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7

알라딘: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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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
이상호 (지은이)섬앤섬2020-06-15




































328쪽
135*205mm
42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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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동안 발간된 한국전쟁에 관한 저서는 그 원인을 분단의 기원으로부터 설명(내재적 원인 강조)하는 연구와 국제정치 즉 미소 냉전의 기원으로부터 설명(외부적 요인 중시)하는 연구로 대별할 수 있다. 내재적 원인의 연구는 한국 사회의 계급적 구조,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내부적 열망과 충돌, 정치 및 경제 체제를 둘러싼 이해집단의 대립과 갈등 등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의 연구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한편 외부적 원인의 연구 역시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 결정, 중국과 일본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 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전개와 과정 등을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연구 성과를 더욱 풍부하게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부적, 외부적 원인이 해소되고 있음에도 한반도의 갈등과 분열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연구는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을 둘러싼 내외부적 요인에는 거대담론인 세계 냉전적 분석이나 미시적인 국내 기원론 이외에 다른 분석의 도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한국전쟁을 둘러싼 한일관계, 미일관계, 한미관계와 인물사를 들여다봄으로써 한국전쟁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전쟁을 불러온 것들과 그 전쟁이 불러온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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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서론 : 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 ・ 14

1장 전후 한일관계 굴절의 기원, 극동국제군사재판 ・ 32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전범 처리 계획 / 연합국전범위원회의 구성과 극동국제군사재판 / 유엔전범위원회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준비 / 일본천황의 전범 제외 구상의 기원 / 극동국제군사재판의 구성 및 판결과 일본 천황의 재판 배제 / 망각에서 왜곡으로 : 전후 한일관계 굴절의 기원 / 미완의 전범 재판

2장 전후 연합국번역통역국(ATIS)의 일본인 귀환자 신문과 공산권 첩보활동 ・ 64
연합국번역통역국(ATIS)의 창설과 조직 / ATIS의 주요 발간물 / 전후 ATIS의 조직 변화 / 중앙신문센터의 창설과 신문활동 / 귀환자 심문을 통한 공산권 첩보 수집 /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대소 첩보활동과 냉전의 기원

3장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와 주한미군 철수 ・ 88
존 무초의 생애와 경력 / 초대 주한미국대사 임명과 정부 권한 이양 /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무초의 현지보고 /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무초의 한국 정부 설득과 조정 / 무초의 딜레마

4장 한국전쟁과 일본 경찰예비대의 창설 ・ 116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비군사화’의 구체화 / 중국의 공산화 가능성 대두와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의 전환 / ‘역코스 정책’으로 전환과 일본 재군비 구상 / 중소우호동맹조약과 중・소의 일본 견제 / 한국전쟁의 발발과 일본 경찰예비대의 구체화 / 일본 경찰예비대의 창설과 구성 / 미국의 일본 재무장과 군사기지화 / 일본자위대의 정상화?

5장 인천상륙작전의 밑그림 4개의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 ・ 146
인천상륙작전의 예비계획과 작전 준비과정 / 군수참모부 작전 계획(LD-SL-17)과 크로마이트 계획과의 연관성 / 4가지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의 내용과 차이 / 크로마이트 작전계획 4가지의 비교


6장 미8군 사령관 워커의 죽음과 진실 ・ 172
워커 장군 죽음에 대한 기존 인식과 논란 / 북한 공식 전사의 워커 죽음에 대한 기술과 오류 / 워커의 생애와 군 경력 / 한국전쟁의 발발과 워커의 활약 / 자료를 통해 본 워커 죽음의 진상 / 한국군에 대한 범죄수사대의 조사 / 미군 동승자에 대한 범죄수사대의 조사 / 호송차량과 군의관에 대한 조사 / 범죄수사대의 최종 결론 / 워커와 워커힐

7장 미국의 한국정부 해외 이전 계획 ・ 206
한국정부 해외 이전 구상의 출현과 미국의 대소 비상계획 / 중공군 공세에 따른 유엔군 철수와 한국정부 이전 계획안 / 1951년 1・4 후퇴 전후 한국정부 이전 계획의 대두 / 한국정부 이전 계획의 구체화–제주도 / 한국정부 이전 계획의 구체화–사이판, 티니안 / 한국정부 이전 계획이 갖는 군사적 의미

8장 맥아더 사령부의 삐라 선전 정책 ・ 234
심리전 연구기관의 출현 / 극동군사령부 작전연구국의 심리전 / 전황의 전개에 따른 삐라 선전 내용의 변화–개전과 지연작전,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전쟁의 확전 논쟁과 제한전 / 삐라 선전 효과의 평가

9장 미군의 공산포로 ‘미국화’ 교육 ・ 264
미국주의의 유입과 체제화 과정 / 포로의 발생과 포로 관리 기관의 설치와 운영 / 공산포로에 대한 미국화 교육–미국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우월성, 반공교육, 기독교, 기타 교육 / 미국화교육(심리전)의 성과

10장 연합국번역통역국(ATIS)과 북한문서의 노획 ・ 290
연합국번역통역국(ATIS)의 연혁과 임무 / 북한문서 수집을 위한 인디언헤드 부대의 조직과 활동 / 한국전에서 ATIS의 조직과 활동 / ADVATIS의 북한지역 작전 / 노획문서의 종류와 체제 / ATIS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참고문헌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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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죽음과 진실

한국전쟁에서 지연작전을 통해 낙동강 방어선이라는 성공적인 철수작전을 이끌고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최후 방어선을 지켜냈으며,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 북한군이 점령했던 대부분의 피점령 지역을 탈환하여 북진의 발판을 마련한 야전군 지휘관 워커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 북진을 시작해 38선 돌파에 이어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 압록강변 혜산까지 진출했던 미군과 한국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역전되면서 혹한의 추위 속에 필사의 후퇴를 시작한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그리고 인민군의 서울 재점령으로 이어지는 1.4후퇴의 와중에, 미군의 최고위 야전사령관인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두고 북한의 공식 전사戰史는 자신들의 특공조의 활약에 따른 전과라며 선전을 하고 있다.

적의 중간방어기도를 짓부시기 위하여 12월 13일 밤 은밀히 련천을 포위한 제2전선부대들은 공격에 앞서 적들의 퇴로를 끊기 위하여 련천으로 잇닿은 모든 길들을 차단하였다. 적들의 가장 중요한 퇴로로 예견되는 련천-서울 사이의 길쪽에는 보병들과 함께 지뢰를 가진 공병들로 이루어진 매복조가 파견되었다. 인민군부대들은 먼동이 트자 3면으로부터 불의에 련천시가로 맹렬하게 돌격하여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살아남은 적들은 서울쪽으로 급히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중땅크 1대를 앞세우고 그 뒤에 꼬리를 물로 도망치던 승용차들과 여러 대의 운수차들이 아군매복조가 묻은 지뢰에 걸려 연거퍼 파괴되었다.
소대장 최종운 영웅을 비롯한 전투원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휘두르며 적들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 놈들의 가슴팍에 복수의 명중탄을 안겼다. 이 전투에서 최종운 영웅과 6명의 전투원들은 38도선 중간방어를 조직하려고 련천에 기여왔다가 달아나던 미제침략군 8군사령관 워커놈을 포함한 적병 80여 명(주로 장교들이었다)을 쓸어눕히고 땅크 1대, 자동차 8대를 불살라버렸다. ―《조선전사》

이 주장은 사실일까?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 경, 워커 중장은 부관인 타이너Layton C. Tyner 중령을 대동, 벨튼George Belton 상사가 운전한 지프차를 타고 서울 북쪽 25마일에 위치한 의정부 근처의 제9군단 산하 제24사단 전투지휘소를 찾아가기 위해 나섰다. 여기에는 사령관 경호원인 리난Francis S. Reenan 병장도 함께 수행했다. 워커 장군의 차량 후미에는 무장을 한 1/4톤 1대가 경호차량escort guards으로 함께 이동했다. 이 차량에는 3명의 제502정찰소대(502d Reconnaissance Platoon) 소속 대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알려진 바와 달리 당시 날씨는 매우 좋았다.

날씨는 매우 맑았고, 도로 상태는 매우 건조했으며, 도로 위에는 군 차량을 포함한 탱크와 우마차 및 도보로 통행하는 민간인 등이 있었다.

사고 당시 지프 차량은 알려진 바와 같이 워커 장군이 직접 운전한 것도 아니고, 과속으로 운행 중이지도 않았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일 이동 중 워커 장군이 탑승한 차량의 속도는 시속 25~30마일(40~48㎞)이었다. 더욱이 사고 직전 도로 왼쪽에 서울 방향으로 주차되어 있는 트럭 때문에 지프의 속도는 시속 18~20마일(29~32㎞) 수준이었다. 따라서 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는 우선 워커 장군 사망의 직접적인 사인은 아닌 것이다.
워커 장군이 탑승한 지프와 직접 충돌을 일으킨 것은 국군 제6사단 제2연대의 차량으로 당시 운전자는 수송부 정비대 민간고용인이었던 박경래(당시 27세)였고, 동승자는 이국순(당시 21세), 박종한(당시 24세), 정만수(당시 29세)였다. 사고 장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3구(당시 주소)로 현재의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596-5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사고 직후 부상당한 워커는 타이너의 지시로 돈린Eugene J. Donlin 상병과 롱Alfred F. Long 상병이 운반하여 호위 차량 뒷좌석에 뉘인 후 후송되었다. 당시에 워커의 상태는 확인되지 않았다. 타이너는 부상당한 몸으로 앞좌석에 앉아 당시 사고지점 북쪽 4마일에 있던 미 제24사단 야전 환자치료소Clearing Station로 워커를 후송하였다. 그곳에서 군의관 헨드릭스Edward L. Hendricks 대위가 워커의 상태를 진찰했고,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 50분에 공식적으로 사망을 확인했다.

서울 광장동 아차산 자락에 위치한 워커힐 호텔은 한국전쟁 중 사망한 워커 중장을 기리기 위해 1963년 박정희의 지시로 지은 주한미군 전용 위락시설이었다. 이후 민영화되어 쉐라톤 워커힐 호텔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워커힐 호텔로 운영하고 있다.  접기
남태평양의 섬나라가 될 뻔했던 대한민국

한국전쟁 이전부터 미 군부는 국무부와 달리 한반도(남한)를 주요 전략 지역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맥아더나 군부에게 일본은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선이지만, 소련과 분할 점령한 한반도는 미군이 철수한다 하더라도 유사시 일본과 오키나와 등지에 주둔한 미군으로 얼마든지 대응하고 현상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병력(과 예산)이 1천만에서 140만 으로 거의 1/10로 축소된 군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6.25 발발 이후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 간 한국정부는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었다. 이때 흘러나온 소식이 한국정부의 해외 이전 계획. 처음에는 일본 혼슈 남부의 야마구치 현에 6만 명 규모의 망명정권을 세우려 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언제 어떻게 누가 준비하고 있었는지 현재 공식적인 사료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곧 이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한 지역까지 유엔군과 한국군이 진출한 상황에서 정부 이전 이야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과 전세 역전, 그리고 1.4후퇴로 이어지면서 미국이 한국정부의 해외 이전을 본격적으로 검토 논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대상지는 처음에는 제주도였으나, 안전과 소련과의 제3차 세계대전 대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남태평양의 사이판과 티니안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전 규모도 5만에서 최대 50만 명까지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정부의 해외 이전 계획은 소련과 전면전을 예상한 극동군사령관에 의해 1951년 4월 Operation Plan CINCFE 4-51로 준비되었다. 이 계획은 유엔군이 한국전에 개입하고 있는 동안 소련에게 공격당해 세계대전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 상정한 것이다. 이 계획의 대체적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즉 한국정부와 선별된 포로를 사이판Saipan과 티니안Tinian에 이송하는 것이다. 이송해야 할 인사들의 범주는 A급?중앙공무원, 군대, 경찰(총인원 300,543명)과 B급?종교 및 전문직 지도자(총인원 182,000명), 그리고 10,000명의 선별된 포로들로 총원은 약 50만 명이었다.  접기
한국전쟁의 또 다른 얼굴 이데올로기 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후 배상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미 대통령 특사 에드윈 폴리Edwin W. Pauley의 지적처럼,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체제의 이데올로기 전쟁터Ideological Battleground로 변화하고 있었다. 결국 폴리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전쟁의 시험장으로 보았던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본격화되었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교육이 공산권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시행된 계기 역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에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이었다. 치열한 전황 속에서 약 400여 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남북한 양국을 비롯하여 20여 개국이 참전한 국제전쟁International War이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다수의 포로가 발생하자 미국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포로를 상대로 한 심리전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냉전이 격화되어 가던 시기에 물리적으로 직접 공산권과 접촉했던 것은 한국전쟁이 유일했다. 따라서 미국의 많은 정부기관들이 한국전쟁이야말로 공산주의와 비견되는 자본주의 특히 미국적 가치의 신념을 대외적으로 표방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이데올로기가 전쟁의 수단으로서 채택된 것은 공산권 포로들에 대해 ‘전향교육’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이들의 신념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도덕적, 물질적 우수성을 전파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 바로 17만여 명에 달하는 공산포로의 재교육이었다. 1950년 9월 포로관리를 맡게 된 미군은 포로처리의 방침을 그들의 노동력 활용과 심리전에 이용하려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 미 국방부와 국무부가 이를 위해서 협의를 하였지만, 합동참모본부가 주도하기로 결정되었다.
포로교육을 담당한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formation & Education, CIE은 GHQ 산하에 설치된 부서의 하나로 점령지 내의 문화?종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CIE는 일본의 여론, 교육, 종교 및 사회적 문제를 검토하고, 일본 사회에 팽배해 있는 국수주의, 군사주의의 퇴치와 새로운 민주사회의 원리를 도입하기 위한 전반적 제도개혁을 실시한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일본인의 ‘정신재교육’을 목표로 운용되었던 CIE가 1951년 4월 3일 유엔군사령부로 배속되면서 전쟁포로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담당하였다. 교육 내용은 문자 훈련, 직업 훈련, 운동, 예술 등이었으나 중점은 오리엔테이션에 있었다.
CIE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자유진영의 이데올로기를 포로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미국주의 즉 아메리카니즘의 대표적인 체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로에 대한 교육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한 것이 바로 기독교 선교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에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단기간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는 미군의 이러한 미국화 교육과 기독교 교육이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크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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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상호 (지은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 현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현대사 관련 다수의 논문과 저술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2015), 《맥아더와 한국전쟁》(2012), 《6.25전쟁 소년병 연구》(공저, 2011), 《반대를 논하다》(공저, 2019)가 있으며, 번역서로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접근》(공역, 2017), 《주한미군사고문단사》(공역, 2018)가 있다. 한미관계사 및 한국전쟁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작 : <한국전쟁>,<반反대를 론論하다>,<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 총 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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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6.25 70주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군국주의, 파시즘이 무너지고 전 세계가 평화를 이야기하기에 여념 없을 때 그 논의에 찬물을 끼얹듯 발발한 한국전쟁. 전쟁 개시 일 년도 안 돼 남북은 각각 국외에 망명정부를 구상해야 할 정도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은 전전의 38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대체하면서 전쟁은 ‘휴전’이라는 불안정한 대립 상태로 일단락을 맺는다.

그동안 발간된 한국전쟁에 관한 저서는 그 원인을 분단의 기원으로부터 설명(내재적 원인 강조)하는 연구와 국제정치 즉 미소 냉전의 기원으로부터 설명(외부적 요인 중시)하는 연구로 대별할 수 있다. 내재적 원인의 연구는 한국 사회의 계급적 구조,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내부적 열망과 충돌, 정치 및 경제 체제를 둘러싼 이해집단의 대립과 갈등 등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의 연구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한편 외부적 원인의 연구 역시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 결정, 중국과 일본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 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전개와 과정 등을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연구 성과를 더욱 풍부하게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부적, 외부적 원인이 해소되고 있음에도 한반도의 갈등과 분열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연구는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을 둘러싼 내외부적 요인에는 거대담론인 세계 냉전적 분석이나 미시적인 국내 기원론 이외에 다른 분석의 도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한국전쟁을 둘러싼 한일관계, 미일관계, 한미관계와 인물사를 들여다봄으로써 한국전쟁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전쟁을 불러온 것들과 그 전쟁이 불러온 것들을.

이 책은 크게 네 가지의 측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첫째, 한국전쟁이 한미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관한 것이다. 1948년의 주한미군철수문제(3장)와 미국의 한국정부 해외 이전계획(7장)은 당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어떻게 정세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당시 한국전쟁에서 활약했으나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인 무초(3장)와 워커(6장)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또한 기존의 인식에서 상식적으로 이해되던 역사적 사례들인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의 실질적인 비밀 실행계획) 1~4를 자료를 통해 새롭게 규명했다.

둘째,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을 통한 한미일 관계의 연계 강화와 구조 문제이다. 제2차 대전 종전 후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1장)이 일본을 미국 세력권 아래 편입하고 지역통합전략 구상과 향후 한일관계의 뒤틀린 구조의 원인으로서 작용했음을 밝히고자 했다. 그 구상의 일환이 바로 일본 경찰예비대 창설(4장)로 이어졌음을 살펴보았다.

셋째, 전쟁의 이면에 감추어진 심리전과 그 부산물인 한국 사회의 미국화 문제이다. 삐라 선전정책을 통한 심리전의 전개 및 효과(8장)와 동북아시아 냉전체제의 전개와 공산포로에 대한 ‘미국화 교육’(9장)을 통해 ‘아메리카니즘’의 체제화 과정이 한국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주목받게 된 연합국번역통역국(ATIS) 자료를 통해 동북아시아 지역의 냉전 체제의 이른 출현(2장)과 노획문서의 활용에 대한 분석(10장)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군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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