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정치와 운동과 사회와 국제관계가 도덕적이려면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정치와 운동과 사회와 국제관계가 도덕적이려면
금강일보
승인 2020.06.01 17:40
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이 주제는 너무 크다. 끊임없이 다루고 진행되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듯이, 또 일상으로 경험하듯이 사람은 함께 모여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도덕이 필요하고 윤리가 세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이 혼자서 사는 존재라면 선과 악, 아름다음과 미움,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라는 판단이나 질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지켜질 것이다. 사람살이에 도덕이 세워지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본다. 무수히 많은 정치가들, 사상가들, 종교가들, 또 우리의 좋은 스승들이 한결같이 말씀하고 스스로 실천하신 것들이 바로 그것, 사람답게 살아보고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민운동을 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것들이 다 그것과 연결되어서 이루어진다.
나는 오랫동안 시민사회활동, 그 중 특히 비정부단체(NGO)나 비영리단체(NPO) 활동의 언저리에서 얼쩡거렸다. 내가 겪은 바로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능한 한 도덕스런 자신과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노력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부족하다. 약하다. 미숙하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면이 많다.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다른 무수히 많은 시민들보다 더 탁월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열악한 대우와 환경 속에서도 오래도록 그 일에 종사하는 모습은 때때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안타깝기도 하다. 때로는 무섭게 비난도 받지만, 때때로 좋은 반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여 다른 어느 곳으로 뛰어보겠다는 수단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적다.
대부분의 시민단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가 종사하는 그 일에 확신을 가지고 때로는 필생의 과제로 알고 뛰어들어 활동한다. 그래서 때때로 스스로 어떤 의에 빠질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하는 일의 의도나 의미를 퇴색시켜서도 안 되지만, 그런 일을 한다고 부정의하거나 부도덕한 일이 무마되거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덕스런 단계에 도달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스스로 담당해야 할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이용수 선생의 기자회견과 정의기억연대의 문제를 아주 깊게 생각한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이용수 선생의 기자회견문 어디에도 정의연을 부정하는 대목이 없다. 당신이 그 일에서 떠나는 것을 선언한 것도 없다. 정의연이 30여 년간 해 온 일의 의미와 성과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옳음에도 단체운영의 투명성과 도덕성은 최대한으로 확보되어야 함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므로 모든 언론의 보도나 논리자들의 말들이 마치 이 선생과 단체 간 어떤 갈등이 있고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일을 폄훼하려는 것처럼, 스쳐지나가는 말 주고받는 가벼운 비아냥거리나 웃음거리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논쟁이나 문제 지적은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한 것이지 말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2. 이용수 선생과 같이 피해를 받고 크게 상처를 안고 일생을 살아야 하는 분들이 인권운동가로 나서고, 사회와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활동하지만, 한 번 받은 상처를 치유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모두가 알 필요가 있다. 운동의 성과나 진행의 지속성도 중요하지만, 그 운동이 시작되는 피해자의 인권과 상처가 보장되고 치유되는 일을 아주 세밀한 면에서 살피고 북돋우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였다. 다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의 존엄함을 모든 활동의 기본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사람들의 열광을 받고, 역사에 기록되는 일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그 한 생명의 존엄이 존엄하게 인정되는 일일 것이다. 다만 그런 일을 할 때 일부러 누구의 상처를 이용하여 운동을 진전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세밀한 살핌이 없이 정의로운 일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바라지도 않고 계획하지도 않은 데서 많은 상처를 더 헤집고 아프게 한 것이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깨달음의 자료다.
3. 한 국가가 다른 국가나 사람에게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이제까지 많은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 개인의 일은 자연스럽게 ‘피해자민족주의’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민족과 민족,나라와 나라, 어떤 종파와 종파의 문제로 비화한다. 정의연의 일이나 피해자 분들이 바라는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이 요구했던 ‘명예회복과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과 진상 공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피해자 당사들이 더 이상 주장하고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분들은 그분들 개인의 어떤 명리를 위하여 그런 것을 주장한다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그것들이 우리 인류역사에서 다시는,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어떤 흐름이나 문화나 정치나 생활이 이루어질 때 보상이 되고 명예가 회복되는 것이지 않을까?
이제 더 이상 피해자 선생들 당사자가 이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배려하면 좋겠다. 그분들이 이렇게 선언하시면 어떨까? ‘우리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이 문제는 한일 양국 정부가 사죄와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가는 방책을 찾아주기 바란다. 우리는 이런 일이 다시없는 새로운 역사를 위한 십자가의 희생물로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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