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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프리즘 #2
‘정의연 사태’와 쉽게 쓰인 글들
은진
'소녀상' 옆에 놓였던 고 손영미 소장의 영정 (출처: 민중의 소리>)
[‘페미니스트 프리즘’은 크든 작든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부정기 연재이다. 이것은 두번째 글이고 좋은 글을 보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1.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계속해서 정의기억연대(舊정대협), 윤미향 당선인, 나아가 일본군‘위안부’ 운동 및 연구 전반에 대한 의혹 제기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의연 사태’라고들 부르고 있는 현 상황의 본질을 규명하거나 종합적인 진단을 내리는 것은 내 능력 범위 밖의 일이라고 느낀다. 다만, 연일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분량의 언론 보도들을 겨우 쫓아가면서, 감정적인 동요를 겪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수 없이 참담해하면서,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으려고 애썼다.
- 보수언론과 정치세력의 마타도어를 현 사태의 핵심으로 지적하는 글에도(전지윤1),
-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 부정과 혐오의 백래시를 짚는 글에도(강성현2),
- 한-미-일 삼각 동맹 강화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계산이 작용했을 거라는 외교적 지형 분석에도(박노자3)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당혹스러움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다. 나에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회 진보, 페미니즘, 소수자 인권 등을 외치던 사람들 중에도 일본군‘위안부’ 운동 및 연구를 향해 크게 다를 것 없는 몰이해와 적의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보수언론과 정치세력에 비판적이고, 역사 부정과 혐오의 백래시를 막고 싶을 사람들, 개인의 인권과 사회정의가 외교적 계산에 좌우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아무렇게나 말을 얹음으로써 ‘정의연 사태’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증언을 청취하는 태도에 대해서, 사회운동과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서는 항상 토론이 활성화되었으면 했지만, ‘증언의 착취’나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범람하는 지금 상황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해당 주제에 대해서 가장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사람들일수록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느꼈다. 의견 개진에 앞서,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한 기반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역사 부정을 방어하기 위해서, 정의연/윤미향 및 그동안의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연구를 비판하는 논조의 글들을 주된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2.
사회운동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고, 운동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런 논의가 생산적인 방식으로 가능하려면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이 존재한다. 최소한의 조건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그의 견해를 왜곡하거나 내심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는 것. 둘째, 운동단체를 비판하고 그 책임을 묻기 전에 운동단체의 활동 내역 및 맥락에 대한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논의의 주제가 증언 청취 및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것이니만큼, 문제 제기자의 말에 충실히 귀를 기울이고 토론에 임하라는 말은 너무 당연해보인다. 운동단체치고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 차원에서도 동의하지 않는 경우는 없으니, 관찰에 기반한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서 비판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당연한, 최소한의 조건들도 지키지 않는 글들이라면, 발전적인 견해가 아님은 물론이고 문제 제기자나 운동단체에게 가하는 폭력이 되기 쉽다. 불행히도 ‘정의연 사태’에는 그런 ‘쉽게 쓰인 글들’이 너무나 많았다.
2-1.
이용수의 견해를 함부로 추측하고 넘겨짚는 글들, 심지어 기자회견에서 말한 내용에 어긋나는 말을 이용수의 의견이라고 내세우는 글들…. 사실상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반일 정서를 문제라고 지적하거나 정의연/윤미향의 재정적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글들 중 대다수는 앞서 언급한 첫 번째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하지 않은 점, 모금 과정 등에서 피해자를 활용하는 태도가 무례했던 점, 2015 한일 합의 관련해서 피해자에게 정보 전달을 제한했던 점 등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비판의 이유로 정의연의 반일 정서 활용을 꼽은 적은 없다. 정의연이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문제 제기가 윤미향 등이 피해자를 위해 모금된 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취지는 아니라고 2020.5.22.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하지만 이용수의 주장을 위 두 가지라고 전제한 채 ‘정의연 의혹’ 류의 기사들이 양산됐다. 이런 기사들과 유사한 논지의, 혹은 이런 기사들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글들은 이용수의 문제 제기를 건네받았다는 이유로 다른 자료 검토 없이도 정의연의 30년 운동을 규정하고 평가할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실상은 이용수의 말에 대한 기초적인 보도 윤리조차 지키지 않은 왜곡 인용에 기반한 것이었다.
물론 이용수 기자회견을 계기로 해서, 이용수가 지적한 부분 외에도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돌아보는 작업은 바람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각자 자신의 주장임을 밝히고 그 주장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지는 태도로 논의에 임해야 한다. 정의연이 민족주의 운동을 해왔고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용수가 기자회견에 나서게 된 이유를 ‘윤미향·정의연의 반일 민족주의 운동 노선에 배신’당했기 때문이라고 타인의 내심을 진단해버려선(채진원4) 안 된다. 혹자는 일본 정부의 사죄·배상을 강조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이고, 일본 시민사회의 민간기금 제안을 정의연도 수용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법적 책임 묻기보다는 역사교육, 박물관 건립 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본인의 의견이지, 이용수의 의견은 아니다. 이용수는 피해자들 중에서도 아시아평화기금 등을 끝까지 거부하는 강경파에 속했고, 기자회견에서도 화해치유재단이 제공하는 돈에 대해 ‘내가 알았으면 돌려보냈을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또, 한·일 양국 젊은이들의 교류 및 역사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일본 정부의 사죄·배상도 필요하다는 본인의 입장을 드러냈다. 정의연이 아시아평화기금, 화해치유재단 등을 거부한 걸 ‘모든 외교적 해법을 가로막았다’고 비판하기 위해서 이용수의 말을 근거로 삼아선 안 된다(조혜경5). 이용수가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변모해서 일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으니 이제 일본군‘위안부’ 운동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한혜인6)을 해선 안 된다. 누군가는 거대양당, 특히 민주당마저 중년 남성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국회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용수가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기까지의 국내 정치적 배경을 분석하는 것과 이용수의 말이 문재인 정부와 86세대 남성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설하는 것은(신지예7) 구분되어야 한다.
증언을 청취하는 윤리적인 태도가 무엇이냐,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나름의 성과 및 연구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해서 고민해나가야 할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의 영역에서도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서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고, 그마저도 울퉁불퉁한 사회현실 앞에서 자주 좌절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견의 가능성과 현실의 복잡성을 고려하더라도, 증언 내용의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뒤트는 것이 윤리적 듣기일 리 없다. 피해자의 의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 피해자의 의사가 존중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평소 주장에다 피해자의 권위를 덧씌우려고 손쉽게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태도임에도,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증언 청취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어긋났다는 비판을 가하는 글들 자신이 그런 방식을 취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때로는 그 이면에 지원단체와 결별한 고령 여성의 궁박한 처지를 ‘정정보도 요청/지적을 당할 위험성이 적음’으로 계산하는 과정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마저 든다. 하지만 이용수의 문제 제기를 부당하게 폄훼하고 비난하는 ‘치매설’, ‘정치공작설’, ‘(국회의원 출마 관련)질투설’ 등이 문제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정의연/윤미향을 비판하는 글들이 이용수의 말을 잘못 가져다 쓰는 데엔 너그러운 듯했다. 위에서 지적한 글들은 좋은 글이라는 코멘트를 달고 널리 공유되었다.
2-2.
정의연의 활동 내역과 맥락을 들여다보지 않고 비판하는 글들도 너무 많았다. 운동단체가 부정의한 사회현실에 문제 제기하고 맞서왔던 지난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면, 해당 단체가 의도적으로 배제했거나 무의식적으로 간과했기 때문에 부정의한 사회현실이 여전한 것인지, 너무나 공고한 사회구조로 인해 해당 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정의가 지속된 것인지는 구분해서 논해야 한다. 후자조차도 전자인 것처럼 논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해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앞장서서 노력했던 사람들에게 그동안 무관심하게 방관했던 사람들이 그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평가를 퍼붓는 곳이 되고 만다. 전자에 대한 비판조차도 어떠한 지형에서 어떠한 효과를 낳게 될지를 고민하면서 수행해야 한다는 게 담론 분석 및 비평에서의 문제의식으로 자리잡힌 현 시점에(예를 들어, 민족주의 운동 내부의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이 제국주의 페미니즘의 알리바이가 되어선 안 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 지식인들조차 전자와 후자를 뒤섞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정의연이 그동안 어떤 지향을 가지고 어떤 활동들을 해왔는지 관찰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서 비판해야 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반일 정서를 문제 삼은 글들은 두 번째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권과 언론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 전반의 인식 측면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인권 유린 사건, 전시 성폭력 사건 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재의 반일 정서를 비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의연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성별화된 민족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인지하고,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평화 운동의 기치를 내세운 단체라는 점에서, 반일 정서의 원인을 오롯이 정의연에게 돌리는 것은 부적절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나 대중적 인식이 민족주의적이었다고 비판적으로 평하다가 그로 인한 운동의 변질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는 생략”하면(정희진8), 논리적 비약이자 정의연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 된다. 이건 정의연의 다양한 활동들이 ‘별책부록’으로 취급될 만큼 강력했던 ‘피해자 민족주의’에 대한 비평(조민아9)과도, 그러한 구도가 공고한 상황에서 때로는 정의연도 반일 정서를 활용하게 됐다는 분석(후지이 다케시10)과도 구분된다. 별도의 다른 근거 없이 한국사회의 한계가 곧 정의연의 한계로 연결되는 논리 속에서, 한국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정의연의 노력은 모두 지워지게 된다. 정의연 모금액 중 피해자들 생활 지원에 사용된 것이 일부에 불과하다며 정의연이 운동의 대의를 피해자들의 의사보다 앞세웠다고 비판할 땐 등장했던 정의연의 활동 내역 ― 필리핀, 태국, 일본 내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연대한 것,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게도 손을 내민 것 등 ― 은 정의연이 남성중심적 민족주의 정서에 편승했다고 비판할 때는 고려되지 않았다.
정의연이 운동의 대의를 위해서 피해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선별하고 재단했다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일본군‘위안부’ 여성을 불쌍하고 무력한 피해자 혹은 정의로운 투사로만 상상하는 한국사회의 한계를 정의연의 한계로 등치시켜도 될까. 일본군‘위안부’ 연구도 반일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비판과는 달리, 일본군‘위안부’ 분야는 증언 청취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선구적인 족적을 남긴 곳이다. 2000년 시민법정과 같은 해 출간된 일본군‘위안부’ 증언 4집에서부터 일본에 의한 피해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경험들을 생생한 구술 문장으로 담았고, 이때 제안된 ‘묻기’에서 ‘듣기’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이제 거의 모든 분야의 구술생애사 연구에 통용되는 기초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정의연은 증언 1 ~ 6집 모두에 단독으로 혹은 공동으로 참여한 운동단체다. 양현아11는 정의연의 피해자에 대한 대우가 온전히 따뜻하고 공정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해도, 정의연이 피해자의 말을 멋대로 재단해왔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이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다수가 이런 증언집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현 상황은 구조적 피해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고정된 피해자 상을 넘어서는 작업이 운동단체 한둘의 노력만으로는 이뤄내기 어려운 과제임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운동을 위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비판은 필요할 테지만, 정의연이야말로 피해자들에게 순결한 소녀 혹은 인권투사라는 고고한 이념형을 들이댔던 주범이라고 주장하거나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시선을 ‘윤미향 부류’의 사고라고 부르는 것(진중권12)은 주객전도다. 정의연을 희생양 삼아, 일본군‘위안부’의 고정된 이미지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책임을 면제해주게 된다.
3.
요약하자면 ‘사실과 주장을 구분해야 한다’, ‘근거를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 ‘허수아비 때리기를 해선 안 된다’ 정도의 당연한 말을 했다. 오히려 유의미한 질문은 이토록 당연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왜 생겼을까 하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서 꼽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글이라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이용수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정확하게 인용하기만 하면 다른 근거 없이도 정의연/윤미향을 비판하기에 충분하다고 보긴 어렵다. 말 그대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말은 모두 진실이라는 성역화도, 피해자의 말에 대한 의심과 무시도 아닌 방식의 듣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런 듣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피해자의 말이 ‘틀린 것’으로 밝혀졌을 때, 그 ‘틀린 말’을 다루는 윤리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피해자들끼리 서로를 부정하고 비난한다면 그 엇갈리는 말들은 어떻게 들어야 할까. 운동단체에게 결별을 고한 피해자를 대하는 해당 단체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함께 하자고 끝까지 설득하는 것? 설득되지 않아도 계속 그 사람을 대변하며 운동을 하는 것? 결별하겠다는 의사를 존중하여 앞으로는 괜한 언급도 하지 않는 것?). 운동단체에게 결별을 고한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는 어때야 할까….
나는 이번 ‘정의연 사태’를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인식이 ‘피해자 한국 대 가해자 일본’ 구도를 넘어설 수 있기를, 고정된 피해자 상을 허물고 피해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위에서 나열한 질문들을 포함하여, 증언 청취 및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논의가 진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위기가 기회로 탈바꿈하기를 희망한다. 진정한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이 이루어졌으면 하고, 그 과정에서 수립된 원칙들이 다른 사회운동들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면 좋겠다. 어쩌면 여기에서 비판한 글의 필자들의 열망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옳은 결과를 담보하진 않는다. 비판의 대상에 대한 관찰도, 논거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도 부재한 채, 옳다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명제만을 반복하는 글은 좋게 말해서 문제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냉정하게 말한다면 지식 권력을 이용해 저지르는 폭력이다. 이런 글들이 진영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합리적인 논평으로 추켜세워지는 것이야말로 좌절스러운 일이다.
(기사 등록 20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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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디어오늘, 전지윤, 2020.5.11.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 향한 마녀사냥 안 된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995
2한겨레, 강성현, 2020.6.8. “30년 운동 폄훼하는 보수언론 부정·혐오에 맞설 힘을 키울 때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48305.html?fbclid=IwAR2uRZzCW2lJjW_4-3WNbHBdqzUvfW83_Wx2ToICk1u4BuNPElcS3XXwAJQ
3박노자, 2020.5.30. “정의연 마녀사냥의 함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ladimir_tikhonov&logNo=221984269367&proxyReferer=http:%2F%2Fm.facebook.com
4프레시안, 채진원, 2020.6.1. “‘운동’에 경종을 울리는 이용수의 절규”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0113203587411
5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조혜경, “[오피니언] 정의기억연대가 사는 길” https://alternative.house/opinion-20200603-cho/
6한겨레, 한혜인, 2020.5.29. “둥지를 떠난 새: 독립한 ‘피해자’의 목소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7006.html
7여성신문, 신지예, 2020.5.27. “[W정치 인사이드] 윤미향 감싸려 이용수 죽이기? 그런 진보가 적폐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0&oid=310&aid=0000078666
7여성신문, 신지예, 2020.5.27. “[W정치 인사이드] 윤미향 감싸려 이용수 죽이기? 그런 진보가 적폐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0&oid=310&aid=0000078666
5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조혜경, “[오피니언] 정의기억연대가 사는 길” https://alternative.house/opinion-20200603-cho/
7여성신문, 신지예, 2020.5.27. “[W정치 인사이드] 윤미향 감싸려 이용수 죽이기? 그런 진보가 적폐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0&oid=310&aid=0000078666
8경향신문, 정희진, 2020.5.27. “[정희진의 낯선 사이]군 위안부 논란, 돈 문제가 아니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32&aid=0003011319
9웹진 제3시대, 조민아, 2020.5.26. “[특집 : 이용수 선생의 발언과 정의연] 넘어서야 할 것과 거리를 두어야 할 것”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1249
10한겨레, 후지이 다케시, 2020.6.2. “뉴스 이제 그만 봅시다” http://www.hani.co.kr/arti/PRINT/947468.html
11한겨레, 양현아, 2020.5.27.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것 : 그 많던 ‘할머니’는 다 어디로 가셨을까”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946634.html#csidx88d3fab85091e8f9fd85079eb53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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