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권 12 hrs · 김종철 선생님을 보내며
어제 오늘 선생님 가시는 길에 함께 했다.
영광 산속에서 처음 비보를 들었을 땐 너무도 놀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막상 장례식장에 오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수많은 동지와 지인들이 장내를 채워서일까.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해 살고는 “난 여기까지야” 하고는 마음 편히 저 세상으로 가신 것 같았다.
사실상 김종철 선생님은 남한 땅의 거의 유일한 생태사상가였다. 국민 사이에 그리고 정치권에 생태주의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게 한 강력한 인플루언서였다. 처음엔 생경했지만 지금은 친숙해진 말인 기본소득, 지역화폐 등이 대표적이다.
내가 감옥에서 야생초를 통해 생태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녹색평론이 없었다면 내가 몸으로 체득한 그 감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대권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야생초 편지> 역시 김종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감옥에서 야생초를 통해 생태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녹색평론이 없었다면 내가 몸으로 체득한 그 감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대권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야생초 편지> 역시 김종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샘은 감옥에서 갓 나온 나를 시민 사회에 데뷔시켜준 은인이기도 하다. 2001년 11월 <녹색평론 10주년 기념 강연회>에 생태사회계에 완전 무명인 황대권을 메인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파격이었다. 중요한 강연회이니만큼 편집진에서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김지하 시인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허나 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를 지목했다고 한다. 무슨 근거로? 나는 출소 직후 앰네스티 초청으로 2년 동안 유럽에 있다가 강연회 직전에 귀국했다. 샘이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곤 내가 영국에 있을 적에 녹색평론에 기고한 글 두 편이 전부였다. 아마도 그 글을 보시고 뭔가 들어볼만한 것이 있을 거라고 자신만의 직감을 믿은 것 같다.
강연회장에는 한국에서 생태운동과 관련해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무명의 인사가 너무도 귀중한 자리에서 첫 인사를 올리게 된 셈이다. 강연 말미에 잡초와 함께 하는 농사 얘기를 하면서 감옥에서 보낸 편지 구절 일부를 인용하였다. 이것을 보고 어느 귀 밝은 출판인이 내게 접근하여 책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야생초 편지>가 탄생하였다. 이후로 샘은 나를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 명단에 끼워주시어 지금까지 함께 해왔다.
샘과 함께 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한 <오래된 미래>의 판권과 관련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와의 분쟁이었다. 양쪽의 얘기를 들어보면 각자의 입장이 이해되지만 헬레나 여사가 신의를 저버린 것만은 분명했다. 샘은 싫어하시는 것에 대해 적대감 표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내 앞에서 육두문자를 써 가며 분을 삭이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 얼마 후 헬레나 여사가 나를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초청한 것이었다. 샘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잠시 고민했지만 장소가 내가 꼭 가고 싶었던 호주의 ‘크리스탈 워터스 공동체’ 근처에 있는 Byron Bay였다. 크리스탈 워터스 공동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일정을 핑계로 거부했을 것이다. 영어도 신통치 않은 사람이 공연히 국제 강연회까지 쫒아가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샘에게 말도 않고 열흘 전에 출국하여 크리스탈 공동체와 강연회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돌아왔다. 다녀와서도 괜히 화만 돋울 것 같아 그냥 호주에 다녀왔다고 얘기하고 말았다. 사실 <오래된 미래>는 오랫동안 녹색평론사의 자금원 역할을 했기 때문에 판권을 잃은 것은 크나 큰 타격이었다. 어찌 되었건, 샘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는 헬레나 여사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다 자기 나름대로 생태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서 빚어진 해프닝 정도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샘의 유골함은 명진 스님의 소개로 삼각산 금선사에 안장되었다. 거기에는 사회운동을 하시던 분들과 장기수 어르신들이 함께 안장되어 있고 자택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안성마춤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주지 스님도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하신 분이라 샘을 모시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금선사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경내를 둘러보니 샘께서도 맘에 들어 하실 것 같다. 아래에 사진을 첨부했는데 영정 사진이 놓인 탱화가 보기 드문 걸작이었다. 주지스님의 지휘로 만들어졌다는데 탱화 속에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이 다 들어 있다. 주지스님은 탱화가 몇 십 년 후에는 문화재가 될 거라고 농을 하신다.
샘, 사랑합니다.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났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샘께서 남겨놓은 과제들은 전국의 녹색평론 독자들과 편집위원들, 그리고 수많은 녹색동지들에게 맡겨두십시오. 생태평화를 앞당기기 위해 남은 힘을 다하겠습니다.
552You, 회리, 강길모 and 549 others
25 comments
현영애
저도 어제 다녀왔어요...혼자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는데 사람들과 함께 조문하며 말씀 나누니 기운이 좀 나더라구요...장례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생명평화 마을로 선생님 뵈러 가고 싶습니다
원혜덕
감사합니다.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경미
잘 읽었습니다!
이생에서 열심히 사신 만큼 편히 쉬실 거예요 ㅠ
김영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종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Tai Kim
_(())_
이복자
감사합니다. 두 손 모읍니다
이상옥
삼가 김종철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민가령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에 위로를 받습니다.
손장희
훌륭한 어르신이시니 더 좋은곳으로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김혜정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양시영
함께 합니다...!
윤차차로
남은 사람의 빚진 마음을 이끌어 뒤를 잇고, 완성하라는
기회와 위로 감사합니다.
이태옥
편안하시길...
김혜원
장례식장에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한채 울고 있었는데...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류기석
위로의 글 감사합니다.
한웅
고인의명복을빕니다
백승종
감사합니다, 황 선생님!
조성대
<오래된 미래> 판권을 다시 녹평사로 찾아올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선생님이 안계시는 녹평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이젠 남은 이들이 그 유산을 잘 지켜나갈 방법을 찾고 다방면에서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허인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소중한 인연과 이별이군요~
윤경빈
생태운동 대중화에 헌신해온 김종철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_()_
Sandeul Ayoung Chu
김종철 선생님이 본향에서 안식을 취하시길 바라며, 남기신 뜻을 새기고 따르겠습니다 두 분의 일화를 통해 두 분 선생님을 더 가깝게 느낍니다. 모신 곳, 사람, 탱화 모두 참 귀하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
Hun Jung Cho
1 hr ·
몸으로 뵌 적이 없는 분. 멀리서 존경과 흠모하던 분. 난 그럴만한 인연이 없어 글 쓰기를 할 수가 없어 이 글을 공유함으로 하늘 가시는 길 지려 밟히는 한송이 진달래꽃 대신합니다
최종수
11 hrs ·
이제 누구의 삶의 품에 안겨 행복할 수 있을까.
황망한 길을 떠나신 김종철 선생님 발인식 전날 밤, 군산에서 5시간 넘게 새만금살리기해수유통 운동하는 형님차로 올라가 조문을 했다. 사모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제가 최종수 신부입니다.”
“그동안 선생님에게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습니다.”
그 인사말과 동시에 사모님 눈가에도 내 눈에도 붉은 이슬이 고였다. 서로 두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다른 문상객들이 있어, 선생님을 위해 백일 동안 미사를 드리겠다는 말씀드리고 대화를 마쳤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새만금해수유통운동을 함께 하고 있는 형님이 막둥이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올랐다. 자급자족 생태공동체를 지향했기에 가능한 품목은 농사를 지었다. 진안고원은 추위가 빨리 와서 11월 20일 경이면 김장을 했다. 몇 년 동안 김장을 해서 맛보시라고 보내드렸다. 자급자족 효도 품목인 블루베리도 수확을 하면 첫 번째로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야콘, 인디언 감자, 고구마 등 수확하는 농산물을 보내드렸다. 그렇게 무언가 보내드리고 안부전화를 드렸다. 그럴 때마다 “자급자족 공동체 한다면서 다 퍼주면 어찌합니까.”라며 걱정을 하셨다. 아버지의 아들 사랑이었다. 서울에 가면 종종 찻집에서 만났다. 나는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말씀드리고 아버지는 요즘 관심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전화를 드리거나 둘이 만나면 아버지였고 여럿이 만나면 종종 선생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최근 들어 강우일 주교님께 나의 책이라는 원고청탁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주교님이 그런 어려운 원고청탁을 들어주실지 의문이라며, 한 번 알아보겠다고 통화를 마쳤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숙제를 하지 못해 안부전화도 드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한 첫 부탁이었다. 그 부탁을 알아보지 않았으니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지른 것인가. 왜 내가 그런 게으름을 피웠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다시 만나는 천국에서, “아버지가 주신 그 숙제를 못해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며 응석을 부려야 겠다.
잠자리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스승, 생태운동가이며 평화운동가이자 대안사회를 실현하려고 고군분투하시는, 아버지의 그 너른 품에 내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런 훌륭한 분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제 내 영혼의 보물창고가 되었다. 아버지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발인식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문상객이 온 분도 처음이고 발인식에 이렇게 많은 분이 오신 것도 처음이라며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의 삶을 흠모했던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담이었다. 발인식이 시작되자, 딸이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앞자리에 섰다. 영정 속에 웃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20년 넘게 존경하고 사랑하고 흠모했던 아버지, 이제 그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내 영혼의 강물로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관을 운구차에 모시고 유족들이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한다. 주일 준비를 하러 가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가을 쯤 찾아뵙겠다고 사모님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운구차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있는 사람들. 소중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다.
등짝으로 송골송골 땀방울 흘리며 신촌역으로 왔다. 군산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사제관으로 돌아와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수도꼭지를 뜨는 순간 물소리와 함께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발인식 때 참았던 눈물보가 터진 것일까. 눈물보다 큰 슬픔을 입으로 쏟아내며 엉엉 흐느끼며 울었다. 한참을 넋을 잃고 울었다.
생태마을을 시작할 수 있는 싹을 심어준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도 돌아가시고, 친아버지처럼 달포 만에 진안에 찾아오셔서 몸보신 음식을 사주신 김봉희 신부님도 천국으로 돌아가셨다. 사상적 뿌리이자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신 김종철 아버님도 하늘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의 삶의 품에 안겨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누구에게 길을 묻고 지혜를 구할 수 있을까.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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