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은이)야간비행2001-07-09
8.6100자평(8)리뷰(61)
280쪽152*223mm (A5신)408gISBN : 9788985304719
책소개
출판인이자 칼럼니스트인 김규항의 칼럼집. 지난 1998년부터 『씨네 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등에 연재했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김규항의 글은 간결하고 평이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듯한 힘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씨네 21』을 손에 넣으면 맨 뒷장에 있는 그의 칼럼을 먼저 읽는다는 독자들이 꽤 많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이처럼 널리 사랑을 받는 것은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스타일보다도 소외된 주변부에 닿아 있는 따뜻한 시선, 진보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각 글에 녹아 있는 판화체의 삽화가 보는 이의 눈을 잠시 사로잡는다.
김규항의 글은 간결하고 평이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듯한 힘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씨네 21』을 손에 넣으면 맨 뒷장에 있는 그의 칼럼을 먼저 읽는다는 독자들이 꽤 많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이처럼 널리 사랑을 받는 것은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스타일보다도 소외된 주변부에 닿아 있는 따뜻한 시선, 진보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각 글에 녹아 있는 판화체의 삽화가 보는 이의 눈을 잠시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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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 6
지식인들, 록을 고르다 = 15
리얼리즘은 리얼하다 = 19
권 장로의 천국 = 23
음악유전 = 29
그들의 댄스를 막지 마라 = 33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 = 37
폭주족을 위한 변명 = 41
나의 월드컵 관전기 = 45
사나이 한 대수 = 49
딸 키우기 = 53
조개구이 = 57
교양 = 61
가르침은 계속된다 = 65
변태 = 69
교양 2 = 73
교회 = 77
아들 키우기 = 81
동물의 왕국 = 85
염치 = 89
에덴의 왼쪽 = 93
칭찬의 가족사 = 97
영감과 빠가사리 = 101
개새끼들 = 105
오월 = 109
교회 2 = 113
톨레랑스 = 117
썩은 고기 = 121
광수 생각 = 125
음모론 = 129
어머니 = 133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 137
쪽의 거처 141
글쓰기 1.5년차의 단상 = 145
달콤 쌉쌀한 초콜릿 = 149
민들레 = 153
도량 = 157
혁명은 안단테로 = 161
조까 = 165
지성 = 169
좃선과 낙선 = 173
쾌도변명 = 177
공산품의 길 = 181
예수 = 185
너에게 수영을 권한다 = 189
캠페인 = 193
서준식을 지지한다 = 197
B급 좌파 = 201
광주 단상 = 205
파리를 떠나다 = 209
날라리들 고고하다 = 213
돌팔이 = 217
돌팔이 2 = 221
거북알 = 225
아웃사이더 = 229
꿈 = 233
통일 = 237
첫사랑 = 241
신분 = 245
돌팔이 3 = 249
이민 = 253
건달의 2백자평 = 257
어릿광대 261
장진구에게 = 265
프로 = 269
염치 2 = 273
청년들, 영화로 도망가다 = 277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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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어줍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뿐.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을 선택했고 그런 삶의 발악이 더러는(거의 가능하지 않지만) 세상에 진짜 유익을 주는 일도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내 삶을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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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법 가장 노릇을 해내고도 나는 담배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황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김단은 나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 가망성도 점점 커질 것이다. 하지만 김단은 점점 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주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점점 작아질 것이다. 결국 김단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김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강한 여자로 키워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우는 여자가 남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울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육체적인 힘도 중요하다. 태권도나 검도를 삼 년쯤 배우면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진 않을 것이다. 킥복싱도 좋은데..온갖 생각을 하며 담배연기를 뿐던 나는 재미있는 상상에 접어들어 빙그레 웃었다. 15년쯤 지나 (그보다 훨씬 빠를 수도) 김단이 제 남자 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날, 나에게 어떤 거짓말을 할까. 나는 과연 김단에게 속을 것인가, 아니면 속는 체 할 것인가. 아마 김단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여자는 남자를 속일 수 있다.-56쪽 접기 - LAYLA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 (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62쪽 접기 - LAYLA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72쪽 - LAYLA
나는 애당초 아들을 갖기를 바라지 ㅇ낳았다. 세상에 한 명의 가해자를 추가하느니 차라리 한 명의 피해자를 낳아 강하게 키우는 편이 낫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
이른바 '이념적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나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삶의 진보성. 공허한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과 생활의 진보성을 체득하는 일,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성적 차별의 문제였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 둔 채 어떤 진보도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더러운 세상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나이들이 뒤섞여 저ㅏㅁ다의 사내다움을 과시하고 경합하는 과정의 부산물인 것이다. -81쪽 접기 - LAY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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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김규항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글쓰기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과 더불어 '먹물이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에 깊이 빠지게 된다. 나는 그의 글솜씨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의 글 내용에서 한국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이 숭배하는 그 어떤 서구의 석학들로부터도 건질 수 없었던 그 어떤 소중한 깨달음을 자주 얻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글을 꿰뚫는 한 가지 중요한 정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위선에 대한 강한 혐오다. 한국에서 위선에 대한 혐오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내가 김규항에 이르러 임자를 만나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확실한 임자다.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비장함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 비장함이 글의 주제와 어울려서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때 비장함은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비장함은 그른 것이다. 김규항 글의 비장함은 대체로 옳고 좋은 것 같다. 그가 칼럼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개 진지한 것들이고, 그 비장함이 실릴 때 김규항의 메세지는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그는 비장함 속에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점점이 박는다. 그런데도 그의 글이 일기가 사소설처럼 읽히지 않는 것은, 그의 눈길이 늘 사회의 변두리에 살갑게 가닿아 있기 때문이고, 또 그의 말투를 빌면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이다. - 고종석, '회고와 전망' 중에서 - 고종석 (소설가,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화이트와인에는 치즈 안주를 먹어야 하고, 레드와인은 고기와 먹는다는 걸 아는 건 교양이 아닌 '화장발'일 뿐이었다. 와인이나 클래식을 모름에도 나 스스로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우길 수 있는 건 다 를 읽은 덕분이다. - 서민 (단국대 의과대학 교수, <밥보다 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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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규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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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비평가이자 교육운동가. 1998년 이래 뚜렷한 계급적 관점과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천착, 간결한 문체와 통찰력 있는 문장의 글을 써왔다. 근래에는 저술에 집중하면서 현대미술과 협업도 시도한다. 2003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B급좌파》 《예수전》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등이 있다.
페이스북 /gyuhang 홈페이지 gyuhang.net
최근작 : <혁명노트>,<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김규항의 좌판> … 총 25종 (모두보기)
SNS : https://www.facebook.com/gyuha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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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내가 남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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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규항을 좋아하기 시작한 책. 그래 난 a급보다 b급에 왠지 더 정이간다.
또다른세상 2014-02-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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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서평을 쓰다가, 이 책'이야말로' 추천해보고 싶어서 한번 써본다. 대학 1~2학년 시절, 소위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던 분들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은 김규항씨라고 종종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내 생각에, 강준만씨와 진중권씨는 다소 공격적으로 보였고, 유시민씨는 조금 무서웠으며(-_-;;;)고종석씨와 홍세화씨는 글 속에... 더보기
率路 2006-10-30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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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말하는 입 그리고, 세상을 담는 마음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 더보기
sigistory 2006-04-02 공감 (15) 댓글 (0)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왠지 B급 좌파 2도 기대가 되는데... 안나오남??? 구매
섭맘 2010-09-07 공감 (0) 댓글 (0)
Thank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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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새는 우익만으로는 날 수 없다.
오랫동안 가슴에 무지룩하게 얹혀져 있던 것의 실체를 알고 나니 맘이 훨씬 홀가분해 졌다. 세상을 살다 보면 불합리한 사고를 합리적인 사고로 전환시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여날 때가 있는가 하면, 정말 무거운 중량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무의식과 의식을 통틀어 원죄처럼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요즘 왜 이렇게 살까. 하고 참으로 오랫동안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80년대의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고 포스트 모던한 90년대를 살아오면서 통쾌한 미래에 대한 기약도 없고, 뭔지 모를 거미줄이 마음속에 켜켜로 쌓인 느낌이었다. 김규항의 B급 좌파를 읽으면서 내가 본 것을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왜 내 눈에는 벌거벗은 임금님만 보이는 걸까를 헛되이 고민한 줄 알겠다.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소설들에서 내가 느꼈던 열패감은 전향한 박노해를 까는 그의 시선으로 볼 때 지극히 정상적인 합리적 사고였던 것이다. 내가 대학 시절 가장 존경했던 박노해가 감방에서 나오면서 보여준 변화는 김지하의 그것보다 훨씬 혁명적이어서 그의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아직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꽂아 두고 있었다.
구사대도 모르는 교양인을 비판하는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고3 제자가 '선생님 그 책 읽어 보셨어요?'하고 물어서이다.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 추천서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득이 될까 해가 될까 물어본 거였다. 그 아이의 시선에 덮인 또 하나의 그물.
우리는 늘 내 시선과, 남의 시선으로 같이 살아간다. 그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시선만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폐적 성향을 보일 것이고, 남의 시선만을 의식한 삶은 '홧병'으로 귀결되기 십상일 듯.
이런 말이 있었다. 새는 좌우의 양 날개로 난다.고. 마치 이 말은 우익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양 들릴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처럼 보수 극우가 오랜 세월 득세한 무덤과 같은 세상에서는 작가같은 B급 좌파 조차도 엄청난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야 할 것이다.
건강한 새는 극우만으로는 날 수 없다. 좌파의 건강한 시각이 건강한 국가의 견제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파시스트를 저주하고, 중산층을 까고, 지식인을 비꼬고, 근로 대중을 지지하는 작가의 삶도 진보적 이념에 못미치는 보수적 삶을 산다고 B급이라 이름했단다. 그의 글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 접기
글샘 2003-09-23 공감(2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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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말하는 입 그리고, 세상을 담는 마음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 서두에는 좌파로 살아가는 자신의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념과 사상이라는 테두리를 떠나서 그의 용기가 오히려 돋보일 수 밖에 없다. 좌파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이 버려야만 하는 것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좌파로 살아가기 위해서 거두어 들이고 계몽시켜야 할 의무를 그는 결코 묵묵하게 혹은 조용하게 치뤄내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늘 용기와 깨어있는 지성을 말한다.
리뷰와 조금은 상이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광고를 무척 싫어한다. TV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점들 보다, TV가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집단지성'의 획일화를 싫어한다. 광고는 그 집단 지성과 획일화를 위해 그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지독히도 전략적인 사기다. 생산과 그 생산을 위한 인간이 중심이 되지 않는 광고는 늘 소비와 집단 최면을 향해 치닫는다. 우습게도, 골때리게도 나 역시 광고라는 큰 테두리 안의 직업군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광고가 가지고 있는 파워와 영향력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광고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과 직군과 직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의 직업과 역량을 부끄러워해 본 적은 없었지만, 반대로 그것에 대한 궁극적 우상화나 어떤 대단한 직업이어서 여타의 추종을 받으면서 나 이런거 하는 사람이다.. 라면서 말해 주는 것을 많이 부끄러워 한다. 친한 친구와 선전과 광고, 광고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설프리만치 단순한 설전을 펼친 적도 있었지만, 짝다리 짚고 서 있는 내 자세로써는 글쎄. 그저 과자 한 봉지, 컴퓨터 한 대, 자동차 한 대를 팔아치우기 위해, TV로 모여드는 '멍'한 상태의 소비자를 찾아 다니는 고도의 상술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가 이야기한 것 처럼, 소위 자본주의의 급물살을 타게 된 90년 대 이후로 우리나라는 '프로'라는 타이틀로 광고대행사의 AE라는 전문가들로 불리우며 찬미받는 존재를 양산하고,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광고라는 노선에 그들을 선봉장으로 이끌며 만들어온 사회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월드컵을, 아니 2002년 대한민국을 월드클래스로 만들어 준 선봉장들 역시 그들이었고, 여전히 그들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들만의 성전을 꾸미며 짐짓 프로이며, 지식인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도 그들이다.
문자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저, 직업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적어도 광고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화이트 칼라에, 최상위 직업군에, 미적, 예술적, 과학적, 심미적인 모든 것들을 알고 있고, 그렇게 우월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리뷰로 돌아와서,(-_-;;)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작가의 각 칼럼이 게재된 때가 1999년도 부터 2001년도 경 까지이니 2006년도의 현재와는 조금 다른 상황으로 인한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으나, 그는 분명 통쾌하리만치 글을 잘 토해낸다.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 구사대가 뭐지?"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라, 회사를 구하는 대다 이건데, 어쨌든 그래서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는 어물쩍(방송용어로 순발력이라고 하는) 넘어간다. '구사대'라는 말을 모르는 30대 여자와 40대 남자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 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중략)..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 교양 p61~64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중략)..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 염치 p89 ~92
폐업에 나선 의사들은 "이럴 바에는 개업할 돈으로 차라리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업하지 말고 카페나 당구장을 하면 될 것이다.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인간은 의사보다 하등하단 건가. 자신들이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의사들의 이중의식은 그들의 권리주장의 공정성을 손상한다.. - 돌팔이2 p221 ~224
내 일생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이민이 등장한 건 지난 여름 어느 날 후배 녀석에게서 캐나다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 이야기를 듣고서다. 주 5일 노동으로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집을 마련하는 데 반생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교육과 의료가 무료이며 도무지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광활한 자연 곁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은 이민에 대해서라면 어린 시절의 반감만 존재하던 나를 뒤흔들었다... - 이민 p253 ~256
세상을 보는 눈은 반드시 신문의 경제면을 펼쳐들고 부동산의 흐름과 주가 동향과 저축 금리를 따지며 '흐흠...'하고 손익계산을 할 수 있는 능력만은 아닐 것이다. 나를 돈독히 다스리고, 내 가족을 살피며, 내 동료와 내 주변의 지인들의 삶을 참견하고, 그리고, 더 크게는 나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삶을 보다 합리적이고 투입에 대한 충분한 산출이 나오는 세상을 만들며 살아가는, 그런 것들을 돌보는 눈이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닐까.
30만원, 50만원, 100만원짜리 적금을 매달 부으며, 20~30년을 오로지 내 집 마련을 위한 융자 갚아나기와 아이들의 교육비로 평생 모으는 돈은 그렇게 어찌보면 허망할 수도 있는 우리의 삶은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 라는 핑계로 하루를 보내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을 때, 우파의 소신보다 어렵고 힘든 좌파를 택하였다는 그의 말이 담긴 'B급 좌파'라는 책은 오히려 반대로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더 잘 보이고, 어떻게 더욱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일까. 도무지 이 사람은 너무 높다.
- 접기
sigistory 2006-04-02 공감(1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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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란 ‘사회적 분별력’일 것이다.”
매주 몇 시간씩 정례적으로 시외버스나 지하철을 타다보니, 잠자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요즘 몇 권의 책들을 그 안에서 읽는다. 맥락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른 것이 김규항의 B급 좌파였다. 여러 단어들과 생각들이 오고갔지만 특히 강한 인상으로 새겨진 것은 “교양”이란 단어인 것 같다. 교양이란 무릇 생산노동에서 벗어난 유한계급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던(여가를 즐기던), 지적유희가 아닌,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그럼, 이런 교양은 어디서 길러질 수 있을까?
한 예로, 헨티히는『왜 학교에 가야하나요?』에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통틀어 “교양”이라 한 바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다양한 능력과 보편적 지식을 습득하고, 어떤 것이 선하고 좋은 것인지를 알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생활습관을 지닌 이들과 사귈 수 있고, ‘진리’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철저히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뽑지 않을 분별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박정희와 전두환 혹은 그와 유사한 이들을 골라낼 수 있는 분별력.
이런 최소한의 기능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립학교들이 건학이념이니 교육이념이니 이야기하고, 사립학교법을 반대하며 학교폐쇄 운운하는 것이 요즘 영 불편하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단지 현 경제적 소유물과 그것을 위한 ‘욕망’일 뿐이지 건학이념이나 교육이념은 아닐 것이다(테두리속에 갇힌 학교이념 말고 그것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김규항이 이 책에서 ‘욕망’에만 눈먼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비판한 바처럼, 극히 일부를 뺀 대부분의 종교계 사립학교들 역시 교육이란 외피를 쓴 ‘욕망’의 덩어리가 아닐까 한다(물론 그렇지 않은 소수의 학교에겐 미안한 말이다). 그리고 오히려 “교양”을 위해 포함될 것이 더 많은(그런 점에서 공정치 못하다고 보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두고 친북교과서니 하는 이들은 정말 “교양이 없는 이들”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학교와 대학이 이런 최소한의 일들을 못하니 그와 같은 계몽주의자라 자처하는 이들의 글이 여전히 소비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만일, “자본주의 사회의 학교란 원래 다 그런 곳이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위의 전제는 부질없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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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dung 2004-11-21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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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일갈
김규항은 글을 잘 쓴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은 참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고, 자기가 혐오하는 것들을 독자 역시 혐오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면 그는 정말로 뛰어난 글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의 분노에는 날카로움이 있고 그의 냉소에는 오만함이 없다.
이것이 그의 글을 다른 글쟁이들의 그것과 구분짓는 명확한 경계선이다.
그 냉소의 대상에 때로는 나 역시 포함되지만, 뭐 어떠랴. 분노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씩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있는 곳의 어쩔 수 없는 차이이므로... 일찍이 샤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내가 서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내가 가진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지지 않은 자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뭔가 이 세상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다면 이 B급좌파의 일갈을 들어보라.. 그의 글은 당신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맹렬히 자극할 것이다.
P.S '개자식''돌팔이''교양'등의 글은 정말 카타르시스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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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hego 2005-09-2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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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사준 생일선물
한 달 전쯤이었다. 본가에서 오래된 책 더미를 정리하다 반가운 책을 만났다. 2004년 생일날 대학 친구가 선물한 책이 나왔다. 안표지에는 손수 쓴 편지가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져있다.
“이 책은 ‘공부’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만, 삶과 이념에 대해서는 고민하게 해줄 것 같다.”
“살고 있는지, 살아지고 있는지, 반성하자. 그리고 공부하자.”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들어 자취방으로 들고 왔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한 장 넘긴다. 잔디밭에서 마시던 막걸리 냄새가 책장 사이에서 나는 것 같다. 학업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쪽)
대학생 때 좌파가 되고 싶었다. 나도 해방, 너도 해방, 우리 모두 해방. 무엇보다 자기 해방. 해방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저 구절이 참 멋스러웠다. 하지만 저게 마냥 멋지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낸다고? 그저 내 양심 하나 건사하는 일도 쉽지 않은 게 어른의 삶이었다.
좌파를 선망했지만 책을 게을리 읽었던. 좌파를 닮기에는 품성이 덜 자랐던. 건전하기에는 자기 성찰이 부족했던. 친구가 선물해준 이 책도 그 때는 그냥 띄엄띄엄 읽었다. 그러다 졸업하고, 군대 가고, 취직하다보니 정신없이 뭔가에 휩쓸려왔다. 띄엄띄엄 살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진보적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었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반성이 없는, 공부가 없는. 이제와 다시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참 아깝다. 그 때 이 책을 공들여 읽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방향이라도 잘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B급 좌파”는 김규항이 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쓴 칼럼을 모은 책이다. 시대가 좀 지났지만 지금도 읽을 만한 책이다.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글쓴이는 시대를 앞서 사회를 분석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학 울타리를 살짝만 벗어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즐겨 썼다. 전체주의, 집단주의가 일상을 여전히 강력히 지배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여전히 힘이 있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40쪽)
지금은 누구나 다 이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들쥐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지금도 썰렁해진 광장에서 중국산 태극기를 흔들며 과거의 망령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
“어쭙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일 뿐.” (11쪽)
내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식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어영부영 한심하게 보내는 삶을 경계하는 위기감은 항상 갖고 있다. 배움을 줄만한 사람이 아니면서 누군가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작고,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잔뜩 겁만 많아져서 일단 나부터 먼저 ‘채우기’ 바쁘다.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숨 가쁜 인간이 되었다. 글쓴이는 스스로 ‘B급 좌파’라고 부른다. 나는 좌파마저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양심을 잘 건사하는 건전한 우파가 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어중간하게 둥둥 떠다닐 뿐.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둔 채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83쪽)
대학생 때 자칭 ‘진보’라면서 우스꽝스러운 짓은 다 하고 다녔다. 사내다움을 내세우고, 사내다워지고 싶어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듯 포장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목소리만 크고 허세 가득했던.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민망한 짓인 줄 알면서도 남자 아이들 가득한 교실을 휘어잡으려고 스스로 사내다운 교사로 포장한다.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인식은 정밀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여성혐오”라는 단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성차별 인식 시계는 아마도 10년 전 대학생 시절 그 언저리에 멈춰있는 것 같다. 제대로 찾아 공부한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실천이 안 된다. 스스로 좌파, 진보로 살아갈 자신을 잃어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페미니즘을 보는 내 태도다.
학생 때 페미니즘을 접하긴 했지만 무척 불편해했다. 지금도 역시 불편하다. 아니, 차라리 겁내고 있다고 해야 정직할 것 같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페미니즘 글들을 보면 종종 지나치게 적대심을 강조하고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니, 차라리 남자로 태어난 게 그냥 범죄라고 하지?’ 사실 이건 참 웃긴 태도다. 노동 문제, 현대사 문제로 토론할 때 ‘네 주장은 너무 과격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답답해했던가!
페미니즘은 내게 숙제다. 여기서 그냥 뒤돌아선다면 나는 그냥저냥 반성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을 테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적어도 대충 살지는 않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 김규항 같은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한국 평균 남성을 훌쩍 뛰어 넘어 시대를 앞서갔다. 좌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 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 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60쪽)
문제는 자기 성찰이다. 어떤 인연이 닿아 지금이라도 이 책을 다시 들여다봐서 참 다행이다. 지식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고민하게 한다. 콧잔등에 옛날 잔디 냄새가 잠시 스친다. 그 때의 나를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와서 그런 거창한 꿈을 바로 가질 수는 없으니, 일단 나부터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자. 이 책은 참 날카롭다. 20대의 나는 그 칼날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30대의 나는 이리저리 찔려서 많이 아프다. 날카로운 만큼 나와, 우리와, 이 사회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요즘 쓴 글을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절 김규항은 글을 참 잘 썼다.
“사람들은 이제 오월 광주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광주의 ‘구체적 실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가슴 속엔 민주, 열사, 항쟁, 성지, 기념식 같은 ‘역사적 추상’만 남았다. … 이제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오월의 ‘구체적 실감’은 휴일 오후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나 어렴풋이 떠올려질 뿐이다. 이제 오월의 정신은 여전히 그 도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는, 여전히 세상을 응급실로 파악하는 몇몇 어리석은 사람들의 썩어진 가슴 속에만 살아있다. 더러운 조선의 역사는 오늘도 장강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풍선 하나씩 손에 든 채 놀이동산과 패스트푸드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기자기한 목소리로 어린이날과 스승의 날을 읊조리며 그들의 오월을 사뿐히 통과한다.” (112쪽)
기억난다. 이 구절을 읽으며 눈시울이,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다음 해였던가. 망월동 묘지 갔다가 왠지 너무 슬퍼져서 눈물 콧물 흩뿌리며 흐느꼈다. 기억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는 현대사 수업시간에 지금까지 5.18을 얼마나 ‘알량하게’ 다뤄왔던가. 80년 5월 광주는 눈물 없이, 심장을 짜내는 고통 없이 그냥 흘려 넘겨서는 안 된다. 내가 학생 때 이 구절을 보고 배운 것. 그것을 앞으로 나의 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학생들을 망월동에 모두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니, 어떻게 해야 그 날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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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탕아 2017-03-19 공감(5)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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