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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쪽발이다'
기사승인 2015.04.22
장상인 / 장상인 JSI파트너스 대표
일본사람들이 한국인을 '조센징(朝鮮人)'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을 '쪽발이'라고 한다. 이는 양(兩)국민을 폄하(貶下) 또는, 멸시(蔑視)하는 말이다. 한자어 자체의 뜻에는 혐오스러운 의미가 없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 나쁘게 변질된 어휘라고 할 수 있다.
쪽발이의 어원(語源)은?
▲게타(좌), 흰버선(우) Ⓒ야후재팬
필자의 일본에 관한 블로그나 칼럼에도 '쪽발이들...'의 댓글이 달린다. '쪽발이'의 본뜻에 관계없이 스스로 ‘쪽발이’를 자처하는 일본인이 있었다. 물론, 소설 속의 이야기다. 일본인 스스로 <쪽발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자체가 특이하다.
일본의 작가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 1927-1971)는 일제 강점기 시절 진주농림학교의 생물교사로 재직했던 고바야시 도키히로((小林時弘)의 셋째 아들로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4년 대구중학교 4학년을 수료했고 1945년 3월 육군항공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고바야시(小林)는 본국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중퇴하고, 진료소의 의사로 근무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쪽발이>는 그가 197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조선인과 재일조선인, 일본인에 얽힌 삶을 다뤘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적시한 '쪽발이'를 조명해본다.
"선생님! 선생님은 조선에서 살다 귀환하신 분이죠? 니시야마(西山)씨가 말한 그 '쪽발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어쩐지 매우 추잡한 느낌이 들어요. 선생님! 입에 담기 거북한 말인가요?"
'쪽발이'
▲ 소설 "쪽발이"의 작가 고바야시 마사루 (1927~1971)
<나는 그것을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간호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나는 중학교 하급생 시절,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조선인들의 눈에는 신기한 버선과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듯싶다"고 대답했지만, 물론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말하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쪽'이라는 발음에서 추정할 수 있는 한자(漢字)는 족(足)이다. '발이' 또는 '바리'로 추정할 수 있는 한자는 할(割)이다. 따라서, '쪽발이'는 어쩌면 '족할(足割)'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아버지는 덧붙였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말을 하나의 추론에 불과하다'고 했다. 쪽발이의 직접적인 의미는 '발굽이 갈라진 자'라는 것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개만도 못한 짐승을 가리키는 말'의 의미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실로 오랜 역사를 통해 언제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자존심 강한 조선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원통하기 짝이 없는 증오와 저주에서 생겨난 뼈에 사무치는 경멸의 불꽃이었다. 예를 들어, 동성 간에 혹은 남녀가 싸울 때, '이 짐승!' 이라는 말을 던진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러던 중 주인공 '나'에게 와세다 대학 1학년생들이 방문했다. 이유는 '재일조선인 문제를 생각하는 학생과 시민의 회(會)'의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모임의 리더이자 주인공의 친구인 오우치의 뜻을 전한다.
▲일본의 전통복장으로 포즈를 취한 데지마 직원의 모습-흰서번과 게타가가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이 두개로(쪽발)로 나뉘어 있다.
"조선에서 태어난 자신은 본적지도 고향으로 느껴지지 않고, 조선은 이미 고향이 아니게 되어 버렸고, 동창생들은 제각각 흩어져서 연락도 별로 없어서 도쿄에 있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주인공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는 독백. 학생들에게 내뱉지는 않았으나. 그의 입안에 꽉 차있는 말이 있었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이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래, 정한론(征韓論)이래, 토지 수탈 이래, 강화도 사건 이래, 청일전쟁 이래, 소위 3·1만세 사건이래, 한일합방 이래, 조선어 금지 이래, 황국 신민의 서사 이래, 창씨개명 이래. 강제 연행 이래, 강제 노동 이래, 그리고 한국전쟁과 특수 경기에 의한 일본 산업의 부흥 이래, 기타 여러 가지 이래, 그 종합적 통일체로서의 일본인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계 없는 일본인이란 하나의 추상으로, 즉 자신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조선인을 마주치더라도 자네들은 자네들로 대표되는 일본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라는 식으로, 자신을 실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에이코'와 '옥순이'
주인공 '나'는 중학생 시절 조선에 있던 가정부 '에이코'를 떠올린다. "창씨개명 때문에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지만, 조선 옷을 입고 머리를 빗어 넘긴 그녀를 '에이코'라고 부를 때, 나는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향해 부르는 듯 한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8월 15일
"그날 낮에 라디오가 종전을 고했다. 학교 사무국에 가보니 학교에 관해서는 총독부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고, 당장에 무슨 일은 없을 것이라는 지극히 미덥지 않은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단지, 조선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 때 손에 손에 깃발을 든 남녀노소 한 무리가 노래를 부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 '에이코'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에이코'를 불렀다. 그러나 '에이코'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에이코'라는 이름의 여자는 애당초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옥순이!"
"나는 옥순이. 그리고, 너는 쪽발이!"라고 그녀의 눈이 말하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쪽발이'는 바로 나였다.
고바야시의 '나의 조선'은 아직도…
작가는 '나의 조선'에 본인의 생각을 용기 있게 썼다.
"내 나라의 추악함에 있어서, 착실히 강대해져가는 권력과 군사력에 대해서, 그리고 조선인에 대한 감도(感度)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과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러한 사실들에 무지했던 나 자신의 나태함에 대해서,,,,"
그러면서 작가는 미래의 양국 관계에 대한 바람을 역설했다.
"나의 저 멀리 앞에는 미래의 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킨 일본인과 조선인이, 과장되지 않은 진정으로 평등하고 대등한 국가를 조국으로 가진 일본인·조선인으로서, 서로 두 나라를 왕래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상상 속에서 떠 올릴 때, 내 피(血)는 진정으로 뜨거워지고 공상의 나래가 끝없이 펼쳐져, 나는 마치 술에 취한 듯합니다."
고바야시(小林)의 바람은 공상의 나래가 아니라 현실적인 그림이었다. 그는 깊은 골이 가로놓인 두 민족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피가 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표현의 칼날을 갈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쪽발이>를 간행한 다음 해인 1971년 3월 25일 장(腸) 폐색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44세의 나이. 조선에서의 16년을 빼면 일본에서 살았던 세월은 28년에 불과했다. 짧은 생이었으나 그는 조선을 가슴 속에 넣고 살았다.
고바야시(小林)가 소설 <쪽발이>를 발표한지 45년이 됐다. 하지만, 그의 우려대로 한일 양국의 관계는 아직도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이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분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어 일본과 교류하고 있는 기업인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 나고야 중심가에서 평화헌법개정을 호소하는 일본의 우익단체- 청중은 단 한명이다.
그래도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이 일부 우익(右翼)들의 목소리나 정치 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어 보이나, 점차 동화되고 있는 듯해서 걱정스럽다. 이럴 때일수록 민간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더불어 양(兩)국민은 공히, 쪽발이나 조센징 등 불미스러운 용어를 삼가야 한다. 올해는 특히 해방 70년, 한일 수교 50년이 아닌가.
지난 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 차관회의에서 '과거사와 안보 분리'라는 '투 트랙 전략'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한국과 일본은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웃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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