇠뭉치로 내려 패는 말일 것이 분 명하였다.
『어떡헐 텐가? 내 청을 들을 텐가 안 들을 텐가?』
라고 다지는 아버지 말에는 벌써 처음보다는 풀이 꺾였다.
『자네 내 딸을 데려다가 무엇을 먹이려고 그러나?』
하고 김 교리는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힌 듯이 빙그레 웃었 다.
『자네 내 딸 먹을 것을랑 자네가 주게 그려. 볏백이나 주 면 되지 않나?』
아버지가 차마 어떻게 이런 뻔뻔한 소리를 하는가 하고 나 는 더욱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어서 죽고 싶었다. 딸을 며느리로 달라던 말보다 이 말은 더욱 내 자손심을 상하게 하였다. 나는 아무리 해서라도 김 교리 집보다 더 잘 살리 라고 맹세를 하였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김 교리가 입고 앉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옷을 해 드리고 비단 보료에 편안 히 앉아서 호강을 하시게 하리라, 이러한 결심을 하였다. 이 순간에 내 가슴속에 일어난 수치와 분함과 비통함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서 술이나 들게.』
하고 김 교리가 권하는 술잔을 받으려고도 아니하고 아버 지는 벌떡 일어나,
『나는 가네. 다시는 자네 집에 발길을 아니할 것일세. 잘 살게.』
하고 나를 앞세우고 오르내리 십릿령을 넘어서 집으로 돌 아 왔다.
나는 애경이 누이를 조부모님댁에 데려다 두고는 방랑 생 활을 하였다. 괴질에 에미, 애비다 잡아 먹은 열 한 살 나는 흰 댕기 드린 아이녀석, 머리와 옷에는 이가 끊는 아이녀 석..... 이것은 결코 어느 집에서나 환영받을 손님은 아니었 다.
나는 외가에도 갔다. 외조모도 없고, 외숙모는 늙은 데다가 장성한 두 아들을 다 앞세운 슬픔으로 얼이 다 빠져 가지고 하루 종일 물레질만 하고 있어서 울지도, 웃지도, 말 한마디 도 아니하였다. 다만 맏형수만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머리 도 빗겨 주고 버선도 기워 주었다. 그러나 한집에 한 달 이 상 붙여 있기는 어려워서 나는 외가집을 떠나서 우리 액내 에서는 가장 잘 살고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구들이 사는 재당숙 집을 간다. 이 집에는 노적 있고, 종도 있고, 아직도 숙보들이나 누나들은 대문 밖에를 안 나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 맏 당숙은 사랑문을 열어 놓고 앉아서 접빈객을 하였고, 가운데 아저씨는 선생이었고, 작은 아저씨는 접장으 로 서전을 읽는 새서방님이었다. 그리고 백(柏)이라는 내 삼 종제는 나와 동감으로서, 이 빛난 가문의 외아들로 귀염을 받고 있었고, 또 과년된 아주머니며 누나들도 있어서 퍽으 나 유쾌한 가정이었다. 행복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여서 이 집에도 걱정 하낙 있었으나, 그것은 큰 누나가 고칠 수 없 는 병으로 시집갈 나이가 지나도록 뒷방에 가만히 앉아서 바느질하기와 책 보기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이 누나 인연으로 언문책을 많이 얻어 보았다. 〈사씨 남정 기〉니<창선감 의록〉이니〈구운몽〉이니 이런 책들은 다 이 누나의 인연으로 보았고,
『석아, 너도 이런 책을 지어 보려무나.』
하는 말도 이 누나에게서 처음 들었다. 석(石) 이란 내 이 름이다. 다른 일가 사람들은 내 아명인 수경을 부르지마는 이 누나는 나를 석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나를 대접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
윷놀이도 이 집에서 배우고, 공기놀기도 여기서 배우고, 또 승경도도 여기서 배우고, 또
『구름 간다 구름 간다 구름 속에 선녀 간다 선녀 적삼 안고름에 울금 대정 향을 찼다 말발굽에 향내 난다.』
이러한 노래며, 또,
『우리 아버지 가는 길엔 술과 안주 널렸더라 우리 오빠 가는 길엔 기생첩이 널렸더라 우리 언니 가는 길엔 칠보 화잠 널렸더라』
이런 노래며, 지금은 더러는 생각 나고 더러는 잊어 버린 여러 노래들을 들은 것도 내 재당숙 집에서다.
그 노래들 중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해서 그 무덤에 가 서 잔디잎이 포릇포릇 나오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운명할 때며 염습할 때며 장례 나갈 때며 무덤에 묻을 때며, 이러 한 것을 아름답게 서사시적으로 읊은 것도 있었는데, 암만 해도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
또 내 작은 재당숙들이 여자들의 청을 들어서 〈삼국지〉 나 〈수호지〉를 진서책대로 조선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러웠다.
아무려나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문학이란 것에 접촉한 것이 여기서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조그마한 이야기책 하나를 지 어서 큰 누나에게 보였으나 칭찬은 듣지 못하였고, 또 내 삼종제와 함께 노래와 고풍 한시를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 나 내가 백을 대할 때에 제일 부려운 것은 그의 꾸려짐 없 이 쭉 펴인 천진 난만한 성품이었다. 나는 부모 없이, 집 없 이 남의 밥을 먹게 되어서 그런지 벌써 눈치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것이 깨끗치 못한 것임과 궁상 임을 알아서 퍽 부끄러웠다.
<나는 왜 백이 같지 못한고.〉 하며 퍽 슬펐었다.
나는 이 집에도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어떤 때에는 책 한 권을 읽고는 떠나고, 어떤 때에는 무슨 노염이 나서는 저녁 도 안 먹고 떠났다.
이 모양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일 년에 나는 세상 인정의 차고 쓴 맛을 꽤 보았고, 또 세상의 더러운 것도 꽤 보았다.
나는 그 동안에 어떤 집 웃목에서 얻어 자다가 남녀의 관계 란 것도 목격하고, 또 남자들으 부자연한 성욕 만족이란 것 도 구경하였다. 예전에는 나를 끔찍이 소중히 여기던 사람 들도 내가 고아가 된 뒤에는 지지리 천대하는 것을 당하였 다. 어떤 겨울날 나는 조부의 집을 향하고 오던 길에 선민 고개라는 고개를 넘어서 양지쪽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서는 눈 녹은 자리를 가리어서 바지를 벗어서 이를 잡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집으로 갈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수경이 와 자더니 이가 올랐어.』
이런 소리를 아니 듣자는 것이다. 산에 눈이 하얗게 덮였 지마는 양지쪽은 따뜻했다. 나는 옷을 이를 다 잡아 입고 머리 의이를 잡노라고 눈 위에 툭툭 머리를 널고 앉았노라 니 웬 보지 못하던 사람이 곁에서 잇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러한 촌구석 사람 같지는 않게 해사하게 생긴 사람 이었다. 눈에 볕이 강하게 비치어서 그는 눈이 부신 모양이 었다.
『너 남궁 석이 아니냐?』
하고 그는 부드러운 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서 병달이었다. 그는 이 지방 동학 두령인 박 대령 의 수제자요. 또 자기도 천여 명 교인을 거느린 대접주였다.
동학에서는 사십명 포덕을 한 사람을 해접주(該接主), 삼백 명 포덕을 한 사람을 수접주(首接主),천명을 대접주(大接主), 만명을 의창 대령(義昌大領), 오만명을 해명 대령(海明大領), 그리고 십만명 도인을 거느린 사람을 수청 대령(水淸大領)이 라고 하는데, 수청 대령은 이 용구(李容九)한 사람뿐이요, 그 위에는 대도주(大道主)의암 손 병희(義菴 孫秉熙) 선생이 었다. 이 서병달이란 사람은 대접주로서 해명 대령 박 해명 의 수제자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이 사람은 나를 자기 집에 불러서 오만년 무극 대도니 수 운 선생, 해월 선생이닌, 철도, 윤선, 은행이니, 여러 가지 처음 듣는 말을 하여 주고, 또 머리도 빗겨 주고 새 옷도 하여 주고 끔찍이 친절하게 해 주었다. 그 집은 다 쓰려져 가는 오막살이 단간집이나 방은 깨끗하고 책도 못 보던 것 이 여러 가지 있었다.
거진 달포나 두고 나를 시험하고 훈련한 뒤에 접주는 나를 박 대령 집으로 끌고 갔다. 그것도 산골짜기에 있는 아주 초라한 집이지마는 방에 들어 가 보면 심히 정결하였다. 그 리고 대령이란 이는 아직 선비다운 점잖은 한 오십 된 사람 으로, 언제나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몸을 단정히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절을 하였다. 서 접주 부인이 참빗질을 잘해서 서캐까지 말짱하게 흝어서 머리를 곱닿게 땋고 흰 댕기도 옥양목으로 좀 넓직하게 접어서 드려 주고, 속속들 이 옥양목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에 버선까지 기워 신겨 주 어서 박 대령집에 갈 때에는 제법 말쑥한 도련님이었다.
나는 입도 예식을 행하여 「 ?梅 從前之過願 一切之善」하 여 「 布德天下凰濟 蒼生保國安民」의 「 牙極大道大德」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를 하느님께 서약하였다.
나는 평생 처음 이런 엄청나게는 큰 소리를 들었고, 또 이 런 정성 있고 용기 있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보았다.
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잡기만 하면 죽인다는데, 그래도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포덕을 하고, 기타활동을 하고 있었다. 밤이면 동학 두령들이 많이 찾아 오는데, 모두 순실하고 점잖고 겸손하였다. 나는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하고 보고 있었다.
내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은 서울서 오는 글밭을 베끼서 갈 포(포라는 것은 한 두령이 거느린 도인의 단체였다)에 보내 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중앙 정부에서 온 지령을 도에서 받 아서 각 군에 전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내 직분은 좋게 말하면 대명의 비서요, 나쁘게 말하면 서기였다. 먼저 이집 에 와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아이가하나 있었는데, 그는 운현이라는 아이로, 나보다 사오 년이나 위이어서 큰 총각 이었다. 키는 작고 낯바닥은 방패와 같이 생겨서 얼굴이 길 다랗고 음흉해 보이는 아이였다. 이 애가 장차 내경쟁자가 될 아이였다.
운현이란 애가 차차 나를 미워하게 된 까닭은, 박 대령의 내게 대한 사랑과 신임이 커가는 것 외에도 또 한가지 있었 다. 그것은 박 대령의 딸 때문이다. 이 예옥이라는 열 여섯 인가 열 일곱 살 되는 계집애는 얼굴은 이쁜 편이 아니라 몸 모양과 목소리가 고왔다. 운현이녀석은 이 새아씨에게 마음을 두어서 장차 이 집 사위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 이었다. 운현이는 내라는 새 인물이 들어 오기 때문에 위험 을 느낀 것이었다. 박 대령 앞에서는 아주 점잖은 그, 내게 대해서도 친절하고 엄숙한 형과 같이 하는 그는 나하고 단 둘이만 있는 곳에서는 공연히 나를 향하여서 눈을 흩기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나를 깔보아서 장난감으로 삼으려고 하엿 다. 그는 내 입을 맞추러 들고 껴안으러 들고, 어떤 때에는 더러운 말까지 하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도인이 그래서 써?』
하고 톡톡 쏘았다.
이 녀석은 대단히 내숭스러운 녀석이었다. 어른들 앞에서 는 아주 엄전하였다. 나는 이녀석이 대단히 미웠으나 나보 다 나이도 많고 또 먼저 이 집에 와 있는 선배라 어찌할 수 가 없었다. 다만 나는 일하는 것과 행실 단정히 가지는 것 으로 운현을 이기리라고 결심하였다.
글씨품은 운현이가 나보다 나았으나 박 대령의 뜻을 받아 서 편지나 글을 짓는 것은 운현이가 나를 따르지 못하였다.
박 대령은 가끔 운현이 앞에서도 내 글재주를 칭찬하였다.
이 일로 나는 운현이 보다 중요한 지위에 있게 되었다. 박 대령은 무식한 이는 아닌 모양인데 웬일인지 그는 제 손으 로 붓대를 잡는 일이 없고 꼭 대필을 시켰다. 들으니, 그는 볼래 노름 잘하고 사람 잘 치고 유명한 오입장이요 날탕패 라고 한다. 그러다가 동학에 입도한 뒤로 이렇게 딴 사람이 되어서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는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아버지 보다도, 할아버지보다도,어느 아저씨들보다도 덕이 높고 엄숙한 이었다. 그는 한두 잔 술을 먹으나 결코 취태를 나타내는 것을 못 보았고,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 있었다. 그의 눈과 온몸에서 거룩한 빛이 발하 는 것같이 내게는 보였다. 우리 고을에서 유명한 학자님이 요 승천재라는, 초시 과거까지 보았다는 큰 재의 선생인 이 학암보다도 더 거룩하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러한 어른의 신임을 받아서 모든 기밀을 맡아 하는내 지위는 심히 중요 한 것임을 나는 인식 하였다. 박 대령 집에 찾아 오는 나 많은 두령들도 나를 존경해서 해라를 아니라고 하였고, 어 떤 두령은 합시오까지 하였다. 이런 것이 다 운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박 대령이 특히 나를 신임하는 또한 이유는, 내가 비밀을 엄수하는 것이었다. 까딱 잘못해서 비밀이 누설되는 날이면 관에 잡혀 가서 목이 달아나는 이 판에 비밀을 엄수하는 것 은 동학 두목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이었다. 그런데 운현 이는 너무 아는 체를 해서 가끔 비밀을 누설하였다고 박 대 령에게 꾸중을 들었다.
이렇게 됨에 박 대령의 부인도 나를 사랑하였다. 아마 내 가 나이 어린 까닭도 있겠지마는 나는 이 집 안방에 무상 출입하는 특권이 있었고, 따라서 예옥이와도 가까이 할 수 가 있었다. 예옥이는 나를 동생처럼 귀여하면서도 또 한편 으로 나를 존경하고 어려워하였다.
나는 때때로 기밀 편지며 문적을 가지고 각 포에 심부름을 갔다. 동학을 잡아라 하는 영이 나서 동학하는 사람이면 지 목이 대단하기 때문에 나 같은 어린 아이가 비밀한 사명을 띠고 다니는 것이 편하였다.
더구나 일.로 전쟁이 터져서 일본군에서 동학당을 잡으라 는 영을 발한 다음부터는 동학 두목들의 생명은 참으로 위 태하였다. 나는 이러한 기호에는 퍽 필요한 인물이었다. 나 는 간데 마다 큰 환경과 큰 대접을 받았다. 동네에 들어 가 는 것은 대개 밤인데, 그것은 동네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누구 집에 다녀 갔다는 소문을 내지 아니하려 함이었다. 밤 중에 내가 살랑살랑 들어 가면 온 집이 떨어 나서 나를 맞 아서 반드시 안방 아랫목에 재우고 더할 수 없는 사랑과 음 식으로 나를 대접했다. 이것은 그들이 도를 존중하는 때문 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표하는 박 대령을 존중하는 때문이 었다.
그리고 내가 가면 그 집에서는 이웃에 있는 도인들을 불렸 다. 수십리 밖까지 사람을 보내어서 대령님께서 무슨 말씀 이 왔으니 와서 들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모이는 대로 나는 대령이 전하는 글발을 읽어 주고, 또 동경 계신 대도주 소 식이며, 요새 세상 형편이며, 우리 도인에 대한 지목이 심하 지마는 그러하수록 우리는 더욱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를 닦아야 될 것이며, 멀지 아니해서 우리도가 창명이 될 것이 니 기뻐하라는 말로 권면을 하였다.
어린 입에서 나오는 이러한 말들은 특별히 그들에게 감격 을 주는 것 같았다. 내 말이 끝나면 그들은 정말로 절하고 치사하였다. 나는 이 동학 도인들의 순진하고 정성스럽고 겸손하고 서로 위하고 아끼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도 일생에 처음 보고 다시 못 볼 것이라고 생각 한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내 머리맡에는 새 옷과 새 버선이 있 었다. 이것은 나를 위하여 밤 동안에 도인들이 준비한 것이 다.
아 모양으로 나는 혹은 사 오일, 길면 십여 일 돌아 다니 면서 사명을 다하고는 박 대령에게 일일이 복명하였다. 그 러면 운현이는 더욱 나를 미워하였다.
내가 눈길을 여러 밤을 걷고 돌아 오면 박 대령은 안방에 서 그 부인과 딸이 있는 곳에 나를 불러서 음식을 주고 이 야기를 물었다.
『자, 보아, 어쩌면 어린것이!』
하고 박 대령은 그 부인을 보고나를 칭찬하였다. 나는 그 서이 무척 기뻤다. 예옥이도 때때로 애정 있 는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박 대령은 가끔,
『얘 예옥아, 너 석이 저고리 동정 갈아 주어라. 내가 이르 기 전에 네가 알아서 갈아 주어.』
하였다. 이것은 운현에게 대해서는 없는 일이었다. 운현은 옷이 더러우면 여기서 한 시오리 되는 제 집에 가서 갈아 입고 왔다.
일. 로 전쟁이 터진 봄이면 나는 벌써 열 세 살이 되었었 을 것이다. 이때에 나는 벌써 이성에 대한 그리운 생각을 가졌었다. 그것은 내가 열 살 내외 되었을 적에 몽득이라는 아이한테 이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것과, 또 열 한 살부터 열 두 살까지 떠돌아 다니는 동안에 이성 관계에 대 한 이야기도 많이 듣고, 또 못 볼 것을 본 까닭인가 한다.
그래서 나는 심히 어렴풋하게 예옥을 그리워하는 생각을 가 졌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눈치가 운현의 눈에 띄었는지는 모르나, 나중에 알아 본즉 운현은 재게 대하여 질투 를 가 졌던 것이 사실이다.
한번은 박 대령이 어디 가고 그 부인도 나가고 예옥이 하 고 나하고 단둘이만 안방에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이날 예옥이가 웬일인지 내 등뒤에서 내 목에 팔을 걸고 뺨이 서로 스칠이 만큼 가까이 제 뺨을 내 뺨에 대고 심히 흥분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새 투수와 새 대님을 주고 내 손을 만지고 쩔쩔 매고 있었다.
이것을 언제 들어 왔던지 운현이가 곁방에서 창틈으로 엿 보고 있다가,
『석아!』
하고 분개한 소리로 불렸다.
예옥은 얼굴이 고추같이 되어서 물러 앉고,나도 어쩔줄을 모르고 장짓문을 열고 운현이가 있는 방으로 뛰어 나왔다.
『석아, 그게 도인의 짓이야?』
하고 운현은 나를몰아 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 돌아 오시면 내가 이를걸.』
하고 운현은 그 길다란 얼굴이 선지빛이 되어서 나를 위협 하였다.
나는 무서워서 조부 집으로 뛰어 돌아와서 안 갔다. 나는 다시는 박 대령 집에는 못 갈 것으로 알고 조부님 명령대로 〈시전〉을 내어 놓고 읽기를 시작했다.
사오 일 후 서 병달 접주가 찾아 와서 나를 데리고 박 대 령 집으로 갔다. 나는 안 간다고 버티었으나 서 접주의 말 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박 대령한테 야단 만날 것을 예기하였다. 그러나 의 외에 박 대령은 온화한 낯으로 나를 맞았다.
『조부님 기운 안녕하시더냐?』
『네예.』
『너 어째 그렇게 오래 있었어?』
나는 대답이 없이 고개를 숙였다.
운현이가 어디 갔나 하고 기다렸으나 운현은 들어 오지 아 니하였다.
사모님(박 대령 부인이다)도장지를 열고 내다보면서,
『네가 여러 날 없으니깐 선생님이 어떻게 너를 찾으시는 지. 나도 보고 싶고 또 예옥이도 섭섭해서 울려고 들었다.』
하고 웃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수 없었다.
박 대령은 내머리를 쓸어 주면서,
『석아, 인제부터 나를 네 아버지로 아러. 사모님은 어머니 로 알고. 또 예옥이는 ㅡ 그래 누나라고 불러라.』
하고 애정 가득하게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집으로 달아난 뒤에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운현이가 예옥이를 협박을 하다가 예옥이가 울고 야단을 치는 판에 박 대령이 들어 와서 운현이를 곧 집으로 쫓아 보낸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로부터 박 대령 부처와 예옥의 사랑을 독검할 수가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화락한 가정으 사랑을 맛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내게 큰 기쁨이 되었는지는 말할 필 요도 없었다. 도인들은 내가 박 대령의 사위로 결정된 것같 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접붙인 가정의 사랑 속에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디를 갔다가 밤에 늦게 집에 들어 오니 조부가 펄쩍 뛰며,
『이녀석, 어서 어디로 달아나거라. 헌병 둘이 너를 잡으러 왔어. 아마 지금도 이 동네 어느 집에서 자는 모양인데 붙 들려 가기만 하면 죽는다더라. 어서 달아나. 이녀석, 동학은 왜 쫓아 다녀?』
하고 눈만 크게 뜨고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였다.
나는 서조모더러 어머니가 짜 둔 명주와 세목과 또 은물을 달라고 하였다. 노자로 쓰자는 것이다. 나는 헌병이 잡으러 왔다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아니하고 도리어 영광스러웠다.
도를 위해서 죽는 것은 영광이란 말을 노들은 까닭이었다.
수운 선생도, 해월 선생도 다도를 위하여서 돌아 갔고, 또 한 달 전에만 해도 두목 두 사람이 잡혀서 혀를 깨물고 총 살을 당한 것을 안다.
나는 조부 앞에 하직 절을 하였다.
『너 어디로 가련?』
하는 조부의 음성은 젖고 떨렸다.
『서울이오.』
내 대답에는 힘이 있었다. 나는 작년과는 달라서 속에 야 심이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에 일등 가고 세계에 이름이 높 은 사람이 된다는 야심이 가슴속에 용솟음친 것이다.
『서울?』
하고 조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래, 가거라. 내가 처음 서울 간 것이 열 일곱 살이야.
그래. 가. 허지만 머리를 깎으면 다시 내 눈앞에는 못 올 줄 알어.』
나는 또 한번 조부와 서조모에게 하직 절을 하고 나섰다.
어린 손자 ㅡ 하나밖에 없는 어린 손자를 방랑의 길로 내보 내는 조부의 심정. 아마 그날 밤을 담배로 새웠을 것이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왔다. 나는 어머니의 유물을 등에 지 고 캄캄한 밤길을 나섰다. 피신하는 날씨로는 가장 합당하 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암만 해도 박 대령 집에를 아니 다녀 갈 수가 없다고 생각 하였다. 나를 잡으러 다닌다면 박 대령도 필시 잡으러 다닐 것이다. 그렇다 하면 박 대령도 벌써 피신 하였을 것 이다. 나는 박 대령이 만일 집에서 피했다면 어디 가 숨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대개 나는 박 대령이 비밀히 왕래 하는 집을 다 알기 때문이다.
박 대령이 집에 없으면 예옥만이라도 한번 더 보고 떠나고 싶었다. 이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이다. 어찌 되면 길에서 붙들려서 죽을지도 모르는 길이다. 나는 내 누 이 동생보다도 예옥을 떠나는 것이더 어려웠다.
나는 아무쪼록 길을 피해서 박 대령네 집으로 갔다. 이렇 게 비 오는 캄캄한 밤에 헌병이 나오서 나를 찾아 다니리라 고는 생각지 아니했으나,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조 심하여서 길 아닌 데를 돌아서 박 대령 집 뒤꼍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안은 캄캄하고 고요하였다. 나는 뒷문고리를 달 각 달각 흔들어 보았다.
『거 누구요?』
사모님은 이렇게 비밀히 다니는 일에는 익숙해서 그리 놀 라지도 아니하고 겨우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물었다. 아직 그가 잠이 들지 아니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저야요, 석이야요.』
하는 내 대답도 안에서 들릴락말락했다.
문이 열리며 어떤 팔이 나와서 나를 안아 들여 갔다. 그것 은 무론 사모님 팔이었다. 이 사모님은 독실한 도인으로
「지기지금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명만사지」를 밤 낮 외위시고 있는 것이다.
『석이, 너 헌병이 잡으러 다닌다느데 웬일이냐?』
사모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서 지금 달아나는 길이야요. 선생님은 어디 피하셨 어요?』
『그럼, 홍 접주가 사람을 보내서 헌병이 잡으러 나간다고, 선생님이랑 서 접주랑 너랑 잡으러 나간다고 어서 피하라고 그래서. 그럼, 오늘 새벽에 그런 기별이 와서 선생님은 고기 장수로 채리고 피신을 하셨단다. 만일 네가 들르거든 받여 울 오 접주 집으로 오라고 그러시더라. 글쎄 그런 망할 녀 석이 어디 있니? 글쎄 운현이 녀석이 읍내 들어 가서 헌병 대에 일러 바쳤다는구나. 너만 잡으면 두목들을 모조리 잡 을 수가 있다고. 그리고 은전으로 이십원을 상을 탔다구.
원, 그런 녀석이 어디 있어.』
『오,모두 운현이 녀석이 농간이로군.』
하고 나도 운현의 길다란 음흉스러운 얼굴을 상상해 보았 다.
『전 가요.』
하고 나는 일어났다.
방이 캄캄해서 예옥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 을 켜기도 겁이 나서 못 켜는 것이었다.
『얘 예옥아, 자니? 석이가 간다.』
하고 사모님의 팔이 움직이는 쪽에 희끄므레한 것이 예옥 이었던 것이다.
『아이, 예옥이가 우네. 석이 떠나는 게 섭섭해서 우는구 나. 안 그렇겠니? 친동기같이 지내다가.』
하는 사모님의 말에 나도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는 나섰다. 그리운 예옥의 얼굴도 한번 못 보고 목소리 조 차도 들어 보지 못하고. 그러나 예옥이가 운다는 것만이 고 마웠다.
나는 헌병에게 붙들리지 아니하고 무사히 서울까지 왔다.
좁은 길가에 떡집, 보행 객주집, 이러한 납작한 집들이 늘 어선 남대문 밖을 지나서 남대문을 바라볼 때에는 그 문이 굉장히 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문통으로서 전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이고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신기하게 생각하였 다. 그 때에는 전차라면 동대문에서 용산까지, 그리고는 종 로에서 서대문까지 있었고, 일등, 이등이 있었다.
나는 그때 서울을 자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 만 상투 있고 망건 쓴 순검과 병정과 헌병들이 있었고, 일 진회가 개혁 운동을 하던 때라는 것을 말하면 족할 것이다.
서울서 일년쯤 지나는 동안에 나 자신으로 보아서 잊히지 아니하는 일도 있고, 또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정세를 그릴 수도 있지마는, 그것은 어린 내 운명의 발전에는 직접으로 는 그리 큰 관계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약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내 자서전은 여기서 한 이 년 껑충 뛰어서 내가 기도교 사상과 당시 전세계를 풍미하던 자연주의 문학에 접 촉하던 때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동경으로 간 것이 열 네 살, 바로 일 . 로 전쟁이 끝 나고 이른바 을사 조약이 맺혀서 동경에 있던 조선 공사관 이 조선 유학생 감독부로 변하던 해다.
나는 그해 여름에 동경에 갓 다음해 가서 다음해 봄까지 어학 준비를 하고 열 다섯 살 되는 봄에 T중학교 일학년에 입학하였다가 일 년 동안을 다니고는 M중학교 삼학년에 보 결 시험을 치르고 입학 하였다. 한 해를 껑충 뛴 셈이다.
이 M학교는 예수교 장로교 계통의 학교로서 신학교와 칼 리지와 중학교와 셋이 한 구내에 있어서, 이른바 미션 스쿠 울 풍이 있는 학교였다.
나는 이 학교에 입학하여서 비로소 예수교의 성경이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보기조차 처음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날마다 채플에서 기도회를 보고 또 한주일 에 두시간씩 성경 과목이 있었다.
내가 M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성경을 배운 것은 「마 태오복음」삼장부터였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유대의 광야에 나와서 설법하야 가 로되, 너희들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에 가까웠나니라」 로 시작된 것이다. 이런 것은 내가 일생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약대 털로 짠 옷을 입고 가죽띠를 허리에 띠고 메뚜기와 석 청을 먹으면서 강가에 서서 외치는 요한의 모양이 내 상상 을 퍽 기쁘게 하였다. 나도 세례 요항 모양으로 대동강 가 나 한강 가에 서서,
『회개하라, 너희 조선 사람들아!』
하고 외치고 싶었다.
나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하늘이 쪼개지고 하나 님의 신이 비둘기같이 내려 왔다는둥, 하늘에서 소리가 나 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다는둥 하는말이 믿기 지 아니하여서 픽 웃기까지 하였지만는, 예수께서 사십일, 사십야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시던 끝에 먹을것, 입을 것 에 대한 탐욕과 명예에 대한 탐욕을 이기시고 갈릴리 바닷 가로 혼자 돌아 다니시면서 어부들에게 설법을 하시는 것, 이런 것이 다 내 마음에 들었다. 만일 H라는 성경 선생이 좀더 종교적인 인물이었들 나는 좀더 감격을 얻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H선생은 성경을 가르치면서 국가주의만 선전하였다. 그것이 내 비위를 거슬렸다. 그리고 기도회 시 간에 기도하는 선생들이 대부분 바리색인 같음을 느낄 때에 더욱 나는 반감이 생겼다. 오직 하나 W라는 늙은 미국 선생 한 분 만이 진실로 예수를 믿고 예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 같아서 나는 무척 그를 숭배하였다. 그는 얼굴이 벌겋고 머 리가 허옇고 키가 훌쩍 크고 언제나 화평한 낯과 언사로 우 리를 대하였다. 그는 결코 성내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웃 지도 아니하였다. 도무지 말이 많지 아니하였다. 그는 〈바 이블 스토오리〉라는 책을 영문으로 가르쳐 주는 선생이었 거니와, 나는 그에게 배운 〈바이블 스토오리〉에 대한 기 억은 없어도 그의 화평한 태도, 자비스러운 표정을 잊을수 가 없다. 키 작은 교장은 교만 하였고, 얼굴이 길다란 부교 장은 수신을 가르치면서도 너무 정치가적이었고, -수염 빠 뚜룩한 교무주임은 평생 양미간을 찌푸리고 짱짱거렸고, 우 리에게 수사법을 가르치던 I선생은 심술궂었고, 아라사 병정 이라는 체조선생은 야비하고 우락부락하였다. 그런중에 W선 생만이 인자하고 점잖고 참되어서 내 마음에 들었다.
나는 W선생을 대할 때마다 내가 어려서 가끔 하던 T절의 노장은 생각하였다. 나는 이 노장의 이름을 모른다. 아버지 가 그를 「방주」하고 부르던 것만 기억한다.
이 노장이 W선생과 같이 낯은 불콰하고 머리는 허옇고, 그 리고 말이 없고, 그러면서도 임자하고 겸손하고 정이 들었 다. 그 노장은 나를 볼 때마다 합장하고 허리를 굽히고 한 번 빙그레 웃는 버릇이 있었다. 나같은 어린애를 대할 때에 도 농담도 없고 곡 점잖은 어른을 대하는 듯하였다. 나는 사오 세부터 이 노장을 숭배하였다. 내가 절에 가고 싶어하 는 것은 노장을 보려 하는 것이 주장 목적이었다. 나는 이 노장이 먹물들인 장삼에 주홍 가사를 메고 까맣게 때묻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부처님 앞에 수없이 내 복을 밀어서 절 하던 것을 기억한다.우리 집에서 불공을 가면 반드시 새벽 에 하였다. 환하게 법당에 촛불을 켜 놓고 이 노장이 축원 을 하는 것은 볼 때에 나는 가장 엄숙한 감정을 경험할 수 가 있었다. 나는 이 노장에세 절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그것을 금 하는 것을 불만하게 생각하던 것을 기억한다. 또 나는 내 조부의 풍신이 이 노장의 풍신과 비슷하면서도 밤 낮 술이나 자시고 농담이나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노장 이 가진 위엄이 없는 것이 슬펐던 것을 기억한다. 더구나 그 밖에 다른 갓쓴 사람들이 술냄새를 피우면서 이 노장을 보고 히게를 하는 꼴들이 미웠던 덕을 기억한다.
나는 이제 W선생을 대할 때에 이 노장을 생각하게 된 것 이다. 이름도 모르는 노장, 조그마한 절에서 혼자 살다가 돌 아 간 노장은 좋은 집에 행복된 가정에 어른으로 있는 W선 생보다 더 높은 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W선생은 적극적으로 우리를 감화하려고 애쓰는 양 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불만이었으나 또 어찌 생각하면 그 무심한 듯 초연한 듯한 것이 더 고상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려나 예수를 믿어서 잘 닦으면 저러한 인격이 되리라, 그러나 나는 W선생보다 더 열정적이요 적극 적인 인격이 되이라. 그래서 이 세상인류의 그릇된 생활을 다 바로 잡아 주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엉뚱한 생각에 더욱 불을 질러 준 덕은 톨스토이의 사상에 접촉함이었다. 내 동급생에 야마사끼라는 아이가 있 었다. 그는 지금은 상당히 이름있는 문사지만 나보다 한 살 위이요, 얼굴이 아름답게 생기고 그리고 예수교인의 가정에 서 자라라서 몸과 마음과 행동이 참 깨끗하였다. 우리 반에 는 흉악한 강난군들이 많아서 M학교 창립이래 에 가장 말 썽 많은 반이라고 학교 당국에서는 치를떨던 터이므로, 우 리는 스트라익을 한 일은 없지마는 학교에서 석탄을 잘 안 준다고 해서 선생의 의자를 쪼개서 난로에 집어넣기, 또 우 리가 원치 않는 선생의 시간이면 방안 가득 석탄 연기를 피 워서 그 시간을 쉬게 하기, 이 밖에도 선생을 울리는 일을 많이 한 반 이었다. 그런 중에 야마사끼는 참 성도와 같이 단정한 애였다. 야마사끼는 니와라고 하는 애와 아울러 우 리 학교의 모범생이었다. 니와라는 애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지금은 상당히 이름 높은 목사다.
나는 야마사끼하고 가장 친한 동무였다. 우리들은 하학 후 면 다른 애들 축에 섞이지 아니하고 운동장 한편 모퉁이에 모여 앉아서 성경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형이 톨스토이 책 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는 톨스토이의 성경에 관한 이야 기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H라는 우리 성경 선생의 강의가 예수의 탐뜻이 아니란 말을 야마사끼가 힘있게 했는데, 나 는 그 말에 굳세게 동감이었다. H선생의 태도는 반그리스도 적이라고까지 극언하였다.
우리는 전쟁을 부인하렸다. 「죽이지 말라」,「심판하지 말 라」는 「마태오 복음」에서 배운 말을 그대로 믿어서 톨스 토이와 함께 비전론자였다.
그때는 일?로 전쟁이 끝난 다음해 여서 누구나 전쟁의 승리 를 찬미하는 때이므로 야마사끼와 같은 비전론자는 반 다른 애들에게서는 비국민의 지목을 받았다. 수신 시간에 야마사 끼가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진 일이라는 영어 연설을 했기 때문에 오가와니 이시모도니 하는 애국주의자들이 기 숙사 뒤 으슥한 데서 야마사끼에게 「철권 체제」를 가하였 다. 그래도 야마사끼는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지켜서 오른편 뺨을 돌려 대고 도무지 저항 하지 아니하였다.
『남궁군, 나는 오늘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고 한참 울었네. 내가 그 사람들한데 얻어 맞을 깨메 조금도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마음속으로도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나지 아니한 것이 어떻게 기쁜지, 어떻게 감사한 일 인지.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남궁군, 우리는 사람으로 오직사람으로만 악을 정복한단 말일세.』
이렇게 말하는 야마사끼군의 시퍼렇게 멍이 든 두 눈에는 맑은 눈물이 이슬같이 고여 있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오가와와이시모도외에 헤어진 교복을 입은 패(이들은 다 불량한 패들이다.)가 우리 앞으로 지나가다가 암팡진 오가와가 우리가 않았는 앞에 우뚝 서 며,
『정신 차려!』
하고 불량스러운 눈망울을 굴렸다.
야마사끼는 일어서서 온화한 말로,
『오가와군, 그리고 이시모도군, 자네들이야말로 회개하게.
그렇게 우락부락하는 것이 애국이 아닐세.진정한 애국은 하 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야. 나는 자네들을 위해서 기도 를 올리기를 쉬지 않네.』
하고 두 사람과 함께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는 마치 순 자와 같이 태연하였다.
『건방진 소리 말어. 또 얻어 맞을 테니! 그 눈 등에 멍이 나 풀리거든 이번에는 눈망울이 쏟아지도록 단단히 때릴 터 이다.』
하고 주먹을 내러 두르고는 웃고 지껄이며 가버렸다.
『남궁군,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많지 못하단 말일 세.』
하고 야마사끼는 내 손은 잡고 떨었다.
나는 성경에서 배우는 것을 고대로 실행하려고 결심하였 다. 나는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있더라도 기쁘게 예수를 따라 가리라고 결심하였다.
첫째로 내가 실행한 것은 우리 집 하녀에게 대한 태도를 고침이었다. 우리는 사오인 유학생이 집 한채를 빌어 가지 고 마나님 하나를 두고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 마나님은 시나노라는 시골에서 온 어수룩한 무식한 노파였다. 우리는 무론 그에게 아무 경의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다. 그런 것 을 나는 존경하는 말로 대하고 또 깎듯이 어른에게 대한 인 사를 하였다. 그리고 세숫물이나 무엇이나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손수 하고 이 노인을 부리지 아니하였다.
내 이러한 태도를 보고 이 노파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 다. 혹 내가 자기를 조롱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모양이었 다.
그러나 이틀 사흘 지나는 동안에 그는 내 성의를 안 모양 이었다. 하루는 내가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오다 께 바아상(이것이 이 마나님의 이름이었다.)이 들어 와서 주 춤주춤하다가 내게 그렇게 자기를 너무 공대하지 말라고, 그러면 도리어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는 내 믿는 대로 하였다. 오다께 바아상은 나를 대단히 사 랑해 주었다. 그 늙은 눈이 나를 바라볼 때 마다 언제나 사 랑과 감사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나는 오다께 바아상의 편지를 보아도 주고, 써도 주었다.
그는 집에서 편지가 올 때마다 날더러 보아 달라고 하고는 곁에 서서,
『그년이 죽었나 좀 보아 주시우』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년이란 이 마나님의 시앗이었다.
『그 시앗이 젊어요?』
나고 내가 물으면,
『젊지요. 나보다 다섯 살 아래 라우.』
하고 분한 표정을 하였다.
『마나님은 몇 살인데요?』
하고 내가 웃으면서 물으면,
『할멈은 벌써 한갑이라우.』
하고 자기도 어이 없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샘이 나요?』
『그럼요. 영감장이가 홀딱 반해서 죽을지 살지를 모르는 것을 할멈은 그 꼬락서니를 보기가 싫어서 이렇게 집을 버 리고 나왔지요. 그래도 할멈이 이렇게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것을 보면 영감장이가 회심을 할 줄 알고 그랬더니, 인제는 좋다구나 하고 떡 그년을 큰집에 불러 들여서는 내 방에서 내 세간을 쓰고 산대요, 글쎄, 우리 딸이 그러는데.』
하고 영감이 곁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대들기라도 할 것같 이 낯 색이 변하고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이때로구나 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고 예수의 말씀을 들어서 말했으나 그는 옳다고는 하면 서도 편지만 오면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치를 떨었 다.
나는 한집에 있는 친구들 보고도 사람은 다 평등으로 형제 요, 자매라, 높고 낮음이 없으니 오다께 바아상을 존경하자 는 제의를 가끔 하였으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들은,
『여!예수 또 났군.』
하고 놀려 먹기만 하고 K라는 짖궂은 친구는 한술 더 떠서 일부러 오다께 바아상의 트집을 잡아 가지고는 몰아세웠다.
『여! 예수도 성내나? 성내지 말라고 했어.』
하고 더욱 나를 조롱하였다. 나는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집 을 실은 「구루마」응 끌고 가는 것을 보면 뒤에서 몰래 밀 어 주었다. 언덕을 다 밀어 올린 뒤에 내가 모른 체하고 가 면 뒤로서,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말을 들을 때에는 기쁘고 안 들을 때에는 섭섭하였다. 그러나 나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 나님」이란 말씀을 생각하고 내 마음이 깨끗지 못함을 뉘우 쳤다.
또 나는 전차에서 여학생들을 볼 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아 니하려고 애를 썼다. 「마음에 음심을 먹기만 하여도 벌써 간음을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지키려 함이나, 이것은 참 어려웠다.
나는 예배당에도 다녀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예시과 또 하는 말들이 나를 만족하게 못하였다. 내가 성경을 보고 그 렸던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인은 외모부부터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질박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무슨 거룩한 빛을 발하지 아니하 면 아니 될 것같이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교장이나 교회 목사나 다 기독교계에 이름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서 저렇게 보통 사람과 같이 다름이 없을까 하면, 일번 으로는 활멸의 비애를 느끼는 동시에 일변으로는 반감이 생 겼다. 내가 기도회 시간 끝에나 교회에서 돌아 오는 길에 야마사끼를 보고 이런 감상을 말하면 야마사끼는 내 어깨를 치고 내 손을 힘있게 쥐어서 나와 동감인 뜻을 표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교회에 다니기로 하고 나 혼자 그리스도 인이 되어서 부패한 현대 기독교를 혁신하리라라는 엄청난 야심을 품었다. 이 마음을 알아 주는 이는 야마사끼였느나, 그래도 그는 이론으로 승인할 뿐이요, 자기가 몸소 실천 하 려는 열심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야마사끼에게 대하 여 그것이 불만이면서도 내 맘을 알아 주는 것만으로도 야 마사끼의 존재를 나는 힘있는 도움으로 생각하였다.
나와 같이 M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 학생들 중에도 점잖 은 예수교인이 이삼인 있었다. 그중에도 R이라고 하는 이는 이름이 중학생이지, 나이가 삼십이 넘고 고향에서는 교회 장로까지 지냈다는 아버지 같은 어른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대해서는 내 신앙을 고백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것은 그들이 벌써 완고하게 일가진을 이루어서 제 의향과 다른 의견을 용납할 아량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나는 「마태 복음」칠장 이십절에, 열매로써 그 나무를 안 단 말과 또 이십 일절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 께서 하라신 대로 꼭 행하고 말라신 것은 목숨을 내어 대이 고라도 아니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내가 이 결심을 한 것은 학교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전나무 수풀속, 내가 항상 혼자 기도하기를 즐겨하던 자리에서였다.
나는 밤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다 잠이 들기를 기다려서 살짝 문을 열고 나서서 내 기도하는 처소에 가는 버릇이 있 었다. 인가도 길도 없는 산림 속의 밤은 형언할 수 없이 어 두웠으나, 나뭇 가지 틈으로 보이는 하늘 조각과 별에서 오 는 빛이 이러한 어둠 속에서야말로 고맙기도 하고 신비하기 도 하였다. 이러한 곳에서,
『나는 일생을 주의 뜻을 따라 살아 가기를 작정하옵니다.
어떠한 괴로움이 있든지, 비록 이 몸이 죽더라도 주의 뜻에 서 벗어나지 아니할 것을 서약하옵니다. 이 연약한 어린 죄 인에게 힘과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하고 빌 때에는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는 나는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나를 희생할 기회를 찾았다. 나는 나와 같이 있는 식구들의 심부름을 하 기를 힘썼다. 그들이모르는 동안에 구두를 닦고 책상을 치 고, 이러한 일도 하였고, 또 오다께 바아상을 위하여 우물의 물도 길어 주었다. 한번은 한방에 있는 학생 하나가 내 학 비 이십원을 훔친것을 빤히 알고도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 이십원을 찾지 못하면 오는 한달 동안을 살아 갈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때에야말로 내 믿음을 실행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고,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주라 하셨고,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하셨다. 이 가르침을 지키자면 나는 이 돈 이십원을 찾을 길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는 이 괴로움 을 이기어나가기 심히 어려웠다. 한 일주일 동안이나 괴로 와 한 끝에 나는 내 돈을 훔친 P라는 학생을 보고 장난으로 내 돈을 감추었거든 그만하고 도로 달라고 부드럽게 말을 하였다가 단단히 피잔을 당하고 그 이튿날이 월사금 내일 기일이므로 이층에 있는 K라는 사람에게 월사금 꾸어 달라 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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