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9

書評:李相日『帝国日本の植民地を歩く』(崔吉城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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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吉城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書評:李相日『帝国日本の植民地を歩く』(崔吉城著、花乱社、2019)
私は本書を読みながら韓国の反日主義者たちが崔吉城教授を親日派とすることを理解する。私自身が如何に反日主義者であるかということにもなる。ページを紐解きながら日帝植民地史を思い出し恥辱が浮上し、総督府庁舎の<撤去>が<破壊>という認識にいたっては驚く。
崔教授は日帝植民地研究者である。欧州の大国がアフリカやインド、東南アジアなど未開発地域を植民地にしたのは、先進諸国の発展と実力が後進国を圧倒し、領土を侵略し、経済的に開発したのは種族を超えたものとして理解する。そこに人間云々と考慮する余地はない。しかし後進な<倭国>が一足早く近代化し、優位にたって先進国の朝鮮を襲い、王朝の脈を切り、総督府と憲兵隊の威圧で朝鮮語を抹殺し、創氏改名した。その流れでは朝鮮半島は日本の領土、今の沖縄のようになるほどであった。日本植民地36年は(註:実は35年も足らず)、事実だけではなく、恥辱である。

著者も反日主義者隊列に一度割り込まなければならない。客観的とか研究の次元という言い訳はいらない。<歴史的事実と感情的な真実の間>と考えて欲しい。<事実>だけ注視しては情緒的な真実を理解し難い。実際という埃は飛ばされてしまう。もっと大局的に見て欲しい。それが知的成長である。
私(李)は日韓の「事実と真実」を論じている。私は知識を科学的に整理するWisswenschaftをドイツで勉強した知識人であり、情緒と哲学のイデオロギーから物事と現実を客観的に見ており(評論活動50年)、進歩精神に基づいている。保守意識とは距離が遠い。私は日本の植民地史とは無関係、近隣関係で自由でよい。

ただ私は保守反日主義者の名分を借りて極右と極左の二分論理を使ってみた。
崔教授は被植民地出身の劣等意識を伏せて、日本の権威を借りて、植民地の歴史の英雄と犠牲者を介して、植民地支配と被支配の間に、いわゆる植民地の歴史の遺物を見ている。それは揺れるアイエンディーティー、コンプレックスから中立性と客観性を借りての研究に過ぎない。仮面をかぶったに過ぎない。本人自ら植民地の歴史の証人であろうとし、さらに日韓の間で生け贄になって神話的人物になろうとする。
植民地研究は彼の突破口である。中立、客観的調査の姿勢といい、植民地の<英雄>を調べている。イェーツのような詩人、被植民地人でありながら、植民地官僚になり処刑(アイルランド独立幇助大逆罪)されたケースメント(R. Casement1864-1916)のような人物を発掘している。それはまさに崔吉城教授自身を反射投影している。
 私は、植民地問題は、謝罪と許し、中立的、客観的、研究によって越えていくべきと思う。崔吉城教授が標榜する学術中立性を評価する。容易ではない。慰安婦問題は戦争中に起きた戦争犯罪とみるのが正しい(20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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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상일, 『제국 일본의 식민지를 걷다』(최길성 지음, 화란사, 2019) --- 나는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반일 주의자들이 최 요시키 교수를 친일파라고하는 것을 이해한다. 내 자신이 얼마나 반일 주의자인가하는 것에도된다. 페이지를 紐解き하면서 일제 식민지 역사를 기억 치욕이 떠올랐다 총독부 청사의 <철거>가 <파괴>라는 인식에 이르러서는 놀란다. 최 교수는 일제 식민지 연구자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 등 미개발 지역을 식민지로 한 것은 선진국의 발전과 실력이 후진국을 압도하고 영토를 침략하고 경제적으로 개발 한 것은 종족을 초월한 물건으로 이해한다. 거기에 인간 운운 고려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후진적인 <왜국>이 한 발 앞서 근대화하고 우위에 서서 선진국 조선을 습격 왕조의 맥을 끄고 총독부와 헌병대의 위협에서 조선어를 말살하고 창씨 개명했다. 그 흐름은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지금의 오키나와처럼 될 정도였다. 일제 36 년은 (주 : 사실 35 년 미만) 사실뿐만 아니라 치욕이다.

저자도 반일 주의자 대열에 일단 중단해야한다. 객관적이나 연구의 차원이라는 변명은 필요 없다. <역사적 사실과 감정적 인 진실 사이>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실> 만 주시하고는 정서적 인 진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로는 먼지가 날려 버린다. 더 대국적으로 보면 좋겠다. 그것이 지적 성장이다. 나는 (이)은 한일간의 '사실과 진실'을 논하고있다. 나는 지식을 과학적으로 정리 Wisswenschaft 독일에서 공부 한 지식인이고 정서와 철학의 이데올로기에서 사물과 현실을 객관적으로보고 있으며 (평론 활동 50 년), 진보 정신에 근거한다. 보수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와 무관 이웃 관계에서 자유로운있다.

단지 나는 보수 반일 주의자의 명분을 빌려 극우와 극좌의 이분법 논리를 사용해 보았다. 최 교수는 피 식민지 출신의 열등 의식을 덮어 일본의 권위를 빌려 식민지 역사의 영웅과 희생자를 통해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 이른바 식민지의 역사 유물을보고있다. 그것은 흔들리는 아이 엔 디티 컴플렉스에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받아 연구에 불과하다. 가면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 식민지 역사의 증인이든, 심지어 한일간로 제물이되어 신화 적 인물이 되고자한다. 식민지 연구는 그의 돌파구이다. 중립 객관적 조사의 자세라고 식민지의 <영웅>을 조사하고있다. 예이츠와 같은 시인, 피 식민지 인이면서 식민지 관료가 처형 (아일랜드 독립 방조 대역죄) 된 케이스먼트 (R. Casement1864-1916) 같은 인물을 발굴하고있다. 그것은 바로 최 요시키 교수 자신을 반사 투영하고있다. 나는 식민지 문제는 사과와 용서, 중립적, 객관적 연구에 의해 넘어 가야 할 것 같아요. 최 요시키 교수가 표방하는 학술 중립성을 평가한다. 쉽지 않다. 위안부 문제는 전쟁 중에 일어난 전쟁 범죄라고 보는 것이 옳다 (2020.6.28). --- 나는 본서를 읽으면서 한국의 반일 주의자들이 최 요시키 교수를 친일파로 이야기를 이해한다.나 자신이 얼마나 반일주의자인지도 모를 일이다.페이지를 풀면서 일제 식민지사를 생각해내 치욕이 떠오르면서 총독부 청사의<철거>이<파괴>라는 인식에 이르러서는 놀란다. 최 교수는 일제 식민지 연구자이다.유럽 강국들이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 등 미개발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선진국의 발전과 실력이 후진국을 압도하고 영토를 침략해 경제적으로 개발한 것은 종족을 넘어선 것으로 이해한다.거기에 인간 운운하며 고려할 여지는 없다.그러나 후진인 <왜국>이 한발 앞서 근대화하고, 우위에 서서 선진국 조선을 습격하여 왕조의 맥을 끊고, 총독부와 헌병대의 위압으로 조선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하였다.그 흐름에서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지금의 오키나와와 같은 상황이 될 정도였다.일본식민지36년은(주:사실 35년도 안 돼) 사실뿐만 아니라 치욕이다. 저자도 반일주의자 대열에 한 번 끼어들어야 한다.객관적이라든가 연구의 차원이라는 변명은 필요 없다.<역사적 사실과 감정적 진실 사이>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사실>만 주시해서는 정서적 진실을 이해하기 어렵다.실제라는 먼지는 날아가 버린다.좀 더 대국적으로 봐줬으면 좋겠어.그것이 지적 성장이다. 나(이)는 일한의 「사실과 진실」을 논하고 있다.저는 지식을 과학적으로 정리하는 Wisswenschaft를 독일에서 공부한 지식인으로 정서와 철학의 이데올로기에서 사물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았고(평론활동 50년) 진보정신을 바탕으로 했습니다.보수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나는 일본 식민지사와 무관하며 근린관계로 자유롭고 좋다.다만 나는 보수 반일주의자의 명분을 빌려 극우와 극좌의 이분 논리를 써봤다. 최 교수는 피식민지 출신의 열등의식을 덮어두고 일본의 권위를 빌려 식민지 역사의 영웅과 희생자를 매개로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 이른바 식민지 역사의 유물을 들여다보고 있다.그것은 흔들리는 아이엔디티, 콤플렉스에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빌린 연구일 뿐이다.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본인 스스로 식민지 역사의 증인일 것이고, 나아가 한일 간에 제물이 되어 신화적 인물이 되려 한다. 식민지 연구는 그의 돌파구다.중립, 객관적 조사의 자세라 하여 식민지의 <영웅>을 조사하고 있다.예이츠 같은 시인, 피식민지인이면서 식민지 관료가 되어 처형(아일랜드 독립방조대역죄)된 케이스먼트(R. Casement 1864-1916)와 같은 인물들을 발굴하였다.그것은 바로 최길성 교수 자신을 반사 투영하고 있다.  나는 식민지 문제는 사죄와 용서와 중립적 객관적 연구를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최길성 교수가 표방하는 학술 중립성을 평가한다.쉽지 않다.위안부 문제는 전쟁 중 일어난 전쟁 범죄로 보는 게 옳다(20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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