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칼럼] '반핵'을 내던진 위선자들
[중앙일보] 입력 2006.10.12 21:16 수정 2006.10.13
1980년대 후반, 대학생 시위 현장마다 빼놓지 않고 울려 퍼지던 운동가요가 있었다. 주먹 쥔 오른손으로 허공을 힘차게 가르며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친 뒤 시작하는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할퀴고 간 상처에 성조기만 나부껴/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이 땅의 양심들아 어깨 걸고 나가자…'.
박치음 현 국립 순천대(재료금속고분자화학공학부) 교수는 86년 봄 서울대생 김세진씨의 분신자살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이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가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칠 즈음이었다. 그해 2학기 박씨가 순천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 그가 만든 '반전반핵가'는 운동가요의 빅히트곡으로 떠올라 있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뒤늦게 '불온 가요' 제작자로 밝혀진 박 교수는 대학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렸다. 그를 구한 것은 이듬해의 6월 시민항쟁이었다.
온갖 시위에 빠짐없이 등장하던 '반전반핵가'와 '반전반핵' 구호가 '팽'당한 시기는 93~94년의 1차 북핵 위기 때와 대략 맞물린다. 그 이전인 92년에 남북한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발효되었고, 적어도 남한 땅에서는 핵무기가 사라졌다. 북한으로서는 있지도 않은 남한 핵무기 아닌 다른 공격 목표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자신들이 몰래 핵무기를 개발 중인 마당에 남한 좌파들이 눈치도 없이 '반핵'을 꾸준히 외쳐대는 게 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국제적으로도 오랜 역사를 지닌 '반전반핵' 구호는 졸지에 짝 잃은 외기러기로 전락했다.
이후 '반전반핵'은 '반전평화'로 점차 물갈이됐다. 나는 물갈이에 북한과 친북좌파의 입김도 작용했다고 본다. 미선.효순양의 죽음을 계기로 벌어진 2002년 촛불시위, 이라크 파병,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을 거치면서 남한에서도 이제는 '반전평화'가 대세인 양 자리 잡았다. '반전평화 미국 반대를 위한 전국민중대회' '반전평화 축제' '반전평화 8.15 통일대행진' 등 각종 행사마다 문패로 내걸렸다.
실종된 '반핵'은 어디로 갔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친북좌파가 내버린 반핵을 낚아챈 쪽은 보수우익이었다. 2002년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시인한 것이 계기였다. 이때 결성된 '북핵저지 시민연대'는 2003년 3월 '반핵반김 국민협의회'로 확대돼 활동 중이다.
북한의 주장에 로봇처럼 동조하는 이들을 보면, 북한 방송에 뭔가 다른 지침이 나오자마자 잽싸게 운동 방향을 바꾸던 80년대 주사파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들은 북한의 9일 핵실험 발표에 대해서도 "철저히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자위적 핵 억지력"(한총련 10일 성명)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반핵'에서 '친핵'으로 돌변했으니 이런 위선과 자기기만이 따로 없다.
박치음 교수는 "20년 전의 나는 미국 전술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가능성에 대한 경고로서 반전반핵가를 만들었다. 노래로 전달하려던 세계관, 즉 반전과 반핵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치적 입장 또는 목적에 따라 반전반핵을 편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북핵) 위기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행담론으로 전환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그는 반핵이 좌.우 어느 한쪽의 전유물인 양 여겨져서는 안 되며,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는 없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돈에 눈이 없듯이 핵무기의 가공할 살상력에는 국적이 없다. 앞으로 무서운 핵베개를 베고 자게 된 마당에 '북한표 핵'은 선이고 '미제 핵'은 악이라고 외치는 이들 때문에 그나마 잠까지 설치게 됐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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