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8

HJu Kim 히틀러는 이상한 사람이다.

HJu Kim
Yesterday at 01:16 ·



히틀러는 이상한 사람이다. 찰리 채플린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역설적이면서도 그럴듯한 제목을 가졌다. 히틀러가 그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는 게 사실일까. 히틀러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하여는 믿기지 않는 소문이 많다.

그 중 압권은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공식석상에서 이야기했고 독일대중은 호응했다. 16세기 이래 독일은 개신교 국가다.

전후 독일은 아돌프라는 이름을 사람에게 쓰지 않을 정도로 나치즘을 혐오하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정하게 반성했다고 들었는데... 본회퍼는 전쟁 중 옥중에서 죽었고, 고향으로 쫒겨났던 바르트는 전쟁 끝나고 돌아와 신학을 가르치고 WCC 만들고... 그 과정에서 독일 국가교회는 어떤 기도를 하고 무슨 말로 설교하고 결국 무엇을 배웠을까.


내가 속한 개신교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근대사의 정점을 (혹은 저점을) 교회는 어떻게 통과했을까. 시간을 두고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 어느 때건 우리에게는 지혜 보다 은혜가 더 필요하다고 믿는다.


최주훈Follow
8 June 2015


루터 다시 읽기 4

유럽에서 사형선고 받은 루터:

20세기 유럽 신학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무협지보다 재미 있다는 생각이 들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난 번 포스팅에 한국에서 루터가 발을 붙이지 못한 이유를 짧게 소개했는데, 20세기 유럽에선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특별히 1925년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전기 <Mein Kampf>에서 루터를 ‘가장 위대한 독일인이며 롤모델’로 선언한 이후로 아우슈비츠의 숨겨진 망령으로 의심받았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신학 역사와 관련해서 본다면 좀 더 뚜렷해진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30년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 유럽의 신학계에는 천재적인 학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이름하여 변증신학자, 또는 신정통주의신학자라는 양반들이다. 바르트니 불트만이니 에밀 부룬너니 하는 골치 아픈 분들이 이 때 나오신 분들이다. 오죽하면 파울 틸리히 같은 학자도 자리를 잡지 못해 미국으로 건너갔을까? 근 백년이 지났지만 우린 여전히 사골 우려내듯 하면서 이 양반들 방귀 소리에도 감탄한다. 여하튼 20세기 루터에 대한 오해, 정확히 말하면 대문 밖으로 쫓아버린 결정적인 사건은 나치 정권의 득세지만 여기에 의도치 않게 기름을 부은 인물은 ‘칼 바르트’다.

1930년대 히틀러 정권 아래서 일련의 신학적 논쟁이 치열하게 있었다. 한국엔 잘 소개 되지 않았지만 당시 기독론에 방점을 두었던 바르트 계열과 창조론에 기반을 두던 루터신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신학 논쟁은 저항하는 독일교회의 표상이었던 ‘고백교회’(다양한 교파가 함께 모인 일종의 교회 연합운동) 내부에서 조차 가열 차게 진행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말이지만 난 신학교 대학원 다닐 때 까지도 고백교회가 어떤 유명한 교회 이름인줄 오해하고 있었다. 그저 바르트(칼빈파)와 본회퍼(루터파)가 사이 좋게 목회하는 ‘좋은 교회’ 정도로 생각했으니 여간 우습지 않다.

1930년대 어간에 벌어진 신학논쟁과 고백교회에 대한 문제는 기회가 된다면 후에 논의해보자. 이 당시 치열했던 신학논쟁은 ‘교회와 국가'가 어떤 긴장관계를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20세기 초반 신학 논쟁을 보면 루터의 정치관을 단선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1934년(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까지 바르트를 위시한 신학과 루터신학자들 간의 신학논쟁은 생명을 건 전쟁처럼 치열했다. 보통 바르트의 신학적 대적자로 보편계시를 주장했던 에밀 부룬너로 알고 있지만, 정작 바르트 본인은 루터학자였던 파울 알트하우스를 최대의 적수로 꼽았다. 그도그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알수 있는 방법이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바르트 주장에 "노"라고 단호히 알트하우스가 맞섰기 때문이다. 그는 루터의 글과 성서의 전거를 인용하면서 하나님 존재를 알 수 있는 일종의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창조세계 안에 주어졌다고 역설했다. 이성이나 역사, 자연만물의 신비 같은 것들이 신의 존재를 추정할 수있는 접촉점이다. 다만 이 접촉점은 안개처럼 희미하고 불완전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의 조명 없인 장님이 길거리를 헤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알트하우스에 따르면 이 접촉점은 '알지 못하는 신'을 알려고 하는 종교발생의 기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를 '원-계시'(Ur-offenbarung)라고 칭했는데, 그도 역시 온전한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것으로 가르쳤다. 알트하우스가 보기에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너무 단순화해 버린 것으로 판단했다. 만일 이런 접촉점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도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런 관점은 바르트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바르트의 신학적 업적과 가치는 20세기 신학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힐 만하다. 특별히 기독론적 집중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역사를 논하면서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우매한 일을 없지만, 그래도 '만일' 1930년대 당시 유럽에서 기독론과 창조론의 논의가 조금 더 깊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 문제는 바르트도 스스로 고민했던 문제인데 결국 미제로 남고 말았다. '만일' 이런 시도가 끈질기에 당시에 논의 되었다면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종교세계에도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치 정권의 득세로 인해 풍성한 신학 논쟁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결말이 난 것처럼 보이도록 한 사건이 있었으니, 독일의 패망이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전쟁 끝에 영웅과 악당의 단선적 구조만 남듯이, 바르멘 선언을 주도했던 바르트는 신학계의 일약 스타가 되었고, 승자독식의 원리에 따라 그의 후예들이 신학계를 주름잡게 되었다. 반대로 그와 논쟁을 벌이던 당시 루터신학의 거장들은 ‘나치주의자’라는 소문에 휩쓸려 신학도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물론 나치정권 당시 독일에서는 ‘독일 기독당’(Deutsche Christen)이란 기치 아래 히틀러를 민족의 영웅이며 구원자로 칭송하던 교회들도 다수 있다. 특별히 중동부지방인 튀링엔 지방은 거의 광신도 집단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란 것이 한 색깔로 채색될 수 없듯이 저항자들도 있었고, 나치의 광풍과 상관없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 예로 당시 파울 알트하우스는 나치와 상관없는 인물임에도 전쟁이 끝난 직후 ‘나치 추종자’라는 낙인이 찍혀 에를랑엔 대학교 신학교수직을 박탈당했다. 후에 근거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귀 했지만 이미 찍힌 낙인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1950년도 어간에 이렇게 낙인 찍혔던 신학자들의 대다수가 루터신학자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독일 개신교에서 루터파의 비율은 약 8-90% 정도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치와 상관없이 낙인 찍혔던 학자들을 재평가해야된다는 논문과 그들의 신학이 가지는 가치, 나치 추종자라는 낙인이 때로는 소문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고증들이 1980년대 후반 부터 쏟아져 나왔다.

다만 문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바르트 계열 신학의 주도아래 루터신학 쪽은 거의 식물인간 상태처럼 신학계의 수면 밑으로 들어가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엔 넌센스가 있다는 게 참 흥미롭다. 재차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개신교 내부 진영이 아니라 가톨릭 신학자들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루터와 결별한 곳, 그곳에서 루터가 다시 살아났다.

여담이지만 신학에서 보수주의자로 꼽히는 바르트가 한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진보를 넘어 자유주의자로 낙인 찍혀서 이름 조차 거론하지 못하게 한다. 이유? 아래 사진 때문이다.ㅋㅋ 그나마 루터는 살아났는데, 그 교단에서 바르트는 언제 살아나려나?

예고
가톨릭 신학에서 살아난 루터(1970년대 종교신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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