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인터뷰] ‘한일 막후 괴물’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충고 : 월간조선
02 2017 MAGAZINE
원로 인터뷰
‘한일 막후 괴물’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충고
일본과 和하는 것을 잊지 마라(不失和日本, 《징비록》의 신숙주 유언)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 1958년 도일(渡日), 30년간 근대 한일관계 자료를 수집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 백범 김구,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아…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해야”
⊙ 천황은 2600년 전 도일한 재일교포… 천황 방한하면 한일관계 전기 맞을 것
⊙ 이명박 대통령의 깜짝 독도 방문처럼 일본을 자극하지 말아야
⊙ 위안부 할머니들, 국민 상대로 ‘대국민 선언’ 발표한다면 명예회복에 도움될 것
올해 90세의 고령에도 불구,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외교부 고문 자격으로 지금도 한일 간 현안이 생길 때마다 도쿄와 서울을 수시로 오간다. 최 원장은 아침에 눈을 뜨면 일간신문을 쌓아놓고 ‘가위질’을 시작한다. 1969년부터 5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일상(日常)이다.
최서면 원장은 “지난해 11월 말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불참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70번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임기를 마치는 모습을 보니 서글프다”며 “외교는 국가에 ‘공기’와도 같은 것인데 대한민국만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최 원장의 본명은 최중하(崔重夏)로, 연희전문 문과에 다니다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출신들이 만든 한독당 산하 대한학생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시영(李始榮) 선생의 권유로 18세의 나이에 《대동신문(大東新聞)》 기자로 일했으며, 이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후쿠자와 유키치 딸의 도움으로 도쿄에 정착
1969년 대장상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를 만나 박경원 강원지사의 방일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최서면. 강원도에 의해 강원도 개발 협력공사 회장으로 위촉된 최씨는 강원도 내 공장 건립을 위해 노력했다. 후쿠다는 최서면에게 강원도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일본 재계 인물들을 많이 소개했다고 한다. 1997년 후쿠다 다케오 전 수상이 최서면씨 체일 30주년을 기념해 써준 휘호(왼쪽 사진). 일의대수(一衣帶水·한 줄기 띠와 같은 바닷물)와 같이 한일 양국의 친선에 기여해 달라는 뜻으로 써준 글귀다.
최서면 원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일본’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필요하다. ‘가톨릭’이 그와 노기남(盧基南) 대주교, 장면(張勉)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면, ‘일본’은 자유당 때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한국학 전문가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천주교 성직자로 변장한 그는 미 군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 후 그는 문부성 장관을 지낸 오타 고조(太田耕造) 아세아대 총장과 재정보증인 브리지트 키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특별체류허가’를 얻어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에 돌입한다.
최 원장은 1969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설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딸의 도움으로 그가 제공한 사저(私邸)에 도쿄한국연구원의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70년 10월 연세대 박대선(朴大善) 총장과 게이오대 사토사쿠 총장을 연결해 두 대학 간 자매결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일본인보다 한국을 더 모르는 게 부끄러웠다”던 그는 첫 일본 정착 5년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자료 속에 파묻혀 살았다고 한다. 최 원장은 당시를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흥분의 시간들이었다”며 “지구상에서 나 혼자만 역사의 진실을 접하는 환희를 누렸다”고 회고했다.
1958년 도일, 1969년 도쿄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1988년까지 30년간 근대 한일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그는 1988년 귀국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안중근평전》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1969년에는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의 의병 활약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발견했다. 탁본된 북관대첩비는 의병장 최배천(崔配天) 장군의 후손인 최옥자(97) 세종대 설립자의 주선으로 2002년 4월 29일 강원도 강릉 최씨 사당인 황산사(篁山祠)에 모셨다.
최서면 원장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좌우를 넘나들며 김구, 장면, 박정희(朴正熙), 김대중(金大中) 등 당대의 거물들과 교분을 가졌다. 일본에서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 등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전 외상 같은 정객들과 깊이 사귀었다.
최서면 원장의 이런 인맥관계를 활용해 박정희 정부는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7·4남북공동성명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아 한일관계가 악화됐을 때 이를 무마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전 주한 일본 대사는 생전에 한일관계에서 그의 역할을 가리켜 “사케테토오레나이미치(避けて通れない道·돌아서 갈 수 없는 길)”라고 했다. 최 원장을 통하지 않고는 한국과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범 김구,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6·25 전쟁 중 북한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인민군에게 납치된 독일 신부들이 1954년 국제적십자사의 중재로 북한에서 풀려나 서울에 왔다. 최서면(오른쪽에서 네 번째)씨가 이들을 장면 당시 천주교 총무원 사무총장에게 소개하고 있다.
— 1월 8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는 조치로 주한 일본 대사가 부산 일본 총영사와 함께 지난 1월 9일 일본으로 일시 귀국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일 통화 스와프 협상, 고위급 경제 협의 중단까지 발표하고 있고요.
“90년을 각각 절반씩 한국과 일본에 살면서 양국의 기쁨과 슬픔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때가 참 곤란합니다. 고사(故史)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있지 않아요? 한일관계는 실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임에도 한국 사회는 집단 ‘친일파’ 트라우마에 빠져 있어요.”
— 친일파 트라우마라니요?
“한국 사람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친일파’라는 말이에요. 우리 사회는 친일파라는 용어를 과잉 해석해 모든 한일 간 현안을 파행적으로 처리하고 있어요. 일본에 당연하게 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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