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9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 FELIVIEW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 FELIVIEW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2016년 9월 17일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李光洙(イグァンス)―韓国近代文学の祖と「親日」の 烙印』, 최주한 역, 푸른역사(中央公論新社), 2016(2015).

이상하게도,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이광수에 대해서 읽고 있을 때는 언제든 그렇다. 명명백백한 그의 친일 행적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고, 시대가 그랬으니 덮고 넘어가야한다고 강변하려는 마음도 아닌데도. 홍명희나 한용운 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하타노 세츠코의 이광수를 읽다보니, 이광수에 대한 연구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느낌이다. 왜 그랬을까? 비분강개조가 싫어서일까, 아니면, 구구한 변명에 나조차 구차해져서 일까. 막상 책을 펼치고, 그에 대한 담담한 기록들을 읽다보니, 애석한 삶을 살아간 한 천재의 삶이 비추어질뿐. “조부나 아버지나 삼촌이나 다 세상에는 아무짝에 쓸 데 없는 인물들이었다. 조상의 유업을 받아가지고 놀고먹고 그리고 가난해져서 쩔쩔매는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밥 굶을 날이 앞에 다닥드리는 것 을 보면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제 생활에만 무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일에 대하여 다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자손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수 없 다.”(31, 『그의 자서전』, 1936) 1892년 생, 이광수의 유년기, 부모가 없고, 가난해서 친척집을 떠돌면서 밥을 빌어먹는 삶. 어려서 서 당에서 천재소리를 듣고, 열 살 무렵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당숙, 재당숙 집을 며칠씩 머물면서 떠돌때 4/29/2020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shatano-yikwangsu/?ckattempt=1 2/5 도, 책을 손에 잡고 있었던 그는 우연히 동학을 만난다. 동학 전령 노릇을 하다 동학의 도움으로 서울로 와서 동학의 진보회가 합류한 “일진회” 장학금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난 것이 1905년. 열네살 혹은 열 다섯살의 중학생 나이. 을사조약으로 망국의 길을 걷던 나라.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작년과는 달라서 속에 야심이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에 일등 가고 세계에 이름이 높은 사람이 된 다는 야심이 가슴속에 용솟음친 것이다.”(41, 『그의 자서전』, 1936) ‘일등一等’이란, 원래 조선에서는 ‘공신’의 순위를 나누는 말이긴 했는데. 1905년 일본에서는 자주 쓰던 말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 후, 일본이 ‘일등국’이라는 표현이 흔히 등장한다. 두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 로 세계의 일등국이 된 일본. 소년 이광수의 마음에 들어선 ‘일등’이란 단어 기원은 어디일런지. 그는 경 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으로 간다. 1906년 1월의 일이다. 만 열셋. 순탄치 않은 유학생활은 곧 좌초한다. 일진회 이탈 문제로 천도교가 분열하고, 학비가 떨어진 그는 귀국 했다가, 이듬해 단지사건으로 천도교 유학생에게 황실에서 학비를 대기로 한 후 관비유학생으로 메이지 가쿠인에서 중학과정을 마친다. 그리고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한때 톨스토이주의의 영향으로 청교도적 생활을 하다가, 바이런을 접하고, 욕망에 눈뜬다. 망국의 혼란에서 이 소년을 무엇을 보고 느 끼고 만났을까. “나는 여행을 중지하고 정거장에서 나와서 학교로 향하였다. ‘인제는 망국민이다’ 하는 생각을, 한참을 길을 걸은 뒤에야 할 수가 있었다. / 나는 중도에 앉아서 얼마 동안인지 모르게 혼자 울었다. 나라가 망 한다 망한다 하면서도 설마설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대황제가 이나라의 주인이냐? 그가 무엇이길 래 이 나라와 이 백성을 남의 나라에 줄 권리가 있느냐?’ / 이런 생각도 났으나 그것은 ‘힘’이 있고야 할 말이다. 힘! 그렇다 힘이다! 일본은 힘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았다.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는 것도 ‘힘’이 다! 대한 나라를 내려누르는 일본 나라의 힘은 오직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야 밀어낼 수가 있다. (103, 『나의 고백』, 1948) 진화론과 바이런을 가르친 것을 기독교 신자들이 문제 삼자,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중국의 안동으로 상 하이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대륙을 방랑한다. 상하이에서 “홍명희는 아침부터 밤까지 방에 처박혀 오스 카 와일드를 읽었”고 “조소앙은 새로운 종교를 일으킨다며 코란을 읽고 명상에 잠겼”다 하는데.(111) 기약없는 망명객들은 무엇을 붙들려 했을까. 블라디보스톡에서 무링으로 시베리아를 떠돌던 이광수는 미국행이 좌절되어, 경성으로 돌아온 후, 두번째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이번에는 김성수의 도움을 받았 다. 1915년 5월 도쿄의 유학생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발표한 논설 「공화국의 멸망」에서 이광수는 “외부 에서 주입된 ‘자유’, ‘권리’, ‘법’ 사상이 조선의 전통질서를 오염시키고 말았다고 한탄하며 “아아, 우리는 피상적 문명에 중독하야 오래고 정들은 공화국을 깨트리었도다”라고 적고 있다.”(120) 외부에서 주입 된 ‘자유’, ‘권리’, ‘법’ 사상이 공화국의 사상이며, 정작 조선은 한 번도 공화국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이 렇게 말한 것은 쑨원孫文이 말하는 신해혁명의 ‘오족공화’를 제나름 해석한 것이리라. 이광수에게 종종 나타나는 서양 문명에 대한 일종의 혐오는 정작 자신이 두 차례의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 문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처지이면서도, 침략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음에 좌절한 탓이리라. 그러나 그가 말하는 4/29/2020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shatano-yikwangsu/?ckattempt=1 3/5 전통은 실상은 허상에 불과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다. 모두 잃어버린. 근원과 뿌리를 상실하면 무엇을 꿈꾸게 될까. 이 시기 그는 「교육가 제씨에게」에서 “조선의 쇠퇴와 침체를 타파하려면 ‘대욕망’을 가진 청년을 길러내 야 한다고 ‘욕망의 교육’을 주장했다” 이는 중학시절 이광수가 탐독한 기무라 다카타로의 바이런 평전에 나오는 “실로 구미欧米 기독교 국가의 인민은 자신들이 문명하다고 뽐내지만, 그 내부는 당장이라도 파 열을 일으킬 듯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오직 그 욕망이 있어 그것으로써 강대해진다”는 구절을 떠올 린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실린 「자녀중심론」은 “우리의 자녀로 하여금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온통 그네의 식료로 삼게 하여야 한다. (중략) 우리의 자녀가 필요로 인정하거든 우리의 골격을 솥에 끓여 기 계를 운전하기에 유용되는 기름으로 만들어도 가可하고, 거미새끼 모양으로 우리를 산대로 두고 가슴을 욱이어 먹어도 가可하다.”(142-143) “우리는 선조先祖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어떤 의미로는) 으로 금일今日 금시今時에 천상天上으로서 오토吾土에 강림한 신종족新種族으로 자처하여야 한 다.”(143-144) 1917년 1월 『학지광』에 발표한 「위선 수獸가 되고 연후然後에 인人이 되라」는 논설에 서 “‘살아라.’ 삶이 동물의 유일한 목적이니 차此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는 도덕도 무無하고 시비是非도 무無하니라. 기아飢餓하여 사死에 빈瀕하거든 타인의 것을 약탈함이 어찌 악이리오, 자기가 사死함으로 는 녕寧히 타인이 사死함이 정당하니라.”(145) 하야타 세츠코는 메이지 시대 언론인 야마지 아이잔山路 愛山의 「나는 어떻게 제국주의의 신자가 되었나」(1903)를 인용한다. “나는 인간은 존재의 권리가 있다 는 신념을 가진 까닭에 제국주의의 신자가 되었다. …… 제국주의가 아니면 인간은 지상地上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146) 너무나도 익숙한 사고방식. 굳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지금도 우리 를 지배하는 상식.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시대에는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고 넘어가기 쉬우리라. 이광수의 이런 주장이 새로운 주장이란 사실을 꼭집고 넘어가야 한다. 전통적인 시대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시대일수도 있다. 말하자면, 후세를 길러도 희망이 없는 시대일수 있다는 이야기다. 부모를 희생시켜, 자녀를 기르면서, 강력한 욕망의 동기로 움직여 나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한 발짝이라 도 움직인 것일까. 이제 비로소 그런 사회를 좀 세련된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할까. 부모 세대가 자신 과 자신의 자녀를 기르기 위해, 일자리를 움켜쥐고, 자녀 세대에는 구조적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고, 모 든 것을 빼앗긴 그 부모의 부모 세대는 가난하게 죽어가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자녀를 기를 때, 다 내 주고, 모든 것을 다해주면, 버림받는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위로가 될까. 노인들이 분노로 치를 떨면서, 공공장소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도 언뜻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움켜쥔 일부의 삶이 행복할까. 이 세 세 대가 모두 살아남아 가난 속에서 각축하면서, 자신 만이라도 안전하고, 편안하기를 꿈꾼다. 4년 5년에 한 번씩 투표의 현장에서 격돌하고, 매일 매일 일상의 삶에서 부딛힌다. 애초에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기획 자체가 틀려먹은게 아닌가. 『무정無情』을 처음 읽었던 중학생 때 쯤인가. 이 소설의 배경이 1910년대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욕망과 이념을 따라 겉으로만 흔들리는 지식인, 부유한 김장로와 그의 딸,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여인. 그리고 삼랑진의 수해와 음악회. 처음 읽었을 때부터 기묘한 뻔한 스토리. 하야타 세츠코는 영채 의 부재를 확인하고 식욕을 느끼는 형식, 은사의 무덤 앞에서 무덤 위의 꽃을 보고 기뻐하는 형식을 두 고, “욕망”을 고취하는 소설(156-157)이라 이름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정의 한 장면에게 기이한 위화감을 발견한다. 그것은 모두가 화해하는 바로 그 “음악회”. 수해를 당해 먹을 것도 없고, 집과 가재 4/29/2020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shatano-yikwangsu/?ckattempt=1 4/5 도구를 모두 잃은 이들에게도 물론 음악이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음악이 태어나서 처음들어본 서양 음악과 찬송가 였을지라도 그렇다, 아름다움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니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101공수사단 506연대의 E중대의 이야기를 그린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라는 시리즈 가 있다.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제작한. 7회인지 8회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벨기에의 어느 수도원에 묵으면서, 성가대의 노래에 위로받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느끼는 위로, 안식, 그리운 기 억. 그들에게는 그 음악이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되었으리라. 그런 음악회가 삼랑진의 수재민에게 어떤 위로를 주었을까. 들은 바 없는 노래로 자신들을 위로 하겠다는 유학가는 신청년이 돌아오면, 자신들의 삶을 더 낫게 해주리라는 기대가. 아니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삶을 향유하는 그들에 대한 동경이. 주먹 밥 하나의 위로만 했을까. 이 위선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도쿄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기초하고, 상하이로 가서, 망명정부에 머문다. 그도 한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바친 투사였다. 평생의 스승 안창호의 만류를 무릅쓰고, 1921년에 돌아온 후, 「민족개조론」을 발표하고, 실력양성론 즉, 개량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거짓말하지 않고, 공론空論을 버 리고 실행하며, 신의信義를 지키고, 작정한 일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아가며, 사私보다 공公을 중시하 고, 전문기술을 갖추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위생과 건강에 유의하는. 이렇게 개조하면, “건전한 제국 주의자도 될 수 있고, 민주주의자도 될 수 있고, 노동주의자 및 자본주의자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194) 하타노 세츠코는 ‘건전한 황국신민’도 될 수 있다고 덧붙이는데.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서양 사상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다. 논설 「상쟁相爭의 세계에서 상애相愛의 세계 에」에서 “인류의 최대 다수에 공통하던 이 사상[상애주의]에 반대한 유일한 악마적 사상을 로마羅馬에 원源을 발發한 권리사상이외다. 이 사상은 인류의 이기적 쟁투본능에 영합하여 천여 년간 백석인종白晳 人種을 수화獸化하였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자연과학의 현훈眩暈할 만한 위력을 빌려 동양 제 민족에게 가지 이 권리사상의 독액毒液을 주사하여 정화淨化되었던 인성人性에 오래 병식屛息하였던 이기적 쟁 투본능을 격발케 하였습니다. 이 권리사상의 표어는 ‘생존경쟁’이외다. 우리 동양 민족은 상생相生의 원 리는 알았으나 상극相克의 원리인 생전경쟁이란 말부터 몰랐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어 우리 의 미약하던 이기적 쟁투본능을 격발한 자는 백석인白晳人이외다.”(224) 유럽인들의 역사의 산물인 근대와 근대 문명이 비유럽지역에 이식될 때, 총과 대포, 기차와 전기 같은 문명의 이기만 이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농업사회와 신분제로 구성된 사회구조 마저 바꾸고, 생각 마저 유럽식으로 바꾸어야한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을때, 일단 생각까지 한 번 바꾸려 해보았지만, 여전 히 유럽지역의 그리고 그 주구인 일본의 희생물, 피지배 처지를 면하지 못할 때, 비유럽지역의 지식인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머리부터 생각까지 모두 서구식, 일본식으로 바꾸고, 그 방식을 옳다고, 추 종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전통으로 돌아가자로 없는 전통을 향해 일방적 구애의 몸짓으로 허우적 거릴 것인가. 구한말 일본 식민지와 지금이 가진 차이라면, 풍요와 근대 문명의 열매를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 19세기 이전의 역사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삶을 수립해 과는 과정이다. 어쩌면 우리의 조상 은 차라리 17~18세기 혹은 그 이전의 유럽인들이고. 이를 부정할 때, 현전을 부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가끔 돌이켜 찾는 전통은 실제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처럼 누구나 족보를 가지고, 누구나 제사를 지내는 시대가 온 것은 불과 사오십년. 이상향 처럼 꿈꾸는 전통사회에서 정작 그 자신은 성도 이름도 4/29/2020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shatano-yikwangsu/?ckattempt=1 5/5 없고, 족보도 뿌리도 없고, 조상도 없는 그런 존재였을지 모른다. 역사나 뿌리를 찾을 수 없다는 심정이 어쩌면 이광수의 갈팡질팡에도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모두가 잘알듯 전향을 하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을, 친일을 하고, 연설도 하고, 글도 쓴다. 해방이 되고, 이번에는 백범의 비서 노릇도 하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후, 결국 납북된다. 그의 고향이 있는 정주 근처 평안북도 어디에서 죽었다고만 알려질 뿐. 사람의 자기 이해의 태반은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그게 옳든 그르든. 민족주의든 국민주의든 그게 무엇 이든. 한국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울림이다. 그리고 모든 한국인은 두 개의 조상과 두 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에 살던 사람들인 조선인이라는 조상과 유럽에 살던 사람들인 유럽인이라는 조상. 유럽을 조선에 가져온 일본인과 친일파라는 조상도 있다. 어 쩌면 그 모든 것의 결과로 나는 오늘 매립지 위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 마당에서 가끔 저려오는 어깨를 주무르면서 이 글을 쓴다.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광수 역시 평생 이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이광수를 옹호할 생각도 없고, 비난할 생각도 없다는 식의 상투적 문구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광수를 이해해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2016. 9. 17.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이 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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