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7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기억과 권력의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어떤 지식인들에게 고함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기억과 권력의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어떤 지식인들에게 고함

기억과 권력의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어떤 지식인들에게 고함
윤미래


어느 학교에나 여성학 수업에는 으레히 교수에게 ‘진정한 성평등’에 대해 가르치려 드는 남학생 ‘빌런’들이 등장하곤 한다. 임명묵 씨가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기억과 권력: 이용수 vs. 정의연 진실공방에 관하여>라는 글은, 비록 그보다는 풍부한 학문적인 내용을 갖추고 있다고는 하나, “학교 다니며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의 “간단하고 초보적인 탈식민주의 얘기”로 수십 년간 탈식민주의 여성 운동을 선도해온 학자와 활동가들을 계도할 수 있다고 믿는 (다분히 젠더화된) 오만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들과 본질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억압,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을 ‘위안부’ 문제의 세 가지 축으로 열거한 뒤, 이 글은 “이 두 관점도 충분히 주의깊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인사치레를 남기고 앞의 두 가지를 분리해 덜어내버린다. 그리고 “권력을 통해 지식을 독점하였던 전시 총력전 국가의 기록과, 자신의 이야기를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해서라도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립이 위안부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 폭력 논쟁의 본질이다.”라고 대담하게 요약한다.




이것부터가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귀동냥’ 이상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차마 할 수 없는 ‘무식한’ 짓이다. 흑인 여성이나 이슬람 여성, 퀴어 여성들 등 여성 ‘내부’의 소수자들이 다수자 여성 중심의 헤게모니에 끊임없이 반기를 들어온 결과로, 현재 대부분의 페미니즘 조류들은 ‘상호교차성’이라는 접근에 예의상으로라도 존중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풀어 말하면 이 글에서처럼 여러 억압들을 기계적으로 병렬해놓고 상황에 따라 번갈아 가면서 조명하는 식의 단선적 접근으로는 중층적이고 교차된 억압 경험을 담아낼 수 없다는 합의가 이미 여성학계에는 일반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애초에 주변부 여성들이 당하는 다층적인 억압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임명묵 씨처럼 ‘위안부’ 문제에서 여성 문제와 민족 문제를 사상하고 국가만을 남기는 것은 탈식민주의 페미니즘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 줄기차게 비판해온 바로 그 남성 지식인의 관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론적 관성이 대상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우리는 다름아닌 이 글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을 통해 지식을 독점하였던 전시 총력전 국가의 기록과, 자신의 이야기를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해서라도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립이 위안부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 폭력 논쟁의 본질이다.”라는 식의 단언으로써, 글쓴이는 한일 관계의 주요 외교 현안으로서 동아시아의 정세 전반까지 영향을 미쳤던 ‘위안부’ 문제를 한 줌의 개인들이 벌이는 모종의 자유주의적 반국가 투쟁으로 손쉽게 축소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체계적이면서도 대안적 기억’을 구성해낼 수 있는 대안적 국가권력”의 등장을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이쯤 되면 권력과 담론에 대한 자신의 박식을 자랑하는 것 외에 일관되게 주장하고 싶은 논지가 있기는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미 제국의 헤게모니에 복속된 일본과 한국의 국가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력과 체계, 언어와 지식을 구축하고 관철하려 하였던 여성과 약소 민족들의 투쟁은 임명묵 씨의 서술에서는 애초에 범주로서 성립조차 하지 못한다. (어쩌면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글쓴이의 오락가락하는 입장은 국가와 개인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역사적 주체들을 침대에 나그네를 구겨넣는 격으로 억지로 찌그러뜨려 넣으려는 불운한 시도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그 결과 이 글에서 위안부 문제의 성공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실제의 운동으로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만들어낸 건지 알 길이 없는 신비한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실체적 진실을 구성하기 위해 권력이 남기는 체계적 지식과 개인이 남기는 주관적 체험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다시 돌아보는 작업이다.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작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의 가치를 높이 사고, 그것을 대안적 문서자료로 보충했기에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식의 주어 없는 문장들을 읽고 있다 보면, 세계사란 원래 모종의 보편 정신이 법정에 앉아 여성학자들이 제출한 논문을 심사하고 승인 여부를 판정해주는 방식으로 쓰이는 일종의 판결문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정말로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필자가 늘어놓는 “기억 전쟁” 같은 개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억과 지식은, 학문적이거나 통념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이거나 언제나 정치적 경합과 협상의 장이며 거기에서 이루어진 합의와 타협, 갈등과 긴장의 산물이다. ‘위안부’에 대한 증언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획득한 것 역시 길고 힘겨운 과정 끝에 일구어낸 성취로, 증언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업부터가 그냥 개인이 입을 열고 증언을 던지는 식으로 간단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년의 침묵을 깨려는 당사자와 연대자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싸움을 치러온 이들은 이 글에서 소리없이 존재를 삭제당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순결한 소녀 이미지’에 몰두하는 NL식 낭만적 민족주의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무조건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렬한 탈식민론자” 등 글쓴이가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중간중간 넘어뜨리고 지나가는 초라하게 희화화된 허수아비들로만 등장하고 있다.



그 결과, 자기가 바로 그 전 문단까지 장황하게 상찬하던 운동을 내치는 글쓴이의 분열적인 우왕좌왕은 마치 운동 그 자체보다도 더 운동적인 내재적 비판처럼 연출된다. ‘위안부’ 운동을 근거로 삼아 고백의 진실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어 놓고는, 바로 그 ‘위안부’ 운동을 향해 “고백의 진실성을 부정할 수 있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당사자의 이야기를 묵살하려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믿기란 내게는 너무 힘들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임명묵 씨는 이런 유체이탈 화법으로써 사실상 ‘위안부’ 운동을 비교 사례로 가져와서 ‘위안부’ 운동을 신뢰성이 없다고 폄하하는 학적, 논리적 부정직을 은폐하고 있다.



기실, 그는 애초에 ‘위안부’ 운동의 의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이 보인다. ‘위안부’ 투쟁이 무엇과 싸워야 했는지,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다 못해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위안부’ 생존자들 같은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 특히 식민지 여성들의 말이 기억과 지식으로 인정받기가 그토록 지난한 이유는 결코 그들 모두가 임명묵 씨가 쓰고 있는 것처럼 “두뇌 기억의 한계로 인해서” “파편화되고 일관성조차 의심받는” 말들밖에 하지 못하는 어눌한 눌변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혼란과 침묵, 자기검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억과 증언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면 상당히 일관되고 유사한 기억의 구조가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배우지 못해서, 혹은 물증을 갖추지 못해서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식의 인식 역시 피해자에게서 문제를 찾음으로써 정작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권력 관계와 구조를 은폐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이 의심받는 이유를 피해자에게서 찾는 모든 접근이 그러하듯이. 남성 중심적, 식민주의적 계급 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진술, 특히 피지배 계급 유색인 여성의 진술은 일관되면 일관되기 때문에,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럽기 때문에 의심받고 기각당한다. 그것은 그들의 무능이나 무력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합격점을 내줄 의사가 전혀 없이 정해진 질문만을 되풀이해 던지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위안부’ 피해생존자들 같은 하위 주체들의 말이 말로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언어에는 정상적인, 믿을 만한, 합리적인 말과 그렇지 못한 소리를 분별하는 체제가 필연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질서에서 소외된 이가 그 질서에 위반되는 말을 뱉으면 그것을 현상태로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말들을 미리 짜여진 프레임에 밀어넣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기꾼, 무지렁이, 미친 여자의 헛소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명묵 씨가 아무 비판 없이 근거로 끌어오는 중앙일보 기사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정의기억연대나 윤미향 당선자의 언행들을 수구 언론들이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는 단체 성명이나 반박 보도들을 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으니 여기서 밝혀 적지 않겠다. 통합진보당에서 조국 대전과 채널A의 검언유착 스캔들을 거쳐 지금의 사태에 이르기까지, 수구 언론이 누군가를 찍어내는 방식을 관찰해온 이라면 놀랄 만큼 비슷하게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겠으나, 임명묵 씨와 같은 논자들이 이 부분에서 그만치의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부류를 익히 알고 있으리라. 그들은 온갖 억압에 대한 담론들을 섭렵하고도 자신이 휘두르고 있는 기득권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문조차 가지지 않으며, 어디에나 논평을 얹으려 하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외치면서도 학술과 언론은 성역으로 둘 것을 요구하며, 운동의 온갖 세미한 오류나 편향들은 기가 막히게 집어내어 장광설을 펼치면서도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가고 현직 법무부 장관에게 사퇴를 강제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비선출 권력의 전횡에는 놀라울 정도로 순진하고 무감하다. 세련되고 정교한 식견으로 끝없는 장광설을 풀 수 있으나, 정작 비판적 독해의 기본 중 기본이라 할 만한 ‘미디어 리터러시’는 성실한 중등교육과정생 수준에도 미달한다.



그들의 말과 글은 정말이지 형편없지만, 그들이 꼭 멍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영리하고, 자기 이익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때문에 나에게는 별로 이런 이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문사회학적 이론 따위를 아무리 늘어놓은들, 그들은 조금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수십 년을 동고동락해온 조력자들을 두고 ’당사자의 관점에서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그것도 1분간 검색을 해 보는 수준의 교차 검증도 하지 않은 채 공개 지면에 대문짝만하게 써붙일 수 있는 그 용감무쌍함의 근거를 묻고자 한다. 자기가 이 책도 읽었네, 저 책도 읽었네 하며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서 전문가나 당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왜 항상 서울대 남성들인지.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서조차 당신들에게 마이크를 주는 사회는, 당신들의 그 비대한 자의식에 지금 이 순간도 그런 식으로 양분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서발턴을 서발턴으로 만드는 구조의 핵심임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지식 특권이야말로 하위 주체성의 반대쪽 저울에 올려진 추, 하위 주체성이라는 곤경과 쌍을 이루는 수혜이다. 누군가가 세 치 혀와 펜끝으로 한 사람의 몫 이상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부단히 침묵당해야 한다. 당신들도, 아니 당신들이야말로 문제의 일부다. 무지한 당사자와 연대자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믿을 수 있는 연대자를 감별해주는 컨설턴트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위안부’ 운동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고발과 국경을 넘은 여성 연대와 더불어 바로 그 ‘말할 수 없음’에 맞선 싸움으로서 세계사적 의미를 얻었다. 진술을 자료로 보충하는 작업은 분명 그 과정의 중요한 일부였으나, 글쓴이가 쓴 것처럼 그 싸움의 전부이거나 본질인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한국의 반공 국가주의에서부터 사회 곳곳에 스민 성폭력 생존자에 대한 편견과 ‘창녀’ 혐오에 이르기까지, 생존자와 조력자들은 온갖 층위에서 작동하는 억압 기제들과 싸워 기필코 거기에 균열을 냈다.



그리고 지금 그 운동은 언론 권력이라는 또 하나의 기제에 한참 공격받고 있는 중이다. 글쓴이가 하필이면 탈식민주의의 이름으로 그걸 받아쓰고 이론적으로 윤색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조잡한 글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반론 기고씩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졸업논문도 못 쓴 석사생에 불과하고,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누굴 가르치기엔 턱도 없이 식견이 얕다. 하지만 “학교 다니며 귀동냥한” 지식인 남성이 이따위 오개념을 퍼뜨리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기에도 너무 속터지는 일이다. ‘위안부’ 운동은 시작했을 때부터 국경을 넘어선 페미니즘 운동이었고, 다름아닌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전세계적으로 연대와 인정을 받으며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위안부’ 연구자가 아닌 사람이 하나라도 좀 나서서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정말로 초보적인 이야기부터 다시 해보자. 탈식민주의 여성학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거창한 박식이 아니라 우선 특수한 지역, 집단, 현장에 대한 존중, 그리고 다른 실천과 지식에 대한 존중이다. 불편부당한 ‘제네럴리스트’연하며 아무 데나 말을 얹고 아무 때나 가르치려 드는 교만을 경계하는 것이다. 지식 산업 역시 식민주의 구조의 일부이고, 연구자들은 그 구조의 수혜자로서 원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어려운 말이나 세련된 방법론으로 뒷받침되는 것과는 다른 지식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고, 그 의미나 영향이 학문적 지식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평등하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세상을 추구하며, 그것이 곧 인간의 평등과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들 무리하고 주제넘게 굴면서 ‘위안부’ 운동을 매도하지 못해 안달인 이유가, 전부는 아닐지언정 상당 부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위안부’ 운동이 이상적인 운동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적지 않은 사람이 문제가 많다고 보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무학 고령의 여성이 입을 열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기존의 권력 분배에 균열을 냈다. 기억과 지식을 생산하고 승인할 권력을 기존에 배제되었던 자들 쪽으로 한 발쯤 이동시켰다. 어떤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해줄지”, 어떤 관점이 얼마나 “주의깊게 다뤄져야” 할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을, 그러니까 가령 여기서 임명묵 씨가 별다른 의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행사하고 있는 권력을.



그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회만 있으면 새로운 프레임을 들고 와서 ‘위안부’ 문제를 재규정하려 드는 것은 그러므로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사자의 의사를 묻는 일 따위 불필요, 읽은 책과 익힌 언어만 있으면 하고 싶은 대로 남의 문제를 정의할 수 있었던 시대가 그들에게는 너무 살기 좋았던 탓이고, 그 힘을 놓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것은 자기 것이었다가 빼앗긴 영토를 재장악하려는, 혹은 그것을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해 ‘자기 영역’을 재확인하려는 기도이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그것을 지식인, 심지어 지식 그 자체와 동일시하려는 시도에는 단호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느낀다. 지식이 나아온 길,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도전받지 않은 권위를 넘어, 더 많은 참여를 향하여 나 있기 때문이다. 운동에 관해서 말한다면, 당사자가 더 많이, 더 존중받으면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조력자들보다 먼저 그런 치들이 권력에 침 흘리는 입을 좀 닫아야 할 것이다.



 (기사 등록 20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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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anotherworld.kr/819?category=713458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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