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9

어린 벗에게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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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信[제일신][편집]

사랑하는 벗이여
前番[전번] 平安[평안]하다는 片紙[편지]를 부친 後[후] 사흘만에 病[병]이 들었다가 오늘이야 겨우 出入[출입]하게 되었나이다. 사람의 일이란 참 믿지 못할 것이로소이다. 平安[평안]하다고 便紙[편지] 쓸 때에야 뉘라서 三日後[삼일후]에 重病[중병]이 들 줄을 알았사오리까. 健康[건강]도 믿을 수 없고, 富貴[부귀]도 믿을 수 없고, 人生萬事[인생만사]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生命[생명]인들 어찌 믿사오리이까. 이 便紙[편지]를 쓴지 三日後[삼일후]에 내가 죽을는진들 어찌 아오리까. 古人[고인]이 人生[인생]을 朝露[조로]에 비긴 것이 참 마땅한가 하나이다. 이러한 中[중]에 오직 하나 믿을 것이 精神的[정신적]으로 同胞民族[동포민족]에게 善影響[선영향]을 끼침이니, 그리하면 내 몸은 죽어도 내 精神[정신]은 여러 同胞[동포]의 精神[정신] 속에 살아 그 生活[생활]을 管攝[관섭]하고 또 그네의 子孫[자손]에게 傳[전]하여 永遠[영원]히 生命[생명]을 保全[보전]할 수가 있는 것이로소이다. 孔子[공자]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고, 耶蘇[야소]와 釋迦[석가]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고, 여러 偉人[위인]과 國土[국토]와 學者[학자]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고, 詩人[시인]과 道士[도사]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는가 하나이다.
나도 只今[지금] 病席[병석]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그대에게 이 便紙[편지]를 쓰려 할 제 더욱 이 感想[감상]이 깊어지나이다. 어린 그대는 아직 이뜻을 잘 理解[이해]하지 못하려니와 聰明[총명]한 그대는 近似[근사]하게 想像[상상]할 수는 있는가 하나이다.
내 病[병]은 重[중]한 寒感[한감]이라 하더이다. 元來[원래] 上海[상해]란 水土[수토]가 健康[건강]에 不適[부적]하여 이곳 온지 一週日[일주일]이 못하여 消化不良症[소화불량증]을 얻었사오며 이번 病[병]도 消化不良[소화불량]에 原因[원인]한가 하나이다. 첨 二[이], 三日[삼일]은 身體[신체]가 倦怠[권태]하고 精神[정신]이 沈鬱[침울]하더니 하루 저녁에는 惡寒[악한]하고 頭痛[두통]이 나며 全身[전신]이 떨리어 그 괴로움이 참 形言[형언]할 수 없더이다. 어느덧 한잠을 자고나니 이번에는 全身[전신]에 모닥불을 퍼붓는 듯하고 가슴은 바짝바짝 들이타고 燥渴症[조갈증]이 나고 腦[뇌]는 부글부글 끓는 듯하여 가끔 精神[정신]을 잃고 군소리를 하게 되었나이다.
이때에 나는 더욱 懇切[간절]히 그대를 생각하였나이다. 그 때에 내가 病[병]으로 있을 제 그대가 밤낮 내 머리맡에 앉아서 或[혹] 손으로 머리도 짚어 주고 多情[다정]한 말로 慰勞[위로]도 하여 주고 ── 그 中[중]에도 언제 내 病[병]이 몹시 重[중]하던 날 나는 二[이], 三時間[삼시간] 동안이나 精神[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깨어날 제 그대가 무릎 위에 내 머리를 놓고 눈물을 흘리던 생각이 더 懇切[간절]하게 나나이다. 그때에 내가 겨우 눈을 떠서 그대의 얼굴을 보며 내 여위고 찬 손으로 그대의 따뜻한 손을 잡을제 내 感謝[감사]하는 생각이야 얼마나 하였으리이까. 只今[지금] 나는 異城[이성] 逆旅[역려]에 외로이 病[병]들어 누운 몸이라 懇切[간절]히 그대를 생각함이 또한 當然[당연]할 것이로소이다. 나는 하도 아쉬운 마음에 억지로 그대가 只今[지금] 내 곁에 앉았거니, 내 머리를 짚고 내 손을 잡아주거니 하고 想像[상상]하려 하나이다. 夢寐間[몽매간]에 그대가 내 곁에 있는 듯하여 반겨 깨어 본즉 차디찬 電燈[전등]만 無心[무심]히 天井[천정]에 달려 있고 琉璃窓[유리창] 틈으로 찬바람이 휙휙 들여쏠 뿐이로소이다. 世上[세상]에 여러 가지 괴로움이 아무리 많다 한들 異城逆旅[이성역려]에 외로운 病이[병]든 것보다 더한 괴로움이야 어디 있사오리이까. 몸에 熱[열]은 如前[여전]하고 頭痛[두통]과 燥渴[조갈]은 漸漸[점점] 甚[심]하여 가되 主人[주인]은 잠들고 冷水[냉수]한 잔 주는 이 없나이다. 그때 그대가 冷水[냉수] 먹는 것이 害[해]롭다 하여 밤에 커다란 무를 얻어다가 깍아 주던 생각이 나나이다. 焦渴[초갈]한 中[중]에 시원한 무 ─ 사랑하는 그대의 손으로 깍은 무 먹는 맛은 仙桃[선도] ─ 만일 있다 하면 ─ 먹는 맛이라 하였나이다.
이러한 때에는 여러 가지 空想[공상]과 雜念[잡념]이 많이 생기는 것이라 只今[지금] 내 머리에는 過去[과거] 일, 未來[미래] 일, 있던 일, 없던 일, 기쁘던 일, 섧던 일이 連絡[연락]도 없고 秩序[질서]도 없이 짤막짤막 조각조각 쓸어 나오나이다. 한참이나 이 雜念[잡념]과 空想[공상]을 겪고 나서 번히 눈을 뜨면 마치 그 동안에 數十年[수십년]이나 지나간 듯하나이다. 或[혹]「죽음」이라는 생각도 나나이다. 내 病[병]이 漸漸[점점] 重[중]하여 져서 明日[명일]이나 再明日[재명일]이나 또는 이 밤이 새기 前[전]에라도 이 목숨이 스러지지 아니할는가,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가 非夢似夢間[비몽사몽간]에 이 世上[세상]을 버리지나 아니할는가, 或[혹] 只今[지금] 내가 죽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제 손으로 제 몸을 만져 보기도 하였나이다.「죽음!」生命[생명]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이뇨. 生命[생명]과 죽음은 한데 매어 놓은 빛 다른 노끈과 같으니 붉은 노끈과 검은 노끈은 元來[원래]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노끈의 한 끝을 붉게 들이고 한 끝을 검게 들였을 뿐이니 이 빛과 저 빛의 距離[거리]는 零[영]이로소이다. 우리는 광대 모양으로 두 팔을 벌리고 붉은 끝에서 始作[시작]하여 時時刻刻[시시각각]으로 검은 끝을 向[향]하여 가되 어디까지나 붉은 끝이며 어디서부터 검은 끝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다만 가고 가고 가는 동안에 언제 온지 모르게 검은 끝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로소이다. 나는 只今[지금] 어디쯤에나 왔는가. 나선 곳과 검은 끝과의 距離[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나는 只今[지금] 病[병]이란 것으로 全速力[전속력]으로 검은 끝을 向[향]하여 달아나지 않는가, 할 때에 알 수 없는 恐怖[공포]가 全身[전신]을 둘러싸는 듯하더이다. 오늘날까지 工夫[공부]한 것은 무엇이며 勤苦[근고]하고 일한 것은 무엇이뇨. 사랑과 미움과 國家[국가]와 財産[재산]과 名望[명망]은 무엇이뇨. 希望[희망]은 어디 쓰며, 善[선]은 무엇, 惡[악]은 무엇이뇨. 사람이란 一生[일생]에 얻은 모든 所得[소득]과 經驗[경험]과 記憶[기억]과 歷史[역사]를 아끼고 아끼며 지녀 오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 무덤 海關[해관]에서 말끔 빼앗기고 世上[세상]에 나올 때에 발가벗고 온 모양으로 世上[세상]을 떠날 때에도 발가벗기어 쫓겨나는 것이로소이다. 다만 變[변]한 것은 고와서 온 것이 미워져서 가고, 기운차게 온 것이 가엾게 가고, 祝福[축복]받아 온 것이 咀呪[저주]받아 감이로소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나이다. 이제 죽으면 어떻고 來日[내일] 죽으면 어떠며 어제 죽었으면 어떠랴 ─ 아주 나지 않았은들 어떠랴. 아무 때 한 번 죽어도 죽기는 죽을 人生[인생]이요, 죽은 뒤면 王公[왕공]이나 거지나 사람이나 돼지나 乃至[내지] 귀뚜라미나 다 같이 스러지기는 마치 一般[일반]이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아까울 것이 무엇이랴 함이 나의 死生觀[사생관]이로소이다.
그러나 人生[인생]이 生[생]을 아끼고 死[사]를 두려워함은 生[생]이 있으므로 얻을 무엇을 잃어버리기를 아껴 함이니, 或[혹] 金錢[금전]을 좋아하는 이가 金錢[금전]의 快樂[쾌락]을 아낀다든가, 사랑하는 父母[부모]나 妻子[처자]를 둔 이가 이들과 作別[작별]하기를 아낀다든가, 或[혹] 힘써 얻은 名譽[명예]와 地位[지위]를 아낀다든가, 或[혹]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기를 아낀다든가, 或[혹] 宇宙萬物[우주만물]의 美[미]를 아낀다든가 함인가 하나이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人生[인생]으로 하여금 生[생]의 慾望[욕망]과 執着[집착]을 生[생]하게 하는 것이니, 이 생각에는 人世[인세]의 萬事[만사]가 發生[발생]하는 것인가 하나이다. 내가 只今[지금] 死[사]를 생각하고 恐怖[공포]함은 무엇을 아낌이오리이까. 나는 富貴[부귀]도 없나이다, 名譽[명예]도 없나이다, 내게 무슨 아까울 것이 있사오리이까, ─ 오직 「사랑」을 아낌이로소이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快樂[쾌락]과 남이 나를 사랑하여 주는 데서 오는 快樂[쾌락]을 아낌이로소이다. 나는 그대의 손을 잡기 爲[위]하여, 그대의 多情[다정]한 말을 듣기 爲[위]하여, 그대의 香氣[향기]로운 입김을 맡기 爲[위]하여, 차디차고 쓰디쓴 人世[인세]의 曠野[광야]에 내 몸은 오직 그대를 안고 그대에게 안겼거니 하는 意識[의식]의 짜르르 하는 妙味[묘미]를 맛보기 爲[위]하여 살고자 함이로소이다. 그대가 만일 平生[평생] 내 머리를 짚어 주고 내 손을 잡아 준다면 나는 즐겨 一生[일생]을 病[병]으로 지내리이다. 蒼空[창공]을 바라보매 모두 차디차디한 별인 中[중]에 오직 따뜻한 것은 太陽[태양]인 것같이 人事[인사]의 萬般現象[만반현상]을 돌아보매 모두 차디차디한 中[중]에 오직 따뜻한 것이 人類[인류] 相互[상호]의 愛情[애정]의 現象[현상]뿐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저 形式的宗敎家[형식적종교가], 道德家[도덕가]가 입버릇으로 말하는 그러한 愛情[애정]을 이름이 아니라, 生命[생명] 있는 愛情[애정] ── 펄펄 끓는 愛情[애정], 빳빳 마르고 슴슴한 愛情[애정] 말고, 자릿자릿하고 달디달디한 愛情[애정]을 이름이니, 假令[가령] 母子[모자]의 愛情[애정], 어린 兄弟姉妹[형제자매]의 愛情[애정], 純潔[순결]한 靑年男女[청년남녀]의 相思[상사]하는 愛情[애정], 또는 그대와 나와 같은 相思的友情[상사적우정]을 이름이로소이다. 乾燥冷淡[건조냉담]한 世上[세상]에 千年[천년]을 살지 말고 이러한 愛情[애정] 속에 一日[일일]을 살기를 願[원]하나이다. 그러므로 나의 잡을 職業[직업]은 아비, 敎師[교사], 사랑하는 사람, 病人看護[병인간호]하는 사람이 될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只今[지금] 사랑할 이도 없고 사랑하여 줄 이도 없는 외로운 病席[병석]에 누웠나이다.
이리하기를 三[삼], 四日[사일] 하였나이다. 上海[상해] 안에는 親舊[친구]도 없지 아니하오매, 내가 앓는 줄을 알면 찾아오기도 하고 慰勞[위로]도 하고 或[혹] 醫員[의원]도 데려오고 밤에 看護[간호]도 하여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앓는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傳[전]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뜻은 사랑하지 않는 이의 看護[간호]도 받기 싫거니와 내가 저편에 請[청]하여 저편으로 하여금 體面上[체면상] 나를 慰問[위문]하게 하고 體面上[체면상] 나를 爲[위]하여 밤을 새우게 하기가 싫은 까닭이로소이다.
나도 지내 보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爲[위]하여서는 連日[연일] 밤을 새워도 困[곤]한 줄도 모르고 設或[설혹] 病人[병인]이 吐[토]하거나 똥을 누어 내 손으로 그것을 쳐야 할 境遇[경우]를 當[당]하더라고 싫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사랑하는 이를 爲[위]하여 服務[복무]하게 된 것을 큰 快樂[쾌락]으로 알거니와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爲[위]하여서는 한 時間[시간]만 앉아도 졸리고 허리가 아프고 그 病人[병인]의 살이 내게 닿기만 하여도 싫은 症[증]이 생겨 或[혹] 억지로 體面[체면]으로 그를 안아 주고 慰勞[위로]하여 주더라도 이는 한 外飾[외식]에 지나지 못하며 甚至於[심지어] 저것이 죽었으면 사람 죽는 구경이나 하련마는 하는 수도 있더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의 外飾[외식]하는 看護[간호]를 받으려하지 아니함이로소이다. 그때에도 여러 사람이 곁에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로 나를 慰勞[위로]하고 救援[구원]하는 것보다 그대가 혼자 困[곤]하여서 앉은 대로 壁[벽]에 기대어 조는 것이 도리어 내게 큰 效力[효력]이 되고 慰安[위안]이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러 사람의 看護[간호]를 받기보다 想像[상상]으로 실컷 사랑하는 그대의 看護[간호]를 받는 것이 千層萬層[천층만층] 나으리라 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아니한 것이로소이다.
第五日夜[제오일야]에 가장 甚[심]하게 苦痛[고통]하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나 精神[정신]을 못 차리고 昏睡[혼수]하였나이다. 하다가 곁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로 겨우 눈을 떠 본즉 어떤 淸服[청복] 입은 젊은 婦人[부인]과 男子學徒[남자학도] 하나이 風爐[풍로]에 조그마한 남비를 걸어 놓고 무엇을 끓이더이다. 稀微[희미]한 精神[정신]으로나마 깜짝 놀랐나이다. 꿈이나 아닌가 하였나이다. 나는 淸人女子[청인여자]에 아는 이가 없거늘 이 어떤 사람이 나를 爲[위]하여 ── 외롭게 病[병]든 나를 爲[위]하여 무엇을 끓이는고.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動靜[동정]을 보았나이다.
얼마 있다가 그 少年學生[소년학생]이 내 寢臺[침대] 곁에 와서 가만히 내 어깨를 흔들더이다. 나는 깨었나이다. 그 少年[소년]은 핏기 있고 快活[쾌활]한 하고 상긋상긋 웃는 얼굴로 나의 힘없이 뜬 눈을 들여다보더니 淸語[청어]로,
『어떠시오? 좀 나아요?』
나는 無人曠野[무인광야]에서 동무를 만난 듯하여 꽉 그 少年[소년]을 쓸어안고 싶었나이다.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네, 關係[관계]치 않습니다.』
이때에 한 손에 부젓거락 든 婦人[부인]의 視線[시선]이 마주치더이다. 나는 얼른 보고 그네가 오누인 줄을 알았나이다. 그 婦人[부인]이 나 잠 깬 것을 보고 寢臺[침대] 가까이 와서 英語[영어]로,
『藥[약]을 다렸으니, 爲先[위선] 잡수시고 早飯[조반]을 좀 잡수시오.』
이때에 내가 무슨 對答[대답]을 하오리이까. 다만,
『感謝[감사]하올시다. 하나님이여, 당신네게 福[복]을 내리시옵소서.』
할 따름이로소이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나이다. 그 少年[소년]은 外套[외투]를 불에 쪼여 입혀 주고 婦人[부인]은 남비에 데인 藥[약]을 琉璃盞[유리잔]에 옮겨 담더이다. 나는 일어 앉아 내 이불위에 보지 못하면 上等[상등] 담요가 덮인 것을 發見[발견]하였나이다. 나는 참말 꿈인가 하고 고개를 흔들어 보았나이다. 나는 차마 이 恩人[은인]을 더 고생시키지 못하여 억지로 일어나 내 손으로 藥[약]도 먹으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두 恩人[은인]은 억지로 나를 붙들어 앉히고 藥[약] 그릇을 손수 들어 먹이나이다.
나는 그 藥[약]을 먹음보다 그네의 愛情[애정]과 精誠[정성]을 먹는 줄 알고 단모금에 죽 들이켰나이다. 곁에 섰던 少年[소년]은 더운 물을 들고 섰다가 곧 양치하기를 勸[권]하더이다. 婦人[부인]은,
『이제 早飯[조반]을 만들겠으니 바람 쏘이지 말고 누워 계십시오.』
하고 물을 길러 가는지 아래 層[층]으로 내려가더이다. 나는 그제야 少年[소년]을 向[향]하여
『누구시오?』
한대, 少年[소년]은 한참 躊躇躊躇[주저주저]하더니,
『나는 이 이웃에 사는 사람이올시다.』
하고는 내 册床[책상] 위에 놓은 그림을 보더이다. 나는 다시 물을 勇氣[용기]가 없었나이다.
婦人[부인]은 바께쓰에 물을 길어 들고 올라오더니 少年[소년]을 한 번 구석에 불러 무슨 귓속말을 하여 내어보내고 自己[자기]는 藥[약] 달이던 남비를 부시어 牛乳[우유]와 쌀을 두고 粥[죽]을 쑤더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물어 보고 싶은 맘이 懇切[간절]하기는 하나 未安[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물을지도 알지 못하여 가만히 베개에 기대어 하는 양만 보고 있었나이다. 그때엣 나의 心中[심중]은 어떻게 形言[형언]할 수가 없었나이다. 婦人[부인]은 그리 燦爛[찬란]하지 아니한 비단 옷에 머리는 流行[유행]하는 洋式[양식] 머리, 粉[분]도 바른 듯 만 듯, 自然[자연]한 薔薇[장미]빛 같은 두 보조개가 아침 光線[광선]을 받아 더할 수 없이 아름답더이다. 그뿐더러 매우 精神[정신]이 純潔[순결]하고 敎育[교육]을 잘 받은 줄은 그 얼굴과 擧止[거지]와 言語[언어]를 보아 얼른 알았나이다. 나는 그가 아마 어느 文明[문명]한 耶蘇敎人[야소교인]의 家庭[가정]에서 가장 幸福[행복]하게 자라난 處子[처자]인 줄을 얼른 알았나이다. 그러고 그의 父母[부모]의 德[덕]을 사모하는 同時[동시]에 人類中[인류중]에 이러한 淨潔[정결]한 處子[처자]있음을 자랑으로 알며 그를 보게 된 내 눈과 그의 看護[간호]를 받게된 내 몸을 無上[무상]한 幸福[행복]으로 알았나이다. 나는 病苦[병고]도 좀 덜린 듯하고 設或[설혹] 덜리지는 아니하였더라도 淸淨[청정]한 稀罕[희한]한 기쁨이 病苦[병고]를 잊게 함이라 하였나이다. 實狀[실상] 昨夜[작야]는 참 苦痛[고통]하였나이다. 하도 괴롭고 하도 외로와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어버리려고까지 하였나이다. 만일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오늘 아침에 깨어서도 또 그러한 凶[흉]하고 슬픈 생각만 하였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맘에 기쁨을 얻고 生命[생명]의 快樂[쾌락]과 執着力[집착력]을 얻었나이다. 나는 죽지 말고 살려 하나이다. 울지 말고 웃으려 하나이다. 이러한 美[미]가 있고 이러한 愛情[애정]이 있는 世上[세상]은 버리기 에는 너무 아깝다 하나이다. 하나님은 地獄[지옥]에 들려는 어린 羊[양]에게 두 天使[천사]를 보내다 다시 당신의 膝下[슬하]로 부른 것이로소이다.
나는 風爐[풍로]의 불을 불고 숟가락으로 粥[죽]을 젓는 婦人[부인]의 등을 向[향]하여 慇懃[은근]히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天使[천사]시여 하였나이다. 婦人[부인]은 偶然[우연]히 뒤를 돌아보더이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나이다.
이윽고 층층대를 올라오는 소리가 나더니 그 少年[소년]이 蜜柑[밀감]과 林檎[임금] 담은 광주리와 牛乳筩[우유통]을 들고 들어와 그 婦人[부인]께 주더이다. 婦人[부인]은 또 무어라고 소곤소곤 하더니 그 少年[소년]이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날더러,
『칼 있읍니까?』
『네 저 册床[책상] 왼편 舌盒[설합]에 있읍니다.』
『열어도 關係[관계]치 않습니까?』
『녜.』
하는 내 對答[대답]을 듣고 少年[소년]은 발소리도 없이 册床[책상] 舌盒[설합]을 열고 칼을 내어다가 林檎[임금]을 깍아 白紙[백지]위에 쪼개어 내 寢床[침상]머리에 놓으며,
『잡수세요, 목마르신데.』
하고 焦悴[초췌]한 내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보더이다. 나는 感謝[감사]하고 기쁜 맘에,
『참 感謝[감사]하올시다.』
하고 얼른 두어 쪽 집어 먹었나이다. 그 맛이여! 빼빼 마르던 가슴이 뚫리는 듯하더이다. 그때에 그대의 손에 무쪽을 받아 먹던 맛이로소이다.
알지 못하는 處女[처녀]가 異國病人[이국병인]을 爲[위]하여 精誠[정성]들여 끓인 粥[죽]을 먹고 알지 못하는 少年[소년]이 손수 발가주는 蜜柑[밀감]을 먹고 나니 몸이 좀 부드러워지는 듯하더이다. 그제야 나는 婦人[부인]더러,

『참 感謝[감사]드릴 말씀이 없읍니다. 大體[대체] 아씨는 누구시완데 外國病人[외국병인]에게 이처럼 恩惠[은혜]를 끼치십니까?』
하고 나는 不知不覺[부지불각]에 눈물을 흘렸나이다. 婦人[부인]은 少年[소년]의 어깨를 만지며,
『저는 이 이웃의 사람이올시다. 先生[선생]은 저를 모르시려니와 저는 여러번 先生[선생]을 뵈었나이다. 여러 날 出入[출입]이 없으시기로 主人[주인]에게 물은즉 病[병]으로 계시다기에 客地[객지]에 얼마나 외로우시랴 하고 제 同生[동생](少年[소년]의 어깨를 한 번 더 만지며)을 데리고 藥[약]이나 한 貼[첩] 달여 드릴까 하고 왔읍니다.』
나는 너무 感激[감격]하여 한참이나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未安[미안]하올시다마는 좀 앉으시지요.』
하여 婦人[부인]이 椅子[의자]에 앉은 뒤에 나는,
『참 이런 큰 恩惠[은혜]가 없읍니다. 平生[평생] 잊지 못할 큰 恩惠[은혜]올시다.』

婦人[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잠간 붉히며,
『千萬外[천만외] 말씀이올시다.』할 뿐.
이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精神[정신]이 아득하여지며 房[방] 안이 노랗게 되는 것만 보고는 어찌 된지 몰랐나이다. 아마 衰弱[쇠약]한 몸이 過劇[과극]한 精神的動搖[정신적동요]를 견디지 못하여 氣絶[기절]한 것이로다. 이윽고 멀리서 나는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 본즉, 곁에는 그 婦人[부인]과 少年[소년]이 있고 그 外[외]에 어떤 洋服[양복] 입은 男子[남자]가 내 팔목을 잡고 섰더이다. 一同[일동]의 눈치와 얼굴에는 驚愕[경악]한 빛이 보이더이다. 나는 이 여러 恩人[은인]을 걱정시킨 것이 더욱 未安[미안]하여 기써 웃으며,
『暫時[잠시] 昏迷[혼미]하였었읍니다. 이제는 平安[평안]하올시다.』
그제야 婦人[부인]과 少年[소년]이 웃고 내 손목을 잡은 사람도 婦人[부인]을 向[향]하여,
『二[이], 三日內[삼일내]에 낫지요.』
하고 아래로 내려가더이다. 婦人[부인]은「후 ─」하고 한숨을 쉬며,
『아까 잡수신 早飯[조반]이 滯[체]하셨는가요. 어떻게 놀랐는지 ─ 두 時間[시간]이나 되었읍니다.』
그 後[후] 아무리 辭讓[사양]하여도 三日[삼일]을 連[연]하여 晝夜[주야]로 藥[약]과 飮食[음식]을 여투어 주어 부드러운 말로 慰勞[위로]도 하더이다. 그러나 앓는 몸이요, 또 물을 勇氣[용기]도 없이 姓名[성명]이 무엇인지, 다만 이웃이라 하나 統戶數[통호수]가 얼마인지도 몰랐나이다. 너무 오래 그네를 수고시키는 것이 좋지 아니하리라하여 不得已婦人[부득이부인]의 代筆[대필]로 몇몇 親舊[친구]에게 便紙[편지]를 띄우고 이제부터 내 親舊[친구]가 올 터이니 너무 수고 말으소서, 크나 큰 恩惠[은혜]는 刻骨難忘[각골난망]하겠나이다 하여 겨우 돌려보내었나이다. 그 동안 이 두 恩人[은인]에게 받은 恩惠[은혜]는 참 헤이릴 수도 없고 形言[형언]할 수도 없나이다. 더우기 그 추운 밤에 病床[병상]에 지켜 앉아 連[연]해 젖은 手巾[수건]으로 머리를 식혀 주며 자리를 덮어 주고 甚至於[심지어] 물을 데워 아침마다 手巾[수건]으로 얼굴을 씻어 주고 少年[소년]은 册床[책상]을 整頓[정돈]하여 주며 심부름을 하여 주고 ── 마침 十二月[십이월] 二十四[이십사], 五日頃[오일경]이라 學校[학교]는 休業[휴업]이나 ── 하루 세 번 藥[약]을 달이고 먹을 것을 만들어 주는 等[등] 親同生[친동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나이다. 나는 이 두 恩人[은인]을 무엇이라 부르리이까. 아우와 누이 ── 우리 言語中[언어중]에 여기서 더 親切[친절]한 말이 없으니 이말에「가장 사랑하고 가장 恭敬[공경]하는」이라는 形容詞[형용사]를 달아 「가장 사랑하는 누이」,「가장 사랑하는 아우」라 하려 하나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살려 하나이다. 살아서 일하려 하나이다 ── 그대와 저와 세 사람을 爲[위]하여 그 세 사람을 가진 福[복] 있는 人生[인생]을 爲[위]하여 잘 살면서 잘 일하려 하나이다.
오늘은 十二月[십이월] 二十七日[이십칠일]. 부디 心身[심신]이 平安[평안]하여 게으르지 말고 正義[정의]의 勇士[용사] 될 工夫[공부]하소서.
─사랑하시는 벗

第二信[제이신][편집]

前書[전서]는 只今[지금] 渤海[발해]를 건너갈 듯하여이다. 그러나 다시 사뢸 말씀 있어 또 그적이나이다.
오늘 아침에 처음 밖에 나와 爲先[위선] 恩人[은인]의 집을 찾아보았나이다. 그러나 姓名[성명]도 모르고 通戶[통호]도 모르매 아무리 하여도 찾을 수는 없이 空然[공연]히 四隣[사린]을 휘휘 싸매다가 마침내 찾지 못하고 말았나이다 . 찾다가 찾지 못하니 더욱 마음이 焦燥[초조]하여 뒤에 人跡[인적]만 있어도 幸[행]여 그 사람인가 하여 반드시 돌아보고 돌아보면 반드시 모를 사람이러이다. 幸[행]여 길에서나 만날까 하고 아무리 注目[주목]하여 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더이다. 나는 무엇을 잃은 듯이 茫然[망연]히 돌아왔나이다. 돌아와서 그 보지 못하던 담요를 만지고 三[삼], 四日前[사일전]에 있던 光景[광경]을 그려 없는 곳에 그를 볼 양으로 철없는 애를 썼나이다.
나는 그가 섰던 자리에 서도 보고 그가 만지던 바를 만져도 보고 그가 걸어 다니던 길을 回想[회상]하여 그 方向[방향]으로 걷기도 하였나이다. 그가 우두커니 섰던 자리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나이다. 만일 空氣[공기]에 對流作用[대류작용]이 없었던들 그의 깨끗한 肺[폐]에서 나온 입김이 그냥 그 자리에 있던 온통으로 내가 들이마실 수 있었을 것이로소이다. 나는 그동안 門[문]을 열어 놓은 것을 恨[한]하나이다. 門[문]만 아니 열어 놓았던들 그의 입김과 살내가 아직 남았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남은 김이나 들여마실 양으로 한 번 더 深呼吸[심호흡]을 하였나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였나이다. 그러나 香氣[향기]로운 입김과 깨끗한 살내는 내 房[방]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全宇宙[전우주]에 퍼져서 全萬物[전만물]로 하여금 造物主[조물주]의 大傑作[대걸작]의 醇味[순미]를 맛보게 할 것이라 하였나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담요를 만지고 만지다가 담요 위에 이마를 대이고 엎더졌나이다. 내 가슴은 자주 뛰나이다. 머리가 훗훗 다나이다. 숨이 차지나이다. 나는 丁寧[정녕] 무슨 變化[변화]를 받는가 하였나이다. 「아아 이것이 사랑이로구나!」하였나이다. 그는 나의 말에 感謝[감사]를 주는 同時[동시]에 一種[일종] 不可思議[불가사의]한 불길을 던졌나이다. 그 불길을 只今[지금] 내 속에서 抵抗[저항]치 못할 勢力[세력]으로 펄펄 타나이다.
나는 朝鮮人[조선인]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듣고, 맛은 못본 朝鮮人[조선인]이로소이다. 朝鮮[조선]에 어찌 男女[남녀]가 없사오리이까마는 朝鮮男女[조선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본 일이 없나이다. 朝鮮人[조선인]의 胷中[흉중]에 어찌 愛情[애정]이 없사오리이까마는 朝鮮人[조선인]의 愛情[애정]은 두 잎도 피기 前[전]에 社會[사회]의 習慣[습관]과 道德[도덕]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 죽고 말았나이다. 朝鮮人[조선인]은 果然[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國民[국민]이로소이다. 그네는 夫婦[부부]가 될 때에 얼굴도 못 보고 이름도 못 듣던 남남끼리 다만 契約[계약]이라는 形式[형식]으로 婚姻[혼인]을 맺자 一生[일생]을 이 形式[형식]에만 束縛[속박]되어 지나는 것이로소이다. 大體[대체] 이따위 契約[계약] 結婚[결혼]은 짐승의 雌雄[자웅]을 사람의 맘대로 마주 붙임과 다름이 없을 것이로 소이다 옷을 지어 입을 . 때에는 제 맘에 드는 바탕과 빛갈에 제 맘에 드는 모양으로 지어 입거늘 ── 담뱃대 하나를 사도 여럿 中[중]에서 고르고 골라 제 맘에 드는 것을 사거늘, 하물며 一生[일생]의 伴侶[반려]를 定[정]하는 때를 當[당]하여 어찌 다만 父母[부모]의 契約[계약]이라는 形式[형식]하나로 하오리이까. 이러한 婚姻[혼인]은 오직 두 사람 意義[의의]가 있다 하나이다. 하나는 父母[부모]가 그 아들과 며느리를 노리개감으로 앞에 놓고 구경하는 것과, 하나는 돼지 장사가 하는 모양으로 새끼를 받으려 함이로소이다. 이에 우리 朝鮮男女[조선남녀]는 그 父母[부모]의 玩具[완구]와 生殖[생식]하는 機械[기계]가 되고 마는 것이로소이다. 이러므로 지아비가 그 지어미를 생각할 때에는 곧 肉慾[육욕]의 滿足[만족]과 子女[자녀]의 生産[생산]만 聯想[연상]하고 男女[남녀]가 女子[여자]를 對[대]할 때에도 곧 劣等[열등]한 獸慾[수욕]의 滿足[만족]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로소이다. 男女關係[남녀관계]의 究竟[구경]은 毋論[무론] 肉的交接[육적교접]과 生殖[생식]이로소이다. 그러나 오직 이뿐이오리이까. 다른 짐슴과 조금도 다름 없이 오직 이뿐이오리이까. 肉的交接[육적교접]과 生殖以外[생식이외]에 ─또는 以上[이상]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리이까. 어찌 그러리요. 人生[인생]은 禽獸[금수]와 달라 精神[정신]이라는 것이 있나이다. 人生[인생]은 肉體[육체]를 重[중]히 여기는 同時[동시]에 精神[정신]을 승히 여기는 義務[의무]가 있으며 肉體[육체]의 滿足[만족]을 求[구]하는 同時[동시]에 精神[정신]의 滿足[만족]을 求[구]하려는 本能[본능]이 있나이다. 그러므로 肉體的行爲[육체적행위]만이 人生行爲[인생행위]의 全體[전체]가 아니요, 精神的行爲[정신적행위]가 또한 人生行爲[인생행위]의 一半[일반]을 成[성]하나이다. 그뿐더러 人類[인류]가 文明[문명]할수록, 個人[개인]이 修養[수양]이 많을수록 精神行爲[정신행위]를 肉體行爲[육체행위]보다 더 重[중]히 여기고 따라서 精神的滿足[정신적만족]을 肉體的滿足[육체적만족]보다 더 貴[귀]히 여기는 것이로소이다. 好衣好食[호의호식]이나 滿足[만족]하기는 凡俗[범속]의 하는 바로되 天地[천지]의 美[미]와 善行[선행]의 快感[쾌감]은 오직 君子[군자]라야 能[능]히 하는 바로소이다. 이와 같이 男子關係[남자관계]도 肉交[육교]를 하여야 비로소 滿足[만족]을 얻음은 野人[야인]의 일이요, 그 容貌[용모] 擧止[거지]와 心情[심정]의 優美[우미]를 嘆賞[탄상]하며 그를 精神的[정신적]으로 사랑하기를 無上[무상]한 滿足[만족]으로 알기는 文明[문명]한 修養[수양] 많은 君子[군자]라야 能[능]히 할 것이로소이다. 아름다운 女子[여자]을 사랑한다 하면 곧 野合[야합]을 想像[상상]하고, 아름다운 少年[소년]을 사랑한다 하면 곧 醜行[추행]을 想像[상상]하는 이는 精神生活[정신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卑賤[비천]한 人格者[인격자]라 할 것이로소이이다. 외나 호박꽃만 사랑할 줄 알고 菊花[국화]나 薔薇[장미]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얼마나 賤[천]하오리이까. 그러므로 男女[남녀]의 關係[관계]는 다만 肉交[육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精神的 愛着[정신적애착]과 融合[융합]에 있다 하나이다 ── 더구나 文明[문명]한 民族[민족]에 對[대]하여 그러한가 하나이다. 男女[남녀]가 서로 肉體美[육체미]와 精神美[정신미]에 홀리어 서로 全心力[전심력]을 傾注[경주]하여 사랑함이 人類[인류]에 特有[특유]한 男女關係[남녀관계]니 이는 무슨 方便[방편]으로 即[즉] 婚姻[혼인]이라는 形式[형식]을 이룬다든가, 生殖[생식]이라는 目的[목적]을 達[달]한다든가, 肉慾[육욕]의 滿足[만족]을 求[구]하려는 目的[목적]의 方便[방편]으로 함이 아니요,「사랑」그 물건이 人生[인생]의 目的[목적]이니 마치 나고 자라고 죽음이 사람의 避[피]치 못할 天命[천명]임과 같이 男女[남녀]의 사랑도 避[피]치 못할 또한 獨立[독립]한 天命[천명]인가 하나이다. 婚姻[혼인]의 形式[형식] 같은 것은 社會[사회]의 便宜上[편의상] 制定[제정]한 規模[규모]에 지나지 못한 것 ── 即[즉] 人爲的[인위적]이어니와 사랑은 造物[조물]이 稟賦[늠부]한 天性[천성]이라 人爲[인위]는 거스릴지언정 天意[천의]야 어찌 禁違[금위]하오리이까. 毋論[무론] 사랑 없는 婚姻[혼인]은 不可[불가]하거니와 사랑이 婚姻[혼인]의 方便[방편]은 아닌 것이로소이다. 吾人[오인]의 忠孝[충효]의 念[염]과 兄友弟恭[형우제공]의 念[염]이 天性[천성]이라 거룩한 것이라 하면 男女間[남녀간] 사랑도 毋論[무론] 그와 같이 天性[천성]이라 거룩할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吾人[오인]은 決[결]코 이 本能[본능] ── 사랑의 本能[본능]을 抑制[억제]하지 아니할뿐더러 이를 自然[자연]한 (即[즉] 正當[정당]한) 方面[방면]으로 啓發[계발]시켜 人性[인성]의 完全[완전]한 發見[발견]을 期[기]할 것이로소이다. 忠孝[충효]의 念[염] 없는 이가 非人[비인]이라 하면 사랑의 念[염]없는 이도 또한 非人[비인]일지며 事實上[사실상] 人類[인류]치고 萬物[만물]이 다 가진 사라의 念[염]을 아니 가진 이가 있을 理[리]없을지나, 或[혹] 나는 없노라 壯談[장담]하는 이가 있다 하면 그는 社會[사회]의 慣習[관습]에 잡혀 自己[자기]의 本性[본성]을 抑制[억제]하거나 또는 社會[사회]에 阿謟[아첨]하기 爲[위]하여 本性[본성]을 欺罔[기망]하는 것이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人生[인생]이란 男女[남녀]를 勿論[물론]하고 一生[일생] 一次[일차]는 사랑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니 男子十七[남자십칠], 八歲[팔세] 女子[여자] 十五[십오], 六歲[육세]의 肉體[육체]의 美[미]와 心中[심중]의 苦悶[고민]은 即[즉] 사랑을 要求[요구]하는 節期[절기]를 表[표]하는 것이로소이다. 이때를 當[당]하여 그네가 正當[정당]한 사랑을 求得[구득]하면 그 二年[이년] 三年[삼년]의 사랑期[기]에 心身[심신]의 發達[발달]이 完全[완전]히 되고 男女[남녀] 兩性[양성]이 서로 理解[이해]하며 人情[인정]의 奧妙[오묘]한 理致[이치]를 깨닫나니, 孔子[공자]께서 「學詩乎[학시호]」아 하심같이 나는「學愛乎」[학애호]아 하려 하나이다. 이렇게 實利[실리]를 超絶[초절]하고 肉體[육체]를 超絶[초절]한 醇愛[순애]에 醉[취]하였다가 만일 境遇[경우]가 許[허]하거든 世上[세상]의 習慣[습관]과 法律[벌률]을 따라 婚姻[혼인]함도 可[가]하고 아니하더라도 相關[상관]없을 것이로소이다. 진실로 사랑은 人生[인생]의 一生行事[일생행사]에 매우 重要[중요]한 하나이니, 男女間[남녀간] 一生[일생]에 사랑을 지녀 보지 못함은 그 不幸[불행]함이 마치 사람으로 世上[세상]에 나서 衣食[의식]의 快樂[쾌락]을 못 보고 죽음과 같은 것이로소이다.
너무 말이 길어지나이다마는 하던 걸음이라 사랑의 實際的利益[실제적이익]에 開[개]하여 한 마디 더 하려 하나이다.
사랑의 實際的利益[실제적이익]에 세 가지 있으니, 一[일], 貞操[정조]니, 男女[남녀]가 各各[각각] 一個[일개] 異性[이성]을 全心[전심]으로 사랑하는 동안 決[결]코 다른 異性[이성]에 눈을 거는 法[법]이 없나니 男女間[남녀간] 貞操[정조] 없음은 다 사람에 對[대]한 사랑이 없는 까닭이로소다. 大抵[대저] 한 사람을 熱愛[열애]하는 동안에는 晝夜[주야]로 생각하는 것이 그 사람뿐이요, 말을 하여도 그 사람을 爲[위]하여, 일을 하여도 그 사람을 爲[위]하여 하게 되며, 내 몸이 그 사람의 一部 分[일부분]이요, 그 사람이 내 몸의 一部分[일부분]이라 내 몸과 그 사람과 合[합]하여 一體[일체]가 되거니 하여 그 사람 없이는 내 生命[생명]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내 全心全身[전심전신]을 그 사람에게 바쳤거니 어느 겨를에 남을 생각하오리이까. 古來[고래]로 貞婦[정부]를 보건대 다 그 지아 비에게 全心全身[전심전신]을 바친 者[자]라. 그렇지 아니하고는 一生[일생]의 貞操[정조]를 지키기 不能[불능]한 것이로다. 또 朝鮮人[조선인]에 왜 淫風[음풍]이 많으뇨. 더구나 男子[남자]치고 二[이], 三人[삼인] 女子[여자]와 醜關係[추관계] 없는 이가 없음이 專[전]혀 이 사랑 없는 까닭인가 하나이다.
二[이], 品性[품성]의 陶冶[도야]와 事爲心[사위심]의 奮發[분발]이니,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내 言行[언행]을 監視[감시]하는 威權[위권]은 王[왕]보다도 父師[부사]보다도 더한 것이라, 王[왕]이나 父師[부사]의 앞에서는 할 좋지 못한 일도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敢[감]히 못하며, 王[왕]이나 父師[부사]의 앞에서는 能[능]치 못할 어려운 일도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는 能[능]히 하나니, 이는 첫째 사랑하는 이에게 나의 義氣[의기]와 美質[미질]을 보여 그의 사랑을 끌기 爲[위]하여, 둘째 사랑하는 者[자]의 期望[기망]을 滿足[만족]시키기 爲[위]하여 이러함이니, 이러하는 동안 自然[자연]히 品性[품성]이 高潔[고결]하여지고 여러 가지 美質[미질]을 기르는 것이로소이다. 古來[고래]로 英雄烈士[영웅열사]가 그 愛人[애인]에게 奬勵[장려]되어 品性[품성]을 닦고 大事業[대사업]을 成就[성취]한 이가 數多[수다]하나니 愛人[애인]에게 滿足[만족]을 주기 爲[위]하여 萬難[만난]을 排[배]하고 所志[소지]을 貫徹[관철]하려는 勇氣[용기]는 實[실]로 莫大[막대]한 것이로소이다. 그대도 愛人[애인]이 있었던들 實驗[실험]에 優等首席[우등수석]을 하려고 애도 더 썼겠고 運動會[운동회] 達距離競走[달거리경주]에 一等賞[일등상]을 타려고 競走練習[경주연습]도 많이 하였을 것이로소이다.
三[삼], 여러 가지 美質[미질]을 배움이니, 첫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맛을 배우고, 사랑하는 者[자]를 爲[위]하여 獻身[헌신]하는 獻身[헌신]맛을 배우고, 易地思之[역지사지]한 同情[동정]맛을 배우고, 精神的要求[정신적요구]를 위하여 生命[생명]과 名譽[명예]와 財産[재산]까지라도 犧牲[희생]하는 犧牲[희생]맛을 배우고 精神的快樂[정신적쾌락]이라는 高尙[고상]한 快樂[쾌락]맛을 배우고…… 이밖에도 많이 있거니와 上述[상술]한 모든 美質[미질]은 修身敎科書[수신교과서]로도 不能[불능]하고 敎壇[교단]의 說敎[설교]로도 不能[불능]하고 오직 사랑으로야만 體得[체득]할 高貴[고귀]한 美質[미질]이로소이다. 人類社會[인류사회]에 모든 美德[미덕]이 거의 上述[상술]한 諸質[제질]에서 아니 나온 것이 없나니 이 意味[의미]로 보아 사랑과 民族[민족]의 隆替[융체]가 至大[지대]한 關係[관계]가 있는 가 하나이다.
우리 半島[반도]에는 사랑이 갇혔었나이다. 사랑이 갇히매 거기 附隨[부수]한 모든 貴物[귀물]이 같이 갇혔었나이다. 우리는 大聲疾呼[대성질호]하여 갇혔던 사람을 解放[해방]하사이다. 눌리고 束縛[속박]되었던 우리 精神[정신]을 봄 풀과 같이 늘이고 봄 꽃과 같이 피우게 하사이다.
어찌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男子[남자]나 女子[여자]나)을 보고 사랑 하여 못 쓰나이까. 우리는 아름다운 景致[경치]를 對[대]할 때 그것을 사랑 하지 아니하며, 아름다운 꽃을 對[대]할 때 그것을 鑑賞[감상]하고 읊조리고 讚美[찬미]하고 입맞추지 아니하나이까. 草木[초목]은 사랑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 그런 背理[배리]가 어디 있사오리이까. 毋論[무론] 肉的[육적]으로 사람을 사랑함은 社會[사회]의 秩序[질서]를 紊亂[문란]하는 것이매, 마땅히 排斥[배척]하려니와 精神的[정신적]으로 사랑하기야 왜 못하리이까. 다만 그의 양자를 胷中[흉중]에 그리고 그의 얼굴을 對[대]하고 말소리를 들고 손을 잡기를 어찌 禁[금]하오리이까. 제 兄弟[형제]와 제 姉妹[자매]인들이 이 모양으로 사랑함이 무엇이 惡[악]하오리이까. 이러한 사랑에 肉慾[육욕]이 짝하는 境遇[경우]도 없다고 못할지나, 人心[인심]에는 自己[자기]가 精神上[정신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對[대]하여 肉的滿足[육적만족]을 얻으려 함이 罪悚[죄송]한 줄 아는 觀念[관념]이 있으므로 결코 危險[위험]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지 아니하나이다.
大體[대체] 社會[사회]의 乾燥無味[건조무미]하기 우리 나라 같은 데가 다시 어디 있사오리까. 그리고 品性[품성]의 卑劣[비열]하고 情[정]의 醜惡[추악]함이 우리보다 더한 이가 어디 있사오리이까. 그리고 이 原因[원인]은 敎育[교육]의 不良[불량], 社會制度[사회제도]의 不完全[불완전] ─ 여러 가지 있을지나 그 中[중]에 가장 重要[중요]한 原因[원인]은 男女[남녀]의 絶緣[절연]인가 하나이다. 생각하소서. 一家庭內[일가정내]에서도 男女[남녀]의 親密[친밀]한 交際[교제]를 不許[불허]하며 甚至於[심지어] 夫婦 間[부부간]에도 肉交[육교]할 때 外[외]에 接近[접근]치 못하는 수가 많으니, 自然[자연]히 男女[남녀]란 肉交[육교]하기 爲[위]하여만 接近[접근]하는 줄로 더럽게 생각하는 것이로다. 이렇게 人生和樂[인생화락]의 根源[근원]인 男女[남녀]의 交際[교제]가 없으매, 社會[사회]는 朔風[삭풍] 불어 지나간 曠野[광야]같이 되어 快樂[쾌락]이라든가 忘我[망아]의 웃음을 볼수 없고 그저 욱적욱적 小小[소소]한 實利[실리]만 다투게 되니 社會[사회]는 恒常[항상] 서리친 秋景[추경]이라, 이 中[중]에 사는 人生[인생]의 情境[정경]이 참 可憐[가련]도 하거니와 이 中[중]에서 쌓은 性格[성격]이 그 얼마나 粗惡無味[조악무미]하리이까. 一家族[일가족]은 勿論[물론]이어니와 親[친]히 性格[성격]을 알아 信用[신용]할 만한 男女[남녀]가 正當[정당]하게 交際[교제]함은 人生[인생]을 春風花香[춘풍화향]의 快樂裏[쾌락리]에 둘뿐더러 吾人[오인]의 精神[정신]에 生氣[생기]와 强[강]한 彈力[탄력]을 줄 줄을 믿나이다.
이 意味[의미]로 보아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나 또는 只今[지금] 내 새 恩人[은인]을 사랑하는 것이 조금도 非難[비난]할 餘地[여지]가 없을뿐 더러 나는 人生[인생]이 되어 人生[인생] 노릇을 함인가 하나이다.
나는 한참이나 담요에 엎디었다가 하염없이 다시 고개를 들고 册床[책상]을 對[대]하여 보다 놓았던 小說[소설]을 읽으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눈이 册張[책장]에 붙지 아니하여 아무리 읽으려 하여도 文字[문자]만 하나씩 둘씩 보일 뿐이요, 다만 한 줄도 連絡[연락]한 뜻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부질 없이 두어 페이지를 벌덕벌덕 뒤다가 휙 집어 내어던지고 椅子[의자]에서 일어나 뒤숭숭한 머리를 숙이고 왔다갔다하였나이다. 아무리 하여도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하여 견딜 수 없어 그대에게 이 便紙[편지]를 쓸 양으로 다시 册床[책상]을 對[대]하였나이다. 書簡用箋[서간용전]을 내려고 册床舌盒[책상설합]을 열어 본즉 어떤 書柬[서간] 한 封[봉]이 눈에 띄었나이다. 西洋封套[서양봉투]에 다만「林輔衡氏」[임보형씨]라 썼을 뿐이요, 住所[주소]도 없고 發信人[발신인]도 없나이다. 나는 깜짝 놀래었나이다. 이 어떤 書柬[서간]일까, 뉘 것일까? 그 恩人[은인] ── 그 恩人[은인]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即[즉] 나를 사랑하는 생각으로)써 둔 것 ── 이라 하는 생각이 一種[일종] 形言[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부끄러움 섞인 感情[감정]과 함께 일어나나이다. 나는 이 생각이 참일 것을 믿으려 하였나이다. 나는 그글 속에「사랑하는 내 輔衡[보형]이여, 나는 그대의 病[병]을 看護[간호]하 다가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 사랑하여 주소서」하는 뜻이 있기를 바라고 또 있다고 믿으려 하였나이다. 마치 그 말이 엑스 光線[광선] 모양 으로 封套[봉투]를 꿰뚫고 내 뜨거운 머리에 直射[직사]하는 듯하더이다.
내 가슴은 자주 치고 내 숨은 차더이다. 나는 그 書柬[서간]을 두 손으로 들고 茫然[망연]히 앉았었나이다. 그러나 나는 얼른 뜯기를 躊躇[주저]하였나이다. 대개 只今[지금] 내가 想像[상상]하는 바와 다를까보아 두려워함이로소이다. 만일 이것이 내 想像[상상]한 바와 같이 그의 書柬[서간]이 아니면 ── 或[혹] 그의 書柬[서간]이라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면 그때 失望[실망]이 얼마나 할까, 그때 부끄러움이 얼마나 할까. 차라리 이 書柬[서간]을 뜯지 않고 그냥 두고 내 想像[상상]한 바를 참으로 믿고 지낼까 하였나이다. 그러나 마침내 아니 뜯지 못하였나이다. 뜯은 結果[결과]는 어떠하였사오리이까. 내가 기뻐 뛰었사오리이까, 落望[낙망]하여 울었사오리이까. 아니로소이다. 이도 저도 아니요,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래었나이다.
무엇이 나오려는가 하는 希望[희망]도 많거니와 不安[불안]도 많은 맘으로 皮封[피봉]을 떼니 아름다운 鐵筆[철필] 글씨로 하였으되,
『나는 金一蓮[김일련]이로소이다. 못 뵈온지 六年[육년]에 아마 나를 잊었으리이다. 나는 그대가 이곳 계신 줄을 알고 또 그대가 病[병]든 줄을 알고 暫時[잠시] 그대를 訪問[방문]하였나이다. 내가 淸人[청인]인 듯이 그대를 속인 것을 容恕[용서]하소서. 그대가 熱[열]로 昏睡[혼수]하는 동안에 金一蓮[김일련]은 拜[배]』
라 하였더이다 . 나는 이 書柬[서간]을 펴 든 대로 한참이나 멍멍하니 앉았었나이다. 金一蓮[김일련]! 金一蓮[김일련]! 옳다 듣고 보니, 그 얼굴이 果然[과연] 金一蓮[김일련]이로다. 그 좁으레한 얼굴, 눈꼬리가 잠간 처진 맑고 多情[다정]스러운 눈, 좀 숙는 듯한 머리와 말할 때에 살작 얼굴 붉히는 양하며 그 中[중]에도 귀 밑에 있는 조그마한 허물 ── 果然[과연] 金一蓮[김일련]이러이다. 萬一[만일] 그가 上海[상해]에 있는 줄만 알았더라도 내가 보고 모르는지 아니하였으리이다. 아아 그가 金一蓮[김일련]이런가? 내가 그대에게 對[대]하여서는 아무러한 秘密[비밀]도 없었나이다. 내 胷底[흉저] 속속 깊이 있는 秘密[비밀]까지도 그대에게는 말하면서도 金一蓮[김일련]에 關[관]한 일만은 그대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말 아니하고 참을 수 없사오며 또 對面[대면]하여 말하기는 수줍기도 하지마는 이렇게 멀리 떠나서는 말하기도 얼마큼 便[편]하여이다.
내가 일찍 東京[동경]서 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에 있을 제 같은 學校[학교]에 다니는 親舊[친구] 하나가 있었나이다. 그는 나보다 二年長[이년장]이로되 學級[학급]도 三年[삼년]이나 떨어지고 맘과 行動[행동]과 容貌[용모]가 도리어 나보다 二[이], 三年[삼년]쯤 떨어진 듯, 그러나 그와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愛情[애정]이 깊었나이다. 나는 그에게 英語[영어]도 가르치고 詩[시]나 小說[소설]도 읽어 주고 散步[산보]할 때에도 반드시 손을 꼭 잡고 二[이], 三日[삼일]을 作別[작별]하게 되더라도 서로 떠나기를 아껴 西洋式[서양식]으로 꽉 쓸어안고 입을 맞추고 하였나이다. 그와 나와 別[별]로 主義[주의]의 共通[공통]이라든가, 特別[특별]히 親[친]하여질 格別[격별]한 機會[기회]도 없었건마는 다만 彼此[피차]에 까닭도 모르게 서로 兄弟[형제]같이 愛人[애인]같이 사귀게 된 것이로소이다.
하루는 그와 함께 어디 놀러 갔던 길에 어느 女學校[여학교] 門前[문전]에 다다랐나이다. 나는 前[전]부터 그 學校[학교]에 金一鴻君[금일홍군]의 妺氏[말씨]가 留學[유학]하는 줄을 알았는 故[고]로 그가 妺氏[말씨]를 訪問[방문]하기 爲[위]하여 나는 먼저 돌아오기를 請[청]하였나이다. 그러나 그는「그대도 내 누이를 알아 둠이 좋을지라」하여 紹介[소개]하려는 뜻으로 나를 데리고 그 寄宿舍[기숙사] 應接室[응접실]에 들어가 더이다. 거기서 暫間[잠간] 기다린즉 門[문]이 방싯 열리며 單純[단순]한 黑色[흑색] 洋服[양복]에 漆[칠] 같은 머리를 한 편 옆을 갈라 뒤로 치렁치렁 땋아 늘인 處女[처녀]가 방금 沐浴[목욕]을 하였는지 紅暈[홍훈]이 도는 빛나는 얼굴로 들어오더이다. 一鴻君[일홍군]은 일어나 나를 가리키며,
『이이는 早稻田[조도전] 政治科[정치과] 三學年[삼학년]에 있는 林輔衡[임보형]인데, 나와는 兄弟[형제]와 같은 사이니, 或[혹] 以後[이후]에라도 잊지 말고…….』하고 나를 紹介[소개]하더이다. 나도 일어나 慇懃[은근]히 절하고 그도 答禮[답례]하더이다. 그러고는 限[한] 五分間[오분간] 말없이 마주앉았다가 함께 宿所[숙소]에 돌아왔나이다. 그後[후] 一鴻君[일홍군]이 感氣[감기]로 數日[수일] 辛苦[신고]할 때에 그 妺氏[말씨]에게서 書籍[서적]을 몇 가지 사 보내라는 寄別[기별]이 왔더이다. 學期初[학기초]이라 時日[시일]이 急[급]한 모양인 故[고]로 一鴻君[일홍군]의 請[청]대로 내가 代身[대신] 가기로 하였나이다. 나는 이때에 아직 一蓮[일연] 아씨에게 對[대]하여 別[별]로 想思[상사]의 情[정]도 없었나이다. 다만 아름다운 깨끗한 處子[처자]요, 親舊[친구]의 누이라 하여 情[정]답게 여겼을 뿐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處子[처자]를 爲[위]하여 힘쓰기를 매우 기뻐하기는 하였나이다. 그래 곧 神保町册肆[신보정책사]에 가서 所請[소청]한 書籍[서적]을 사가지고 곧 나를 寄宿舍[기숙사]에 찾아가 前[전]과 같이 應接室[응접실]에서 그 册[책]을 傳[전]하고 一鴻君[일홍군]이 感氣[감기]로 辛苦[신고]하는 말과 그래서 내가 代身[대신]왔노라는 뜻을 告[고]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自然[자연]히 가슴이 설레고 말이 訥[눌]함을 깨달았나이다.
저의 얼굴이 빨갛게 됨을 슬쩍 볼 때에 나의 얼굴도 저러하려니 하여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였나이다. 그는 겨우 가느나마 快活[쾌활]한 목소리로,
『奔走[분주]하신데 수고하셨읍니다.』
할 뿐이러이다.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었나이다. 그도 할 말도 없고 수줍기만 하여 고개를 숙이고 册[책]싸개만 凝視[응시]하더이다.
그제야 나는 어서 가야 될 사람인 줄을 알고,
『저는 가겠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門[문]밖에 나섰나이다. 그도 門[문]을 열고,
『感謝[감사]하올시다. 奔走[분주]하신데.』
하더이다. 나는 速步[속보]로 四[사], 五步[오보]를 大門[대문]을 向[향]하여 나가다가 不意[불의]에 뒤를 휙 돌아보았나이다. 幻覺[환각]인지는 모르나 琉璃窓[유리창]으로 그의 얼굴이 번듯 보이는 듯하더이다. 나는 다시 부끄러운 맘이 생겨 더한 速步[속보]로 大門[대문]을 나서서 冷靜[냉정]한 모양으로 또 四[사], 五步[오보]를 나왔나이다. 그러나 自然[자연]히 몸이 뒤로 끌리는 듯하여 차마 발을 옮기지 못하고 四[사], 五次[오차]나 머뭇머뭇 하였나이다. 狂亂怒濤[광란노도]가 서두는 듯한 가슴을 가지고 電車[전차]를 탔나이다. 宿所[숙소]에 돌아와 一鴻君[일홍군]에게 前後始末[전후시말]을 이야기할 제도 아직 맘이 가라앉지 못하여 一鴻君[일홍군]이 有心[유심]히 나를 보는 듯하여 얼른 고개를 돌렸나이다. 그러고 그날 하루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맘만 散亂[산란]하여 지내고 그 二[이], 三日[삼일]이 지나도록 이 風浪[풍랑]이 자지 아니하더이다. 그 후부터는 하루에 몇 번씩 그를 생각지 아니한 적이 없었나이다.
하루는 一鴻君[일홍군]이 어디 가고 나 혼자 宿所[숙소]에 있을 제 如前[여전]히 그 생각으로 心緖[심서]가 定[정]치 못하여 하다가 幸[행]여나 그의 글씨나 볼 양으로 一鴻君[일홍군]의 册床[책상] 舌盒[설합]을 열었나이다. 그 속에는 그에게서 온 書柬[서간]이 있는 줄을 알았으므로 葉書[엽서]와 封書[봉서]를 몇 장 뒤적뒤적하다가 다른 舌盒[설합]을 열었나이다. 거기서 나는 그와 다른 두 사람이 박힌 中板寫眞[중판사진] 한 장을 얻었나이다. 나는 가슴이 뜨끔하면서 그 寫眞[사진]을 두 손으로 들었나이다. 그 寫眞[사진]에 박힌 모양은 꼭 日前[일전] 册[책] 가지고 갔을 때 모양과 같더이다. 한 편을 갈라 넘긴 머리하며 방그레 웃는 態度[태도]하며, 한 손을 그 동무의 어깨에 얹고 고개를 잠간 기울여 그 동무의 걸앉은 椅子[의자]에 힘없는 듯 기대어 섰는 양이 참 美妙[미묘]한 藝術品[예술품]이러이다. 나는 그때 寄宿舍[기숙사] 應接室[응접실]에서 그를 對[대]하던 것과 같은 感情[감정]으로 한참이나 그 寫眞[사진]을 보았나이다. 그 방그레 웃는 눈이 마치 나물나물 더 웃으려는 듯하며 살짝 마주 붙인 입술이 今時[금시]에 살짝 열려 하얀 이빨이 드러나며 琅琅[낭랑]한 웃음소리가 나올 듯. 두 귀밑 으로 늘어진 몇 줄기 머리카락이 그 부드럽고 香氣[향기]로운 콧김에 하느 적하느적 날리는 듯하더이다. 아아 이 가슴 속에는 只今[지금] 무슨 생각을 품었는고. 내가 그를 보니 그도 나를 물끄러미 보는 듯, 그의 그림은 只今[지금] 나를 向[향]하여 방그레 웃는다. 그의 가슴 속에는 日光[일광]이 차고 春風[춘풍]이 차고 詩[시]가 차고 美[미]와 사랑과 溫情[온정]이 찼도다. 이에 외롭고 싸늘하게 식은 靑年[청년]은 그 흘러 넘치는 기쁨과 美[미]와 사랑과 溫情[온정]의 一滴[일적]을 얻어 마시려고 무릎을 꿇고 두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그 앞에 엎더졌도다. 그가 한 방울 피를 흘린다사 무슨 자리가 아니 날 모양으로 그가 가슴에 가득찬 사랑의 一滴[일적]을 흘린다사 무슨 자리가 나랴. 뜨거운 沙漠[사막]길에 먼지 먹고 목마른 사람이 서늘한 샘물을 보고 一掬水[일국수]를 求[구]할 때 그 우물을 지키는 이가 이를 拒絶[거절]한다 하면, 너무 慘酷[참혹]한 일이 아니오리이까.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 寫眞[사진]을 向[향]하여 懇請[간청]하더라도 그는 들은 체만체 如前[여전]히 방그레 웃고 나를 내려다볼 뿐이로소이다. 그가 마치 「내게 사랑이 있기는 있으나 내가 주고 싶어 줄 것이 아니라, 주지 아니치 못하여 주는 것이니 , 네가 나로 하여금 네게 주지 아니치 못하게 할 能力[능력]이 있고사 이 단샘을 마시리라」하는 듯하더이다. 나는 이윽고 寫眞[사진]을 보다가 마침내 情火[정화]를 이기지 못하여 그 寫眞[사진]에 내얼굴을 닿이고 그 입에 熱烈[열렬]하게 입을 맞추고 그 동무의 어깨위에 놓은 손에 내 손을 힘껏 대었나이다. 나는 狂人[광인]같이 그 寫眞[사진]을 품에 품기도 하고, 뺨에 닿이기도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하고, 뺨도 대고 키스도 하였나이다. 내 얼굴은 水蒸氣[수증기]가 피어오도록 熱[열]하고 숨소리는 마치 全速力[전속력]으로 다름질한 사람 같더이다. 나는 한 時間[시간]이나 이러다가 大門[대문] 열리는 소리에 놀래어 그 寫眞[사진]을 처음 있던 곳에 집어넣고 얼른 일어나 그날 新聞[신문]을 보는 체하였나이다.
그 後[후] 얼마 동안을 苦悶中[고민중]으로 지내다가 나는 마침내 내 心情[심정]을 書柬[서간]으로 그에게 알리려 하였나이다. 어떤 날밤 남들이 다 잠든 열 두 時[시]에 일어나 불일듯하는 생각으로 이러한 書柬[서간]을 썼나이다.
『사랑하는 누이여, 내가 이 말씀 드림을 容恕[용서]하소서. 나는 외로운 사람이로소이다. 父母[부모]도 없고 同生[동생]도 없고 넓은 天下[천하]에 오직 한 몸이로소이다. 나는 至今[지금]토록 일찍 누구를 사랑하여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사랑함을 받은 적도 없나이다. 사랑이라는 따뜻한 春風[춘풍] 속에 자라날 나의 靈[영]은 至今[지금]껏 朔風寒雪[삭풍한설] 속에 얼어 지내었나이다. 나는 나의 靈[영]이 그러한 오랜 겨울에 아주 말라 죽지 아니한 것을 異常[이상]히 여기나이다. 그러나 以後[이후]도 春風[춘풍]을 만나지 못하면 可憐[가련]한 이 靈[영]은 아주 말라 죽고야 말 것이로소이다. 그 동안 봄이 몇 번이나 지났으리이까마는 꽃과 사랑을 실은 東君[동군]의 수레는 늘 나를 찾지 아니하고 말았나이다. 아아 이 어린 靈[영]이 한 방울 사랑의 샘물을 얻지 못하여 아주 말라 죽는다 하면 그도 불쌍한 일이 아니오리까. 나는 猥濫[외람]히 그대에게서 春風[춘풍]을 求[구]함이 아니나 그대의 胷中[흉중]에 사무친 사랑의 一滴甘泉[일적감천]이 能[능]히 말라 죽어가는 나의 靈[영]을 살릴 것이로소이다. 그대여,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要求[요구]하는 바를 誤解[오해]하지 말으소서. 내가 장난으로 또 凶惡[흉악]한 맘으로 이러한 말을 한다고 말으소서. 내가 그대에게 要求[요구]하는 바는 오직 하나 ── 아주 쉬운 하나이니, 即[즉]「輔衡[보형]아 내 너를 사랑하노라, 누이가 오라비에게 하는 그대로」한 마디만 그만이로소이다. 만일 그대가 이 한 마디만 주시면 나는 그를 다시 護身符[호신부]로 삼아 一生[일생]을 그를 依支[의지]하고 살며 活動[활동]할 것이로소이다. 그 한 마디가 나의 財産[재산]도 되고 精力[정력]도 되고 勇氣[용기]도 되고 ── 아니, 나의 生命[생명]이 될 것이로소이다. 나는 決[결]코 그대를 만나보기를 要求[요구] 아니하리이다. 도리어 만나보지 아니하기를 要求[요구]하리이다. 대개 歲月[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그대는 늙기도 하오리이다. 心身[심신]에 여러 가지 變化[변화]도 생기리이다. 決[결]코 그런 일이 있을 理[리]도 없거니와 或[혹] 그대는 惡人[악인]이 되고 病身[병신]이 되고 罪人[죄인]이 된다 하더라도 내 記憶[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는 永遠[영원]히 열 일곱 살 되는 아름답고 淸淨[청정]한 處女[처녀]일 것이로소이다. 後日[후일] 내가 老衰[노쇠]한 老人[노인]이 되고 그대가 曾祖母[증조모]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또는 그대가 이미 죽어 그 아름답던 얼굴과 몸이 다 썩어진 뒤에라도 내 記憶[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는 永遠[영원]히 그處女[처녀]일 것이로소이다. 그리하고 그대의「내 너를 사랑한다」한마디는 永遠[영원]히 希望[희망]과 歡樂[환락]과 熱情[열정]을 나에게 줄 것이로소이다. 이러므로 나는 決[결]코 그대를 다시 對[대]하기를 願[원]하지 아니 하고 다만 그대의 그「한 마디」만 바라나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胷中[흉중]에 찬 사랑의 一滴[일적]을 이 매마른 목에 떨어뜨려 죽어가는 이 靈[영]을 살려 주시면 그 靈[영]이 자라서 將次[장차] 무엇이 될는지 어찌 아오리이까. 只今[지금]은 夜半[야반]이로소이다. 冬至[동지] 寒風[한풍]이 萬物[만물]을 흔들어 草木[초목]과 家屋[가옥]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發[발]하나이다. 이러한 中[중]에 발가벗은 어린 靈[영]은 한 줄기 따뜻한 바람을 바라고 구름 위에 앉으신 天使[천사]에게 엎디어 懇求[간구]하는 바로소이다.』
이 편지를 써 놓고 나는 再三[재삼] 생각하였나이다. 이것이 罪[죄]가 아닐까. 나는 벌써 婚姻[혼인]한 몸이라 다른 女子[여자]를 사랑함이 罪[죄]가 아닐까. 내 心中[심중]에서는 或[혹]은 罪[죄]라 하고 或[혹]은 罪[죄]가 아니라 自然[자연]이라 하나이다. 내가 婚姻[혼인]한 것은 내가 함이 아니요, 나는 男女[남녀]가 무엇이며 婚姻[혼인]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前[전]에 父母[부모]가 任意[임의]로 契約[계약]을 맺고 社會[사회]가 그를 承認[승인]하였을 뿐이니, 그 結婚行爲[결혼행위]에는 내 自由意思[자유의사]는 一分[일분]도 들지 아니한 것이요. 다만 나의 幼弱[유악]함을 利用[이용]하여 第三者[제삼자]가 强制[강제]로 行[행]하게 한 것이니, 法律上[법률상]으로 보는 지 倫理上[윤리상]으로 보든지, 내가 이 行爲[행위]에 對[대]하여 아무 責任[책임]이 없을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 契約的行爲[계약적행위]가 내 意思[의사]에 適合[적합]한 줄로 여기는 時[시]는 그 行爲[행위]를 是認[시인]함도 任意[임의]여니와 그것이 나에게 不利益[불이익]한 줄을 깨달을진댄 그 契約[계약]을 否認[부인]함도 自由[자유]라 하였나이다. 나와 내 아내는 조금도 우리의 夫婦契約[부부계약]의 拘束[구속]을 받을 理[리]가 없을 것이라, 다만 父母[부모]의 意思[의사]를 尊重[존중]하고 社會[사회]의 秩序[질서]를 근심하는 好意[호의]로 그 契約계약] ── 내 人格[인격]을 蹂躪[유린]하고 侮辱[모욕]한 그 契約[계약]을 눈물로써 黙認[묵인]할 따름이어니와 내가 精神的[정신적]으로 다른 異性[이성]을 사랑하여 蹂躪[유린]된 權利[권리]의 一部[일부]를 主張[주장]하고 掠奪[약탈]된 享樂[향락]의 一部[일부]를 恢復[회복]함은 堂堂[당당]한 吾人[오인]의 權利[권리]인가 하나이다. 이 理由[이유]로 나는 그를 사랑함이요 ── 더구나 누이와 같이 사랑함이요 ── 또 그에게서 그와 같은 사랑을 받으려 함이 決[결]코 不義[불의]가 아니라고 斷定[단정]하였나이다.
이튿날 學校[학교]에 가는 길에 書柬[서간]을 投凾[투함]하려 하였으나 무엇인지 므를 생각에 制御[제어]되어 하지 못하고 그날에 十餘次[십여차], 그 後[후] 三日間[삼일간]에 數十餘次[수십여차]를 넣으려다는 말고 넣으 려다는 말고 하여 그 皮封[피봉]이 내 포키트 속에서 닳아지게 되었다가, 한 번 모든 名譽[명예]와 廉恥[염치]를 단번에 賭[도]하는 생각으로 마침내 어느 郵便凾[우편함]에 그것을 넣고 한참이나 그 郵便凾[우편함]을 보고 섰었나이다. 마치 무슨 絶大[절대]한 所得[소득]을 바라고 큰 冒險[모험]을 할 때와 같은 웃음이 내 얼굴에 떴다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三日[삼일]만에 學校[학교]로서 돌아오니, 案頭[안두]에 一封書[일봉서]가 놓였더이다. 내 가슴에는 곧 風浪[풍랑]이 일었나이다. 나는 그 글씨를 보았나이다 ── 果然[과연] 그의 글씨로소이다. 나는 그 片紙[편지]를 집어 포키트에 넣고 선 자리로 발을 돌려 大久保[대구보] 벌판으로 나아갔나이다. 집에서 뜯어 보기는 남이 볼 念慮[염려]도 있고 또 이러한 글을 房[방]안에서 보기는 不適當[부적당]한 듯하여 ── 깨끗하고 넓은 自然[자연] 속, 맑은 하늘과 빛나는 太陽[태양] 아래서 보는 것이 適當[적당]하리라 하여 그러함이로소이다. 나는 내 발이 땅에 닿는지 마는 지도 모르면서 大久保[대구보] 벌판에 나섰나이다. 겨울 날이 뉘엿뉘엿 넘어 가고 演習[연습] 갔던 騎兵[기병]들이 疲困[피곤]한 듯이 돌아오더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맘 속에 數千[수천] 가지 數萬[수만] 가지 想像[상상]을 그리면서 方向[방향] 없이 마른 들판으로 向[향]하였나이다. 이 片紙[편지] 속에 무슨 말이 있을는가 ── 나는「사랑하나이다 오라비여」하였기를 바라고 또 그렇기를 믿으려 하였나이다. 나는 그 片紙[편지]를 내어 皮封[피봉]을 보았나이다. 그리하고 그가 내 片紙[편지]를 받았을 때의 그의 모양을 想像[상상]하였나이다. 爲先[위선] 보지 못하던 글씨에 놀래어 한참을 읽어 보다가 마침내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훗훗했으려니, 그 글을 두 번 세번 곱 읽었으려니, 이 世上[세상]에 女子[여자]로 태어난 後[후] 첫 經驗[경험]을 하였으려니, 그리고 心緖[심서]가 散亂[산란]하여 그 片紙[편지]를 구겨 쥐고 한참이나 멍멍하니 앉았었으려니, 그러다가 一邊[일변] 기쁘 기도 부끄럽기도 하여 곧 내 모양을 想像[상상]하며 내가 自己[자기]를 그리워하는 모양으로 自己[자기]도 나를 그리워하였으려니, 그러고 곧 이 回答[회답]을 썼으렷다, 써가지고 넣을까 말까 躊躇[주저]하다가 오늘에야 부쳤으렷다, 그러고 只今[지금]도 나를 생각하며 내가 이 片紙[편지] 읽는 光景[광경]을 想像[상상]하고 있으렷다. 어제까지 어린아이같이 平穩[평온]하던 맘이 오늘부터는 異常[이상]하게 설레려는. 아무려나 나는 메마르던 목을 축이게 되었다, 나는 사랑의 단맛을 보고 生命[생명]의 快樂[쾌락]을 보게 되었다, 말라 가던 나의 靈[영]은 甘泉[감천]에 젖어 잎 피고 꽃 피게 되었다 하면서 풀판에 펄썩 주저앉아 그 皮封[피봉]을 떼고도 얼른 그 속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躊躇[주저]하며 想像[상상]하다가 마침내 속을 뽑았나이다. 아아 그 속에서 무엇이 나왔사오리이까.
나는 激怒[격노]하였나이다. 「흑」하고 소리를 치고 벌떡 일어나며 그 片紙[편지]를 조각조각 가루가 되도록 찢어버렸나이다. 그러고도 不足[부족]하여 그것에 침을 뱉고 그것을 발로 지르밟았나이다. 그러고 方向[방향]없이 벌판으로 彷徨[방황]하며 그 侮辱[모욕]받은 羞恥[수치]와 이에 對[대]한 憤怒[분노]를 참지 못하여 혼자 주먹을 부르쥐고 이를 갈고 발을 구르며「흑」,「흑」소리를 連發[연발]하였나이다. 當場[당장] 그를 칼로 푹찔러 죽이고도 싶으고 내 목숨을 끊어버리고도 싶으고…이 모양으로 거의 한 時間[시간]이나 돌아다니다가 어스름에야 얼마큼 맘을 鎭定[진정]하고 돌아왔나이다. 돌아와 본즉 一鴻君[일홍군]은 벌써 저녁을 먹고 불을 쪼이며 담배를 피우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有心[유심]히 내 얼굴을 쳐다보더이다. 그에게 對[대]한 憤怒[분노]와 羞恥[수치]는 一鴻君[일홍군]에게 까지 옮더이다.
이튿날 나는 感氣[감기]라는 핑계로 學校[학교]를 쉬었나이다. 어제는 다만 一時的[일시적]으로 激怒[격노]만 하였거니와 오늘은 羞恥[수치]와 悲哀[비애]의 念[염]만 가슴에 가득하여 그 안타까움이 비길 데 없더이다. 나는 베개 위에 머리를 갈며 이불을 차 던지고 입술을 물어뜯었나이다. 이제 무슨 面目[면목]으로 世上[세상]을 보며 무슨 希望[희망]으로 世上[세상]에 살랴. 一鴻君[일홍군]이 만일 이 일을 알면 그 좁은 속에, 그 어린 속에, 얼마나 나를 嘲弄[조롱]하랴. 아아 나는 마침내 사랑의 맛을 못 볼 사람인가. 언제까지 孤獨[고독]하고 冷寂[냉적]한 生活[생활]을 할 사람인가. 나는 어찌하여 따뜻한 손을 못 쥐어 보고, 사랑을 말을 못 들어 보고 熱烈[열렬]하고 자릿자릿한 抱擁[포옹]을 못하여 보는고. 사람이 원망되고 世上[세상]이 원망되고 내 生命[생명]이 원망되어 내 손으로 내 머리털을 몇 번이나 쥐어뜯었사오리이까. 그러다가 오냐, 내가 男子[남자]가 아니다, 一開兒 女子[일개아여자]로 말미암아 이것이 무슨 꼴인고 하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決心[결심]하려 하나 그것은 제가 저를 속임이러이다. 그의 모양은 如前[여전]히 나의 가슴을 밟고 서서 방그레하는 모양으로 나를 支配[지배]하더이다. 나는 하염없이 天井[천정]을 바라보고 누웠나이다.
나는 一封書[일봉서]를 받았나이다. 그 글에 하였으되
『사랑하는 이여, 어제 지은 罪[죄]는 容恕[용서]하시옵소서. 그대가 그처럼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이 몸과 맘을 그대에게 바치나이다. 暫間[잠간] 여쭐 말씀 있사오니, 午後[오후] 四時[사시]쯤 하여 日比谷公園[일비곡공원] 噴水池[분수지] 가에 오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글을 받은 나는 미친 듯하였나이다. 곧 日比谷[일비곡]으로 달려갔나이다. 이제야 살았구나, 十九年[십구년] 겨울 世界[세계]에 봄이 왔구나 하면서.
夕陽[석양]이 鶴噴水[학분수]를 비치어 五色[오색]이 玲瓏[영롱]한 무지개를 세울 제 나는 藤棚下[등붕하] 걸상에 걸앉아 紫煙生[자연생]하는 噴水[분수]를 보면서 여러 가지 未來[미래]의 空想[공상]을 그렸나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로다. 슬픈 사람이 아니요, 不幸[불행]한 사람이 아니로다. 宇宙[우주]의 美[미]와 享樂[향락]은 내 一身[일신]에 集中[집중]하였도다.
只今[지금] 내 身體[신체]를 組織[조직]한 모든 細胞[세포]는 기쁨과 滿足[만족]에 뛰며 소리하고, 熱[열]한 血液[혈액]은 律呂[율려] 맞추어 循環[순환]하는도다. 내 얼굴이 夕陽[석양]에 빛남이여 天國[천국]의 樂[낙]을 맛봄이요, 내 靈[영]이 춤을 추고 노래함이여 砂漠[사막]길에 오아시스를 얻음이로다. 萬物[만물]이 이제야 生命[생명]을 얻었고 人界[인계]가 이제야 웃음을 보이도다 하였나이다. 果然[과연] 아까까지도 萬物[만물]이 모두 죽었더니 저 天使[천사]의 口號[구호]한 마디에 一齊[일제]히 蘇生[소생]하여 뛰고 즐기도소이다. 이따금 電車[전차]와 自動車[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릴 뿐이요, 公園內[공원내]는 至極[지극]히 고요하여이다. 樹林[수림]속 瓦斯燈[와사등]은 어느새 반작반작 稀微[희미]한 빛을 發[발]하나이다. 이때에 噴水池[분수지] 저편가으로 쑥 나서는 이가 누구이리까. 그로소이다, 아아 그로소이다. 그는 只今[지금] 내 곁에 섰나이다. 내 눈과 그 눈은 같이 저 噴水[분수]를 보나이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절하였나이다. 그의 빨간 얼굴에는 夕陽[석양]이 反照[반조]하여 마치 타는 듯 하더이다. 내 가슴이 자주 뛰는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는 듯,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어떤 行動[행동]을 할 것인지 全[전]혀 모르고 우두커니 噴水[분수]만 보고 섰었나이다. 하다가 겨우 精神[정신]을 차려,
『제가 그 따윗 片紙[편지]를 드린 것을 얼마나 괘씸히 보셨읍니까. 버릇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도 한참이나 머뭇머뭇하더니 겨우 눈을 들어 暫間[잠간] 나를 보며,
『저는 그 편지를 받자 한끝 기쁘면서도 한끝 무서운 생각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것이 罪[죄]인가보다 하는 생각으로 도로 보내었읍니다. 그러나 도로 보내고 다시 생각한즉 어찌해 도로 보낸 것이 罪[죄]도 같이 또 알 수 없는 힘이 제 등을 밀어…….』
하고는 말이 아니 나오더이다. 얼마 沈黙[침묵]하였다가,
『제가 先生[선생]의 착하심을 믿으므로 설마 惡[악]에 끌어 넣지는 아니 하시려니 하고요.』
나는 다시 내 뜻을 말하였나이다 ── 나는 그에게 다만,
『오라비여 사랑하노라.』
한 마디면 滿足[만족]한다는 뜻과 決[결]코 그를 다시 對面[대면]하고자 아니하는 뜻을 말하였나이다. 아직 어린 그는 毋論[무론] 그 意味[의미]를 十分[십분] 解得[해득]할 수는 없을지나 그 맘 속에 神奇[신기]한 變動[변동] ── 아직 經驗[경험]하여 보지 못한 사랑의 意識[의식]이 생긴 것도 毋論[무론]이로소이다. 그러나 이 밖에 彼此[피차] 하려는 말이 많은 듯하면서도 나오려는 말은 없는 듯하여 한참이나 黙黙[묵묵]히 섰다가 내가,
『아무려나 그대는 나를 살려 주셨읍니다. 그대는 나로 하여금 참사람이 되게 하였고 내게 살 能力[능력]과 살아서 즐기며 일할 希望[희망]과 기쁨을 주셨읍니다. 나는 그대를 爲[위]하여, 그대의 滿足[만족]을 爲[위]하여 工夫[공부]도 잘하고 큰 事業[사업]도 成就[성취]하오리다. 나는 詩人[시인]이니 그대라는 생각이 내게 無限[무한]한 詩的刺激[시적자격]을 줄 것이외다. 그대도 부디 工夫[공부] 잘 하시고 맘 잘 닦으셔서 朝鮮[조선]의 大恩人[대은인] 되는 女子[여자]가 되십시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내 義務[의무] 같기도 하고 또 그밖에 할 말도 없어 또는 , 이런 말을 하여야 그의 내게 對[대]한 信愛[신애]가 더 깊어질 듯하여 이 말을 하였나이다. 그러고 오래 같이 섰고 싶은 맘이야 懇切[간절]하나 그럴 수도 없어 둘이 함께 고불고불한 길로 公園[공원]을 나오려 하였나이다. 그는 나보다 一步[일보]쯤 비스듬히 앞섰나이다. 그의 하얀 목이 異常[이상]하게 빛나더이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나이다. 그는 떨치려고도 아니하고 우뚝 서더이다. 그 손을 꼭 쥐었나이다. 그의 푹 숙인 머리는 내 가슴에 스적스적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내 입김에 날리더이다. 나는 胷部[흉부]에 그의 體溫[체온]이 옮아옴을 깨달았다. 나의 꼭 잡은 손은 갑자기 확확 달음을 깨달았나이다. 내 몸은 痙攣[경련]하듯이 떨리고 내 눈이 朦朧[몽롱]하여졌나이다. 이윽고 두 얼굴은 서로 입김을 맡으리만큼 가까워지고 눈과 눈은 固定[고정]한 듯이 마주보나이다. 나는 그의 새말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았나이다. 두 입술은 꼭 마주 붙었나이다.
따뜻한 입김이 내 입술에 感覺[감각]될 때 나는 나를 잊어버렸나이다. 불같이 뜨거운 두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내 입술에 感覺[감각]되더이다.
이윽고「내 사랑하는 이여」하고 우리는 速步[속보]로 公園[공원] 밖에 나왔나이다. 이때에 누가 뒤로서 내 어깨를 치더이다. 깨어 본즉 이는 한바탕 꿈이요 곁에는 一鴻君[일홍군]이 正服[정복]을 입은 대로 앉아서 나를 깨우더이다. 一鴻君[일홍군]은 有心[유심]히 웃더이다. 나는 또 羞恥[수치]한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나 水道[수도]에 가 洗手[세수]를 하였나이다. 밖에 서는 바람 소리와 함께 豆腐[두부]장수의 뚜뚜 소리가 들리더이다. 一鴻君[일홍군]은 簡單[간단]히,
『그게 무슨 일이요, 내가 그대를 그런 줄 알았더면 내 누이에게 紹介[소개] 아니하였을 것이요. 만일 그대가 未婚자[미혼자]면 나는 기뻐 그대의 願[원]을 이루게 하겠소. 그러나 記憶[기억]하시오, 兄[형]은 旣婚男子[기혼남자]인 줄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들었을 뿐이로소이다. 果然[과연] 옳은 말이로소이다.
누구나 이 말을 다 옳게 여길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世上萬事[세상만사]를 다 그렇게 單純[단순]하게만 判斷[판단]할 수가 있사오리이까. 우리가 簡單[간단]히「옳다」하는 일에 그 속에 어떠한「옳지 않다」가 숨은 줄을 모르며, 우리가 簡單[간단]히「옳지 않다」하는 속에 어떠한「옳다」가 있는지 모르나이까. 世人[세인]은 제가 當[당]한 일에는 이 眞理[진리]를 適用[적용]하면서도 第三者[제삼자]로 批評[비평]할 때에는 이 眞理[진리]를 無視[무시]하고 다만 表面[표면]으로 얼른 보아「옳다」「옳지 않다」하나이다.
只今[지금] 내 境遇[경우]도 表面[표면]으로 보면 一鴻君[일홍군]의 말이 果然[과연] 옳거니와 一步[일보] 깊이 들어서면 그렇지 아니한 理由[이유]도 깨달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一鴻君[일홍군]에게 對[대]하여 아무 答辯[답변]을 하려 하지 아니하고 다만 듣기() 하였을 뿐이로소이다. 그 後[후]에 나는 이유를 알았나이다 ── 그가 내 書柬[서간]을 받고 一鴻君[일홍군]을 請[청]하여 물어 보았고 一鴻君[일홍군]은 내가 旣婚男子[기혼남자]인 理由][이유]로 이를 拒絶[거절]하게 한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그 後[후] 나는 매우 失望[실망]하였나이다. 술도 먹고 學校[학교]를 쉬기도 하고 밤에 잠을 못 이루어 不眠症[불면증]도 얻고 (이 不眠症[불면증]은 그後[후] 四年[사년]이나 繼續[계속]하다), 幽鬱[유울]하여지고 世上[세상]에 맘이 붙지 아니하며 成功[성공]이라든가 事業[사업]의 希望[희망]도 없어지고 ── 말하자면 나는 싸늘하게 식은 冷灰[냉회]가 되었나이다. 或時[혹시] 나는 鐵道自殺[철도자살]을 하려다가 工夫[공부]에게 붙들리기도 하고, 卒業[졸업]을 三[삼], 四月後[사월후]에 두고 退學[퇴학]을 하려고도 하여보며, 이리하여 여러 朋友[붕우]는 나의 急激[급격]한 變化[변화]를 걱정하여 여러 가지로 忠告[충고]도 하며 慰勞[위로]도 하더이다. 그러나 元來[원래] 孤獨[고독]한 나의 靈[영]은 다시 나을 수 없는 큰 傷處[상처]를 받아 모든 希望[희망]과 精力[정력]이 다 스러졌나이다. 나는 이러한 되는 대로 生活[생활], 落望[낙망], 悲觀的生活[비관적생활]을 一年[일년]이나 보내었나이다. 만일 다른 무엇(아래 말하려는)이 나를 救援[구원]하지 아니 하였던들 나는 永遠[영원]히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로소이다. 그「다른 무엇」은 다름 아니라, 「同族[동족]을 爲[위]함」이로소이다. 마치 人生[인생]에 失望[실망]한 다른 사람들이 或[혹] 削髮爲僧[삭발위승]하고, 或[혹] 慈善事業[자선사업]에 獻身[헌신]함같이, 人生[인생]에 失望[실망]한 나는 「同族[동족]의 敎化[교화]」에 내 몸을 바치기로 決心[결심]하여 이에 나는 새 希望[희망]과 새 精力[정력]을 얻은 것이로소이다. 그제부터 나는 飮酒[음주]와 懶惰[나타]를 廢[폐]하고 勤勉[근면]과 修養[수양]을 힘썼나이다. 가다가다 맘의 傷處[상처]가 아프지 아니함이 아니나 나는 少年[소년]의 敎育[교육]에 이 苦痛[고통]을 잊으려 하였으며 或[혹] 이 新愛人[신애인]에게서 새로운 快樂[쾌락]을 얻기까지라도 하였나이다. 그렁성하여 나는 至今[지금]토록 지내어 온 것이로소이다. 이 말씀을 듣고 보시면 내 行動[행동]이 或[혹] 解釋[해석]될 것도 있었으리이다. 아무려나 나는 그 金一蓮[김일련]을 爲[위]하여 最大[최대]한 希望[희망]도 붙여 보고 最大[최대]한 打擊[타격]과 動亂[동란]도 받아 보고 그 때문에 내가 只今[지금] 所有[소유]한 여러 가지 美點[미점]과 缺點[결점]과 한숨과 幽鬱[유울]과 悲哀[비애]가 생긴 것이로소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뒤에 金一蓮[김일련] 그가 나를 變形[변형]한 모양이로소이다.
이 金一蓮[김일련]이, 即[즉] 그 金一蓮[김일련]일 줄을 누가 알았사오리이까. 只今[지금]껏 때때로「奔走[분주]하신데……」하던 容貌[용모]와 音聲[음성]이 一種[일종] 抑制[억제]할 수 없는 悲哀[비애]를 띠고 내 記憶[기억]에 일어나던 것이 무슨 緣分[연분]으로 六年[육년]만에 또 한 번 번뜻 보이고 숨을 것이니이까. 내 心緖[심서]는 六年前[육년전]과 같이 散亂[산란]하였나이다. 그래서 終日[종일] 그를 찾아 돌아다녔나이다. 내가 이 담요에 얼굴을 대고 있을 제 日比谷[일비곡] 꿈이 歷歷[역력]히 보이나이다. 그것은 꿈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꿈이 아니라 하나이다. 만일 그것이 꿈이면 世上萬事[세상만사] 어느 것이 꿈 아닌 것이 있사오리이까.
그 꿈은 참 解明[해명]하였나이다. 그뿐더러 一瞬間[일순간] 꿈이 내 一生 涯[일생애]에 가장 크고 重要[중요]한 內容[내용]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꿈이오리까.
편지가 너무 길어졌나이다. 벌써 新年[신년] 一月一日[일월일일] 午前[오전] 三時[삼시]로소이다. 歲[세] 잘 쇠시기 바라고 이만 그치나이다.

第三信[제삼신][편집]

나는 三日前[삼일전]에야 海參威[해참위]에 漂着[표착]하였나이다 ──.
갖은 고생과 갖은 危險[위험]을 겪고 몇 번 죽을 번하다가 내 一生[일생]이 元來[원래] 고생 많은 一生[일생]이언마는 이번같이 죽을 고생하여 본 적은 없었나이다. 나는 上陸[상륙]한 後[후]로부터 이곳 病院[병원]에 누워 이 글도 病狀[병상]에서 쓰나이다. 이제 그 동안 十餘日間[십여일간]에 지내온 이야기를 들으소서.
나는 美國[미국]에 가는 길로 지난 一月五日[일월오일]에 上海[상해]를 떠났나이다. 혼잣몸으로 數萬里[수만리] 異域[이역]에 向[향]하는 感情[감정]은 참 形言[형언]할 수 없더이다. 桑港[상항]으로 直航[직항]하는 배를 타려다가 旣往[기왕] 가는 길이니, 歐羅巴[구라파]를 通過[통과]하여 저 人類 世界[인류세계]의 主人[주인] 노릇 하는 民族[민족]들의 本國[본국] 구경이나 할 次[차]로 露國[노국] 義勇艦隊[의용함대] 프르타와號[호]를 타고 海參威[해삼위]로 向[향]하여 떠났나이다. 나 탄 船室[선실]에는 나 外[외]에 露人[노인] 하나이 있을 뿐. 나는 외로이 寢牀[침상]에 누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가 元來[원래] 衰弱[쇠약]한 몸이라 그만 잠이 들었나이다. 깨어본즉 電燈[전등]은 반작반작 하는데 機械[기계]소리만 멀리서 오는 듯이 들리고 자다 깬 몸이 으스스하여 外套[외투] 뒤쳐쓰고 甲板[갑판]에 나섰나이다. 陰十一月下旬[음십일월하순] 달이 바로 檣頭[장두]에 걸리고 늠실늠 실하는 波濤[파도]가 月光[월광]을 反射[반사]하며 파랗게 맑은 하늘 한편에 啓明星[계명성]이 燦爛[찬란]한 光彩[광채]를 發[발]하더이다. 나는 外套[외투]깃으로 목을 싸고 甲板上[갑판상]으로 왔다갔다 거닐며 雄大[웅대]한 밤 마다 景致[경치]에 醉[취]하였나이다. 여기는 아마 黃海[황해]일 듯, 여기서 바로 北[북]으로 날아가면 그대 계신 故鄕[고향]일 것이로소이다.
四顧茫茫[사고망망]하여 限際[한제]가 아니 보이는데 方向[방향] 모르는 靑年[청년]은 물결을 따라 흘러 가는 것이로소이다.「江天一色無纖塵皎皎空中 孤月輪[강천일색무섬진교교공중고월륜]」이란 張若虛[장약허]의 詩句[시구]를 읊조릴 제 마음조차 이 詩[시]와 같이 된 듯하여 塵世名利[진세명리]와 뒤숭숭한 心慮[심려]가 씻은 듯 스러지고 다만 月輪[월륜] 같은 精神[정신]이 뚜렷하게 胷中[흉중]에 坐定[좌정]한 듯하더이다. 山[산]도 아름답지 아님이 아니로되 曲折[곡절]과 凹凸[요철]이 있어 아직 사람의 맘을 散亂[산란]케 함이 있으되 바다에 이르러서는 萬顷一面[만경일면] 지질펀한데 眼界[안계]를 막는 것도 없고 心情[심정]을 刺激[자격]하는 것도 없어 참말 自由[자유]로운 心境[심경]을 맛보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中[중]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愛人[애인]이라, 그대와 一蓮[일련]의 생각은 心中[심중]에 雜念[잡념]이 없어질수록에 더욱 鮮明[선명]하고 더욱 懇切[간절]하게 되나이다. 만일 이 景致[경치]와 이 心境[심경]을 저들과 같이 보았으면 어떠랴, 이 달 아래 이 바람과 이 물결에 그네의 손을 잡고 逍遙[소요]하였으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차차 더 激烈[격렬]하게 일어나이다. 그러나 여기는 萬頃海中[만경해중]이라 나 혼자 이 天地[천지] 속에 깨어 있어 이러한 생각을 하건마는 그네들은 只今[지금] 어떠한 꿈을 꾸는가. 아아 그립고 그리운 母國[모국]과 愛人[애인]을 뒤에 두고 數萬里外[수만리외]로 漂泊[표박]하여 가는 情[정]이 그 얼마나 하오리이까.
나는 船室[선실]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나이다. 그러나 精神[정신]이 灑落[쇄락]하여 졸리지는 아니하고 하릴없이 上海[상해]를 떠난 적에 사 가진 新聞[신문]을 끄내어 뒤적뒤적 읽었나이다.
그러다가 다시 잠이 들었더니 더 할 수 없는 恐怖[공포]를 가지고 그 잠을 깨었나이다. 일찍 들어 보지 못하던 轟然[굉연]한 爆響[폭향]이 나며 船體[선체]가 空中[공중]에 떴다 내려지듯이 搖動[요동]하더이다. 나는「水雷[수뢰], 沈沒[침몰]」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일어나며 門[문]을 차고 甲板[갑판]에 뛰어 나가다가 소낙비 같은 물바래에 精神[정신]을 잃을 번하였나이다. 甲板上[갑판상]에는 寢衣[침의]대로 뛰어 나온 男女船客[남녀선객]이 몸을 떨며 부르짖고 船員[선원]들은 미친 듯이 左右[좌우]로 馳驅[치구]하더이다. 우리 배는 벌써 三十餘度[삼십여도]나 左舷[좌현]으로 傾斜[경사]하고 汽罐[기관]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의 呼吸[호흡] 모양으로 아직도 퉁퉁 퉁퉁하더이다.「水雷[수뢰], 水雷[수뢰]」하는 소리가 絶望[절망]한 音調[음조]로 名[명]사람의 입으로 지나가더니 上甲板[상갑판]에서 누가,
『船體[선체]는 水雷[수뢰]에 腹部[복부]가 破碎[파쇄]되어 救援[구원]할 길이 없소. 只今[지금] 救助艇[구조정]을 내릴 터이니 各人[각인]은 文明[문명]한 男子[남자]의 最後體面[최후체면]을 생각하여 女子[여자]와 幼兒[유아]를 먼저 살리도록 하시오.』하고 외치는 것은 船長[선장]이러이다.
이때에 敏活[민활]한 水夫[수부]들은 船上[선상]에 配置[배치]하였던 個人 救助艇[개인구조정]을 내리고 船客[선객]들은 悲慘[비참]한 慟哭[통곡]속에 女子[여자]와 小兒[소아]를 그리로 올려 태우더이다. 어떤 婦人[부인]은 그 지아비에게 매어달려 말도 못하고 慟哭[통곡]하며 그러면 그 지아비는 無情[무정]한 듯이 그 아내의 가슴을 떠밀어 救助艇[구조정]에 싣고 소리 높이 「하나님이시여 主[주]께 돌아가나이다」하고, 어떤 이는 미친 듯이 부르짖 으며 前後[전후]로 왔다갔다하며, 어떤 이는 氣力[기력]없이 甲板[갑판]에 기대어 彫像[조상] 모양으로 멍멍하니 섰기로 하더이다. 各救助艇[각구조정]에는 水夫[수부]가 六穴砲[육혈포]를 들고 서서 定員以外[정원이외] 오르기를 不許[불허]하고 어떤 卑怯[비겁]한 男子[남자]는 억지로 救助艇[구조정]에 오르려다가 여러 사람의 叱責[질책] 속에 도로 本船[본선]에 끌려 오르기도 하더이다. 救助艇[구조정]은 하나에 二十餘名[이십여명]씩이나 싣고 定處[정처]없이 萬頃[만경]에 나뜨더이다. 거기 탄 女子[여자]와 小兒[소아]는 本船[본선]에서 時間[시간]이 못하여 죽으려 하는 지아비와 아비를 向[향]하여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우짖고 本船上[본선상]에 남아 있는 男子船客[남자선객]과 船員[선원]은 도리어 萬事泰平[만사태평]인 듯이 沉着[침착]하더이다. 사람이란 避[피]할 수 없는 危險[위험]을 當[당]할 때에는 도리어 泰然[태연]한 것이러이다. 船體[선체]의 前半部[전반부]는 半以 上[반이상]이나 물에 들어가고 우리는 暫時[잠시]나마 生命[생명]을 늘일 양으로 後半部[후반부]로 옮았나이다. 本船[본선]을 떠나는 救助艇[구조정]에서는 讚頌歌[찬송가]가 일어나며 이것을 듣고 우리도 各各[각각] 讚頌歌[찬송가]를 부르며 어떤이는 두 팔을 들고 소리를 내어, 어떤이는 고개를 숙이고 主[주]에게 마지막 祈禱[기도]를 올리더이다. 나는 暫間[잠간] 故鄕[고향]과 家族[가족]과 同族[동족]과 그대와 그와 朋友[붕우]들과 품었던 將來[장래]의 希望[희망]을 생각하고 아주 冷靜[냉정]하게 最後[최후]의 決心[결심]을 하였나이다. 나는 이 世上[세상]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에 恐怖[공포]하였나이다. 아껴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世上[세상]의 冷酷[냉혹]하고 괴로움을 생각할 때에 하루라도 바삐 이 世上[세상]을 벗어남을 기뻐하였나이다. 나는 더러운 病席[병석]에서 오줌똥을 싸뭉개다가 죽지 아니하고 新鮮[신선]한 朝日光[조일광] 茫茫[망망]한 海洋中[해양중]에 悲壯[비장]한 景光裏[경광리]에 죽게 됨을 幸福[행복]으로 여겼나이다. 實狀[실상] 집에서 죽으려거든 功成名遂[공성명수]하고 限命[한명]까지 살다가 子女[자녀]와 社會[사회]의 깊이 哀悼[애도]하는 속에 하거나, 그렇지 아니하거든 或[혹]은 霜刃下[상인하]에, 或[혹] 人類[인류]의 文明[문명]을 爲[위]하여 電氣[전기]나 化學[화학]의 實驗中[실험중]에 죽을 것인가 하나이다. 나는 저 苟且[구차]하게 無氣力[무기력]한 生命[생명]을 아껴 醜[추]한 生活[생활]을 이어가는 者[자]를 誹笑[비소]하나이다. 只今[지금] 洋洋[양양]한 바다는 우리를 받아들일 양으로 늠실늠실하고 光輝[광휘]한 太陽[태양]은 他界[타계]로 가는 우리를 作別[작별]하는 듯이 우리에게 따뜻한 빛을 주더이다. 배가 가라앉음을 좇아 차차 後部[후부]로 옮는 船客[선객]들을 이제야 몸과 몸이 서로 마주 닿게 되었나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上甲板[상갑판]과 檣[장]으로 기어 오르나이다. 汽罐[기관] 벌써 죽었나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로소이다. 그러나 우리 中[중]에는 이제는 우리 이도 없고 덤비는 이도 없고 다만 悲愴[비창]한 한숨 소리와 祈禱[기도]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릴 뿐이로소이다. 船員[선원]은 우리 生命[생명]이 이제 四十分[사십분]이라 하나이다. 우리 心臟[심장]은 一秒一秒[일초일초] 뛰나이다. 一分[일분] 가나이다, 二分[이분] 가나이다. 이때에 가끔 물바래가 우리 熱[열]한 얼굴을 적시더이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우으로 우으로 올라가나이다. 다만 一瞬間[일순간]이라도 할 수 있는 대로는 生命[생명]을 늘이려 하는 人生[인생]의 情狀[정상]은 참 可憐[가련]도 하여이다. 救助艇[구조정]도 어디 갈 데가 있는 것이 아니요, 後[후]에 오는 배만 기다리는 故[고]로 그 周圍[주위]로 슬슬 떠다닐 뿐이러이다. 가끔 女子[여자]의 울음 소리가 물결 소리와 함께 울려 올 뿐이로소이다. 十分[십분] 지났나이다. 남은 것이 三十分[삼십분]. 우리는 不知不覺[부지불각]에 주먹을 부르 쥐고 입을 꼭 다물었나이다. 마치 우리를 向[향]하여 오는 무엇을 抵抗[저항]하려는 듯이. 그러나 우리는 그 運命[운명]을 抵抗[저항]할 수 있사오리까. 아까 救助艇[구조정]에 오르려던 男子[남자]는 失神[실신]한 듯이 甲板上[갑판상]에 거꾸러지며 거푸을 吐[토]하고 痙攣[경련]을 生[생]하더이다.
다른 사람들은 빙그() 웃으면서 그 사람의 파래진 얼굴을 보았나이다. 우리는 그를 救援[구원]하려 할 必要[필요]가 없고 다만 暫間[잠간] 먼저 가거라, 우리도 네가 아직 一哩[일리]을 앞서기 前[전]에 따라갈 것이로다 할 뿐이로소이다. 이때 우리 心中[심중]에야 무슨 慾心[욕심]이 있으며 무슨 念慮[염려]가 있으리이까. 萬人[만인]이 꿈에도 놓지 못하던 名利[명리]의 慾[욕]이며 快樂[쾌락]의 慾[욕]이며 ── 온갖 것을 다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가 世上[세상]에 올 때에 가지던 바와 같은 純潔[순결]한 맘으로 오려는 죽음을 맞을 따름이로소이다. 이때에 우리 二百餘名[이백여명] 사람은 모두 聖人[성인]이요, 모두 天使[천사]로소이다. 만일 누구나 葬式[장식]을 볼 때에 暫間[잠간] 이러한 생각을 하였던들 社會[사회]의 모든 惡[악]하고 無用[무용]한 軋轢[알력]이 없어질 것이로다. 이 배에는 或[혹] 金貨[금화]도 실었으리이다. 그러나 只今[지금] 누가 그것를 생각하며, 美人[미인]은 있으리이다. 그러나 只今[지금] 누가 그를 생각하오리이까. 그뿐더러 우리의 生命[생명]까지도 그리 아까운 줄을 모르게 되어 沈沒[침몰]하는 船體[선체]의 異常[이상]한 不快[불쾌]한 音響[음향]을 發[발]할 때마다 本能的[본능적]으로 몸이 흠칙흠칫 할 뿐이로소이다. 二十分[이십분] 지내었나이다. 船體[선체]는 漸漸[점점] 물 아래로 잠기나이이다. 우리는 더 올라 갈 곳이 없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섰나이다. 이때에 群衆中[군중중]에서 누가,
『저기 배 보인다!』
하고 외친다. 群衆[군중]의 視線[시선]은 一齊[일제]히 西[서]편 까만 點[점]으로 쏠리더이다. 船長[선장]은 마스트 第一桁[제일항]에 올라가 雙眼 鏡[쌍안경]으로 그 異點[이점]을 보더니, 손을 내어두르며,
『코리아號[호]외다. 우리 배보다 二時間後[이시간후]에 떠난 코리아號[호]외다. 우리 배 沈沒[침몰]한다는 無線電信[무선전신]을 받고 이리로 옴이외다. 그러나 저 배는 一時間後[일시간후]가 아니면 오지 못할 터이니 各各[각각] 무엇이나 하나씩 붙들고 저 배 오기를 기다리시오.』
우리의 얼굴은 一時[일시]에 變[변]하였나이다. 沈着[침착]하던 마음이 도리어 動亂[동란]하더이다. 一條[일조]의 生道[생도]가 보이매 至今[지금]껏 죽으려고 決心[결심]하였던 것이 다 虛事[허사]가 되고 이제는 살려는 希望[희망]을 가지고 努力[노력]하게 됨이로소이다. 우리는 船員[선원]과 함께 널쪽 뜯기에 着手[착수]하였나이다. 나도 依接[의접]할 것을 하나 얻을 양으로 잠기다 남은 甲板[갑판] 위로 뛰어 돌아 가다가 異常[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래어 우뚝 섰나이다.「사람살리오!」하는 女子[여자]의 소리(英語[영어]로) 들리며 무엇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이다. 나는 곧 그 소리가 서너 치나 이미 물에 잠긴 主檣[주장]밑 一等室[일등실]에서 나는 줄을 알아 차리고 얼른 뛰어가,
『門[문]을 칠 터이니 물러서시오.』
하며 손에 들었던 도끼로 돌저귀를 때려부수고 힘껏 그것을 잡아 제쳤나이다. 그 속에는 어떤 늙은 西洋夫人[서양부인] 하나와 젊은 東洋夫人[동양부인] 하나이 있다가 흐트러진 머리 寢衣[침의] 바람으로 문을 차며 마주 뛰어 나오더이다. 나는 그 門[문]을 떼어 生命[생명]을 依接[의접]할 양으로 도끼로 잡을 손 있는 데를 깨뜨렸나이다. 이때에 뒤로서 누가 내게 매어달 리기로 돌아본즉 이것이 누구오리까. 내 恩人[은인] 金一蓮[김일련]이로소이다. 나는 다른 말 할새 없이 다만,
『이 門[문]을 잃지 말고 여기 매어달리시오. 只今[지금] 救助[구조]할 배가 옵니다.』
하였나이다. 돌아서며 보니 船客[선객]과 船員[선원]들은 벌써 널쪽을 하나씩 집어 타고 물에 나떴더이다. 甲板[갑판]에 물이 벌써 무릎을 잠그고 船體[선체]는 漸漸[점점] 빠르게 가라앉더이다. 게다가 굽신굽신하는 물결이 몸을 쳐 한 걸음만 걸핏하면 그만 千[천]길 海中[해중]으로 쑥 들어 갈 것이로소이다. 船上[선상]에는 우리 세 사람 뿐이로소이다. 내가 도끼로 문을 부시는 동안에 남들은 다 내려간 것이로소이다. 아아 어찌하나 이 門[문] 한 짝에 세 사람이 붙을 수 없고 그러나 이제 달리 어쩔 수도 없어 그 危急[위급]한 中[중]에 얼마나 躊躇[주저]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 門[문]을 타고 나가시오. 걸핏하면 그만이오. 어서어서.』
하고 다시 물 속에 든 도끼를 찾아 다른 門[문]을 부시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때에 벌써 물이 허리 위에 올라 오고 물 속에 잠긴 돌저귀를 부시지 못하여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뒤를 돌아본즉 두 婦人[부인]은 水上[수상]에 조금 남겨 놓인 欄干[난간]을 붙들고 흑흑 느끼더이다. 나는 이를 보고 허리를 물에 잠그고 겨우하여 그 門[문]을 뜯어 내어 놓고 본즉 먼저 뜯어 놓은 門[문]이 갑자기 밀어 오는 물결에 밀려 달아나더이다. 나는 도끼를 집어 내어던지고 그 門[문]을 잡고 헤어나갈 準備[준비]를 하였나이다. 그러나 어찌하리요. 門[문] 하나에 셋은 탈 수 없으니 우리 셋 中[중]에 하나는 죽어야 할 것이라,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이리이까.
이제 우리는 寸刻[촌각]의 餘裕[여유]도 없나이다. 두 婦人[부인]더러 그 門[문]의 한편 옆에 붙으라 하고 나는 다른 옆에 붙어 아주 우리 몸이 뜨기만 바랐나이다. 沈沒[침몰]하는 本船[본선] 周圍[주위]에는 運命[운명]에 生命[생명]을 맡긴 人生[인생]들이 或[혹]은 널쪽에 或[혹]은 救命帶[구명대]에 或[혹]은 救助艇[구조정]에 붙여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말없이 떠다니나이다. 아까 보이던 코리아號[호]는 果然[과연] 오는지마는지.
이윽고 우리 몸은 全[전]혀 그 門[문]에만 매어달리게 되었나이다. 두 婦人[부인]은 氣運[기운]없이 門[문]설주를 잡고 내 얼굴만 쳐다보더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重量[중량]에 門[문]은 連[연]해 가라앉으려 하고 그러할 때마다 弱[약]한 婦人[부인]네는 더욱 팔에 힘을 주므로 우리는 몇 번이나 머리까지 물 속에 잠겼나이다. 가뜩이나 겨울 물에 四肢[사지]는 얼어 들어 오고 팔맥은 풀리고 아무리 하여도 이 모양으로 十分[십분]을 지낼 것도 같지 아니하더이다. 이제 우리가 한 가지 오래 갈 妙策[묘책]은 門[문]을 胸腹部[횽복부]에 기대고 팔과 다리로 方向[방향]을 잡음이러이다. 그러나 걸핏하면 널쪽이 뒤집히든가 가라앉든가 할 모양이니 어찌하오리이까. 그러나 우리는 數分間[수분간]에 一次[일차]씩 물에 잠기어 아무리 하여도 이대로 참을 수는 없더이다. 이때말로 姑息[고식]을 不許[불허]하고 勇斷[용단]이 必要[필요]하더이다. 이렁그렁하는 동안에 氣力[기력]은 차차 耗盡[모진]하더이다. 元來[원래] 纖弱[섬약]한 金娘[김랑]은 벌써 흐뜩흐뜩 느끼며 졸기를 시작하더이다. 아무리 하여도 셋 中[중]에 하나는 죽어야 하리라 하였나이다. 나는 얼른「살아야 할 사람」은 나와 내 同胞[동포] 金娘[김랑]인가 하였나이다. 人道上[인도상]으로 보아 두 婦人[부인]을 살리고 내가 죽음이 마땅하다 하려니와 나는 그때 내 生命[생명]을 먼저 버리기에는 너무 弱[약]하였나이다. 그러나 저 西洋婦人[서양부인]을 떠밀어 내기도 生命[생명]이 있는 동안은 못할 일이러이다. 또 한 번 우리는 물 속에 들었다 나왔나이다. 숨이 막히고 精神[정신]이 아뜩아뜩 하더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였나이다. 아직 國家[국가]가 있다. 國家[국가]가 있으니 內外國[내외국]의 別[별]이 있다, 그러니까 다 살지 못할 境遇[경우]에 내 同胞[동포]를 살림이 當然[당연]하다 하였나이다. 그러나 斷行[단행]치 못하고 또 한 번 물에 잠겼다 나왔나이다. 나는 이에 決心[결심]하였나이다. 차라리 이 널쪽을 뒤쳐엎었다가 둘 中[중]에 하나 사는 者[자]를 살리리라 하였나이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이의 生命[생명]이 어찌 될는가.
『하나님이시여 容恕[용서]하소서.』
하고 나는 널쪽을 턱 놓았나이다. 아아 그때의 心中[심중]의 苦悶[고민]이야 무엇으로 形容[형용]하리이까. 널쪽이 번쩍 들리며 두 婦人[부인]은 물 속에 들어 갔나이다. 나는 얼른 널쪽을 잡으려 하였으나 널쪽은 물결에 밀려 數步外[수보외]에 달아나더이다. 이윽고 두 婦人[부인]도 물을 푸푸 뿜으며 나뜨더이다 . 나는 最後[최후]의 努力[노력]이로구나 하면서 널쪽을 버리고 金娘[김랑] 있는 데로 헤어 가서 한 손으로 그의 겨드랑을 붙들고 널 쪽을 向[향]하여 헤었나이다. 널쪽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우리 보다 앞서 가더이다. 나는 死力[사력]을 다하여 헤었나이다. 우리의 두 몸은 이제야 겨우 코 以上[이상]이 물 위에 떴을 따름이로소이다. 나는「이제는 죽었 구나」하며 남은 힘을 다하였나이다. 그러나 屍體[시체]나 다름 없는 女子[여자]를 한 손에 들었으니 어찌 하오리이까. 그렇다고 차마 그는 놓지 못했나이다. 나는 不知不覺[부지불각]에「아이구」하였나이다. 그러나 내 生命[생명]은 아직 끊기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래도 허우적허우적 널쪽을 向[향]하여 헤었나이다. 거의 기운이 다하려 할 제 널쪽이 손에 잡혔나이다.
나는 새 기운을 내어 金娘[김랑]을 널쪽에 올려 싣고 나도 가슴을 널쪽에 대었나이다. 그러고는 다리를 흔들어 널쪽의 方向[방향]을 돌렸나이다. 西洋婦人[서양부인]이 아직도 떴다 잠겼다 함을 보고 나는 그리로 向[향]하여 저어가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내 四肢[사지]는 이미 굳었나이다. 그러고는 精神[정신]을 잃었나이다.
깨어 본즉 나는 어느 船室[선실]에 누웠고 곁에는 金娘[김랑]과 다른 사람 들이 昏迷[혼미]하여 누웠나이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잘 나가지 아니하더이다. 이 모양으로 二十分[이십분]이나 누웠다가 겨우 精神[정신]을 차려 나는 어느 배의 救援[구원]을 받아 다시 살아난 줄을 았았나이다. 그러고 겨우 몸을 일혀 곁에 누운 金娘[김랑]을 보니 아직도 昏迷[혼미]한 모양이러이다. 뒤에 들은즉 이 배는 우리가 기다리던 코리아號[호]요, 그 船客[선객]들이 衣服[의복]을 내어 갈아 입히고 우리를 自己[자기]내 寢台[침태]에 누인게라 하더이다. 저녁때쯤 하여 金娘[김랑]도 일어 나고 다른 遭難客[조난객]도 일어나더이다. 三百餘名[삼백여명]에 生存[생존]한 者[자]가 겨우 一百二十幾人[일백이십기인]. 나도 그 틈에 끼인 것이 참 神奇[신기]하더이다. 아아 人生[인생]의 運命[운명]이란 果然[과연] 알 수 없더이다. 船長[선장]도 죽고 나와 같은 房[방]에 들었던 이도 죽고 毋論[무론] 西洋婦人[서양부인]도 죽고 ── 그러나 그때 救助艇[구조정]에 뛰어 오르려다가 도로 끌려 내린 者[자]는 살아나서 바로 내 맞은편 寢牀[침상]에 누워 앓는 소리를 하더이다. 여러 船客[선객]은 여러 가지로 慰問[위문]하여 주며 어떤 西洋婦人[서양부인]네는 눈물을 흘리며 慰問[위문]하더이다. 나는 그네에게 對[대]하여 나의 目睹[목도]한 自初至終[자초지종]을 말하였나이다. 그네는 或[혹] 놀라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그 말을 듣더이다. 그 水雷[수뢰]는 敷設水雷[부설수뢰]인가 獨逸水雷艇[독일수뢰정]이 發射[발사]한 것인가 하고 議論[의론]이 百出[백출]하였으나 毋論[무론] 歸結[귀결]되지 못하였나이다. 우리도 국과 牛乳[우유]를 마시고 다시 잠이 들어 翌朝[익조] 長崎[장기]에 碇泊[정박]할 때까지 世上[세상] 모르고 잤나이다.
長崎[장기]서 이틀을 留[유]하여 단번 義勇艦隊[의용함대] 배로 이곳에 到着[도착]한 것이 再再昨日[재재작일] 午前[오전] 九時[구시]로소이다. 그러나 물에서 몸이 지쳐 우리는 그냥 病院[병원]에 들어와 只今[지금]까지 누웠으나 오늘부터는 心神[심신]이 자못 輕快[경쾌]하여 감을 느끼오니 過慮[과려]말으소서.

第四信[제사신][편집]

나는 只今[지금] 小白山中[소백산중]을 通過[통과]하나이다. 正[정]히 午前[오전] 四時[사시]. 겹琉璃窓[유리창]으로 가만히 내다보면 稀微[희미]하 게나마 白雪[백설]을 지고 인 沈沈[침침]한 森林[삼림]이 보이나이다. 우리 列車[열차]는 零下[영하] 二十五[이십오], 六度[육도] 되는 天地開闢以來[천지개벽이래]로 일찍 人跡[인적] 못 들어 본 大森林[대삼림]의 밤 空氣[공기]를 헤치고 헐럭헐럭 달아가나이다. 들리는 것이 오직 둥둥둥둥한 車輪[차륜]소리와 汽罐車[기관차]의 헐덕거리는 소리뿐이로소이다. 우리 車室[차실]은 寢臺[침대] 四個中[사개중]에 二層[이층] 二個[이개]는 비고 나와 金娘[김랑]이 下層[하층] 二個[이개]를 占領[점령]하였나이다. 蒸氣鐵管[증기철관]으로 室內[실내]는 우리 溫突[온돌]이나 다름 없이 훗훗 하여이다.
나는 金娘[김랑]의 자는 얼굴을 보았나이다. 담요를 가슴까지만 덮고 입술을 半[반]쯤 열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무슨 微妙[미묘]한 音樂[음악]같이 들리더이다. 그 가는 붓으로 싹그은 듯한 눈썹하며 방그레 웃는 듯한 두 눈하며 여러 날 危險[위험]과 勞困[노곤]으로 좀 해쓱하게 된 두 뺨하며 입술이 약간 가뭇가뭇하게 탄 것이 도리어 風情[풍정] 있더이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지 오래거니와 아직 이 사람의 其間[기간]의 變遷[변천]과 經過[경과]를 仔細[자세]히 들어 볼 機會[기회]가 없었나이다. 上海[상해]서 精誠[정성]된 看護[간호]를 받을 때 그의 마음이 如前[여전]히 天使[천사] 같거니 하기는 하였으나 그 眞僞[진위]를 判定[판정]할 機會[기회]는 없었나이다. 나는 이제야 그 좋은 機會[기회]라 하였나이다. 대개 아무리 外飾[외식]에 익숙한 者[자]라도 잘 때엣 容貌[용모]와 態度[태도]는 숨기지 못하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자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性情[성정]을 大槪[대개]는 正確[정확]하게 判斷[판단]하는 것이로소이다. 죽은 얼굴은 더욱 그의 性格[성격]을 잘 發表[발표]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家族 外[가족외]에는 남의 자는 얼굴을 보기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硏究[연구]의 最好[최호]한 機會[기회]는 車中[차중]이나 船中[선중]인가 하나이다. 나는 그대의 자는 얼굴을 여러 번 보았나이다. 그러고 그 얼굴로 그대의 性情[성정]을 많이 判斷[판단]하였나이다. 이제 그 솜씨를 가지고 金娘[김랑]의 자는 얼굴을 硏究[연구]하려 하였나이다.
맨처음 그의 얼굴과 숨소리가 小兒[소아]의 그것과 같이 和平[화평]함은 그의 心情[심정]이 善[선]하고 快暢[쾌창]함을 보임이요, 그의 방그레한 웃음을 띄움은 어떤 處地[처지] 어떤 事件[사건]을 當[당]하거나 絶望[절망]하고 悲痛[비통]하지 아니하고 恒常[항상] 主宰[주재]의 攝理[섭리]를 依支[의지]하여 마음을 和樂[화락]하게 가짐을 보임이니,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그렇게 큰 困難[곤란]을 겪은 뒤에는 반드시 얼굴에 苦悶不平[고민불평]한 빛이 보일 것이로소이다. 그의 숨소리가 順[순]하고 長短[장단] 같음은 그 이 肉體[육체]와 心情[심정]의 完全[완전]히 調和[조화]함을 보임이니 숨소 리의 不齊[부제]함은 무슨 不調和[부조화]가 있음이로소이다. 그는 어젯밤에 누운 대로 端正[단정]한 姿勢[자세]를 維持[유지]하였으니 이는 그의 心情[심정]이 端雅[단아]하고 沈着[침착]함을 보임이로소이다. 或[혹] 베개를 목에 걸고 고개를 번적 재낀다든가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린다든가 팔과 다리를 모양 없이 내어 던지는 사람은 반드시 맘의 主[주]대 없고 亂雜[난잡]함을 보임이로소이다. 입을 꼭 다물지 아니함은 意志[의지]가 弱[약]하다든가 남에게 依賴[의뢰]하려는 性情[성정]을 表[표]함이어니와 조금 방싯하게 입을 연 것은 도리어 美[미]를 더하는 點[점]이로소이다. 只今[지금] 우리 金娘[김랑]은 마치 아기가 그 慈母[자모]의 품에 안긴 듯이 마음을 푹 놓고 極[극]히 安穩[안온]하게 자는 것이로소이다. 나는 한참이나 이 純潔[순결]한 女性[여성]의 얼굴을 凝視[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壁[벽]에 기대어 생각 하였나이다. 果然[과연] 아름답도소이다. 이 아름다움을 보고 嘆美[탄미]하고 愛着[애착]하는 情[정]이 아니 날 사람이 있사오리이까. 造物[조물]은 嘆美[탄미]하기 爲[위]하여 이런 美[미]를 짓고 이런 美[미]를 鑑賞[감상]하는 힘을 人生[인생]에게 준 것이로소이다. 그 동안 여러 危險[위험]과 困難[곤란]에 餘裕[여유] 없는 胷中[흉중]은 다시 舊[구]에 復[복]하여 散亂[산란]하기 始作[시작]하였나이다. 나는 六年前[육년전] 某女學校[모여학교] 寄宿舍[기숙사]에서「奔走[분주]하신데」하고 살작 낯을 붉히던 그를 回想[회상]하고, 日比谷[일비곡]의 一場夢[일장몽]을 回想[회상]하고, 그때 나의 憧憬[동경]과 苦悶[고민]을 생각하고, 또 내가 지난 四[사], 午年間[오년간]에 겪은 모든 精神的變遷[정신적변천]과 苦悶[고민]이 太半[태반]이나 只今[지금] 내 앞에 누워자는 一短軀[일단구]에 原因[원인]함을 생각 하였나이다. 아마 그는 내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겪은 모든 것을 모를 것이로소이다. 그래서 같이 死生間[사생간]에 出入[출입]하면서도 또는 같이 無人[무인]한 車室內[차실내]에 있으면서도 彼此[피차]의 心中[심중]은 大端[대단]히 懸殊[현수]한 것이로소이다. 胷壁[흉벽] 하나를 隔[격]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心中[심중]은 마치 此界[차계]와 他界[타계]와 같아야 其間[기간]에 交通[교통]이 생기게 前[전]에는 決[결]코 接觸[접촉]하지 못하는 것이로소이다. 그 交通機關[교통기관]은 言語[언어]와 感情[감정]이니 이 機關[기관]으로 彼此[피차]의 內情[내정]을 査悉[사실]한 後[후]에야 和親[화친]도 생기고 排斥[배척]도 생기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朋友[붕우]라 함은 서로 理解[이해]하여 各其[각기] 他人[타인]에게 自己[자기]와의 共通點[공통점]을 發見[발견]함으로 생기는 關係[관계]라 할 수 있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는 딴 問題[문제]니 그의 性情[성정]이며 思想言行[사상언행]이 或[혹] 사랑의 原因[원인]도 되며, 或[혹] 이미 成立[성립]한 사랑을 强[강]하게 하는 效力[효력]은 있으되 그것은 理解[이해]한 後[후]에야 비로소 사랑이 成立[성립]되는 것이 아니로소이다. 말이 너무 곁길로 들었나이다. 나는 내 心情[심정]을 吐說[토설]함이 金娘[김랑]에게 어떠한 생각을 줄까 하였나이다. 내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全人格[전인격]의 變動[변동]과 苦悶[고민]을 받은 줄을 말하면 그의 感想[감상]이 어떠할는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五[오], 六年[육년]을 苦悶中[고민중]으로 지낸 男子[남자]인 줄을 알 때에 果然[과연] 어떠한 感想[감상]이 생길는가. 毋論[무론] 그 事情[사정]을 듣는다고 없던 사랑이 생길 理[리]는 없으련마는 自己[자기]를 爲[위]한 犧牲[희생]을 可憐[가련]하게는 여기리라 하였나이다. 設或[설혹] 그가 내 陳情[진정]을 듣고 도리어 성내어 나를 排斥[배척]하리라 하더라도 稀微[희미]한 怨望[원망]과 함께 오래 품어 오던 情[정]을 바로 그 當者[당자]를 向[향]하여 吐露[토로]하기만 하여도 훨씬 속이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있을 듯하더이다. 그래 나는 제가 잠을 깨기만 하면 곧 그러한 말을 하리라 하였나이다. 그러고 다시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보매 如前[여전]히 安穩[안온]히 자더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였나이다. 設或[설혹] 저편이 나를 사랑한다 한들 내가 저를 사랑할 權利[권리]가 있을까. 나는 旣婚男子[기혼남자]라, 旣婚男子[기혼남자]가 다른 女性[여성]을 사랑함은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이 禁[금]하는 바라, 그러나 내 아내에게는 어찌하여 사랑이 없고 도리어 法律[법률]과 道德[도덕]이 사랑하기를 禁[금]하는 金娘[김랑]에게 사랑이 가나이까. 法律[법률]과 道德[도덕]이 人生[인생]의 意志[의지]와 情[정]을 거스르기 爲[위]하여 생겼는가. 人生[인생]의 意志[의지]와 情[정]이 所謂[소위] 惡魔[악마]의 誘惑[유혹]을 받아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을 違反[위반]하려 하는가. 이에 나는 道德[도덕]‧法律[법률]과 人生[인생]의 意志[의지]와 어느 것이 原始的[원시적]이며 어느 것이 더욱 權威[권위]가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하겠나이다. 人生[인생]의 意志[의지]는 天性[천성]이니 天地開闢[천지개벽]때부터 創造[창조]된 것이요, 道德[도덕]이나 法律[법률]은 人類[인류]가 社會生活[사회생활]을 始作[시작]함으로부터 社會[사회]의 秩序[질서]를 維持[유지]하기 爲[위]하여 생긴 것이라. 即[즉] 人生[인생]의 意志[의지]는 自然[자연]이요, 道德[도덕]·法律[법률]은 人爲[인위]며 따라서 意志[의지]는 不可變[불가변]이요, 絶對的[절대적]이요, 道德[도덕]·法律[법률]은 可變[가변]이요, 相對的[상대적]이라. 그러므로 吾人[오인]의 意志[의지]가 恒常[항상]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에 對[대]하여 優越權[우월권]이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내 意志[의지]가 現在[현재] 金娘[김랑]을 사랑하는 以上[이상]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을 違反[위반]할 權利[권리]가 있다 하나이다.
내가 이를 違反[위반]하면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은 반드시 나를 制裁[제재]하리라. 或[혹] 나를 姦淫者[간음자]라 하고 或[혹] 重婚者[중혼자]라 하여 社會[사회]는 나를 排斥[배척]하고 法律[법률]은 나를 處罰[처벌]하리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金娘[김랑]을 사랑함이 社會[사회]와 法律[법률]의 制裁[제재]보다 重[중]타고 認定[인정]할 때에는 나는 그 制裁[제재]를 甘受[감수]하고도 金娘[김랑]을 사랑할지니 大槪[대개] 靈[영]의 要求[요구]가 有形[유형]한 온갖 것보다도 ── 天下[천하]보다도 宇宙[우주]보다도 더 重[중]함이로소이다. 現代人[현대인]은 너무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에 靈性[영성]이 麻痺[마비]하여 靈[영]의 權威[권위]를 認定[인정]못하나니 이는 生命[생명] 있는 人生[인생]으로서 生命[생명] 없는 機械[기계]가 되어버림과 다름이 없나이다. 예수가 十字架[십자가]에 박힘도 當時[당시]의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에 違反[위반]하였음이요, 모든 國土[국토]와 革命 家[혁명가]가 重罪人[중죄인]의로 或[혹]은 賤役[천역]을 하며 或[혹]은 生命[생명]을 잃음도 靈[영]의 要求[요구]를 貴重[귀중]하게 여기어 現時[현시]의 制度[제도]를 違反[위반]함이로소이다. 大槪[대개]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을 違反[위반]함에는 二種[이종]이 있으니, 一[일]은 私慾[사욕], 物慾[물욕], 情慾[정욕]을 滿足[만족]하기 爲[위]하여 違反[위반]함이니 이때에는 반드시 良心[양심]의 苛責[가책]을 兼受[겸수]하는 것이요, 基二[기이]는 良心[양심]이 許[허]하고 許[허]할뿐더러 獎勵[장려]하여 現社會[현사회]를 違反[위반]케 하는 것이니, 이는 法律上[법률상]으로 罪人[죄인]이라 할지나 他日[타일] 그의 爲[위]하여 싸우던 理想[이상]이 現實[현실]되는 날에 그는 敎祖[교조]가되고 國祖[국조]가 되고 先覺者[선각자]가 되어 社會[사회]의 追崇[추숭]을 받는 것이니, 歷史上[역사상]에 모든 偉人傑士[위인걸사]는 대개 이러한 人物[인물]이로소이다. 나는 不幸[불행]히 凡人[범인]이 되어 政治上[정치상] 또는 宗敎上[종교상] 이러한 革命家[혁명가]가 되지 못하나 人道上[인도상] 一革命者[일혁명자]나 되어 보려 하나이다.
내가 金娘[김랑]을 사랑함이 果然[과연] 이만한 高尙[고상]한 意義[의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이미 내 全靈[전령]이 그를 사랑하는 以上[이상] 나는 決[결]코 社會[사회]를 두려 내 靈[영]의 要求[요구]를 抑制[억제]하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或[혹] 社會[사회]가 나를 惡人[악인]으로 여겨 다시 나서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내 靈[영]의 神聖[신성]한 自由[자유]를 죽여서까지 肉體[육체]와 名譽[명예]의 安全[안전]을 圖謀[도모]하려 아니하나이다. 나는 日本人[일본인]의 情死[정사]를 부러워하나니 대개 제가 사랑하는 者[자]를 爲[위]하여 목숨을 버리기조차 辭讓[사양]히 아니하는 그 精神[정신]은 果然[과연] 아름답소이다. 저 或[혹]은 名譽[명예]를 爲[위]하여, 或[혹]은 身體[신체]나 財産[재산]을 爲[위]하여 사랑하던 者[자] 버리기를 식은 밥 먹듯하는 種族[종족]을 나는 미워하나이다. 나도 그러한 懦弱[나약]하고 冷淡[냉담]한 피를 받았으니 果然[과연] 저 外國人[외국인] 모양으로 사랑하는 者[자]를 爲[위]하여 生命[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게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이제 金娘[김랑]을 對[대]하여 이 實驗[실험]을 하여 보려 하나이다. 내가 日前[일전] 破船[파선]하였을 때에 한 行動[행동]도 이 方面[방면]의 消息[소식]을 傳[전]함인가 하나이다. 人生[인생]의 一生[일생]이 果然[과연] 우습지 아니하리이까. 오래 살아야 七十 年[칠십년]에 구태여 社會[사회] 앞에 꿇어 엎디어 온갖 服從[복종]과 온갖 阿謟[아첨]을 하여 가면서까지 奴隸的安全[노예적안전]과 快樂[쾌락]에 戀戀[연연]할 것이랴 무엇이니이까. 제가 正義[정의]로 생각하는 바를 따라 勇往邁進[용왕매진]하다가 成[성]하면 좋고 敗[패]하면 暴風[폭풍]에 떨어 지는 꽃 모양으로 훌적 날아가면 그만이로소이다. 나는 벌떡 일어섰나이다.
두 주먹을 불끈 부르쥐고, 〈옳다 怯[겁]을 버려라. 내 사랑하는 金娘[김랑]을 爲[위]하여 全心身[전심신]을 바치리라.〉 하였나이다 . 내 발소리에 깨었는지 金娘[김랑]이 눈을 뜨며,
『추우십니까?』
『아니올시다. 너무 오래 잤기로 運動[운동]을 좀 하노라고 그럽니다.』
『只今[지금] 몇 時[시]야요?』
하면서 일어 앉는다.
『다섯時[시] 五分[오분]이올시다. 좀 더 주무시지요. 아직 이른데.』
하고 나는 異常[이상]하게 수줍은 맘이 생겨 金娘[김랑]을 正面[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窓[창]도 내다보며 電燈[전등]도 보며 하였나이다.
『여기가 어딥니까?』

『小白山[소백산] 森林[삼림] 속이올시다. 아직까지 두 발 달린 짐승 들어 보지 못한 聖殿[성전]인데 只今[지금]은 鐵道[철도]가 생겨 차차 森林[삼림]도 採伐[채벌]하고 아담과 말하던 새와 사람들도 가끔 두 발 달린 짐승의 銃[총]소리에 놀랍니다. 地球上[지구상]에는 이 두 발 달린 짐승이 過[과]히 繁盛[번성]하여서 모처럼 하나님이 數十萬年[수십만년] 품 들여서 만들고 새겨 놓은 地球[지구]를 말 못되게 보기 숭하게 만듭니다. 自然[자연]을 이렇게 버려 놓는 모양으로 사람의 靈性[영성]에도 붉은 물도 들이고 푸른 물도 들이고 깍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여 모양 없이 만들어 놓습니다. 보시오. 우리 身體[신체]도 그러합지요. 모두 무슨 凶物[흉물]스러운 헝겊 으로 뒤싸고 禮儀[예의]니 習慣[습관]이니 하는 오라줄로 꽁꽁 동여매고….』
나는 나오는 대로 한참이나 지껄이다가 過[과]히 冗長[용장]한 듯하여 말을 뚝 끊고 金娘[김랑]의 얼굴을 보았나이다. 金娘[김랑]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도 衣服[의복]도 없고 文明[문명]도 없으면 이 추운 땅에서야 어떻게 삽니까?』
『못 살지요. 元來[원래]로 말하면 地球[지구]가 이렇게 식어서 눈이 오고 얼음이 얼게 되면 차차차차 赤道地方[적도지방]으로 몰려가 살 터지지요 말하자면 赤道地方[적도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짜장 살 權利[권리] 있는 사람 이요, 溫帶[온대]나 寒帶[한대]에 사는 사람들은 天命[천명]을 拒逆[거역]하여 사는 것이외다그려. 그러니까 赤道地方[적도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天命[천명]대로 自然[자연]스럽게 살아가지마는 溫帶[온대]나 寒帶[한대]에 사는 사람들은 所謂[소위]「自然[자연]을 征服[정복]」한다 하여 꼭 天命[천명]을 거슬리는 生活[생활]도 합니다그려. 그네의 所謂[소위] 文明[문명]이라는 것이 即[즉] 天命[천명]을 拒逆[거역]하는 것이외다. 爲先[위선] 우리로 보아도 한 時間[시간]에 十里[십리]씩 걸어야 옳게 만든 것을 꾀를 부려 百餘里[백여리]씩이나 걷지요. 눈이 오면 추워야 옳을 텐데 우리는 只今[지금] 따뜻하게 앉았지요……. 그러니까 文明[문명]속에 있어서는 하나 님을 섬길 수 없어요.』
『아 그러면 先生[선생]님께서는 文明[문명]을 詛呪[저주] 하십니다그려. 그러나 우리 人生[인생] 치고 文明[문명] 없이 살아갈까요? 톨스토이가 제아무리 文明[문명]을 詛呪[저주]한다 하더라도 그 亦是[역시]「家屋[가옥]」속에서「料理[요리]」한 飮食[음식] 먹고「機械[기계]」로 된 衣服[의복] 입고 지내다가 마침내는 鐵道[철도]를 타다가 停車場[정차장]에서「醫 師[의사]」의 治療[치료]를 받다가 죽지 아니하였읍니까.』
나는 이 말에는 대답하려 아니하고 單刀直入[단도직입]으로 金娘[김랑]의 事情[사정]을 探知[탐지]하려 하였나이다. 金娘[김랑]의 述懹[술양]은 如左[여좌]하여이다.

내가 東京[동경]을 떠난後[후] 一年[일년]에 金娘[김랑]도 某高等女學校[모고등여학교]를 卒業[졸업]하고 仍[잉]하여 女子大學校[여자대학교] 英文 學科[영문학과]에 入學[입학]하였나이다. 元來[원래] 才質[재질]이 超越[초월]한 者[자]라 入學以後[입학이후]로 學業[학업]이 日進[일진]하여 校門[교문]에 朝鮮才媛[조선재원]의 名聲[명성]이 赫赫[혁혁]하였나이다. 그러나 꽃과 같이 날로 피어가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醉[취]하여 모여드는 蝴蝶[호접]이 한둘이 아니런 듯하여이다. 그 中[중]에 一人[일인]은 姓名[성명]은 말할 必要[필요]가 없으나 當時[당시] 朝鮮留學生界[조선유학생계]에 秀才[수재]이던 某氏[모씨]러이다. 氏[씨]는 帝大[제대] 文學科[문학과]에 在[재]하여 才名[재명]이 隆隆[융융]하던 中[중], 그 中[중]에도 獨逸文學[독일문학]에 精詳[정상]하고 또 天稟[천품]의 詩才[시재]가 있어 입을 열면 노래가 흐르고 붓을 들면 詩[시]가 솟아나는 者[자]러이다. 朝鮮學 生[조선학생]으로 더구나 아직 靑年學生[청년학생]으로 日本文壇[일본문단]의 一方[일방]에 明星[명성]의 譽[예]를 得[득]한 者[자]는 아직껏 아마 氏[씨]밖에 없었으리이다. 氏[씨]의 詩文[시문]이 어떻게 美麗[미려]하여 人[인]을 [뇌쇄]하였음은 일찍 氏[씨]의《少女[소녀]에게》라 하는 詩集[시집]이 出版[출판]됨에 그 後[후] 一個月[일개월]이 못하여 無名[무명]한 靑年女子[청년여자]의 熱情[열정]이 橫溢[횡일]하는 書翰[서한]을 無數[무수]히 受[수]함을 보아도 알 것이로소이다. 말하자면 金娘[김랑]의 萬人[만인]을 惱殺[뇌쇄]하는 美貌[미모]를 某氏[모씨] 그 筆端[필단]에 가진 것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金娘[김랑]과 某氏[모씨]와는 詩文[시문]의 紹介[소개]로 不識不知間[불식부지간] 相思[상사]하는 愛人[애인]이 되었나이다. 그러하여 爲先[위선] 雙方[쌍방]의 胷中[흉중]에 火焰[화염]이 일어나고 다음에 詩[시]와 文[문]이 되고 다음에 熱烈[열렬]한 書翰[서한]이 되고 또 다음에 偶然[우연]한 對面[대면]이 되고 마침내 핑계 있는 訪問[방문]이 되어 드디어 떼려도 뗄 수 없는 愛[애]의 融合[융합]이 된 것이로소이다. 或[혹] 新春[신춘]의 佳節[가절]에 手[수]를 携[휴]하고 郊外[교외]의 春景[춘경]을 爛漫[난만]한 百花[백화]의 熱烈[열렬]한 情熖[정염]을 돋우며 朗朗[낭랑]한 종달의 소리에 靑春[청춘]의 生命[생명]의 喜悅[희열]을 노래하고 或[혹] 瀧川高尾[농천고미]에 晩秋[만추]의 色[색]을 賞[상]하여 飄颻[표요]하는 落葉[낙엽]에 人生[인생] 無常[무상]을 歎[탄]하고 冷冷[냉랭]한 秋水[추수]에 뜨거운 靑春[청춘]의 紅淚[홍루]를 뿌리기도 하여 春去春來[춘거춘래] 三個[삼개]의 星霜[성상]을 꿈같이 달고 꿈같이 朦朧[몽롱]하게 지내었나이다. 그러나 某氏[모씨]는 天才[천재]의 흔히 있는 肺病[폐병]이 있어 몸은 날로 衰弱[쇠약]하고 詩情[시정]은 날로 淸純[청순]하여 가다가 去年[거년] 春三月[춘삼월] 피는 꽃 우는 새의 아까운 人生[인생]을 버리고 구름 위 白玉樓[백옥루]의 永遠[영원]한 졸음에 들었나이다. 其後[기후] 金娘[김랑]은 破鏡[파경]의 紅淚[홍루]에 속절없이 羅衿[나금]을 적시다가 斷然[단연]히 志[지]를 決[결]하고 一生[일생]을 獨身[독신]으로 文學[문학]과 音樂[음악]에 보내리라 하여 어떤 獨逸宣敎師[독일선교사]의 紹介[소개]로 伯林[백림]으로 向[향]하던 길에 今次[금차]의 難[난]을 遭[조]한 것이로소이다. 黃海中[황해중]에서 不歸[불귀]의 客[객]인 된 그 西洋婦人[서양부인]은 即[즉] 金娘[김랑]이 依託[의탁]하려던 獨逸婦人[독일부인]인 줄을 이제야 알았나이다. 娘[낭]은 言畢[언필]에 潜然[잠연]히 淚[루]를 下[하]하고 鳴咽[명인]을 禁[금]치 못하며 나는 고개를 돌려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나이다.
슬프다 某氏[모씨]여, 朝鮮[조선] 사람은 某氏[모씨]의 夭逝[요서]를 爲[위]하여 痛哭[통곡]할지어다. 槿花半島[근화반도]의 高麗[고려]한 江山[강산]을 누가 있어 咏嘆[영탄]하며 四千年[사천년] 묵은 民族[민족]의 胷中[흉중]을 누가 있어 읊으리이까. 山谷[산곡]의 百合[백합]을 보는 이 없으니 속절없이 바람에 날림이 될지요, 柳間[유간]의 黃鶯[황앵]을 듣는 이 없으니 無心[무심]한 空谷[공곡]이 反響[반향]할 따름이로소이다. 우리는 이러한 天才詩人[천재시인]을 잃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 恨歎[한탄]한들 미치지 못하거니와 幸[행]여나 마음 있는 누가 그의 무덤 위에 한 줌의 꽃을 供[공]하고 한 방울 눈물이나 뿌렸기를 바라나이다.
曙色[서색]이 窓[창]에 비치었나이다. 하늘과 땅이 온통 雪白[설백]한 中[중]에 永遠[영원]의 沈黙[침묵]을 깨뜨리고 우리 列車[열차]는 數百名[수백명] 各種人[각종인]을 싣고 헐덕헐덕 달아나나이다. 이 列車[열차]는 무슨 뜻으로 달아나고 車中[차중]의 人[인]은 무슨 뜻으로 어디를 向[향]하고 달아나나이까. 봄이 가고 겨울이 오니 꽃이 피고 꽃이 지며 밤이 가고 낮이 오니 해가 뜨고 달이 지도다. 꽃은 왜 피고 지며 해와 달은 왜 뜨고 지나이까. 쉬임 없이 天軸[천축]이 돌아가니 滿天[만천]의 星辰[성진]이 永遠[영원]히 맴돌이를 하도다. 저 별은 왜 반짝반짝 蒼穹[창궁]에 빛나고 우리 地球[지구]는 왜 해바퀴를 싸고 빙글빙글 돌아가나이까. 나라와 나라이 왜 적었다 컸다가 있다가 없어지며 人生[인생]이 어이하여 났다가 자라다가 앓다가 죽나이까. 나는 어이하여 났으며 金娘[김랑]은 어이하여 났으며 그대는 어이하여 났으며 나는 무엇하러 小白山中[소백산중]으로 달아니고 그대는 무엇하러 漢江[한강]가에 머무나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그러나 하고 많은 나라에 나와 그대와가 어찌하여 한나라에 나고, 하고 많은 時期[시기]에 나와 그대와가 어찌하여 同時[동시]에 나고, 하고 많은 사람에 나와 그대와가 어찌하여 사랑하게 되었나이까. 나와 金娘[김랑]이 어찌하여 六年前[육년전]에 만났다가 헤어지고 黃海[황해]에서 같이 죽다가 살아나고 이제 同一[동일]한 車室[차실]에서 마주 보고 談話[담화]하게 되었나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그대를 腹中[복중]에 둔 그대의 母親[모친]과 나를 腹中[복중]에 둔 나의 母親[무친]과는 서로 그대와 나와의 關係[관계]를 생각하였으리까. 腹中[복중]에 있는 그대와 나와는 서로 나와 그대를 생각하였으리이까. 그대와 나와 初對面[초대면] 하기 前日[전일]에 그대와 나와는 翌日[익일]의 相面[상면]을 期[기]하였으리이까. 그대와 나와 初對面[초대면]하는 日[일]에 그대와 나와의 翌日[익일]의 愛情[애정]을 想像[상상]하였으리이까. 서로 생각도 못하던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者[자] ── 그 무엇이며 서로 제 各各[각각] 제 境遇[ 경우]에 자라던 사람과 사람의 맘을 서로 交通[교통]케 하는 者[자] ── 그 무엇이리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알지 못케라. 우리가 가장 멀게 생각하는 亞弗利加[아불리가]의 內地[내지]나 南美[남미]의 南端[남단]에 휘파람하는 靑年[청년]이 나의 親舊[친구]가 아닐는지. 뽕 따고 나물 캐는 아리따운 處女[처녀]가 나의 愛人[애인]이 아닐는지.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이제 金娘[김랑]과 나와 서로 對坐[대좌]하였으니 兩個[양개]의 靈魂[영혼]이 제 말대로 鼓動[고동]하나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微妙[미묘]한 줄이 萬人[만인]의 맘과 맘에 往來[왕래]하니 이 줄이 明日[명일]에 甲[갑]과 乙[을]과를 어떠한 關係[관계]로 맺아 놓고 丙丁[병정]과 戊巳[무사]와를 어떠한 關係[관계]로 맺아 놓으리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金娘[김랑]과 내가 將次[장차] 어떠한 關係[관계]로 웃을는지 울는 지도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나는 이제는 明日[명일] 일을 豫想[예상]할 수 없고 瞬間[순간] 일을 豫想[예상]할 수 없나이다. 다만 萬事[만사]를 造物[조물]의 意[의]에 付[부]하고 이 列車[열차]가 우리를 실어가는 데까지 우리 몸을 가져가고 이 靈魂[영혼]을 끌어가는 데까지 우리는 끌려 가려 하나이다.
(一九一九年十一月[일구일구년십일월]《靑春》[청춘]第九號[제구호]─十一號[십일호] 所載[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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