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기억, 혼혈아의 내선일체 ― 이광수와 야마사키 도시오1)
이 경 훈
1. “미스터 리”의 추억
김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된 이형식이 그 “교수하는 방법”을 놓고 고심하는 것은 『무정』이 제시한 근대문학의 명장면이다. 이형식은 책상을 놓고 선형과 마주 앉을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면 입김과 입김이 서로 마주치렷다. 혹 저편 히사시가미가 내 이마에 스칠 때도 있으렷다. 책상 아래에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2)라고 예상하며 얼굴을 붉힌다. 이는 근대화와 더불어 ‘남녀칠세부동석’이나 ‘내외(內外)’ 등의 관념과 풍속이 소멸되기 시작함을 표현한다.3)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중문(中門)’ 안쪽의 선형 방에서 이루어진 영어 공부의 역사적 의의다. 이 근본적인 변화를 스스로 체현하게 됨으로 인해 이형식은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랄 정도로 “교수하는 방법”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형식이 “미스터 리”로 불린 것은 상징적이다. 이는 신우선이 “예, 월향아!”라고 부르던 영채에게 “여보시오. 박영채 씨.”라고 말 걸게 되는 일, 그리고 유학을 마친 영채, 선형, 병욱이 “훌륭한 레이디”4)가 될 것이라고 전망되는 일 등과 함께 사회적 관계의 문명개화적인 재배치를 암시한다. 이는 “하인들로 하여금 아씨니 마님이니 하는 말을 못 쓰게”5) 하는 대신 “선생님”으로 호칭되기를 바라는 일로도 나타날 것이다.6)
그런데 이형식을 “미스터 리”로 부른 신우선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이 심훈(심대섭)의 형인 심우섭(심천풍)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7) 그는 『매일신보』 기자였는데, 총독부 기관지인 이 신문은 이광수를 통해 청년학생층 독자에 대한 본격적인 계몽과 포섭에 나섰다.8) 또한 이 신문은 춘원의 『무정』이나 「오도답파여행」 등과 나란히 심우섭의 「산중화(山中花)」도 연재했다. 즉 심우섭은 『무정』의 이야기 내부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무정』이 연재되던 바로 그 시기에 이광수와 『매일신보』의 지면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편 심우섭은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매일신보』 사장이었던 아베 미츠이에[阿部充家]9)와 이광수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광수는 1939년 『경성일보』에 실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처음 무부츠[無佛] 옹을 만난 것은 타이쇼(大正) 5년(1916년)의 초가을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나는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시베리아 유랑에서도 돌아와, 다시 와세다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던 때였는데, 여름 방학을 마치고 동경으로 돌아가는 도중 경성에 들른 어느 날 아침 일찍, 심우섭(沈友燮) 군에 이끌려 욱정(旭町)에 있는 우거(寓居)로 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 심군은 매일신보의 솜씨 좋은 기자 중 한 사람으로, 이상협 씨와 함께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심군은, “아베라는 사람은 조선인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조선 청년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기뻐하네. 아베 씨에게 군 이야기를 벌써 해두었어. 오늘 군을 데려 가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10)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춘원은 아베를 1916년 초가을에 만났다. 이는 춘원이 비슷한 시기에 『매일신보』 감사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를 찾아간 일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광수는 나카무라에게 보내는 「증삼소거사(贈三笑居士)」라는 한시를 『매일신보』 1916년 9월 8일에 게재한11) 후, 곧 이어 이 신문에 「대구에서」(1916.9.20-23.)와 「동경잡신」(1916.9.27-11.9.)을 연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매일신보』로부터 신년 소설을 쓰라는 전보 청탁을 받고 『무정』(1917.1.1-6.14.)을 싣는 것이다. 즉 아베나 나카무라는 이형식을 “미스터 리”로 부른 소설 속의 신우선에 대응하는 현실 세계의 호명자였다. 이렇게 『매일신보』는 이광수를 『무정』의 작가 “미스터 리”로 호출했다.
한편 인용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춘원이 이 시기를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시베리아 유랑에서도 돌아와, 다시 와세다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던 때”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때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시베리아 유랑”을 떠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춘원은 교회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1913년 11월에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는데12), 이때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양으로”, “잊음의 나라”를 찾아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기억을 일으키지 말아 달라!”라고 외치며 조선에 대한 실망과 증오를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나는 압록강을 건너서서 조선과 외면한 고개를 영원히 돌리지 아니할 것이다. 불신한 사람을 낳고 기른 조선을 향하여 나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우연히 내 고개가 조선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하면 그 모가지를 찍어버리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 하나를 항상 몸에 지닐 것이다.13)
위의 글에서 춘원은 오산학교 학생들을 생각하며 “행여 그것들이나 자라서 새 종자를 펴 주기나 할까?”라고 회의하는데, 이는 조선 민족이 “아이누나 다름없는 종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는 『무정』의 태도를 상기시킨다. 즉 『무정』에는 춘원으로 하여금 오산학교를 떠나게 한, “불신한 사람을 낳고 기른 조선”을 향한 종족적인 회의 및 민족적인 열패감이 작용한다. 이는 학문과 과학을 통한 낙관적인 전망으로 전환되어야 했거니와, 그 서사적 시도의 장을 제공한 것은 조선 청년에 대한 “본격적인 계몽과 포섭”에 나선 『매일신보』였던 것이다. 이는 조선을 떠나 시베리아에서 유랑한 일과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아베를 만난 일이 일련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유일 수 있다. 이 일들은 단지 시간적 선후관계를 맺고 있지만은 않을 터이다.
따라서 1913년의 오산학교 “탈출”14)은 적어도 그 출발의 동기에서 춘원이 1919년에 <2.8 독립선언서>를 쓴 후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을 만든 일을 마주보고 있다. 다시 말해 “오산학교는 탈출하는 지사들의 역원(驛院)”15)이었다는 점에서, 춘원의 상해 망명은 1913년의 일과는 달리 오히려 오산학교로의 복귀(춘원이 치타를 떠나 1914년 9월에 오산학교로 돌아간 사실과는 별도로), 즉 조선(민족)으로의 복귀였던 셈이다. 그 점에서 이광수가 1911년 가을쯤에 오산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이승만을 1920년에 상해에서 재상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는 아베 및 『매일신보』의 “미스터 리”와 구분되는 “미스터 리”의 또 한 가지 기원을 함축한다. 1931년에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음 이 박사를 만난 것은 상해서였다. 1920년 박사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상해에 와 있을 때다. (중략)
“아 미스터 리시오?” (중략)
“7, 8년 전에 정주 오산에서 한 번 선생을 뵈었습니다.”
하고 나는 어느 석양에 오산의 논둑길에서 박사가 가방을 들고 고읍 역에서 오는 것을 만난 것과 학생들에게 훈화를 청한 것을 말하였다.
“아 그렇소?”
하고 박사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유쾌한 듯이 무릎을 치며 웃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중략)
“얼마나 노심(勞心)하시오. 내가 화성돈 있을 때에도 미스터 리의 말은 다 들었소.”16)
물론 위의 글을 수양동우회 기관지 『동광』에 실은 이광수는 이승만보다는 안창호의 “미스터 리”였다. 한편 파벌 싸움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 내부의 상황은 “불신한 사람을 낳고 기른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춘원은 “이천만 흰 옷 입은 무리”의 “입술에서 거짓의 뿌리를 뽑아주소서”라고 기도했으며, “서로 믿고 싶다”(「미쁨」,『창조』 6호, 1920.5.)고 썼다. 이 모든 상황은 춘원과 아베의 관계와 더불어 “미스터 리”에 복잡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복잡성은 이광수가 이승만이 오산학교에서 훈화한 일에 대해, “박사는 약 십 분 간 무슨 훈화를 하였다. 그 말은 지금 기억이 없다”고 말한 것, 또 이승만과 상해에서 만나 이야기한 일에 대해서도 “이때에 우리는 아마 삼십 분 이상이나 말하였으나 그 말은 다 기억할 수 없다”고 회고한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억 불능은 다른 여러 요인들과 함께 무엇보다도 위 글의 마지막 7행이 생략(검열)된 일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될 터이다. 아마도 춘원은 이승만의 말을 잊지 않았으리라. 아니면 “다 기억할 수 없다”고 했으므로, 부분적으로 기억된 말이 생략된 7행에 제시되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아베로부터 소개받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춘원에게 한 말, 즉 “내 조선 아들”17)이 되어 달라고 한 부탁이나 “조선의 입장에서 본 동양사를 써보라”18)고 한 주문이 선명히 직접 인용되는 것과 대비된다. 더 나아가 「무부츠 옹의 추억」이 다음과 같이 끝나는 것과도 비교된다.
무부츠 옹이 서거한 지 벌써 4주년,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선배 중 한 사람인 고(故) 아베 무부츠 거사(居士)의 추억을 멈추지도 못하고 이렇게 쓰고야 말았다.19)
2. 동경 ․ 경성 ․ 나라
그런데 「무부츠 옹의 추억」이 회고하는 것은 아베 미츠이에와 도쿠토미 소호 및 그들과 관련된 춘원 자신의 일만은 아니다. 이 글의 한 가지 핵심은 교토에서 겪은 다음과 같은 경험에 있다.
“지금 일본인 중에 최소한 천팔백만 명은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이나 신라인의 자손이니까.”
“교토 거리도 옛날 신라 도시와 건물에서부터 풍속까지 닮았다는 것 아닌가.”
“지금도 교토에는 조선식 사원 건물이 남아 있어.”
“히라노진자[平野神社]는 간무텐노[桓武天皇]님의 어머님이 태어나신 나라인 백제에서 가져온 세 주(柱)의 신께 제사 드리고 있어요.”
“나라[奈良]조 시대에는 한층 더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밀접해서, 형제 이웃 같아서 말야, 민족적 대립 따위의 감정은 없었단 말야.”
“음,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님의 법화경 스승이 고구려 스님이 아닌가.”
“그래, 혜자(慧慈)라는 사람이지. 백제의 자총(慈聰)이란 스님도 그렇지.”
아무리 봐도 덧없는 세상에서 벗어난 이 두 노인은 정자에 앉아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촉촉이 내리는 빗속에 남아 있는 옛 절과 옛날 그대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일본과 조선은 옛날부터 이미 하나라는 기분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 기분 속으로 녹아들 수 있었다.20)
위와 같이 「무부츠 옹의 추억」이 구성해 내는 것은 고대(古代)로 소급된 ‘내선일체’의 기억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춘원에게 삼국시대는 ‘내선일체’를 합리화할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근거로 작용했다.21) 예컨대 이광수는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면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석자 성명은 지나식의 것”이며 “그 전까지는 지금 내지인이 사용하고 있는 씨명”과 같은 계통이었으므로 “칠백 년 전의 조상들을 다시 따라가는 셈”22)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춘원은 이 상상된 역사적 기억을 불교적 의미의 “인연”으로 심화시키려 했다. 그는 “우리가 오늘날 일본 국민이 된 것은 인연 중에도 큰 인연”이라고 규정하면서, “우리는 전생(前生) 다생(多生)에 천황의 신민으로 갱생한 인(因)을 쌓았다.”23)고 말했다. 한편 동경에서 열린 ‘제 1회 대동아문학자대회’(1942.11.4-5.)에 참가한 후 ‘나라[奈良]’에 간 이광수는 1942년 11월 10일 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썼다.
“마셔 마셔”라는 가와카미 씨의 권유로 대여섯 잔을 거푸 비웠다. 가와카미 씨는 내가 취하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야시 후사오 씨의 수완이다. 가야마[香山]란 자식, 한번 속내[本音]를 드러내 보란 투였다. 혹은 가와카미 씨도 나도 나라 시대에 아라이케[荒池] 기슭에서 함께 마시다 대취한 구연(舊緣)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혜자(慧慈)이거나 담징(曇徵)의 수행원이 되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행기(行基)와 동반해서 왔는지도 모른다. 훌쩍훌쩍 울고 있는 산새 소리를 미카사야마[三笠山]에서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나라가 한없이 그립다. 가와카미 씨도 동경에서 일부러 와서 나와 나라라는 수도의 초승달에 가슴이 뛰었던 것이리라.
좋다 마시자. 속내뿐 아니라 마음속 진흙을 토해도 좋다. 나에게는 중생에 대해 감출 어떤 일도 없다. 취해서 보여줄 추함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참된 모습이리라. 나에게 진심을 구하는 벗에게 내 있는 그대로를 안 보이고 어쩔 것인가.24)
「飮め 飮め」と河上氏に勸められるままに五六杯もあふった。河上氏も私を醉わせようとするらしい。林房雄氏の手だ。香山の奴、一つ本音を吐かせてやらうといふのだらう。或は河上氏も私も奈良時代に、荒池の畔で飲みつぶれた舊緣があるのかも知れぬ。私が惠慈か曇徵のお供をして来てゐたのかも知れぬ。ほろほろと鳴く山鳥の聲を三笠山に聽いたかも知れぬ。それで私は奈良が無性に懷しく、河上さんもと東京からわざわざ來て、私と奈良の都の新月に胸を搏たれたのだらう。
よし。飲まう。本音どころか泥を吐いてもいい。私には衆生に對して、隱すべき何事もないつもりである。醉って見せる醜さがあるなら、それが私の眞の姿であらう。私に眞心を求める友にわがありのままを見せないでどうしょう。
가와카미 데츠타로[河上徹太郞]는 춘원에게 산토리 위스키를 계속 권한다. 이는 식민지인으로서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실천하는 이광수의 “가면”25)을 벗겨 그 “속내”를 엿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김윤식 교수가 말하듯이 그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나라에 간 이광수는 “식민지 조선인이 아니라 고대인 조선인”26)이기 때문이다. “아라이케 기슭에서 함께 마시다 대취한 구연”이 상기되고 재현되는 한, 춘원은 더 이상 식민지인이 아니며, 가와카미 역시 어엿한 제국의 국민이 아니다. “혜자의 수행원”이라는 점에서 춘원은 오히려 가와카미의 스승에 가깝다.
춘원이 ‘나라’를 ‘수도’로 칭하며 “나는 나라가 한없이 그립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춘원은 경성을 떠난 자기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동경에서 일부러” 온 가와카미 또한 시골 출신의 한낱 “중생”임을 선포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제국(동경)과 식민지(경성)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승열패의 나라(국가)를 초월하는 나라, 즉 ‘나라[奈良]’를 수도로 하는 불법의 나라에서 “진심을 구하는 벗”으로 서로 만났다. 아니, “나에게는 중생에 대해 감출 어떤 일도 없다”고 확신하는 그는 「무명(無明)」의 화자처럼 가와카미를 포함한 뭇 “중생”들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하야시 후사오의 집에서 “왠지 내가 주인이 된 듯[何だか自分が主人になったやう]”27) 느꼈던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춘원은 “고대인 조선인”도 넘어서고자 한다. “포즈였다고 해서 그것이 진심이 아닌 가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28)라는 질문은 이와 관련된다. 즉 그는 ‘나라’의 역사적 기억을 통해 자신을 식민지인으로 만든 역사 또는 “다윈주의의 도배(徒輩)”29)들이 지배하는 근대 자체를 초극하려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의 “무차별세계”를 지향한다.
나는 이것을 믿소. 이 중생 세계가 사랑의 세계가 될 날을 믿소. 내가 법화경을 날마다 읽는 동안 이 날이 올 것을 믿소. 이 지구가 온통 금으로 변하고 지구상의 모든 중생들이 온통 사랑으로 변할 날이 올 것을 믿소. 그러니 기쁘지 않소? 내가 이 집을 팔고 떠나는 따위, 그대가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다는 따위, 그까진 것이 다 무엇이오? 이 몸과 이 나라와 이 사바세계와 이 왼 우주를(왼 우주는 사바세계 따위를 수억만 헤아릴 수 없이 가지고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오) 사랑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그대나 내나가 할 일이 아니오? 저 뱀과 모기와 파리와 송충이, 지네, 거르마, 참새, 새매, 물, 나무, 결핵균, 이런 것들이 모두 상극이 되지 말고 총친화(總親和)가 될 날을 위하여서 준비하는 것이 우리 일이 아니오? 이 성전(聖戰)에 참례하는 용사가 되지 못하면 생명을 가지고 났던 보람이 없지 아니하오?30)
그런데 「삼경인상기」와 관련해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 교수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대동아문학자 대회 기간 중 이광수는 메이지 중학 시절의 친구로서 춘원에게 톨스토이를 소개한 야마사키 도시오[山崎俊夫]31)를 다섯 번이나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삼경인상기」는 이 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2) 즉 야마사키가 「경성의 하늘 밑[京城の空の下]」(1956)과 「경멸[けいべつ]」(1968)에서 이광수와 함께 한 1942년 11월 4일, 5일, 8일, 9일의 일을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춘원은 대회가 열린 날이기도 했던 11월 4일과 5일의 일조차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 이광수는 11월 3일에 제국극장에서 열린 개회식을 “처음 보는 호화판[初めて見た華麗版]”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대도 동경에서 소설을 파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동경의 문인들과 만나두는 편이 좋아[君も東京で小説を賣るんだらう。それなら東京の文人達に逢って置いた方がいい。]”라고 춘원에게 말한 기쿠치 칸[菊池寬] 및 가와카미,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등과 만났던 그 날 저녁의 이야기를 한 후 곧바로 6일로 넘어가버린다. 또한 8일과 9일의 일에 대해서도 춘원은 야마사키의 월광장(月光莊) 집에 초대되어 식사한 사실이나 도쿄를 떠나는 춘원을 야마사키가 배웅했던 일은 생략한 채 기술한다. 이는 야마사키가 자기 집에서 이광수에게 대접한 음식 종류 및 춘원이 자기 아이들에게 선물한 책의 제목까지 자세히 밝히는 것과 대비된다. 야마사키는 11월 5일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 다음날 밤은 대동아문학자들이 가부키좌에 초대되었다. 나는 저녁 때 외출하여 가부키좌의 복도에서 주재자 중 한 사람인 기쿠치 칸과 만났다.
“우리는 중학 시대의 친구입니다. 삼십삼 년 만입니다.”
이군은 이렇게 말하며 기쿠치 칸에게 설명했다.
“야마사키 군, 설마 가야마 군을 유혹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아니, 실은 조금 빌리러 온 거야.”
이렇게 말하고 나는 이군을 납치해서 가부키좌의 현관으로부터 도망쳤다. 유혹이라고 해봤자 나는 화류계 거리를 알 리도 없다. 스에히로에 가서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맥주를 마셨을 뿐이다. 이군은 그때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역시 이군은 이군인 것이 좋았다.33)
あのあくる晩は大東亜文学者達が歌舞伎座に招待されていた。わたしは夕方から出かけて行って、歌舞伎座の廊下主宰者の一人である菊池寛にあった。
-ボクたちは中学時代の友達です。三十三年ぶりであったんです。
李君はこう菊池寛に説明した。
-山崎君、まさか香山さんを誘惑に來たんじゃないだろうね。
-いや、実はちょっと借りに來たんだ。
こう云ってわたしは李君を拉して歌舞伎座の玄関から逃げ出した。誘惑と云ったところでわたしは柳暗花明の巷を知っているわけでもない。スエヒロへ行ってビフテキをたべ、ビールを飲んだだけのことであろ。李君はこの頃は香山光郎という日本名を使っていた。だが、わたしにはやっぱり李君は李君であってほしかった。
이 야마사키와 관련해 춘원은 “왠지 첫사랑을 나누었던 사이처럼 평생 잊히지 않고 언제나 그리움”34)을 느낀다고 피력하면서, “이번에 동경에 가면 제일 먼저 찾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쓴 바 있다. 실로 춘원은 1941년 5월에 모던일본사를 통해 「가실」, 「유정」, 「사랑」 전후 편을 야마사키에게 보냈고, 야마사키는 이에 감격해 “오오, 내 그리운 보경아, 너는 또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35)고 춘원에게 써 보냈다. 이때 춘원이 “첫사랑” 운운한 것은 기쿠치가 언급한 “유혹”과 함께 야마사키의 다음 문장을 상기시킨다. 물론 야마사키는 “유혹”을 “화류계 거리”와 연결시키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말이다.
그 물레방앗간으로 갈 때까지의 좁은 샛길 길가에 피어 있던 엉겅퀴 꽃이라든지 건초 냄새라든지 휘파람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발설하는 날에는 이보옥36)이 마치 ‘춘기 발동한’(春のめざめ) 주인공이 되는 것 같으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37)
その水車小屋へ行き着くまでの細い小径の路傍に咲いてゐたアザミの花だとか、乾草の匂ひだとか、口笛だとか。そんなことを云ひ出した日には、李宝玉がまるで「春のめざめ」の主人公になりさうだから、もうこの辺で止めておくことにする。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러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문학자대회 참석차 동경에 간 춘원은 야마사키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야마사키가 개조사에 춘원의 주소를 물어 가족사진을 보내 주었던 1937년의 일처럼, 이번에도 야마사키가 신문 기사를 읽고 제국호텔로 춘원을 찾아왔다. 그리고 야마사키가 동경에서 춘원과 만난 일을 몇 번에 걸쳐 서술했던 것과는 반대로, 춘원은 오직 나라에서 가와카미와 만난 일을 썼으며, 야마사키가 아닌 가와카미를 “나에게 진심을 구하는 벗”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하타노 교수는 첫째, “야마사키와의 재회라는 사적인 ‘감격’”을 궁성요배, 국민연성대회, 문학자 대회, 해군 항공대 훈련 등의 “공식적인 ‘감격’과 나란히 쓰는 것에 대해 이광수는 위화감과 거부감”을 느꼈을 터이며, 따라서 야마사키에 대해 쓰지 않은 것은 “자기 마음의 영역”38)을 “주체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적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면모”를 보인다는 점, 둘째, 「삼경인상기」에 여러 일본 문인들과 만난 이야기를 쓴 것은 “일본 문단으로 진출하려는 이광수의 선전활동(promotion)”39)이므로, 야마사키와의 재회를 언급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점, 셋째, 야마사키는 춘원뿐만 아니라 기쿠치 칸[菊池寬]과도 친했으므로40), “기쿠치와 야마사키의 소년애적 관계를 입에 올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41)을 것이라는 점을 그 이유로서 “추측”한다.
그러나 필자는 “야마사키와의 우정이라는 ‘마음의 영역’을 보존하려 했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가야마 미츠로로 명명한 ‘마음의 영역’을 야마사키로부터 지켜내려 한 것”일 수 있고, 이는 “야마사키와 관련된 춘원의 ‘자기 마음의 영역 자체가 그야말로 복잡”42)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하타노 교수는 “두 사람 사이의 추억이 꼭 아름답고 따뜻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필자의 지적에 동의하며 “한 가지 더 유력한 추측”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립기는 해도 떠올리는 것은 역시 고통스러운 존재, 어느 쪽인가 하면 차라리 잊고 싶은 존재가 야마사키였다면, 이광수가 야마사키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고 할 것이다.43)
그렇다면 이광수가 야마사키와 만난 일을 쓰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야마사키가 “가야마 미츠로라는 일본 이름”을 낯설어한다는 사실과 관련될 터이다. 즉 “역시 이군은 이군인 것이 좋”다고 하는 야마사키에게 보일 고대인의 “가면”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이백 년 전 나라의 “구연”을 상상하기에는 삼십 년 전 동경 유학 시절에 노출된 벌거숭이 맨얼굴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히 남아 있었으리라. “아라이케 기슭에서 함께 마시다 대취한 구연”과는 달리, “니혼에노키[二本榎]에 있는 야마사키 군의 집에 놀러가서 어머니와 형을 만난 일”44)은 식민지의 가난한 고아 소년 이광수의 심리에 다양한 반응을 초래했을 실제 사실이었다. 실로 춘원은 “나는 단 한번 내지 친구의 가정에서 묵은 적이 있지만,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본 가정의 인상은 내 혼에 깊이깊이 각인되어 지금도 잊을 수 없다”45)고 쓴 바 있다. 이는 다케오의 집에서 “일생 잊지 못할 정도로 깊은 인상”46)을 받는 충식 오누이의 에피소드 또는 니시모도 박사의 집에 살며 “조선 사람의 가정생활이 어떻게 방만하고 무질서한 것”47)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국 쫓겨나는 이원구의 일로도 서사화되었다.
다시 말해 이광수와 야마사키의 “첫사랑”은 개인들의 친밀함과 상호 이해를 강조하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위해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열등한 식민지인의 타자성을 상기시킴으로써 오히려 나라의 “구연”을 방해하기도 했다. 즉 하타노 교수가 말하듯이, 이광수는 야마사키와의 재회라는 “사적인 감격”을 “공식적인 감격”과 나란히 쓰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기보다는 야마사키에 대해 쓰는 순간 이 사적 교류에 전제되고 스며들었던 제국과 식민지의 근대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는 춘원이 야마사키와 만난 일뿐 아니라 4일과 5일에 열린 대회의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쓰지 않은 이유일 수 있다. 대동아문학자대회는 나라가 아닌 동경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3. 두 크리스마스
그렇다면 도대체 메이지 중학 시절의 이광수와 야마사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우리는 『제국문학(帝國文學)』 1914년 1월호에 게재된 야마사키의 「야소강탄제전야(耶蘇降誕祭前夜)」와 1916년 2월 중순경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학지광』 8호의 「크리스마슷밤」48)을 비교 고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야소강탄제전야」는 이보경(李寶鏡), 즉 이광수의 아명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인데, 특히 주목할 것은 이보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는 점이다.
이보경은 금발(金髮) 청안(靑眼)의 키가 큰 소년으로, 피부색조차 황색 인종과는 달랐으므로 항상 ‘혼혈아’라는 험구가 이보경의 신변에 붙어 다니고 있었다. 특히 그 코가 뚜렷하게 러시아풍의 곡선을 띤 것이 나에게조차 쉽게 러시아의 청년 사관과 조선의 박명한 아가씨 사이의 박행한 연애 이야기를 눈앞에 방불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보경은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디까지든 거세게 부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49)
李宝鏡は金髪青眼の背の高い少年で、皮膚の色さへ黃色人種とは異って居るので、常に「混血児」という陰口が李宝鏡の身辺につき纏って居た。殊にその鼻の著しく露西亜風の曲線を帯びたところが、わたしをしてすら容易く、露西亜の青年士官と朝鮮の薄明な娘との薄幸な恋物語をまのあたりに彷佛せしめるには、あまりあるものであった。けれども李宝鏡は何時でもさう人に言はれる毎に、飽くまで手強く否定するのが常であった。
이러한 이보경은 “금발이나 푸른 눈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유창한 일본어”로 ‘나’에게 말을 걸며, “평소 조선인 따위와 말을 나누는 것조차 유쾌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던” ‘나’는 이에 응답하고 만다. “이보경에 대해서는 오히려 나의 추접스런 황색 피부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겁 많고 신경질적인 나와 일본인 생도로부터도 조선인 생도로부터도 지탄받는 이보경”은 예배당이나 강당에서 “무릎을 나란히 하여 좌석을 차지”한 채, 다음과 같은 “첫사랑”을 나누게 된다.
내가 부드럽고 가는 털이 난 새하얀 이보경의 손을 지켜보면서 평소에 품고 있는 혼혈아 동경(憧憬)의 이상한 생각을 몰래 키우고 있노라면, 이보경은 또 내 노란 피부 위에 한탄스런 한숨을 슬며시 닿게 하면서 처량한 망국(亡國)의 노래를 입술 속에 다시 떠올리는 것이었다.50)
わたしがやはらかいこまかい毳の生えた真白い李宝鏡の手を見守りながら、日頃抱いて居る混血児憧憬の怪しげな思ひをひそかに培えば、李宝鏡はまたわたしの黄色い皮膚の上に、歎かはしい吐息をそれとなく触らせて、哀っぽい亡国の歌を唇の裡に憶ひ返すのであった。
그런데 이보경은 “망국”에 대해, “조선의 망국”이 아니라 몇 천만 년 전에 망해서 물 밑에 가라앉았다는 “폐시(廢市)”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나뿐 아니라 당신도 그 망국의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나’는 이보경이 혼혈아라고 “지탄”받는 것에 대해, “나라면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두 소년은 각각 “망국의 백성”과 “혼혈아”로서 동일화되고자 하는데, 이는 아주 흥미롭다. 혼혈아로 의심되는 금발의 이보경은 우승열패의 패자인 “망국의 백성”으로서 ‘나’와 동일화되고자 하며 이는 일본인 역시 백인이 아님을 환기시키는 반면, 순수한 일본인인 ‘나’는 승자, 즉 백인의 흰 피부를 동경함으로써 백인 혼혈아인 이보경과 동일화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두 소년은 화합될 수 없다. ‘나’의 “혼혈아 동경”은 일본인으로서 백인의 위치에 있기를 지향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흰 피부에 대한 황색인종으로서의 콤플렉스가 정직하게 고백”51)된 것을 넘어 서양과 닮은 승자로서의 일본을 열망하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를 상기시킨다. 이보경의 러시아 혈통에 투사된 ‘나’의 욕망은 이보경의 조선 혈통에 대한 배제 및 차별을 함축한다.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이보경의 서양인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보경은 서양(일본)의 비서양(조선) 지배를 자신의 존재로써 체현한다. 그는 승자로서 혼혈(서양 혈통)이고자 하는 ‘나’에 굴복한 패자로서의 혼혈아(조선 혈통)인 셈이다.
이 소설의 또 한 가지 주요 서사인 이른바 “작년 야소강탄제의 추억” 역시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인 아버지와 비엔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한나상(おはんなさん)”과 이보경을 둘러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야소강탄제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된 “오한나상”은 축제 전날 강탄제를 준비하고 좌석을 정리하는 자리에 찾아와 앞에서부터 네 번 째 열, 좌측으로부터 열 번 째 의자에 흰 쪽지를 묶어 놓는데, 오한나상을 짝사랑하던 학생이 이를 발견한다. 그 학생은 그것이 자기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알고 기뻐하지만, 축제 당일 그 자리에는 이보경이 앉아 있다. 더 나아가 오한나상은 바로 그 “실연자” 학생에게 “이보경 님께”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맡기기까지 했으며, 이에 분노한 그 일본인 학생은 선물을 전해 주는 대신 발로 밟아 난로 속에 집어 넣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이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의 반응이다.
“연인을 조선인, 그것도 혼혈아 따위에게 횡탈(橫奪) 당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커다란 치욕이 아닌가.”
“도대체 혼혈아 주제에 다른 사람의 연인을 함부로 횡탈하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오한나상도 이보경과는 잘도 사랑이 움텄군.”
듣던 사람이 제각각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자 마지막으로 실연자는 막 울음을 그친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히 동병상련이라고나 할 수 있겠지.”52)
「恋人を朝鮮のしかも混血児なんかに橫奪されるのは、日本人として大なる恥辱ぢゃないか」。
「いったい混血児の分際でひとの恋人を黙って橫奪するなんざあ、太いにもほどがある」。
「しかしおはんなさんも李宝鏡とはよくもめざしたもんだ」。
ききてはめいめい思ひ思ひのことを言ってしまふと、最後に失恋者は泣かんばかりの声顫はせて、
「同病相憐むとでも言ふんだらうよきっと」。
이때 혼혈아를 질병과 관련시키는 “동병상련”이라는 말은 단순한 관용적 표현을 넘어서는 듯한데, 이는 “오한나상과는 달리 이보경은 러시아의 타락 사관과 조선의 노는 아가씨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니까 꽤 불쌍한 놈이지만, 어쨌든 둘 다 혼혈아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라는 평가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일본인 부계 혈통을 지녔으며 합법적 결혼과 더불어 일본 가정에 입적된 오한나상과 조선인 모계 혈통의 사생아 이보경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혼혈아 따위에게 횡탈 당하는 것” 운운은 이러한 생각을 드러낸다. 오한나상은 백인, 즉 일본인(아버지, 남성)으로서의 혼혈아며 이보경은 비백인, 즉 조선인(어머니, 여성)으로서의 혼혈아다. 당연히 오한나상과 사귀기에 적당한 것은 일본인이다.
하지만 오한나상이 이보경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괴담(怪談)”은 이미 일어나 버린 이야기다. 학생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동병상련”으로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오한나상 역시 순수한 일본인은 아니며, 그렇게 그녀를 타자(병자)로서 배제할 때 “일본인으로서 커다란 치욕”은 위로 받을 것이다. 오한나상은 이보경과 똑같은 “혼혈아 따위”며, 따라서 이효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 둘의 관계는 “쭉정이끼리”53)의 만남일 뿐이다.
이광수의 「크리스마슷밤」은 이 같은 「야소강탄제전야」에 대한 춘원 식의 회답이라고 판단된다. 김영민 교수가 지적했듯이, 일단 이 소설은 「어린 벗에게」나 「사랑인가[愛か]」 등에 제시되는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澁谷[시부야] 철도 선로에서 자살을 하려 하여 유시(遺詩)를 써 놓고 선로에 누어서 마지막 그를 생각하면서 기차가 어서 와서 내 생명을 마저 끊기를 기다렸다”는 서술은 그 대표적인 예다. 미사오[操]에게 냉대 받은 「사랑인가」의 문길 역시 시부야의 철로에 누워 기차가 자기 머리를 부수기를 기다리며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 장면이다.
회당 벤치는 반쯤 차고 부인석이 많이 비었다. 집사들은 모두 기름 바른 머리로 분주하다. 양인은 부인 자리를 찾아 바로 강단 앞에 앉았다. 경화는 성순에게,
“회석 같은 데서는 뒤에들 앉기를 좋아해요.”
“그것도 일종 자존심이어요.”
“이 중에 신자가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오분의 일이나 될까. 대부분은 크리스마스에 온 것이 아니라, 활동사진 구경 왔지요. 교인 중에도 다른 예배일에는 아니 오다가 오늘 저녁에는 남보다 먼저 왔을 사람도 있을 것이오.”
“그러니까 세상은 다 유희예요. 진심으로 무엇을 하는 이가 드물구려.” (중략)
“노형은 평생 여학생 생각만 하시오? 지금껏 여학생석만 보고 있었구려.” 하고 경화도 웃는다.54)
제 일에 <주악(奏樂) ……O양>이라 한 것을 보고 경화는 몸을 흠칫하면서 놀란다. 가는 무늬 하오리에 침향색(沈香色) 하까마 입은 O양은 고개를 숙이고 바로 양인 앞 피아노께로 온다. 경화는 슬쩍 보고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이 뛴다. (중략) 집사 하나이 아직도 이층 석에서 분주하다가 고양이 걸음으로 내려와 피아노 곁에 섰더니 수줍은 생각이 나는지 몇 걸음 물러나 걸터앉는다. (중략)
“이런 수치가 있소? 수천 원 짜리 피아노를 수천 원 들인 솜씨로 타는데도 무슨 맛을 모르겠구려. 내 곡조 없는 동적(洞籍) 소리만도 못 하외다그려.”
“본래 음악의 소양 없는 것이야 어떡하겠소. 타는 당자는 그 진미를 알고 타는지?”
“곡조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소이다. ……아무러나 꼴 되었어요. 사백 명 동경 유학생에 피아노 곡조 하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소구려.”55)
인용된 두 부분은 공히 조선 유학생들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 유학생들은 음악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활동사진을 보고 여학생과 교제하는 “유희”를 위해 교회에 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춘원의 계몽적 태도와 잘 어울린다.
그런데 야마사키의 소설과 관련해 더욱 주의해서 읽어야 할 것은 이 소설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좌석의 문제다. 이를테면 김경화가 “바로 강단 앞”의 “부인 자리”에 앉았음을 적시하면서 등장인물들이 좌석에 대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는 모습을 서술하는 것은 “작년 야소강탄제전야의 추억”을 발생시킨 흰 쪽지가 묶인 “앞에서부터 네 번 째 열, 좌측으로부터 열 번 째 의자” 사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집사, O양과 그녀의 피아노 연주, 그리고 O양과 김경화의 관계 등도 마찬가지다. 즉 피아노 근처에 왔다가 “수줍은 생각이 나는지 몇 걸음 물러나” 앉은 “기름 바른 머리”의 집사는 강탄제를 준비하고 좌석을 정리하다 오한나상의 쪽지를 발견한 “애교 있는” “미소년” “실연자”에 대응한다. 한편 O양과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오한나상과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에, 7년 전 “○○여학교 응접실56)에서 보던” O양과 김경화의 관계는 한때 “바이블 클래스”에 다니며 서로 알게 된 오한나상과 이보경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더 나아가 「크리스마슷밤」의 성순과 「야소강탄제전야」의 ‘나’는 각각 김경화와 O양의 관계 및 이보경과 오한나상의 관계에 대해 캐묻는다. 이에 대해 김경화는 연애를 뛰어넘는 “큰 일”을 언급한 시를 보여주며, 이보경은 자신이 “망국의 백성”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음은 김경화와 이보경이 추궁 당하는 장면이다.
“옳지, 왜 일찍 오신지 내가 압니다.” 하고 장한 듯이 웃는다. 경화도 웃으면서,
“나는 또 무슨 큰일이나 났는가 했지요. 헐떡거리고 뛰어 들어오기에. 왜 다 보지 않고 왔소.”
“큰 일이 있지요. 내가 다 알아요. 모르는 줄 아시는구려. 내가 언제 선생의 일기를 훔쳐보았지요. 그 속에 O가 어쩌고어쩌고 했습디다그려. 오늘 그 O가 그 O가 아니야요?”
“그 O가 그 O지 무엇이야. 내 일기에 무슨 O란 말이 있는가…… 잘못보신 게지요.”57)
다음날 나는 이보경을 불러내 어슬렁어슬렁 성심여학원(聖心女學院)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때마침 문 안에서 나온 오한나상과 엇갈렸다. 이보경은 냉담하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지나쳤지만 오한나상은 지나친 이후 두세 번 뒤돌아보았다. 나는 이보경의 시치미를 떼는 듯한 그 태도에 오히려 반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오한나상과 친한 사이입니까.”
나는 일부러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니요, 친하다고 할 만하지도 않습니다. 한때 조금 랜디스 상의 바이블 클래스에 다닌 일이 있으니까,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저 사람 어머니는 비엔나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실은 어젯밤, 헤본관(ヘボン館)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 이야깁니까? 그 이야기라면 제가 훨씬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까.”58)
その翼日わたしは李宝鏡を誘って、ぶらぶら聖心女学院の門の方へ歩いて行った。すると折よく門の内から出て來たおはんなさんとすれちがった。李宝鏡は冷淡に軽く会釈したまま過ぎたけれども、おはんなさんは行き過ぎてから二三度後をふりむいて見た。わたしは李宝鏡のしらばっくれたやうなその態度に、かへって反感を抱かずにはゐられなかった。
「あなたはおはんなさんとご懇意ですか」。
わたしはわざとかうきいてやった。
「いいえ懇意といふほどでもないんです。一時ちょっとランヂスさんのところのバイブルクラスへ通った事があるもんですから、それで知ってるんです」。
「あの人のお母さんは維納の人ださうですね」。
「わたしもそんなやうなことをききましたよ」。
「実は昨夜ね、へボン舘でおもしろい話をきいて來たんです」。
「ああ、あの話ですか。あの話ならわたしのはうがもっとよく知ってゐますよ。ですがねあなたはあんな話をきかれて、あり得べき事だと思ったんですか」。
요컨대 춘원은 「야소강탄제전야」와 비슷한 에피소드를 말하면서도 “혼혈아 주제” 운운한 일본인 학생들을 직접 거론하며 그들에게 반응하는 대신, 자신의 사랑 고백 및 조선인 학생들을 향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이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서사를 통해 야마사키 소설과의 관련성을 눈에 띄지 않게 한다. 하지만 일견 비겁해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 일본인 학생들과 맞서지 못하는 열패자임을 패배주의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일본인 학생들과의 사건을 조선인 학생들의 일로 전환해 비판하면서 춘원은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조선인 학생들과 똑같은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즉 “연인을 조선인, 그것도 혼혈아 따위에게 횡탈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보다는 신앙도 음악도 모르는 한심한 “주제에” 여학생이나 만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성 관계를 질투하는 일 따위가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의 공통된 문제라는 것이다. 아니면 이는 “새 애인” “배달”을 알게 된 그가 “작년 야소강탄제의 추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조선인 학생들을 계몽할 뿐, “타산(他山)”에 있는 일본인 학생들의 문제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겠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 오한나상에 대응하는 O양은 오스트리아 이름 ‘한나’를 “오한나상”으로 부르는 일본어의 용법을 냉소적으로 환기시키며 ‘한나’라는 이름을 환기(은폐)한다. 이렇게 야마사키와 “첫사랑을 나누었던” 시절은 끝났다. 분명히 이광수는 『제국문학』에 실린 야마사키의 소설을 읽었던 것이다.
이때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야소강탄제전야」와 「크리스마슷밤」에 공히 서술된 교회와 연애가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59)이라는 『개척자』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금발 청안”의 이보경은 “내 딸년은 머리가 노랗고 길지를 못한데 정임은 동양식 미인의 특색으로 칠 같은 머리가 치렁치렁”60)하다고 한 최석의 말도 상기시킨다. 또한 최석은 하얼빈에서 소비에트 육군 소장으로서 러시아 여인과 결혼한 조선인 R을 찾아가 바이칼 호수로 가기 위한 여행권을 부탁하는데, 이때 R은 최석을 위한 소개장에 최석과 자신이 “처남 매부간”61)이라고 썼던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이 소설에 근거해 이광수와 야마사키 사이의 실제 일을 논의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또 오류에 빠질 위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야마사키가 1956년과 1968년의 글에서도 춘원을 “혼혈아”로 제시했으며, 1942년 11월 5일에는 춘원에게 직접 「야소강탄제전야」의 혼혈아 묘사에 대해 말했을 뿐 아니라, 춘원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는 점이다.
나에 대해 군이 어떤 공상을 그려도 그건 군 마음이지만,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 공상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동안이 최고다. 공상의 날개가 시들어 버리면 다 끝이지.62)
ボクのことについてキミがどんな空想を描こうともそれはキミの髄意だが、しかし人間というもの、空想の翼を持ってるうちが花だ。空想の翼がしぼんでしまったら、もう何もかもおしまいさ。
나에 대해 군이 어떤 공상을 그려도 그건 군 마음이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마음의 접촉이 아닐까.63)
ボクのことについてキミがどんな空想を描こうとも、それはキミの髄意だが、しかし人間に一番大切なことは、人間と人間との心の触れ合いじゃないだろうか。
즉 춘원이 혼혈아건 아니건 상관없이, 야마사키 및 일본인 학생들이 춘원을 혼혈아로 생각했던 일은 실재했다. 그리고 춘원은 그렇게 “공상”했던 이들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군은 이군인 것이 좋았다”고 했던 야마사키의 “이군”은 이러한 “이군”이었다. 그는 하필이면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환기하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조선인, 그것도 혼혈아 따위”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4. 이보경과 가야마 미츠로
그렇다면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은 혈통에 있어서도, 신앙에 있어서도 같은 조상 같은 뿌리”64)라고 주장하는 「삼경인상기」가 야마사키와의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광수를 혼혈아 이보경으로 보는 야마사키에게 야마토[大和] 민족 가야마 미츠로는 가당치도 않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
야마사키는 민족적인 차이를 인종적인 차이로 확대함으로써 이보경의 타자성을 극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 인종의 세계 지배라는 제국주의의 일반적인 장면을 역상으로 표현했다. 즉 야마사키의 주인공이야말로 백인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소설 제목처럼 이보경은 토인으로서 ‘경멸’ 당했다.65)
그렇다면 “가야마란 자식 한번 속내를 드러내 보란 투”로 술을 권하는 가와카미 앞에서, “좋다 마시자. 속내뿐 아니라 마음속 진흙을 토해도 좋다”고 결심하는 가야마 미츠로의 가면 쓰기는 결국 이보경을 혼혈아로 규정한 야마사키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마사키는 황금과 용모가 없다는 이유로 윤광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대신 “특대생”인 그에게 “생존경쟁에 열패할 자격”66)을 부여한 일본인 남학생 P를 상기시키거니와, 이로 인해 자살하기 전의 윤광호는 “조물주의 싫증이 나서 되는 대로 만들어 놓은” 자신의 얼굴을 한탄하며 몰래 “화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67) 따라서 이는 자기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보옥(이보경)에게 “짜증”을 내면서, 그를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라자로와 함께 연상하는68) 「악우(惡友)」69)의 에피소드도 떠오르게 한다. 즉 야마사키에게 이보경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말했던 “악우”(「탈아론」)와 다르지 않았다. 「야소강탄제전야」의 다음 부분은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이 모든 일의 기원적 장면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만큼 약속했으면서 이제 와서 말하지 않는 것은 비겁해요. 자, 나는 말씀하신 대로 혼혈아라고 단 한 마디만 말해요, 그걸로 만족할 테니까.”
그러나 이보경은 침묵하고 있다. 조금 후에 나는 세 번째로 재촉했다.
“아무도 듣지 않아요, 말해도 괜찮아요.”
그러자 이보경은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눈이 듣고 있는 걸요, 눈이 듣고 있는 걸요.”
라고 말하면서 노예가 폭왕(暴王)에게 탄원할 때처럼 눈 위에 꿇어앉았다.70)
「あれほど約束しておきながら、今になって言はないなんて卑怯ですよ。さあわたしは仰有る通り混血児ですって、たった一言言って下さい、それでわたしの気がすむんだから」。
しかし李宝鏡は黙って居る。ややしばらくしてわたしは三度催促した。
「だあれもききやしないんですもの、言ったっていいでせう」。
すると李宝鏡はわたしの膝に顔をあてて、
「雪がきいてゐますもの。雪がきいてゐますもの」。
と言いながら、奴隷が暴王に歎願する時のやうに、雪の上へ跪いた。
따라서 춘원은 1942년 11월 나라에서 가와카미 데츠타로라는 이름의 야마사키 도시오를 또 다시 만난 것이다. 야마사키가 이보경으로부터 혼혈아임을 고백 받으려 했듯이, 가와카미는 가야마 미츠로로부터 새어나오는 식민지인의 표정을 읽으려 한다. 하지만 이제 춘원은 눈이 들을까 두려워하며 이 “진심을 구하는 벗” 앞에 “노예”처럼 꿇어앉아 침묵하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가야마는 식민지인도 혼혈아도 아닌 고대인이며, 가와카미는 “폭왕”이 아니라 “중생”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물주의 싫증이 나서 되는 대로 만들어 놓은” 얼굴이야말로 식민지인에게 씌운 제국의 가면이다. 이보경을 “금발 청안”의 혼혈아로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라 시대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한, 가야마는 자신의 “추함”조차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나의 참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야마는 이미 식민지인이라는 사실에 전전긍긍하는 “소아(小我)”가 아니다. 그는 “미스터 리”임을 벗어났다.
이렇게 「삼경인상기」에 서술된 가야마와 가와카미의 산토리 위스키 일화는 「야소강탄제전야」에 제시된 이보경과 ‘나’의 일을 마주보고 있다. 아니, 전자는 후자에 대한 삼십 년 만의 대답이다. 이광수는 술을 권하는 가와카미를 보며 삼십여 년 전의 야마사키를 상기했으리라.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삼경인상기」는 야마사키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야마사키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야마사키와의 사건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 천이백 년 전의 추억은 야마사키와의 일을 망각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선인, 그것도 혼혈아 따위”로 경멸되던 일을 잊을 수 없으면 없을수록 ‘나라’는 한없이 그리웠을 터이다. 반대로 “나라”가 한없이 그리울 때마다 “조선인, 그것도 혼혈아”의 “첫사랑”은 고대인 가야마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혈서」의 일본 여성 노부꼬[信子]가 김군의 사랑을 얻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김군은 “사랑하는 마당에 국경이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도, “나라에 몸을 바치는 중과 같은 생활을 하기로 맹세”했음을 이유로 노부꼬와의 결혼을 거절한다. 그리고 이로써 김군과 결혼하기 위해 조선어까지 공부했던 그녀를 결국 죽게 한다. 즉 김군을 “지아비”로 부르는 ‘혈서’를 남기고 죽은 후에야 그녀는 김군의 가슴 속 “새 집에 영원히” 받아들여진다.71) 요컨대 윤광호가 상처를 간직한 채 자살했던 것처럼 노부꼬 역시 반드시 죽어야 했다. 오직 말살됨으로써 그녀는 다음과 같이 “국경”을 넘는 김군에게 끝내 기억되는 것이다.
유리표박하느라고 다시는 사랑할 새도 없었고 사랑할 생각도 없이 사십이 가까워지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혹은 시베리아 벌판에, 혹은 양자강 어구에, 혹은 감옥의 철장 속에, 혹은 몰래 넘는 국경의 겨울밤에 일찍이 노부꼬를 잊은 일은 없었다.72)
요컨대 김군은 위와 같이 노부꼬의 죽음을 되새김질함으로써 야마사키에게 계속 복수했다. 혼혈아임을 밝히라고 압박하는 야마사키를 향해, 춘원은 혼혈아를 생산하게 될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오히려 식민지인(혼혈아)으로서 거부하는 김군을 제시했다. 그리고 김군으로 하여금 이 사랑의 실패를 결코 망각하지도 못하도록 했다. 「크리스마슷밤」을 오로지 조선인 학생들의 이야기로만 써 냈던 것처럼, 이로써 춘원은 조선인 역시 혼혈아(일본인)를 배제할 수 있음을 주장한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노부꼬와 김군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 순영에 대한 봉구의 생각을 강력히 환기시킨다.
나는 조선을 사랑한다―순영이를 낳아서 길러준 조선이니 사랑한다. 만일 순영이가 없다고 하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조선을 사랑할까?73)
따라서 이는 “불신한 사람을 낳고 기른 조선을 향하여 나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결심했던 1913년의 국경 건너기와 짝을 이루면서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녹기』, 1940. 3-7.)가 시도하는 “내선일체”의 월경(越境)을 복잡하게 완성한다. 즉 “불신한” 식민지인이나 “혼혈아”로부터 “야마토도 고구려도 하나가 되기를”74) 바라는 훌륭한 고대인으로 환골탈태한 조선 여성 석란은 바야흐로 제국의 남성 히가시 다케오[東武雄]와 결혼해 “대동아공영”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군 지역으로 선무공작을 겸한 “신혼여행”을 떠난다. 소아(小我)를 벗어난 그녀에게 혼혈의 문제는 하찮은 일이다. 그것은 “내선일체”와 “대동아”라는 대아(大我) 속에서 해소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눈멀고 중국어도 하지 못하는 부상병 다케오가, 건강할 뿐 아니라 중국어도 유창한 간호부 석란에게 “매달려” “어린애처럼 어리광”75)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동경 “여자학원의 영문과”에서 공부한 석란은 경성의 일본인인 다케오보다도 “유창한 진짜 동경말”76)을 구사한다. 이는 내지인으로서 “히가시 집안의 명예” 운운하며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했던 다케오의 모친을 침묵시킬 것이다. 법화경을 날마다 읽는 수행자 가야마 미츠로에게조차, 아니 가야마 미츠로가 되면 될수록 이보경의 ‘원한’은 더욱 더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77)
1) 이 논문은 연세대 문과대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출판된 『기억, 망각 그리고 상상력』(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10.21.)에 수록된 것이다. 발표를 위해 몇몇 일본어 원문을 제시했으며, 부분적으로 번역의 오류를 수정했다.
2) 김철 교주, 『바로잡은 <무정>』, 문학동네, 2003. 36쪽. 표기는 인용자가 수정함.
3) 이에 대해서는 이경훈, 「<무정>의 패션」(『오빠의 탄생』, 문학과지성사, 2003.)을 참고할 것.
4) 김철 교주, 앞의 책, 717쪽.
5) 이광수, 『흙』, 문학과지성사, 2005, 324쪽.
6) 이에 대해서는 이경훈, 「예배당, 오누이, 죄」(『대합실의 추억』, 문학동네, 2007)을 참고할 것.
7)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한길사, 1986, 506쪽 참조.
8) 이에 대해서는 함태영, 「1910년대 『매일신보』 소설 연구」(연세대 박사논문, 2008)을 참고할 것.
9) 함태영, 위의 논문, 18쪽 참고.
10) 이광수, 「무부츠 옹의 추억」(김원모, 이경훈 편역, 『동포에 고함』, 철학과현실사, 1997, 244쪽.)
11) 김영민, 「이광수 초기 문학의 변모 과정」, 『현대문학의 연구』 34호, 2008.2. 116쪽.
12) 이에 대해서는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한길사, 1986. 331-352쪽을 참고할 것.
13) 이광수, 「잊음의 나라로」, 『이광수전집 13』, 삼중당, 1962. 325쪽.
14) 김윤식, 앞의 책, 같은 곳.
15) 김윤식, 위의 책, 292쪽.
16) 이광수, 「생각키는 망명객들」, 『이광수전집 17』, 삼중당, 1963(중판). 386쪽.
17) 김원모, 이경훈 편역, 앞의 책, 257쪽.
18) 이광수, 「도쿠토미 소호 선생과 만난 이야기」(김원모, 이경훈 편역, 위의 책, 282쪽.)
19) 김원모, 이경훈 편역, 위의 책, 259쪽.
20) 위의 책, 254쪽.
21) 이에 대해서는 이경훈, 『이광수의 친일문학 연구』, 태학사, 1998.을 참고할 것.
22) 이광수, 「지도적 제씨의 선씨 고심담」, 『매일신보』, 1940.1.5.
23) 이광수, 「생사관」, 『신시대』, 1941.2. (이경훈 편역, 『춘원 이광수 친일문학 전집 2』, 평민사, 1995. 175쪽에서 인용함.)
24) 이광수, 「삼경인상기」, 『문학계』, 1943.1. 김윤식 편역, 『이광수의 일어 창작 및 산문선』, 역락, 2007. 130쪽에서 인용함. 인용 중 “속내뿐 아니라 마음속 진흙을 토해도 좋다”의 원문은 “本音ところか泥を吐いてもいい”이므로 “속내 아니라 모든 걸 다 털어놓아도 좋다”(김철, 『식민지를 안고서』, 역락, 2009)는 번역이 더 정확한 듯하다.
25) 김윤식,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서울대출판부, 2003. 136쪽.
26) 위의 책, 137쪽.
27) 김윤식 편역, 앞의 책, 125쪽.
28) 김철, 앞의 책의 「머리말」 중. 쪽수 표시 없음.
29) 이광수, 「대동아문학의 길」, 『국민문학』, 1945.1. (이경훈 편역, 『춘원 이광수 친일문학전집 2』, 평민사, 1995. 456쪽.)
30) 이광수, 「육장기」, 『문장』, 1939.9. 35쪽.
31) 야마사키의 소설은 일본 무사시대학의 와타나베 나오키(渡邊直紀) 교수를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와타나베 교수께 감사를 표한다.
32) 이에 대해서는 하타노 세쓰코, 「이광수와 야마사키 토시오, 그리고 기쿠치 칸」, 『사이間SAI』11호 , 2011.11.을 참고할 것.
33) 山崎俊夫, 「けいべつ」, 『古き手帖より』, 奢灞都館 , 1998, 114-115쪽.
34) 이광수, 「나의 교우록」, 『모던일본(조선판)』, 1940.8. (김원모, 이경훈 편역, 앞의 책, 265쪽.)
35) 山崎俊夫, 「京城の空の下」, 『古き手帖より』, 奢灞都館 , 1998, 101쪽.
36) 이보옥은 이보경, 즉 이광수의 소설 속 이름이다.
37) 山崎俊夫, 「惡友」, 『古き手帖より』, 奢灞都館 , 1998, 211쪽.
38) 하타노 세츠코, 앞의 책, 17쪽.
39) 위의 책, 19쪽.
40) 기쿠치는 「야마사키 군의 일」(『三田文學』, 1937.8.)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41) 하타노 세츠코,, 앞의 책, 21쪽.
42) 이경훈, 「‘이광수와 야마사키 도시오, 그리고 기쿠치 칸 - <삼경인상기>에 씌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서사의 기원과 글쓰기의 맥락』, (제 5회 한국 언어, 문학, 문화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2011.7.29-30.), 18쪽.
43) 하타노 세츠코, 앞의 책, 22-23쪽.
44) 이광수, 「나의 교우록」, 앞의 책, 264-265쪽.
45) 이광수, 「내선일체 수상록」, 『춘원 이광수 친일문학 전집 2』, 평민사, 1995. 252쪽.
46) 이광수,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평민사, 1995. 54-55쪽.
47) 이광수, 「그들의 사랑」, 위의 책, 121쪽.
48) 이에 대해서는 김영민, 「이광수의 새 자료 <크리스마슷밤> 연구」, 『현대소설연구』 36호를 참고할 것.
49) 山崎俊夫, 「耶蘇降誕祭前夜」, 『美童』, 奢灞都館, 1986, 177쪽.
50) 위의 책, 182쪽.
51) 川村湊, 「他者への視線」, 『타자와 문화표상』, 고려대 일본학센터 2005년도 국제학술심포지엄, 2005.11.19. 118쪽.
52) 山崎俊夫, 「耶蘇降誕祭前夜」, 앞의 책, 197쪽.
53) 이효석, 「벽공무한」, 『이효석전집 4』, 창미사, 1990, 260쪽.
54) 거울, 「크리스마슷밤」, 『학지광』 8호, 35쪽. 『학지광』 8호는 김영민 교수로부터 입수했다. 감사를 표한다.
55) 위의 책, 36쪽.
56) 원문은 “응원실(應援室)”이지만 이는 응접실(應接室)의 오식인 듯하다.
57) 거울, 「크리스마슷밤」, 앞의 책, 38쪽.
58) 山崎俊夫, 「耶蘇降誕祭前夜」, 앞의 책, 198-199쪽.
59) 이광수, 「개척자」, 『이광수전집 1』, 삼중당, 1962. 427쪽.
60) 이광수, 「유정」, 『이광수전집 8』, 삼중당, 1962. 12쪽. 이때 흥미로운 것은 노란 머리의 순임과 대비되는 “동양식 미인”인 정임이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혼혈이라는 점, 그리고 『흙』의 허숭이 유순에게 그렇게 하듯이 최석 역시 정임에게 수혈을 해 준다는 점이다. 이는 공히 주인공들의 결혼을 대신하는 민족적 결합을 상징하는 듯하다. 즉 피의 문제는 『사랑』에서 수행되는 안빈 박사의 혈액 검사와 더불어 춘원 문학의 한 가지 중요한 맥락을 이룬다.
61) 위의 책, 71쪽.
62) 山崎俊夫, 「京城の空の下」, 『古き手帖より』, 奢灞都館 , 1998, 106쪽.
63) 山崎俊夫, 「けいべつ」, 위의 책, 115쪽.
64) 김윤식, 『이광수의 일어 창작 및 산문선』, 역락출판사, 2007, 142쪽.
65) 이경훈, 「원한의 화자 이광수」, 『현대문학의 연구』 45호, 2011.10. 326쪽.
66) 이광수, 「윤광호」, 『이광수전집 14』, 삼중당, 1962. 76쪽. 춘원은 1917년의 「개척자」(『이광수전집 1』, 삼중당, 1962. 403쪽.)에서 이러한 류의 “사랑”을 “세상에서 항용 말하는 우정”이라고 규정하면서, “고급의 우정”, “연애”보다 못한 최하위의 “사랑”으로 평가한다.
67) 이에 대해서는 이경훈, 「원한의 화자 이광수」, 앞의 책, 320-327쪽을 참고할 것.
68) 山崎俊夫, 「惡友」, 『古き手帖より』, 奢灞都館 , 1998, 210쪽.
69) 춘원은 “악우”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惡友)와 같이 되고 말았다.”(「개척자」, 앞의 책, 411쪽.)
70) 山崎俊夫, 「耶蘇降誕祭前夜」, 앞의 책, 203-204쪽.
71) 노부꼬가 죽는 장면은 「개척자」에서 성순이 죽는 장면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앞의 책, 458-464쪽을 참고할 것.) 즉 「개척자」에서 “악우”로 불린 민은 김군에 대응한다.
72) 이광수, 「혈서」, 『조선문단』, 1924.10. 30쪽.
73) 이광수, 「재생」, 『이광수전집 2』, 삼중당, 1962, 22쪽.
74) 이광수,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앞의 책, 9쪽.
75) 위의 책, 83쪽.
76) 위의 책, 53쪽.
77) 들뢰즈는 “노예의 유형은 놀랄 만한 기억”에 의해 정의된다고 논한 바 있다. 질 들뢰즈(이경신 역), 『니체와 철학』, 1992(2쇄), 211쪽 참조. 「혈서」와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경훈의 「원한의 화자 이광수」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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