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9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2016년 2월 3일 사진.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 소녀상이 모든 ‘위안부’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 국가에 의해 동 원된 가부장주의적 ‘소녀’의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소녀상’이 그녀들의 어린 시절, 소녀 시절을 누구에게나 있었던 꿈많은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기억 을 생각해 보라. 이것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위안부 상으로 인터넷에서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임산부 상 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사실성 유무를 떠나 보는 내가 너무나 참혹했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뿌리와이파리, 2013. (2014. 6. 24. 초판 3쇄)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다. 이번에 공개된 삭제판이 아닌, 작년 판금되기 이전 구입한 무삭제 판이다. 언제가 읽어보겠지 싶어 묵여두었던 책이다. 상세한 비평은 하지 않기로 한다.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2/8 ‘위안부’에 대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이 책은 ‘위안부’ 문제와 위안소 문제 를 상세하게 다루는 연구서는 아니다. 그다지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 내용은 주로 정대협에 대한 비판 이다. ‘위안부’에 대한 내용은 앞부분의 100여쪽 남짓. 내용이 제목과 살짝 달라 조금 당황했다. 물론 일 본의 지원단체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위안부’ 당사자 및 지원단체의 격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법적 소송과 절차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어찌되었든 소송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주로 삭제된 부분인 ‘동지애'(애국처녀, 긍지, 동지적 관계 등, 생각보다 훨씬 여러번 나왔다)가 가장 논 쟁적인 부분이다. 일본군과 때로 애정을 나누고, 간호법을 배워서 돕기도 하고, 미군의 폭격을 피해서 곳곳으로 함께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니 동지애가 싹텄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인’의 지위였다. 일본을 국적으로하는 여러 인종, 민족, 종족의 사람들 중에서 2등의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인(내지인) 위안부는 수가 적어 장교만 상대하는 등의 현실에 서, 생긴 것과 피부색이 비슷하고, 일본어를 하는 일종의 대용(substitute)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서 일부 위안부들이 일본군을 ‘유군(아군)’이라고 표현하고, 일본의 패배를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여 자 결하기도 했다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전장에서 적과의 사랑이 꽃필 수도 있고, 원수가 친구가 되기 도 한다. 납치된 사람이 납치범과 공감하는 심리상태를 ‘스톡홀롬 신드롬’이라고 한다든가. 그런 감정이 나 상황까지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위안부’의 얼마 정도 어느 정도가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명시하지 않은채, 그런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 말하며, 논의를 금새 확장하지만,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한 문제다. 특히 패전이 확인된 후 그럼 심정은 얼마나 이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퍼졌는가? 상대 방인 일본군도 그렇게 여겼는가? 그래서 일본으로 함께 갔는가? 전쟁 중 극한 상황에서 비이성적으로 표출한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고 말하려면, 얼마나 많은 증거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라면 『우국』 보다 훨씬 뛰어난 소설을 만들어 낼수도 있겠지만. 더욱이 그런 감정을 근거로 ‘위안부’를 피해자이자 협력자라고 단정하는 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위안부’들이 협력해서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마음의 위안, 잠깐 동안 목숨의 연장? 결국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대부분의 ‘위안부’를 버려두고 떠났다. 극적으로 죽이 지까진 않았다고 해도, ‘위안부’를 일본군 중에 포함시켜, 일본으로 수송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데려갈 때는 군용시설을 이용하고선. 동지적 연대를 느낀 ‘협력자’이니 이제 ‘위안부’는 어떤 사과를 받아야 하 는가. 패전의 전장에 한 때의 동지를 버리고 간 ‘도의적 책임’인가. ‘위안부’는 저자가 말하는 제국의 성 착취 시스템의 먹이사슬의 최말단의 희생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협력자’ 딱지를 붙여서 모든 사람 이 협력자이니, 이제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다 그만하자고 할 것인가. 이런 일은 피해자 를 가해자로 만들어서, 이중의 처벌을 가하는 일이다. 소위 아베 총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강제 연행’은 없었다는 주장과 이 책의 내용이 궤를 같이하는 부 분에 대해서. 즉 식민지체제라는 구조적 강제만 인정하는 부분에 대해. 조선에서 위안부를 데려갈 때, 실제로는 업자가 사기·납치 등의 방법을 썼을 수는 있으나 군이 직접 들어가 총을 들이대고 강제 동원하 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거나, 일탈이라는 주장이다. 지배-종속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큰 규모로 진행될 경우, 저항을 포기하거나 시도하지 않고, 순응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 렇게 순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강제는 ‘직접적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도 법적 처벌의 대상도 아니고, 직접 강제가 있을 때만 처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자체를 처벌해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3/8 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식민주의 자체는 처벌할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형식논리상으로 그럴 수 있을 것 이다. 1910년의 합일병합, 제2차 한일신협약에 따라 주권이 양도되었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시, 과거 조약의 무효성을 애매하게 처리(현 시점에서 무효)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일본의 관료와 정 치인들이 계속해서 자료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주장하고 있고, 1965년 한국정부가 개 인의 청구권을 모두 인수했기 때문에 개인은 청구권을 요구할 수 없고, 강제 연행이라는 전쟁범죄가 확 인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배상은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이다. 이를 근거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 서 대부분 ‘위안부’가 패소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패소가 실상은 한국정부 때문이고, 냉전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점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모두 기왕의 법적 논리를 수용하면서 상황을 전 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에서 벌어진 오랜 식민화의 결과, 식민지 전체가 국가에 총동원되는 상황에서 업자들과 계약하고, 업자들의 활동을 방관한 것에 대해서 실제 강제연행 행위를 하지 않았다 고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순응된 강제’ 즉,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협상 전략 내지, 법정 전략 상 어리석어 보인다 할지라도, 승소할 가능성이 없다 할지라도,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무의 미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합의에 구속되겠지만, 시민사회가 국가 의 일부로 구속되지 않는 이상, 시민사회가 그런 주장을 순순히 수용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가부장구조(남성우월주의)와 식민지현실(제국주의)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식민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구조에 책임을 더 물으려고 한다. 그러나 가부장구조는 식민지배를 통해서 강화된 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식민지야 말로, 여성화되어 피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 점은 사이드가 충분히 지적해 두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할 수 있는 지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위와 관련해, 1930년대 말의 오 늘날의 초등학교 취학률을 보면, 전체 아동의 약 3분의 1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취학한 학생 중 남학생 의 비중이 3배였다. 이 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조선인의 일반적 의식이나 가정 단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구조에 의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여성교육기회 는 다양한 측면으로 봉쇄된다. 1944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제 말기 60%를 넘어가므로, 보기에 따 라서는 일제가 교육보급에 노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는 징병제 실시를 준비하 는 과정에서 초등교육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서로 말이 다르면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함 께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조선의 총독부는 서로 의무교육을 먼저 실시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고, 1943년 대만총독부가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하나 사소한 것이지만,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는 소금과 담배는 물론 아편과 모르핀을 전 매했다. 아편의 부산물인 모르핀은 아편 값이 비싸 사용자가 줄어 재정수입이 적어지자 새롭게 전매에 포함시켰다. 다른 점령지나 전선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자가 지적한 ‘위안부’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아편 사용의 이면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또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 약은 생각만큼 2차대전을 종결하는 조약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참여했으나, 소련은 마지막에 서명을 거부했다. 소련과 일본은 1956년의 선언으로 국교를 회복한다. 중국은 미국은 중화민국(대만)을 영국은 중화인민공화국(대륙)을 초청할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초대받지 못했다. 실제 중일양국의 국교정상화는 1972년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더욱 한일국교정상화가 시급했 다. 바야흐로 세계는 냉전이었다.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4/8 일본인, 조선인 등의 범주에 혼란이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명칭이 당시 대일본제국의 내지인, 조선인, 대만인 등을 총칭하는 명칭이 되었다가도, 소위 내지인만 가리키기도 하고, 조선인 범주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범주혼란은 흔한 사례이므로, 이 책의 저자만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화해를 강조한다. 화해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서로를 알고 이해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며, 걸림돌이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난 90년대만해도 크지 않았던 우익이 한국과 위안부 등 과거사 갈등을 하는 동안 혐한과 함께 커져났다. 이런 식으로 일본에 대한 과거사 공 격과 피해자이기만한 양 하는 것은 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협력자들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일본의 우경화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과거사에 입각한 일본 공격을 모두 멈추고 진심으로 화해를 추구하면, 일본에서 우경화가 멈추고, 그들이 다시 돌 아와 손잡고, 한-일 양국이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의 우익이 등장 하는 것이나, 한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우익이 때로 극단적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다 그 나라의 내부 문 제 때문이다. 우리가 방향을 돌린다고, 화해가 되는 것도, 우경화가 멈추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목표 로 그럴 수도 없다. 마치, 여당 독주를 막기 위해, 야당에게 우클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야당 이 막상 우클릭하면서,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여당은 더욱 저멀리 달아나고, 야당은 지지층의 비판을 받고 허우적 거린다. 이 책은 ‘위안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꺼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양한 목소리를 다양하게 보여 주어야 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스베틀라야나 알렉시예비치가 좋은 예가 아닌가. 이 책에서 나는 일종의 조급증, ‘화해조급증’을 읽었다. 저자는 아마도 잊혀져가는 작은 목소리, 혹은 서발턴(subaltern)안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눌린 섭서 발턴(sub-subaltern,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 기에 저자가 들려준 목소리는 너무 단순한 한 가지 소리 뿐이었다. 그런 시도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 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하위 주체 또는 하위 주체들의 복원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 는 저자가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 그 주체이다. 이 주체는 위안부로 끌려갈 때까지는 미성숙의 피동성 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20대초반의 여러 격정과 전시 상황 탓에, 가해자인 일본군과 연애에 빠지기도하 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의 모습을 띈다. 이 주체의 이런 모습은 이 정서 혹은 인식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고수하는 소수에 의해서만 등장하고 발굴되었다. 얼마나 그랬는지 현재로선 알기 어렵지만, 이 모습을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다수의 ‘위안부’가 전쟁이 끝난 후 이 모습을 어떻게 느 꼈을까, 기억을 지우려고 하고, 괴로워도 하고, 그러나 어느 순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젊은 날에 연민을 느끼면서. 이들에게 이토록 엄청난 이름 ‘협력자’라는 틀을 뒤짚어 씌워야 하는지 나는 정 말 의문이 든다. 그 해석이 합당한지도. 그냥 비극적 에피소드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지적하는 업자·포주에 대한 부분은 지금까지 보다 훨씬 상세히 연구되고, 공표되어야 한다. 대부 분이 조선인인 (징모)업자와 포주 없이, 위안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어려웠다. 이 부분은 다른 연구에 서도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보다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 혹시, 이 업자나 포주로 재산을 축적한 사 람이 있으면, 확인해서 환수하는 일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그런 소급입법이 있었다. 사실이 확 인되면, 인륜에 대한 범죄로 처벌하여, 공개해야 한다. 이런 범죄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비로소 한국에서의 협력자와 협력(collaboration) 연구를 촉발시키게 될 것이다. ‘친일’이라는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5/8 단순하게 단죄하는 명칭이자, 그들의 행적과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운 명칭보다. 협력자(collaborators) 와 동화주의자(assimilators)와 같이 각자의 행적과 사상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선도적 연구들을 검토해야 한다. 근현대중국연구자와 일본연구자, 식민지연구자들이 선도적인 작업을 해두었다. 이 책을 요약하면, 이런 주장이 된다. 정대협이 문제다. 소녀상이 문제다. 정대협이 정보를 왜곡, 조작했 다. 정대협은 권력이 되었다. 그래서 ‘위안부’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 마치 노사교섭에서 제3자 개입 금지조항 같다. 정대협은 순수한 ‘위안부’들의 의견을 자신의 권력과 명성을 위해 왜곡하고, 때로는 억 누르면서, 이 문제를 끌고가는 불순세력이다. 그러므로 정대협만 없어지면, ‘위안부’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정대협의 그런 노력의 결정체가 소녀상이다. 소녀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피해자 흉내내기, 순결한 소녀 아닌 ‘위안부’를 소외시킨다. 소녀상은 일본을 자극하고, 특히 한국을 이해하려 던 사람들과 우익들을 자극한다. 그러므로 소녀상을 철거하고, 현실적으로 일본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 한의 대응인 기금 또는 그 후속조치를 수용하고, 이 문제를 끝내달라. 이것이 요약이다. 이들이 고령이 라 곧 돌아가시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은근한 위협(?)까지. 정대협과 북한이 친하다는 식의 내용 도 은근슬쩍 서술한다. 나는 삭제된 34곳이 모두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한겨레」가 공개한 것을 보니, 내가 선을 긋거나 낙서 해 놓은 곳이 꽤 많았다. 일부 제시된 삭제된 부분은 매우 자극적인 부분들이었다. 그 부분들이 삭제됨 에 따라 오히려 이 책이 온건하게, 처음 주었던 충격과 달리 읽힐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 우려되기도 한 다. 덧붙이면, 이 책에 은근히 비속어까지는 아니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조센 삐’이다. 이 단어는 영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삐(ピー)는 ‘プロスチチュ ート (prostitute)’즉, 창녀, 매춘부의 약자라고 한다. 그밖에도 책 내용 중간중간에 반복해서, ‘성욕처 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전쟁에 나간 젊은 남성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기꺼이 강간이라도 일삼는 존재이니, 반드시 성욕처리 시설 혹은 방법이 필요하고, 그래서 미군도, 한국군도 이용했다는 식으로 말 한다. 당연히 이런 부분도 연구되어야 한다. 그래도 ‘성욕처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보기 어려웠 다. 가장 충격적인 단어는 ‘공동변소'(59, 센다 가코 책에서 위안부 증언을 인용하는 부분)였다. 본인들 은 그렇게 쓴다고 해도, 어떻게 희생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좀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안될까. 주를 단다든지 해서. 다른 곳에도 ‘위안부’는 ‘군수품’, ‘적 여성(네덜란드 여성)’은 ‘전리품’ 등의 언급이 나오 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맥락도 알겠으나,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기술하는 것이 마땅하다. 희 생자에 대한 존경심, 피해자에 대한 존중을 보였으면 한다. 지난 주 캄캄한 늦은 저녁에 아내와 함께, 소녀상 옆 노숙 현장에 다녀왔다. 그냥 몇 명을 격려하고 왔 다. ‘바위처럼’도 참 오랜만에 박수치면서 부르고. 일본으로선 아플 수 있지. 그렇지만, 식민지 지배만큼 아플까. ‘위안부’ 한 사람의 아픔만큼 아플까. 맺힌 한도 그 자체로 실체인데. 이 책과 함께, 작년에 사두었던,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읽기로 했다.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6/8 그렇지만 집회현장에서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바르 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서 참회한 사진이 여러장 걸려 있었다. 빌리 브란트의 그 행동은 옳은 일이 었다. 그 일은 그의 ‘동방정책(Ostpolitik)’에 힘이 되었고, 전쟁과 과오를 반성하는 독일이라는 이미지 를 낳았다. 당시 독일 시민들 중에는 일부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역량의 발현이다. 실제 2차 대전 이후 전쟁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독일과 일본은 크게 다 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분리를 통한 전후 처리’ 방법을 택하고 있다. 전쟁의 책임을 진 수괴, 그의 하수 인들, 그리고 일반 시민.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당 수괴를 처벌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공직추방을 당했으나 몇 년 안에 거의 모두 복귀했다. 오늘까지도 떠들썩하게 몇몇 수용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처벌하고 있지만, 그것 뿐이다. 나치당과 제3제국에 있어서 일반의 독일사 람들은 묘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열렬하게 나치당을 지지했던 과거와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히틀러는 대다수 독일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전체주의의 길 을 열었다. 독일이 사과를 하고, 처벌을 하고, 배상을 한다고 해도, 이 선, 즉 평범한 독일의 시민과 히틀 러 및 나치당의 연결은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도쿄 전범재판을 통해, 일부 군국주의자 1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처벌했다. 그러나 핵심인 히로히토 천황은 미국의 비호 아래, 그 지위와 생 명을 부지했다. 새로운 헌법 하에서 새로운 지위로. 그리고 두 개의 원자폭탄과 함께 일본인은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통의 일본인은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 땅에 왔을 때, 가혹한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전시에 전쟁의 열매를 누렸다. 1905년의 히비야 폭동은 보통의 일본인이 근대국가에서 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승 전 후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는 사실에 격분한 시민들은 공원과 전차를 불태웠다. 아마도 전차표값 4전 중 1전은 전비였기 때문이리라. 빌리 브란트가 했듯이 일본 천황이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 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일본이 식민지배 자체가 오류였음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고, 제국주의가 잘못 이었음을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어떤 방식으로든 동원한 것이 국가범죄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 다고 본다. 물론, 지금까지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국민국가와 전쟁이 지배하는 세계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전쟁은 범죄라고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마음을 달래 는 이벤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한국인들이 일본의 굴복을 바란 다고 생각할 터인데, 그 또한 원치 않는 오해다. 원하는 것은 일본이 정말로 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 고, 이를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성과 사죄는 포기했다는 증거이고. 2016. 2. 3. 사족이 될까 우려하면서도, 일본의 책임과 배상 문제에 관하여. 국가단위의 배상책임 문제는 저자가 정 대협을 비판하는 그리고 한국 언론을 비판하는 중요한 논점이기 때문에, 몇자 더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진다. 저자가 정대협을 비판하는 주된 내용 중 하나가 일본의 성의와 의도를 무시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나름의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주 미묘한 부분 들이 있다. 그리고 핵심적 논쟁은 90년대의 ‘아시아여성기금’으로 돌아간다. 저자의 논지는 이것이다. 이 ‘기금’은 명목상 민간기금이지만, 내용상은 국고금이라는 것이다. 실제 기금의 90%가 국고에서 나 왔다. 또 총리의 개인자격의 서신을 포함하고 있다. 역대 총리가 계속 서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로금(見 舞金)이 아니라 보상금(償い金)인데, 한국에서는 위로금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97년 에 6명, 지금까지 61명이 받아들였고, 네덜란드는 200여명이 편지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7/8 보상금이 사실상 속죄의 뜻이라며, 와다 하루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국인에게 전달할 때는 ‘atonement’라고 했다. 그러나 ‘償い金’의 사전적 해석은 보상금이지 속죄는 아니다. 이것은 해석과 수 사의 영역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인은 평화조약에 의해 보상은 받지 않고 편지만 받았다고 또 저자가 기 술한다.) 저자의 핵심 논지는 일본은 사실상 ‘국가 책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가, 각료들, 관료들은 일본 법률 체계 하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벗어날 수 없고, 그 체 계와 해석 속에서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식민지지배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 당시에는 국제법적으로도, 조 약으로도 합법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또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서 개인청구권을 한국 정부가 인수했 으므로, 개인배상은 그때 끝났다는 것이다. 식민지지배 과정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는 ‘도의 적 책임’을 지지만, 법적 책임, 즉 식민지 지배를 불법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일본의 일관된 입장이다. 따라서 일본은 국가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여야 모든 정치인, 관 료 등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입장은 바로 일본의 일관된 법해석(국제법과 국내법), 즉 1860년 대 메이지유신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정변을 겪지 않고, 법체계의 혼란도 가져오지 않고, 법률과 통치의 안정성을 가져온 것을 깰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약 하나하나, 법 률 하나하나에서 신중하게 만들어나간다. 저자의 문제는 바로 이 일본의 법률 해석 체계를 흔들 수 없는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이것을 흔들려면, 일본을 굴복시켜야 한다. 그럴 수 없는 한에서는 지금과 같은 형태, 사회당 등 야당의 연립정권이 수립된 상태에서 진보적 지한파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민간기금의 형태로 정부가 국고를 투입하고, ‘도의적 책임’의 모양을 띄고 있지만, 내용상 그걸 살짝 넘어서는 형태 가 일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호한 형태의 ‘사 과 아닌 사과’가 일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고노담화의 근거였던, 강제 동원의 증거 마저 희박해 지고 있는 마당이라는 것. 요약하면 ‘일본의 한계 내애서의 사과’, ‘일본의 한계 내에서의 책임’ 인 셈이다. 한일간의 인식상의 충돌은 이러한 ‘법적 연속성’에 대한 해석에서 발생한다. 일본은 식민지배는 불행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법과 제도에 의하면 합법적이라는 것이고, 한국의 입장은 식민지배는 불법적 침략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에서 양보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의아한 것은 저자가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중요한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를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자의 취향이겠지만, 그래서 『내셔널리즘과 젠더』의 개정판인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을 찾아보았다. 일단 ‘기금’에 대한 부분, 우에노 지즈코도 기금의 한 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인정하긴 싫지만, 최선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특히, 총리 편지는 국가를 끌 어들인 성공적인 사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대상국인 한국의 ‘위안부’들이 수용하지 않고, 이렇게 문제를 많이 일으킨 상황에서 실패한 것의 책임을 ‘기금’에 묻고 있다. 스스로도 ‘기금’ 이 사들의 고충과 노력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을 만든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지만. 그러면서 일본 인으로서는 현실적으로 다른 해결책은 없을 것이라는 한계도 인정한다. 하나 동시에 기금이 순수 NGO 기금으로 만들어져, 지원과 연대에 멈추고, 사죄와 보상은 국가에 압박하는 형태가 더 나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우에노 지즈코는 차차 찾아보려한다. 일단 몇 자 덧붙인다. 4/29/2020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feliview.com/modern-hist/postcolonial/park-comfortwoman/ 8/8 2016. 2. 5.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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