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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27 June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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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체계화하면서 이론적 입장이 기존의 것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도 계속해서 사유를 확장하려고 노력 중인데 현대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너무나도 어렵다. 아직도 계속해서 방향을 찾고 있지만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확신은 없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속에서 사회 유형은 아시아적 경로와 유럽적 경로로 나뉜다. 전근대 원시공산제 - 노예제 - 농노제라는 사회구성체의 아시아적 경로와 유럽적 경로가 각각 진행되면서 자본제로 향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에서부터 책의 원고를 다 쓰고 나서 계속해서 의문이 든다. 기본적으로 나는 아시아 사회가 유럽과 동등한 수준의 사회 발전 단계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차이는 유형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전제하고 책 원고를 썼는데 과연 정말 아시아 사회가 같은 노예제•농노제 단계를 거쳤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근대사회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과 회의가 있는데 중요한 점은 내 이론적 틀에서 유럽의 봉건적 영주와 비교되는 대상은 아시아의 전제국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봉건적 영주계층이 농노제의 전개 과정 속에서 사멸해가듯이 아시아의 전제국가 또한 그 능력을 제한 당하며 근대를 향해 갈수록 사멸해 간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서유럽의 봉건제가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근대국가를 비롯한 근대 자본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성숙해진다. 봉건영주의 사멸 속에서 근대국가가 자라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국가만을 놓고 비교해 보았을 때, 아시아의 (전제)국가는 사멸해가는 추세를 보이는데 반해 서유럽의 (근대)국가는 전쟁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고 중앙집권화하면서 확장되는 추세를 보인다. 사실상 아시아적 전제국가는 사멸해 가는 와중에 서구적 근대처럼 그것을 대체할 무엇을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한다. 적어도 서구의 근대국가에 대항할 무언가를 창출해내지 못한다.
전쟁 비용이든 무엇이든 유럽의 (근대)국가는 늘어나는 재정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중상주의든 중농주의든 계속해서 재원을 확대하려 채권도 발행하고, 은행제도도 도입하고, 생산성의 증대를 유도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의 여러 방법들을 동원한다.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팽창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아시아적 전제국가는 총액주의에 기반해 계속해서 자신의 지출을 줄이고 재정을 깍는다. 전제국가는 무언가 공급을 조직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반을 확대시킬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조선왕조든 청왕조든 마찬가지이다. 사실 지금의 한국 정부 또한 마찬가지이다. 경제개발에 매진한 박정희 정부조차도 직접적으로 재정을 사회에 투자하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대출을 자꾸 권유하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한국은 국가부터 비용을 들일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사실 나는 근대 제국주의가 필연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확장되어가는 국가가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멸해가는 국가가 있다고 할 때 전자가 후자를 병탄하는 것은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후자가 전자에 대항할 수 있도록 전자로 전환되든지 전자에게 병탄되어 근대국가의 틀 속으로 포섭되든지 둘 중 하나인데, 어느 것이나 사실상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아시아적 경로와 유럽적 경로라는 유형적 차이는 이 지점에서 양적 차이로 전환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가 저발전한 사회인 아시아적 사회와 시민사회가 고발전한 유럽적 사회라는 양적 차이로 유형적 차이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근대 사회 속에서 아시아적 사회와 유럽적 사회의 차이는 양적인 차이지, 질적인 차이가 되지 않는다. 책의 원고에서는 이렇게 적었는데 사실 이 부분도 지금 고민이 많다. 유형적 차이가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시아 사회가 시민사회의 건설에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국 사회가 아시아형 사회에서는 그나마 가장 선진국에 가까운데 여기에서도 시민사회의 건설은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
아무튼 이렇게 제국주의를 통해 형성된 근대국가가 자신의 기반인 원자화된 개인과 일부일처제적 가족공동체를 창출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주로 기능했던 것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이라 생각한다. 물론 두 이념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족주의가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고 근대국가가 기능할 수 있는 공동의 영역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면, 사회주의는 내부적으로 근대적 가족공동체를 비롯한 요소들을 형성하여 근대에의 적응을 가로막을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근대화의 논리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은 전세계적 규모에서는 1945년 이후부터 지금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모든 지역에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이렇듯 근대국가는 원자화된 개인과 그것의 결합체인 가족공동체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계속해서 창출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시민사회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집단, 즉 중간집단인 공동체가 근대국가의 지배 속에서 확장되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해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경향 중 어느 것이 우세한가는 당대의 조건에 달려 있지만, 기본적으로 근대국가와 자본제 자체가 원자화된 개인을 산출해내는 경향성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마르크스의 입론에서는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원자화된 개인에 대한 지배를 행하는 아시아적 전제국가와 사회적 중간집단이 국가에 점차적으로 포섭되면서 개인에 대한 통제력을 계속해서 확장시키는 근대국가는 개인을 원자화시키고 그 원자화된 개인에 대한 지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유럽적 조건에서 탄생한 근대국가가 유럽형 사회를 아시아형 사회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근대사회의 전개는 마르크스에게 있어 ‘아시아화’의 진행이라 할 수 있겠다. 부르주아의 공화정은 원자화된 개인의 위에 코사크적 폭력을 지닌 국가가 전제주의적으로 자리하는 “코사크적 공화정”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언제든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분명히 이런 국가의 전제주의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은 자유로운 개인이 아닌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이 되고 있으며, 그 파편화된 개인들의 열정적인 지지, 포퓰리즘이 만들어내는 보나파르트와 그의 권위주의적인 정부들이 사회를 지배한다. 마르크스가 옳은 것인가?
여기서 고민의 여지가 생긴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만만한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근대국가 속에 내재한 ‘코사크적 공화정’을 통찰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장기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공화정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통찰해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18일>이 지니는 이론적 기여가 여기에 있다. 그 순환과정을 통찰해낸 것. 문제는 그 순환과정 속에서 무엇이 축적되는가 하는 점이다.
자본의 순환이 가치의 축적에 기반하고 있듯이, 정체(政體)의 순환은 무엇의 축적에 기반하고 있는가. 생각하는 바는 있지만 확실하게 이렇다고 말할 정도의 답변은 아니다. 가치의 축적과 순환 과정에서 점차 그것을 방해하는 조건들이 성숙해지고 그에 따라 가치의 실현을 강제하기 위해 공황이 터지듯이 근대국가의 순환 속에서도 그 재생산을 막는 동일한 과정이 나타나고 그 결과가 보나파르티즘이라 보고 있다는 점만 지적하면 될 것 같다. 근대 자본제 사회에서 보나파르트는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어찌됐든 전세계가 사회의 중간집단이 소멸하며 원자화된 개인을 전제주의적으로 지배하는 근대국가, 보나파르트 독재 체제로 나아갈 것이라 보았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그러한 국가권력을 타도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는 이미 자신의 입론 속에 그러한 경향에 반대되는 경향 또한 존재함을 주장한다. 이윤율 저하와 그것을 막아 이윤율 저하가 단순히 “경향”으로만 나타나게 하는 조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 원환(圓環)의 고리 속에서는 어느 것이 더 우선인지 알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우리 시대는 어떤 경향이 더 강해지고 있는 시대인가. 지금은 권위주의의 득세가 시대적 흐름 같지만 그 속에서 무엇이 축적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그 향후의 방향도 명확해질 것이다. 시대로부터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 여기에 자본제와 근대국가 간의 관계까지 고민의 대상으로 넣으면 더 복잡해진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 둘은 공생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제의 발전이 근대국가를 해체시키는 경향도 낳기 때문이다. 이런 것까지 넣어서 고민하게 되면 정말 머리가 아프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직도 답을 찾고 있다. 이게 마무리 되어야 비로소 책의 결론이 보다 명확해질 수 있을텐데. 내 스스로가 아직까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서 책 원고를 보고 있으면 착잡하다. 전세계적 차원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아시아 사회의, 특히나 그 선두주자인 한국 사회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계기를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다. 아직 답이 명확하지가 않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현재 상황의 추이를 보고 이론화해야 하니 쉽지가 않다. 고민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의 시민사회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실험해보기도 해야 하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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