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9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그려진 근대의 肖像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 정 재 정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그려진 근대의 肖像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
정 재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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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15년 전쟁’의 경과와 講和 Ⅲ. ‘식민지 조선’의 戰時狀況과 항일민족운동
Ⅳ. 맺음말-역사인식의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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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일본은 1910년 8월에 한국을 병합하여 1945년 8월까지 35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다. 이 시기는 한국사에서 흔히 ‘日帝下의 民族受難期’ 또는 ‘抗日民族解放運動期’라고 불리 는데, ) 최근의 연구에서는 한국인들이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도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해 줄기차게 反帝國主義鬪爭을 전개하는 한편, 근대문명을 수용하는 데도 매우 적극 적으로 나섰던 ‘식민지 근대’의 시기로도 평가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주사변(1931.9) 에서 시작하여 중일전쟁(1937.7)과 아시아・태평양전쟁(1941.12)을 거쳐 일본의 패망 (1945.8)에 이르는 ‘15년 전쟁’ )은 戰時 總動員體制 아래 ‘식민지 조선’에서 이른바 ‘식 민지 근대’의 현상이 집중적으로 釀成된 시기로 보고 있다. ) 


1)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2008.3 ≪중학교 국사≫ 교과서는 ‘일제하 35년’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전쟁의 전개’를 두 기둥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다.
2) 이 논문에서는 세 단계의 전쟁이 아무 관계없이 따로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內的 연관을가지고 발생한 一連의 전쟁이라는 뜻에서 ‘15년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책에서 시사를 받았다. 江口圭一, 1991 ≪十五年戰争小史≫ (青木書店)
3) ‘식민지 근대’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최근의 연구와 논쟁에 대해서는 먼저 다음을 참조할 것.
정재정, 2008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성론> 한국사연구회 편,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 권태억, 2000 <근대화・동화・식민지 유산> ≪한국사연구≫ 108 (한국사연구회) ; 김철・박지향・이 훈 엮음, 2006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2 (책세상) ; 윤해동・천정환・허수・황병주・이용기・윤대석 엮음, 2006 ≪근대를 다시 읽는다 1・2-한국 근대 인 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역사비평사)

피지배자인 한국인과 지배자인 일본인은 전쟁을 매개로 하여 二人三脚의 복잡하고 위
태로운 관계로 얽혀 ‘15년 전쟁’을 함께 치 다. 이런 同床異夢의 관계 속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일정 부분에서나마 전쟁이라는 경험을 공유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국인과 일본인이 전쟁에 참가한 사정이나 종전 이후 걸어온 道程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 경험을 공유했으면서도 그것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더구나 두 나라의 역사교과서는 자국중심의 현재적 관점에서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 선’을 기술하기 때문에 경험의 공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그 차이만이 더욱 부각 되고 있다.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분열된 이해는 때때로 현실관계에 서도 갈등을 촉발했다. 한국정부는 2001년과 2005년에 일본정부가 ‘15년 전쟁’을 국위 의 선양으로 묘사한 중학교의 ‘새 역사교과서’를 검정에 합격시키고, 泉純一郞 총리대 신이 ‘15년 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靖國神社를 참배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일본은 한국의 항의에 당혹해 하면서도, 두 나라 사이에 역사인식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는 원론적 자세를 견지하 다. 그리하여 한일 양국은 한 동안 정상회의를 열지 않을 만 큼 냉랭한 관계에 빠졌다.4) 
한국과 일본이 근린 국가로서 평화와 共榮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15년 전쟁’
과 ‘식민지 조선’에 대한 분열된 역사인식을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나라의 역사교과서가 상호이해의 방향에서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을 기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교과서는 국민의 역사인식 형성에 큰 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공통의 역사인식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나라의 역사교과서가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를 비교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과 일본이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역사관을 후세에 가르치고, 또 한국과 일본이 전쟁의 평가와 책임을 둘러싸고 왜 아직도 대립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5) 
 

4) 정재정, 2007 <韓日의 歷史葛藤과 歷史 話-和解와 相生의 歷史認識을 향하여> ≪史學硏究≫ 
88 (韓國史學 )
5) 이 논문은 미국 Stanford University의 The Walter H. Shorenstein Asia-Pacific Research Center와 한국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심포지엄(<기억의 차이와 화해, Divided Memories and Reconciliation>, 2008년 9월 29일, 서울)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교과서 분과회의(2008년 10월 24일, 삿포로)에서 발표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그려진 근대의 肖像-‘15년 전쟁’과 ‘식 민지 조선’>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두 회의에서 拙稿에 대해 助 과 批評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이 논문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15 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의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를 상호 비교 의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검토하겠다.6)

6) 이 논문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3종류이다. 
①국사편찬위원 회 국정도서편찬위원회, 2007 ≪고등학교 국사≫ (교학사) 
②김한종 외, 2005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 
③오금성 외, ≪고등학교 세계사≫ (금성출판사) 
④국사편찬위원회 국정도서편찬위원회, 2008 ≪중학교 국사≫ (주 두산)

  ①은 고등학교 1학년에서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로 전근대사(19세기 중반 이전)를 위주로 하여 구성되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고, 전국의 고등학생이 모두 필수로 배워야하는 유일본이다. 내용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역으로 나뉘어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종합하여 파 악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②는 고등학교 2~3학년의 학생이 選擇하여 배울 수 있는 검인정 교 과서인데, 19세기 중반 이후의 한국사를 通史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시장 에서 54%의 채택률을 기록하고 있다. 
③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는 세계사 교과서인데, 채택률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④는 중학교 2~3학년에서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 로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通史로 구성되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고, 전국의 중학생이 모두 필수로 배워야하는 유일본이다. 

  한편 한국의 역사교과서와 비교의 대상이 된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東京書籍의 2003 ≪日本史 B≫ (⑤), 
山川出版社의 2005 ≪詳說世界史≫ (⑥),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東京書籍의 2008 ≪新編 新しい歴史≫ (⑦), 
扶桑社의 2008 ≪新編 新しい歴史敎科書≫ (⑧)이다.
⑤는 中道의 시각에서 일본사를 기술한 교과서이고, 
⑥과 ⑦은 해당 분야의 교과서 중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 고 있다. 
⑧은 근린 제국과의 관계사를 기술한 부분에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과도하게 표출되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역사교과서를 서로 비교해보면 한국 과 일본의 역사인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본문에서 위의 역사교 과서들을 인용할 때는 번호로써 書誌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나라 역사교과서의 특징을 미리 말하면,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15년 전쟁’
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전쟁시기의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기술했다. 반면에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15년 전쟁’의 경과에 대해 대단히 자세하게 기술한 대신에, ‘식민지 조선’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 러므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조목조목 비교 검토하는 데는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경우에 따라 ‘15년 전쟁’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언급 하는 한편,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 논문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기술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 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Ⅱ. ‘15년 전쟁’의 경과와 講和

1. 滿洲事變과 滿洲國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에는 이상할 정도로 만주사변과 만주국에 관한 기술이 거의 없 다. ≪고등학교 국사≫는 ‘일제의 만주 침략’(① 121쪽)이라고 표현하고, ≪고등학교 한 국근・현대사≫는 ‘만주사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두 교과서는 만주사변이 무엇이고, 왜 발발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만주국이 성립했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는 오로지 ‘항일민족운동’이나 ‘무장독립전쟁의 근거지’ 라는 시각에서 ‘만주’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도 이와 마찬가 지이다.
반면에 한국의 ≪고등학교 세계사≫는 만주사변과 만주국에 대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뒤 괴뢰정권(만주국)을 세웠다(1931)고 기술했다(③ 275 쪽). 여기에서도 만주사변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만 주사변의 결과 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도록 기술했다.
만주사변과 그 귀결로써 출현한 만주국은 식민지 조선의 운명과도 접히 관련되어 
있다. 만주사변 때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 그리 고 이듬해 수립된 만주국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무언가 꿈을 실현할 수 있 는 기회의 땅으로 비쳐졌다. )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 新天地로 이주하는 사람이 줄을 이 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한 농민도 있었고, 한몫 잡으려는 야심가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꿈꾸는 志士도 있었다. 
만주사변 당시 만주에는 이미 63만 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만주국이 패망
할 당시에는 그 수가 170만여 명에 달했다. ) 한국인이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것은 이런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역사학계는 20세기의 만주에 대해 별로 연구하지 않았다. 만주에 관한 연구는 주로 그곳에서 전개된 한국인의 항일민족운동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滿洲學 가 창립되어 만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그리하여 만주의 인구이동과 도시발달 등에 대한 全貌가 어 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 앞으로 역사교과서는 이런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야 할 것이다. 만주가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민족운동의 터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 국의 역사교과서가 만주사변과 만주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기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한다. 
한편 일본의 자국사 교과서는 <만주사변과 정당정치의 후퇴>라는 절에서 9쪽에 걸 쳐 만주사변 전후의 국내외 정세를 자세히 기술했다. 곧 일본군의 중국 진출과 국가개조 운동, 만주사변의 발생과 정당내각의 붕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서의 탈퇴와 군 부의 쿠데타, 유럽의 정세와 日・獨・伊 삼국의 제휴, 학문・사상의 억압과 민심의 동향 등 이 기술되어 있다 (⑤ 327~336쪽). 반면에 식민지 조선의 사정이나 만주에서의 항일운 동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東京書籍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중국침략>이라는 절 속에 <滿洲事變>이 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만주사변, 만주국 수립, 5・15사건, 국제연맹 탈퇴 등에 대해 1페 이지를 기술했다(⑦ 186쪽). ) 扶桑社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만주사변>이라는 절에 서 <만주사변 前夜의 만주>, <만주사변으로부터 만주국의 건국으로>, <만주사변을 세계는 어떻게 보았는가>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2쪽이나 기술했다(⑧ 196~197쪽). ) ⑦ 이 일본의 행위를 비판적 시각에서 기술한 반면, ⑧은 일본의 행동을 변명하는 방식으로 기술했다.
일본의 세계사 교과서는 <만주사변・일중전쟁과 중국의 저항>이라는 항목(3쪽)을 설
정하여, 전쟁의 경과와 여파를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서 꽤 자세히 기술했다. 또 전쟁의 와중에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멈추고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일본에 대항했 다는 기술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남경학살사건에 대해서는 “남경 점령 때에는 다수 의 중국인을 살해하여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⑥ 304~311쪽).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사정에 대한 기술은 없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만주사변과 만주국에 대해 기술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 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제국이 치 한 전략을 세워 주체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 키고 만주국을 수립해가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반면에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만주국이 수립되었다는 사실만을 언급했을 뿐, 그 과정에 대해서는 거 의 기술하지 않았다. 곧 한국 교과서는 ‘항일민족운동’의 관점에서 만주를 한두 번 언급 한다. 반면에 일본 교과서는 일본 세력의 팽창이라는 관점에서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추 이를 국제정세와 관련시켜 자세히 설명한다.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에서 한국은 客體 이고 일본은 主體기 때문에 두 나라의 역사교과서가 이렇게 다르게 기술한 것으로 보 인다. 한국과 일본의 학생이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에 대해 이렇게 다른 내용의 역사교 과서를 배우면, 서로 다른 역사지식과 역사인식을 갖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2.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일전쟁의 발발에서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결에 이르는 시기에 ‘식민지 조선’ 에서는 전시동원체제가 형성되고 황국신민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 강도와 범 위는 전쟁의 추이에 따라 격화되고 확대되었다. 일본의 식민지 던 조선이 독립국가의 자격을 가지고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구 실 아래 철저하게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사회는 전쟁과 共鳴하면서 급격히 변모해갔다. 국가총동원체제 아래 정치적으로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는 同化政策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경제적으로는 兵站基地化政策의 파도를 타고 중화학공업 등이 괄목하게 발전했으며, 문화적으로는 군국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일본풍의 문화가 구석구 석 침투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주로 대도시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기 는 하지만, 식민지의 특성을 지닌 日本式의 근대문명이 급속히 확산되었다.12)
그런데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는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추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만 몇 마디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 국 사≫는 중일전쟁에 대해서 <국내외 항일민족운동>이라는 항목 아래, “1937년에 일제 가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고만 기술했다 (① 121쪽). 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라 는 항목에서 중일전쟁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륙 침략 을 본격화하면서”(① 323쪽) 라고 기술했다.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전시총동원체제와 식민지경제의 파탄>이라는 항목 아래, “1941년에 일제는 미국 해군기지가 있던 하와이 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① 183쪽)라고 기술했다. 둘 다 전쟁의 원인이나 경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항일민족운동이나 전시동원정책을 다루는 배경 으로 한두 마디 언급했을 뿐이다.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조선을 침략 전쟁의 기지로 …>라는 항목에서 중 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기술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켜(1937)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 다. 그리고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1941).’(② 160쪽).
간결하게 잘 정리한 문장이지만, 전쟁의 원인이나 경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중학교 국사≫는 <민족 말살 정책>이라는 항목에서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그 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 다(1941). 나아가 일본군은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 아시아 일대까지 침략하 다. 이 전쟁 을 수행하기 위해 일제는 전시 동원 체제를 발동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터에 동원하 다”고 기술했다 (⑦ 261쪽). ≪고등학교 국사≫와 유사한 기술이다.
≪고등학교 세계사≫는 일본은 “화북으로 진출하여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시작하 으 며(1937), 이 과정에서 난징에서는 수십 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기도 하 다(난징 대학 살)”(③ 275쪽)고 기술했다.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가 난징 대학살에 대해 一 半句도 언 급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세계사 교과서는 조금 관심을 기울 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는 항일 ‘무장독립전쟁’, 세계사 교과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12) 脚注 3)의 논고를 참조할 것.
반제국주의운동’을 다루는 곳에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 한두 마디 기 술했다. 한국의 민족운동은 두 전쟁의 추이와 접하게 連動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전쟁과 민족운동이 별로 상관없이 전개된 것처럼 기 술했다. 그 까닭은 한국의 역사학이 두 전쟁에 대해 거의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은 20세기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를 전쟁에 몰아넣 은 사건인데다가, 그로 인해 이 지역의 국제질서가 완전히 뒤바뀌고, 연합국이 이 전쟁 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국도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역사학이 두 전쟁에 대해 좀 더 연구하고, 역사교과서가 두 전쟁에 대해 좀 더 많이 기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일본의 東京書籍 ≪日本史 B≫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따로 떼어서 아주 많
은 내용을 기술했다. <일중전면전쟁>이라는 절(3쪽의 분량)에서는 전쟁의 원인과 경과를 상세히 언급했다. 남경대학살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했을 때 약 20만 명이라고 도 하는 군인・포로・비전투원을 살해함과 더불어, 약탈・방화・성폭력을 다수 일으켰다고 표 현했다 (④ 337~339). 반면에 식민지 조선에 관한 기술은 없다.
또 이 교과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대일본제국의 붕괴>라는 장을 설정하여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대해 14쪽 가량이나 기술했다. 日・獨・伊 삼국동맹과 남진정책, 태평양전 쟁의 개전, 식민지・점령지 통치의 실태와 戰局의 악화, 패전과 국민생활 등의 내용이 들 어 있다. 이러한 기술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식민지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는 創氏改名, 노동자의 强制連行, 慰安婦 동원 등을 기술했다 (④ 
342~355쪽). ) 
동경서적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日中全面戰爭>이라는 절의 아래 <일중전쟁의 발 발>, <진흙탕이 되어버리는 전쟁>, <강화되는 통제경제> 등의 항목을 설정하여 2쪽 을 기술했다(⑦ 188~189쪽).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싸 움>이라는 절 아래 <동아시아에서의 움직임>, <태평양전쟁의 시작>, <총력전과 전 쟁의 장기화>, <전쟁의 희생> 등의 항목을 설정하여 2쪽을 기술하고(⑦ 192~193쪽), 따로 <전쟁의 종결>이라는 절 아래 <독일・이탈리아의 항복>, <일본의 항복>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2쪽을 기술했다(⑦ 194~195쪽). 기술의 내용은 전쟁의 처참함을 보여 주는 것이 많다. 
扶桑社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중일전쟁에 대해 <日中戰爭>이라는 절에서 <2・26사 건>, <西安事件>, <盧溝橋事件에서 일중전쟁으로>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2쪽을 기술 했다(⑧ 198~199쪽).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大東亞戰爭>이라는 절 아래 <眞珠灣攻擊>, <暗轉하는 戰局>, <大東亞 議와 아시아 諸國>이라는 절 아래 <아시 아에 퍼져가는 독립에의 희망>, <대동아회의>, <아시아 제국과 일본>, <戰時下의 생 활>이라는 절 아래 <국민의 동원>, <공습의 피해>, <終戰外交와 일본의 패전>이라 는 절 아래 <얄타에서 포츠담까지>, <원폭 투하와 소련의 침공>, <聖斷 내리다> 등 의 항목을 설정하여 무려 8쪽이나 기술했다(⑧ 204~211). 기술의 논조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마치 일본이 서양세력의 지배로부터 아시아 諸國을 해방하려고 일으킨 것처럼 되어 있다. 전쟁의 호칭조차도 침략전쟁을 주도했던 ‘대일본제국’의 당국자가 羊頭狗肉 으로 내세웠던 ‘大東亞戰爭’이라는 명칭을 일부러 채용하고 있다.
일본의 山川出版社 ≪詳說世界史≫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절에서 유럽의 전쟁 과 함께 태평양전쟁의 경과에 대해 8쪽 정도 기술했다. 식민지 조선에 관해서는 창씨개 명, 노동자의 강제연행, 징병제 실시 등을 간단히 언급했다(⑤ 311~318쪽).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기술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교과서는 전시의 국내 상황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는데 비하여, 일본의 교과서는 전쟁의 확대과정과 점령지의 사정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교과서의 기 술만을 본다면, 한국과 일본의 학생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추이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 기는 어렵다. 더욱이 일본의 일부 교과서가 공공연히 ‘大東亞戰爭史觀’을 표방한다면 한 국과 일본의 역사화해는 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대를 걸어 본다면, 일본군이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주민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함께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일본의 패전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1945.8~9). 그렇지만 패전국 일본이 연합군의 점령에서 벗어나 주권(sovereignty)을 획득 한 것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 1951. 9.8, 발효 1952.4.28) 이후의 일이었다. 한반도 는 1945년 9월을 전후하여 미군과 軍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분할 점령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15일 이남에 대한민국이, 같은 해 9월 9일 이북에 조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북한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참가하지는 않 았지만, 이 조약이 만든 戰後體制 속에서 활로를 모색해나갔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평 화조약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事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고등학교 국사≫는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 결 이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술하지 않았다. 이 점은 ≪ 중학교 국사≫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고등학교 세계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는 미·소의 대립으로 연 합국과 패전국 사이의 전체적인 강화가 아닌 패전국과의 개별 강화로 이루어졌”고, 일본 은 샌프란시스코회의의 결정으로 1951년에 주권을 회복하 다고 기술했다(③ 288쪽). 자국사 교과서보다는 진일보한 표현이다. 
한편, 일본의 東京書籍 ≪日本史 B≫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일미안보체제>라 는 절을 설정하여 강화조약의 체결, 일미안보체제의 성립, 국제통화제도와 자유무역체 제, 현대에 이어진 과제 등을 3쪽 정도 다루었다. 강화조약의 체결에서는 중화민국(대만) 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하고, 조선은 이 조약에 따라 독립했다고 기술했다(④ 369~371).
동경서적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일본>이라는 절 아래 <평 화조약과 國連加盟>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1쪽 가량 기술했다(⑦ 209쪽). 日美安全保障條約도 이 항목에서 등장한다. 扶桑社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점령정책의 전환과 독 립의 회복>이라는 절에 <독립의 회복>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과 일미안전보장조약에 대해 반쪽 정도 설명했다(⑧ 217쪽). 동경서적의 교과서가 ‘국제 사회로의 복귀’라는 식으로 기술한 반명 부상사사 ‘독립의 회복’이라는 식으로 기술하여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후자가 연합국의 일본 점령에 대한 강한 불만과 함께 주권 회복 에 대한 만족을 숨김없이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역시 이 책은 우파 일각의 일본식 내 셔널리즘을 대변하는 역사교과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의 山川出版社 ≪詳說世界史≫는 <냉전구조와 일본・유럽의 부흥>이라는 절(6쪽 의 분량) 아래 <조선전쟁과 냉전체제의 성립>이라는 항목에서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 에 대해 설명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독립을 회복하고, 조선・대만・南樺太・千島를 정식으로 放棄했다는 구절도 들어 있다(⑤ 326~331).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천황이 이것을 공표한 것은 1945년 8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美 兩軍이 한반도의 남북을 분할 점령한다고 발표한 것은 같은 해 9월 2일, 조선총독이 주한미군사령관과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같은 해 9월 9일이었다. 그 후 미 소의 군정을 거쳐 남북한에서는 1948년 8~9월에 각각 독립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 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한반도가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또 
남북에 독립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을 사건의 전개에 따라 기술했다. 반면에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고도 3년이나 지난 뒤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따라 한반도가 일본에서 분리되어 독립했다고 기술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기술이 아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엄연한 사실을 무시 한 채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문면에 사로잡혀 일본의 독립과 한국의 해방을 아전인수격으 로 기술하면, 한국과 일본의 학생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결과 전후처리, 그리고 한국 과 일본의 독립국가 수립에 대해 아주 다른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실제로 현재 한국은 1945년 8월 15일을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 주권을 회 복한 광복절로 인식하는 반면, 일본은 연합국과의 전쟁이 끝난 終戰日로서 이해한다. 일 본인들은 일본이 연합국에 패하여 무조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패전이 아니 라 종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의적 해석은 일본의 정부와 매스컴이 합작 하여 만들어낸 자국위주의 집단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14)
14) 동아시아의 각국이 1945년 8월 15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할 
것. 정근식・신주백 편, 2006 ≪8・15의 기억과 동아시아적 지평≫ (도서출판 선인) ; 佐藤卓己・孫安石 編, 2007 ≪東アジアの終戰記念日ー敗北と勝利のあいだ≫ (筑摩書房)


Ⅲ. ‘식민지 조선’의 戰時狀況과 항일민족운동

1. 도시의 형성과 일상생활의 변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한국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변화의 속 도는 매우 빨랐다. 한국의 ≪고등학교 국사≫는 그런 현상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기술 했다.
한국의 인구는 1910년대 말에 1,700만 명에서 1942년에 2,600만 명 정도로 늘었다. 서
울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 명 정도 는데, 1940년에는 93만 명으로 팽창했다. 일제가 宮城 등의 전통 건물을 헐어버리고, 관공서 등을 신축함으로써 서울은 식민지 도시 풍경 으로 변해 갔다. 그런데 일본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은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 지만, 한국인이 집한 지역은 낡고 누추했다. 도시의 이와 같은 이중적인 모습은 서울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많이 살던 부산,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등도 대부분 마찬가지
다. 도시에서는 주택난이 심각하여 움막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① 242~244쪽). 
한편 한국의 ≪중학교 국사≫는 식민지 시기의 사회 변화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
다.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차별을 강조하는 기술이 主調를 이루었다.
한국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일제강점기에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도시의 상가에 네온사인이 들어오고,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가 등장한 것을 소개했다. 또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단발머리로 바뀌고, 간호부 등의 새로운 직업 이 출현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새로운 생활문화는 신문과 방송 등을 통 해 확산되었지만,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② 224~225쪽).
종래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식민지시기의 경제발전과 사회변화를 기술하는 데 인색했 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는 식민지시기에 경제와 사회가 다양하고 급격하게 변화했다 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가 성행하고 있다. 이런 연구 중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표방하 는 것도 있고, ‘탈근대’를 지향하는 것도 있다. ) 한국 역사교과서의 기술은 식민지시기 를 ‘근대문명의 수용’이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보려는 최신의 연구 성과를 부분적으로 수 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중고등학교를 막론하고 식민지 조선 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2. 兵站基地化政策과 物資收奪

1930년대 이후 일본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거 몰려들었다. ≪고등학교 국사≫는 그 양상을 이런 요지로 기술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로 재편하는 정책 을 추진했다. 공업화정책은 전력과 자원이 풍부한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대륙침략을 위 한 전쟁물자 생산과 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대자본이 활발하게 침투하여 금속・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 다. 그리하여 총 생산 액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회사자본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소유하고, 경 진과 기술자도 일본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한국인은 최소한의 노동기본권 도 보장받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임금과 승진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는 군수물자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크게 강화했다. 세금을 늘리 고 저축을 강요하여 마련된 자금은 군수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되었다. 광물자원을 확 보하기 위해 학교의 철문이나 집안의 숟가락까지 강제로 빼앗아 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 인이 경 하던 기업 중에 문을 닫는 경우가 속출했다. 결국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 정책 은 한국인의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하여 일본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해 나가는 과정에 지 나지 않았다(① 182-183쪽).
≪중학교 국사≫는 <일제의 경제 수탈 정책은?>이라는 절 아래 <토지 약탈>, <산 업 침탈>, <식량 수탈>, <우리 민족이 민족 말살 통치하에서 겪은 고난은?>이라는 절 아래 <민족 말살 정책>, <물적・인적 자원의 수탈>의 항목을 두어 수탈의 실상을 자세 히 기술했다(④ 258~262쪽). 그 기조는 ≪고등학교 국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전쟁의 기지>로 재편했다는 내 용을 아래와 같은 요지로 기술했다. 내용의 기조는 ≪고등학교 국사≫와 비슷하다. 식민 지 공업화는 1938년 무렵에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능가할 정도로 진척되었지만 소
 
를 비판한다.(역사문제연구소, 2002 <특집 탈/국가, 탈/민족 역사서술에 대해 듣는다> ≪역사비 평≫ 58)
비재 생산은 크게 줄었다. 또 공업발달의 지역적 편차는 물론이고, 농업과 공업, 경공업 과 중공업의 불균형이 깊어졌다. 일제는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생계유지도 힘든 민중16) 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위문금품을 모집하고 국방헌금을 거두었다. 일부 실업가 들이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이에 적극 호응하 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쟁에 필요한 물 자와 무기제조의 원료를 충당할 수 없자 고철과 구리 제품도 강제로 모으고 학교 철문 과 쇠 난간을 뜯고 농기구와 가마솥을 훑어갔다. 심지어 놋그릇, 수저, 祭器와 불상까지 가져가 비행기와 총알을 만들기도 하 다.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 지고 도시로 나가거나 화전민이 되었다. 도시 변두리나 하천변 등에는 빈민들의 토막집 이 생겨났다. 그러나 도시의 노동자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다. 견디다 못한 일부 사람들은 떠돌이가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떠나갔다.(② 160~161). 일본의 자국사 교과서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 별로 기술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 속에서 힘든 생활을 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기술은 더러 있다. 예를 들면, 山川出版社의 교과서는 ‘신흥재벌과 식민지’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野口의 일본질소비료회사가 조선의 흥남 등지에서 수력개발과 화학공장건설을 적극적으 로 추진한 사실을 자세히 기술하고, 조선인 농민이 몰락하여 일본 등지로 離散했다는 점 을 소개했다. 東京書籍의 교과서는 식민지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 17세 소녀의 눈으로 조 선의 경제상황을 관찰하고,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회상 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17) 그런데 扶桑社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개발에 대해 <韓國倂合>
이라는 항목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한국병합 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서, 철도・관개의 시설을 정비하 는 등의 개발을 행하고, 토지조사를 개시했다.’(⑧ 170쪽).
 
16) 민중은 世間의 일반사람·보통사람을 가르키는데, 사회의 계급관계에서는 지배계급이 아닌 피지배 계급이고, 계층관계에서는 물질적·정신적 생산에 종사하는 직접생산자이다. 사회를 基底에서 떠 받치고 있는 민중은 습속·관습에 규정되어 보통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나날을 營爲하는 생활인이 다. 민중의 일상의식은 保守的·守 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의 안정적인 재생산이 곤란해 지는 조건에서는 사회의 여러 조건을 매개로 하여 축적된 전통적인 集合意識과 혁신사상에 유도 되어 항거·파괴 또는 폭동·혁명의 주체가 되고 사회변혁의 담당자가 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연구에서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부각시키는 民衆史觀이 붐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망원한국사연구실, 1989 ≪한국근대민중운동사≫ (돌베개)를 들 수 있다. 
17) 정재정, 2008 <일본사 교과서에 기술된 식민지지배와 민족운동-2007년도 검정 합격본의 경우
-> ≪한일관계사연구≫ 30 (한일관계사학회)
이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지지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역사교과서 기술은 
대체로 일제의 수탈과 한국인의 열악한 생활을 강조하는 종래의 역사연구 성과를 받아 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한국과 일본 및 미국 등에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과 생활향상을 보여주는 연구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식민지 문명 화론’을 내건 연구가 그것이다. 이들은 치 한 통계정리와 실증분석을 통해 종래의 ‘수 탈론’을 뒤집는 연구 성과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 ) 
그렇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구 성과에 대한 민족주의 또는 진보주의 진 의 반
론도 거세기 때문에, ) 그것이 역사학계의 주류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갑자기 ‘식민지근대화론’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고등학교 국사≫나 ≪한국근・현대사≫는 ‘식민 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수탈과 민중의 몰락을 무척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도시의 확대와 생활의 근대화를 소개함으로써 ‘식민지 근대’의 일면을 반 했다. 이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수용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식민지 조선’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기 술한 사례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3. 戰時 인력 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동원

‘식민지 조선’에서의 징병・징용과 위안부 동원 등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 깔끔히 처리되지 않은 역사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의 ≪고등학교 국사≫는 본문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 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 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 다”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읽기 자료>에서 는 조선, 중국 등지에서 10~20만 명의 여성을 속임수와 폭력을 써서 연행하여 동남아시 아 등의 戰場에서 성적 행위를 강요했다고 소개했다(① 117쪽).
한편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전쟁 동원과 군 위안부 징용>이라는 절을 설 정하여 전시노무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동원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먼저 <침략전 쟁을 위한 노동력 수탈>이라는 항목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는 전투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1938년에 지원병 형태로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끌어들
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도를 강행하여 학생들마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1944년 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20만여 명의 청년을 징집했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실시하여 노동 력을 강제 징발하 다. 징발된 사람들은 탄광과 금속 광산, 토목과 건축 공사장, 군수 공장 같 은 곳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수준밖 에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공제되는 것이 많아 실제로 받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력수탈은 주로 농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인력이 줄어들어 1939년 이후 농업 생산력은 급속히 낮아졌다(② 162쪽).
이 교과서는 위와 같은 내용의 본문에 이어, 한국인 징용 피해자가 일본의 회사를 상 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기사를 제시함으로써 전쟁동원이 아직도 해 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켰다(② 162쪽).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절의 제목에서 ‘군 위안부 징용’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썼다. 그리고 <군 위안부, 여성까지 전쟁 수단으로>라는 항목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 의 내용을 기술했다.
일제가 침략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한 가장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는 여성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임의로 조선 여성들을 동원하던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여 자 정신대 근무령’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 다(1944).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여성들 가 운데 일부는 조선과 일본의 군수 공장에 보내져 강제 노역을 당하 고, 또 다른 여성들은 전쟁 터로 보내져 군위안부로 이용되었다. 일제는 이미 1930년대 초 대륙 침략과 함께 군 위안소를 시범적으로 운 하다가 전쟁 말기에는 이를 더욱 조직화하여 조선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징발 하 던 것이다. 일제 말기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된 조선 여성들의 수는 수십만 명으로 추산될 뿐 정확한 인원은 파악되고 있지 않다. 이들 여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군위안부로 희생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한 사람도 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외국에 잔류한 사람도 있다. 귀국한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 중 입은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오랫동안 극 복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위하여 왔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이에 대한 국가적인 책임을 명백히 하지 않고 있어 국제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② 163쪽) 이 교과서는 위와 같은 내용의 본문에 이어,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정부에 대
해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 記事를 사진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전쟁의 상처가 아직 도 아물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② 163쪽). 
한국의 ≪중학교 국사≫는 <물적・인적 자원의 수탈>이라는 항목에서 징용, 지원병, 
학병, 징병,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군대 위안부 등에 대해 1쪽 정도를 기술했 다(④ 262쪽). 
일본의 자국사 교과서인 東京書籍 ≪日本史 B≫는 <식민지・점령지 통치의 실태와 戰局의 악화>라는 절(4쪽) 아래 <대동아공 권의 실태>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조선과 중국 및 대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본국내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1940년 이후 조선인과 중국인 포로가 炭坑・광산노 동자로서 일본에 대량 연행되었다(강제연행). 조선에서는 많은 여성이 挺身隊로서 일본의 공장 에, 위안부로서 戰地에 보내졌다. 나아가 전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과 대만에서는 지원병제 에 이어 징병제가 도입되었다.(④ 348쪽).
동경서적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강해지는 통제경제>라는 항목에서 “지원병 제도 를 실시하고, 조선의 사람들도 戰場에 동원했습니다”라고 썼다(⑦ 189쪽). 扶桑社의 중 학교 역사교과서는 <국민의 동원>이라는 항목에서, “전쟁 말기에는 징병과 징용이 조 선과 대만에도 적용되고, 현지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게 되었다. 또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오고, 험한 조건 아래 사역 당했다” 라고 썼다(⑧ 208쪽).
일본의 山川出版社 ≪詳說世界史≫는 <獨 戰과 태평양전쟁>이라는 항목에서 식민
지 조선의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미 1930년대 말부터 創氏改名 등의 동화정책이 강요되고 있던 조선에서는 開戰 후 일본의 
지배가 더욱 가혹해지고,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조선으로부터 노동자가 강제적으로 연행 되고, 전쟁 말기에는 징병제도 적용되었다.(⑤ 315쪽).
한국의 역사교과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한국
인이 강제로 동원되어 가혹한 피해를 당했다는 점에 대해서, 기술의 분량과 내용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만, 논조에서만큼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한국 역사 교과서의 내용이 자세하고 생생한 데 비해, 일본 교과서의 그것은 간결하고 건조하다. 한국 교과서는 정신대로서 끌고 간 여성의 일부를 위안부로 삼았다는 식으로 기술하여 정신대와 위안부의 구분이 약간 애매한데 비해, 일본 교과서는 정신대는 공장에서, 위안 부는 戰地에서 사역 당했다는 점을 구분하여 기술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로 민족과 인권의 시각에서 기
술했다. 따라서 젠더의 관점은 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여성운동가들은 역사 교과서의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젠더의 관점에서 공동으로 역사교재를 개발 하여 양국에서 동시 출간했다.20)  
대체적으로 보건대,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전시 수탈이 가혹했고, 그로 인해 한국인에게 박힌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도 强度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같은 기조에 서 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학생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인이 치른 無故한 희생에 대해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여지는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등의 한국사학계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 總力戰과 工業化 및 社
變化를 有機的으로 연결시켜 파악하는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는 戰時動員을 통해 한국인이 사회경험을 확대하고 업무능력을 향상시켰다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21)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이러한 연구 성과를 수용할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자못 불안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3. 皇國臣民化政策과 日協力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는 戰時에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추진한 황국신민화정책을 ‘민족 말살 정책’이라는 용어로서 표현한다. 
≪고등학교 국사≫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기술했다.
일제는 1930년대 만주침략 이후 한국인을 침략전쟁의 협조자로 만들려는 교육을 더욱 강화 했다.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을 강조하여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한국사의 왜곡을 심화시켰
 
20) 한일여성공동역사교재 편찬위원회, 2005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 (한울아카데미)
21) Carter J. Eckert, “Total War, Industrialization, and social change in late colonial Korea”, (eds.) Peter Duus・Ramon H. Myers・Ma가 R. Peattie, The Japanese Wartime Empire, 1931-1945(Princeton Univ. Press, 1996). 이 논문은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공업화・사회변화>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앞에서 소개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에 게재되어 있다.
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 으며, 이에 저항 하는 종교교단과 지도자들을 박해하 다(① 322쪽).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전시 체제하의 민족 말살 정책>이라는 항목에서 다 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1쪽 가량 기술했다.
1930년대 들어와 대륙침략전쟁을 본격화하면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한층 강 화하 다. 그러한 방책의 하나로 조선인의 사회주의사상을 철저히 통제하 다. 1930~1935년 사이에 ‘사상사건’으로 체포된 인원은 약 2만 명에 이르 다. 일제는 조선민족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의 민족성을 아예 말살하고자 하 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7년부터 ‘황국신민서사’라는 충성 盟誓文을 만들어 외우도록 강요하 다. 이와 함께 전국의 모든 읍・면에 神社를 만들어 조선인을 강제로 참배시켰다. 학교교육과 관공 서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대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 다(1938). 조선인의 민족성을 빼 앗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인의 정신이 담긴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941년에 이르러 학교에서 조선어학습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에 앞서 1940년에는 이미 친일언론으로 변질된 동아일보, 조선일보마저 강제 폐간하는 등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신 문과 잡지를 없애버렸다. 이 밖에 1940년부터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 다. 1941년에는 소학교를 ‘황국신민학교’라는 뜻을 가진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교과편성 과 내용을 바꿨다. 이러한 여러 정책들은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조선민중에게 천황숭배사상을 심어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든 뒤, 침략전쟁에 이용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② 154쪽).
≪중학교 국사≫도 <민족 말살 정책>이라는 항목에서 대체로 ≪고등학교 국사≫와 비슷한 내용을 1쪽 정도 기술했다.
‘말살’이라는 용어는 원래 ‘사실이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완전히 지워버린다’는 뜻 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정신을 개조시켜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려는 정 책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조선인은 이것을 민족성의 말살이라고 인식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도 일본이 조선인의 아이덴티티, 곧 ‘민족성’을 완전히 없애고 일본인으로 개조하 려는 정책을 구사했다는 뜻에서 민족말살이라는 용어를 썼다. 역사교과서의 이러한 기 술은 주류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 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역사연구에서는 말살 대신에 ‘同化’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 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역사교과서가 ‘말살’이라는 용어를 고수한 것은 일본이 조 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구사한 수단과 방법이 너무나 가혹했다는 점을 부각 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추진의 極에는 조선인의 ‘자발적 협력’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 물론 전시체제라는 특수상황에서 ‘자발적 협력’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강요된 협력’에 지나지 않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목숨을 내걸고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애국자’가 많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변절자’ 또는 ‘민족반역자’임에 틀림없 다. 그리하여 최근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는 이러한 日 협력자들을 ‘친일파’라는 용어 로써 표현하고 규탄한다.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어두운 시대의 변절자, 친일의 길>이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기술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관리등용의 기회를 확대하여 조선인들을 회유하는 한편, 사회적
력을 지닌 인물들을 친일세력으로 육성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친일파가 사법, 군대, 경찰 등 조선총독부 기구나 언론, 교육,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그물망처럼 뻗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일제의 위협을 견디다 못하여 마지못해 이름만 내건 사람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든 이 같은 친일파의 준동 은 우리 민족사의 오욕이자 민족정신에 씻기 어려운 해악을 끼쳤다.(② 164쪽).
위와 같은 본문의 기술 이외에도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친일파의 활동을 2
쪽에 걸쳐 칼럼과 사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제시하고 있다.
문인들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동포들에게 징용, 징병, 挺身隊에 나갈 것을 촉구했 다. 경찰들은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 처단을 방해했다. 음악가들은 아 시아・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미술가들은 전쟁에 협력하는 주제의 작품을 제작하 다. 대자본가들은 군수공업을 경 하고, 일본군에 기금이나 무기를 헌납했다. 교육자들은 강 연과 방송 등을 통해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징병, 징용, 학병에 참가할 것을 촉구했다(② 
164~165쪽).
이 칼럼의 끝에서 이 교과서는 일제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한 애 국자와, 강자의 압박에 못 이겨 굴복한 친일파를 비교하고, 광복 이후 친일파가 척결되 었는지 어떤지 알아보자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짐으로써, 친일파의 처단이 아직도 현 안으로 남아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② 164~165쪽).
≪고등학교 국사≫와 ≪중학교 국사≫는 친일파에 대해 거의 기술하지 않아서 ≪고 등학교 한국근・현대사≫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식민지 조선’의 연구에서는 친일파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究明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곧 일본 통치하의 조선인의 행위를 민족운동과 대일 협력의 범주로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양쪽에 걸치는 中間地帶=灰色地帶가 광범하 게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연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연구 성과가 축적 되면 친일파에 대한 역사교과서의 二分法的 기술도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의 東京書籍 ≪日本史 B≫는 <대동아공 권의 실태>라는 항목에서 조선과 대만의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만과 조선에서는 황민화정책이 일중전쟁이 시작되자 더욱 강화되고, 일본어교육이 철저해 짐과 더불어, 신사참배, 궁성요배와 히노마루 게양이 강제되었다. 1940년에는 조선에서는 창씨 개명, 대만에서는 改姓名이라고 하는 일본적인 家制度의 도입과, 더욱 황민화되었다는 것을 주 민 자신에게 보이는 수단으로서 일본식 氏名에의 改名이 실시되었다.(④ 348쪽). 
東京書籍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조선에서는 「황민화」의 이름 아래, 일본어의 사용 과 성명의 표현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創氏改名을 추진했습니다.”라고 기술했 다(⑦ 189쪽). 부상사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조선반도에서는 일중전쟁 개시 후, 일본 식의 성명을 쓰게 하는 창씨개명 등이 행해지고,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이 강화되 고 있었다”라고 기술했다(⑧ 208쪽).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내용은 소략하지만 그 기조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강압적 추진에 대해 감정을 섞어서 아주 자
세히 기술했다. 반면에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황국신민화정책에 관련된 사실을 담담하게 열거했다. 한국과 일본의 교과서는 기술의 논조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교과서 는 황국신민화정책을 민족말살정책으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책에 협력한 동 포를 친일파라고 경멸한다. 이것은 단순히 일본과 친하다는 뜻이 아니라 민족반역자라 는 뜻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는 한국인의 이런 고뇌를 소개하는 기술이 전혀 없다. 한편 일본의 역사교과서 중에는 일본인 중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의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한 사람도 있었다는 사례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東京書籍의 역사교과서는 柳宗悅이 쓴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柳宗悅은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공예와 도예에 관심을 가졌으며, 광화문 의 철거에 반대하여 移築 보존하도록 했다. 최근에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도 이와 같이 韓日連帶의 사례를 기술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역사 교과서의 이러한 기술은 한국과 일 본의 학생들에게 상호 이해와 협력의 역사의식을 길러주고자 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식민시기의 조선인이 일본에 대해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은 곧 매국 또는 민족반역이라고 규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절박한 사정도 함께 기 술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상호 이해와 연대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24)
 

4. 한국문화의 연구와 전수

한국의 ≪고등학교 국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화를 연구하고 전수하기 위해 각 방면에서 분투한 모습을 기술했다. 예를 들면, 한국 인의 표현수단인 한글의 연구와 보급, 한국민족의 내력과 아이덴티티를 강조한 역사학 의 대두, 한국인의 정서와 의지를 표현한 문학・음악・화 등의 제작과 유행 등을 4쪽에 걸쳐 소개했다(① 322~324쪽, 327쪽).
한국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도 일제의 식민지문화정책과 한국인의 민족문화 수
호운동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서술의 기조는 ≪고등학교 국사≫와 유사하지만, 내용은 훨씬 다양하고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한국인이 벌인 과학의 대중화운동을 소개한 것은 특이하다. 또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이라는 코너를 2쪽이나 설정하여, 일본인이 왜곡 한 한국사연구를 철저하게 비판했다(② 229~230쪽, 236쪽, 242~ 243쪽).
≪중학교 국사≫는 <우리 민족이 민족 문화의 수호를 위해 벌인 노력은?>이라는 절 에서 <국어 연구>, <국사 연구>, <종교 활동>, <문화 활동> 등의 항목을 설정하여 3쪽을 기술했다. 기조는 ≪고등학교 국사≫와 비슷하다. 
한국은 오랜 역사와 높은 문화를 유지해왔다. 한국인들은 보통 전근대에는 한국이 선 진문화를 일본에 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일본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 고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한국 인은 일본에 대해서 항상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배신감과 함께 분노를 금치 못한다.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이와 같은 긍지와 집착이 결국 민족해방운동과 民族文化保全運動의 원천이 되었다. ) 
 
24) 정재정, <일본사 교과서에 기술된 식민지지배와 민족운동-2007년도 검정 합격본의 경우-> ≪앞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한국인의 문화의식과 문화운동에 대해 아무
것도 기술하지 않았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이 기승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끈질기게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위와 같이 자기 문화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좀 더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 가려 한다면, 일제하에 한국인이 벌인 민족문화수호운동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기술해 야 할 것이다. 


5. 항일독립전쟁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등학교 국사≫는 <민족의 수난과 항일민족운동>이라는 장을 설정하여,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항일민족운동에 대해 4쪽 가량 기술했다. 그 중에서 만주사변 이후의 내 용이 약 2쪽이다.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이후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 투에서 승리하 다. 또 義烈團과 韓人愛國團에 속한 義士들은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거나 일 본인 高官과 親日 人士들을 처단하 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 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지역의 독립군과 각처의 무장투쟁세력을 모아 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 다(1940). 임시정부가 일본에 宣戰 告를 한(1941.12) 후 韓國光復軍은 연합군과 공동 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 다. 또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 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 다. 그 밖에, 만주지역에서는 1930년대에 들어 중국공산당군 과 연합한 항일유격대인 東北抗日聯軍의 활동도 계속되었다. 의열단 계통의 인사들은 중국국민 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활동하 다. 조선의용대에서 분화된 인사들은 華北地方의 朝鮮獨立同盟에 합류하여 朝鮮義勇軍을 결성하고 중국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 다(① 121~122쪽).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항일민족운동에 관해 무려 36쪽이나 기술했다. 그 중 에서 1930년대 이후의 것만도 8쪽이다. 그리고 章의 제목을 <무장 독립 전쟁의 전개> 라고 설정함으로써 한국의 각 독립운동세력이 국내외 각처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 다 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던 시기의 역사를 일본제국주의사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한국 사의 일부로써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이민족의 통치하에서도 불굴의 투지로 삶을 개척 해갔던 한국인의 행위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지배를 타파 하려고 한 항일민족운동 특히 무력투쟁이 식민지 시기 역사서술의 주류가 되는 것은 당 연한 일이다.26) 한국의 자국사 교과서는 역사교육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항 일민족운동에 대한 기술의 분량과 내용을 배려했다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는 10여 개의 주요 항일민족운동단체를 열거하고, 각각 1쪽 분량을 할당하여 그들의 활동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술했다. 또 만주와 중국에 산재 한 한국독립운동 戰迹地의 지도와 사진을 2쪽에 걸쳐 제시하고 설명을 붙임으로써 한국 인이 移住한 모든 곳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교과서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기술의 기조는 ≪고등학교 국사≫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화북과 만주에서 활약한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투쟁을 크게 부각시킨 점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 다. 종래 한국의 역사교과서가 거명하기를 꺼렸던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까지도 국 내 민중에게 크게 위안이 되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② 186~188, 195~201).
한국의 ≪중학교 국사≫는 <독립 전쟁의 전개>라는 章을 설정하여 국외에서의 독립
운동을 7쪽에 걸쳐 기술했다. 그리고 <국내의 민족 운동>이라는 별도의 章을 설정하여 9쪽이나 기술했다. 기술의 기조는 ≪고등학교 국사≫와 거의 유사하다. 
최근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의 항일민족운동에 관 한 연구는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 다. 여기에는 무력투쟁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및 농민 운동과 같은 민중운동까지도 포함된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항일민족운동은 대한 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한 우파계열의 운동을 究明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1980년대 이 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져서, 지금은 항일민족운동 의 전모를 꽤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좌우합작의 민족통일전선에 입각 한 항일민족운동을 전면에 내세우는 개설서나 대중서도 간행되었다.27)
한국의 역사교과서가 우파 민족운동 일변도의 기술에서 벗어나 좌파 민족운동까지 망 라하여 기술한 것은 위와 같은 연구 성과를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등학 교 한국근・현대사≫가 좌파 항일민족운동을 부각시킨 것에 대해 보수주의 진 의 반격 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 교과서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기조를 견지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26) 교육부, 2001 ≪고등학교 교육과정 해설≫
27) 강만길 외, 200.9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그런데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 술한 반면, 그 시기에 전개된 한국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술하지 않았 다. )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가 일본의 일방적인 의지만으로 집행된 것이 아니 라, 한국인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대응을 바탕으로 하여 수정・보완되어간 측면이 있음 을 감안하면, )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한국인이 전개한 다양한 항일민족운동에 대해서 기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속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 록 돕는다는 차원에서라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 대신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한국인 이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아주 자세히 기술하지 말고, 중일전쟁과 아시아・태 평양전쟁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기술하여 학생들이 그 시대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본과 한국의 학생들이 위와 같이 자국사 위주로 기술된 역사교과서만을 배우게 되
면, 두 나라 국민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그리고 戰後의 한일관계사에 대해 전혀 다른 역사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한국 학생은 한국인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으며 일본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그 덕택으로 해방을 쟁취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 에 일본 학생은 한국인은 일본의 의도대로 전쟁에 동원되었을 뿐이고 민족해방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둘 다 실상을 정확히 반 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교과서는 항일독립운동이 치열했지만 민족의 해방은 궁극적으로 연합군의 승리 덕택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일본의 교과서는 한국인의 항일민족운동이 일본의 식민지지 배정책의 궤도를 수정시킬 만큼 강인했다는 것을 소개하는 아량을 가져야 할 것이다. 


Ⅳ. 맺음말-역사인식의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15년 전쟁’과 그 시기의 ‘식민지 조선’에 대해 꽤 많은 내용을 기술했다. 그렇지만 기술의 시각과 방향은 아주 다르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전 쟁의 추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 시기에 일제가 추진한 황국신민화정책과 인적・물적 수탈에 대해 자세하고 생생하게 기술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일제의 통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무장투쟁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독립을 爭取했다고 기술했 다. 반면에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전쟁의 추이 등에 대해서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맞춰 상 세히 기술했지만, ‘식민지 조선’의 사정이나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는 별로 언 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일본세력의 대외 팽창과 그로 인한 열강과의 대립이나 점령지에 서 야기된 문제 등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15년 전쟁’과 그 시기의 ‘식민지 조선’에 대해 이렇게 다르게 기술한 것은 전쟁에 관여한 두 나라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서 전쟁을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했다. 반면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타율적으로 전쟁에 끌려들어가 무고한 희생을 치 을 뿐이었
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세력의 대외팽창과 국제질서의 대결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고,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한국인이 민족말살의 위기를 극복하 고 자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데 중점을 두어 기술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 의 역사교과서가 自己中心의 자세에서 ‘15년 전쟁’과 그 시기의 ‘식민지 조선’을 기술한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좁은 바다를 통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정치・외교・
경제・문화 면 등에서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앞으로 두 나라가 이사가지 않는 한 이런 접한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억지로라 도 평화롭게 共榮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 국민이 경험을 공유한 사안에 대해서는 역사인식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항상 두 나라 사이를 멀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역사인식의 접근을 모색하기 위해서 두 나라의 역사교과서는 ‘15년 전쟁’과 그 시기
의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기술하면 좋겠는가?

첫째,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지나치게 자국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폭 넓은 
시야에서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을 상대화하여 기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세계질서 의 재편과정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 전쟁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국내의 상황에만 집착하지 말고, 국제정세와 전쟁의 추이에 대해서도 많이 기술할 필요 가 있다. 반면에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전쟁과 국제정세의 추이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 선’의 사회상황과 민족운동 등에 대해서도 많이 기술해야 한다. 실제로 ‘15년 전쟁’ 시 기에 일본과 한국에서 일어난 각각의 사안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별개의 부품이 아 니었다. 오히려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일본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을 형성하고 작동해간 因子던 셈이다. 따라서 양국의 교과서는 자국중심의 편협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양국의 상호관계 속에서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을 기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미약하나마 이 시기를 공동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이 생길 것이다.
둘째,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인권과 주권, 평화와 상생, 교류와 협력 등의 소중 함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15년 전쟁’을 기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전쟁은 무모성, 폭 력성, 잔학성 등의 면에서 종래 인류의 상상을 뛰어 넘은 재앙이었다. 우리는 이 전쟁에 대한 학습을 통해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교훈과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렇지 만 양국의 역사교과서는 지나치게 국가중심의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국주의가 군국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주의가 역사 기술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 역사를 만들어가는 궁극적 실체는 개개인의 인간이다. 따라서 양국의 역사교과서는 각각의 국민이 ‘15년 전쟁’에서 어떻게 동원되 고, 희생당하고, 살아 남았는가 라는 관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역사적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 과서가 상생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국 국민 개개인의 일상과 행동 및 사상에 좀 더 초점을 맞춰 기술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자국사와 동아시아사 및 세계사의 전개를 서로 관
련시켜 기술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자국의 역 안에서 일어난 일들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15년 전쟁’은 한국인만 겪은 경험이 아니었다. 세계의 거의 대 부분의 나라가 연동된 세계적 대전쟁이었다. 따라서 ‘15년 전쟁’ 시기의 한국의 역사를 특수한 것으로만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역사교과서는 세계사적인 보편성 속에서 한국이 어떤 경험을 했는가를 비교 검토할 수 있도록 기술하면 좋을 것이다. 자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이렇게 개방적인 역사관이 더욱 필요하다.
넷째,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15년 전쟁’과 그 시기의 양국 상황을 複眼의 시각
에서 기술해야 할 것이다. 두 나라는 지금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연구자・교육자・정치가 사이에 갈등을 빚고 있다. 오죽하면 ‘歷史內戰이라고 부르겠는가.30) 역사갈등은 국내문 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 한국・일본・중국 사이에서도 역사인식의 상호 대립이 외교현안 으로 부상한지 오래다. 각국의 정치권과 매스컴은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며 이런 攻防을 부추기는 경향마저 보인다. 역사교과서의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에 관한 기 술은 이러한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테마이다.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相生의 역 사인식을 지향한다면, 역사교과서가 편협한 내셔널리즘의 시각에서 벗어나 ‘15년 전쟁’ 과 ‘식민지 조선’의 다양한 측면을 기술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학제간・국제간의 대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국내에 국한하지 않고 이미 국경을 넘어 국제문제화 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해결의 방안도 국제적 시야에서 모색해야 한다. 한국・일본・중국은 이미 민간인 레벨 에서 서로 다양한 역사대화를 시도하고 있고, 국제간의 공동작업을 통해 몇 종류의 역사 공통교재를 발간한 바 있다. ) 특히 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은 정부가 지원하는 역사 공동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다. ) 따라서 역사갈등의 극복을 논의할 때는 국내문제와 국제문제를 서로 연계시켜 검토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각국이 역사교과서를 기술할 때 이와 같은 국제간 역사대화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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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문] 야마우치 마사유키

우리들 일본과 한국의 공동연구위원이 서로 비평을 행함에 생각나는 것은, 1718년 도 쿠카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쇼군(軍)직 계승을 맞아 조선이 보낸 통신사에 얽힌 일화 이다. 그 사절에 포함된 申維翰은 崔昌大(昆侖)에게 책자의 序를 요청하 다. 부탁을 받 아 쓴 최창대의 문장의 주지는 우리들 양국 위원의 뜻과 공통되는 것이다. 즉 최창대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시를 읽고 감동한 바, 일본인에 대등의 예를 다하여야 한 다고 충고하 다. 또,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재주 높고 식견 넓은 이’가 있을 것이어서 葵丘 盟의 桓公의 예에도 있듯이 당신의 문장에 信服하지 않는 일본인 도 있을 것이므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조언한 것이다(신유한, ≪海遊 ≫). 이것은 참으 로 일본과 한국의 전문가로서 교과서 소그룹의 위원들이 처음부터 서로 유념한 것이다. 일본 측 위원도, 참으로 최대창이 말한 것처럼 다수의 한국인 식자의 존재를 언제나 의 식하 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교과서 문제는 세계 나아가서는 세계사 속의 일한/한일 관계라는 시각에서 자리매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측의 개별 주제에 대해서 각 전문가의 논의를 존중하는 것 은 불가결한 것이지만, 우리 그룹도 히스토리안으로서 모인 이상 히스토리아그래피, 즉 ‘역사 연구’의 검증과 사적 연구를 사명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 사례에 입각한 접근과 배경으로부터의 접근을 시도하여서 서로 접점을 찾아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비 평문은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쓰여진 것임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여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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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그려진 근대의 肖像-‘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의 집필자인 정재정씨는 서울대학과 도쿄대학에서 공부한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파 역사학 자이며 식민지 시기의 철도 연구를 비롯한 근대사 연구 역에서 업적이 평가되고 있다. 또 일찍부터 민간 차원의 한일 교과서 문제에 관한 연구와 계몽에 진력하고 있어 일본 에서도 저명한 한국인 논객의 한 사람이다.
일찍이 평자는 교과서 소그룹의 회합에서, ‘간단한 일이 아니며 학문 이외의 여러 가
지 요인을 품고 있는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학자의 논리로 정치 논의와는 분리하여 이 야기하고 싶다’는 취지로 정재정씨를 비롯한 한국 측 위원에 대해 발언한 적이 있다. 평 자는 한국사 전문가가 아닌 탓인지, 한국 측의 보고와 논문에 나오는 용어의 문제에 의 문을 느낀 적이 적지 않았다. 또 회의 석상에서 평자는 ‘“일제”라고 말하는 방식 및 그 술어의 배경이 매우 마음에 걸린다’는 질문을 한국 측에 솔직히 던진 적이 있다. 일제라 는 것은 ‘일본제국’인가, 아니면 ‘일본제국주의’인가, 또는 ‘일본제국주의자’인가. 그러나 그 때는 평자가 꼭 만족할만한 설명은 얻을 수가 없었다. 이 2년 반에 걸친 공동연구에 서도 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정재정씨의 논문은 과연 용어의 선정을 신중하게 하고 있고 학문적으로도 치 한 논
의를 애써 행하고 있다. 배우는 점도 많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15년 전쟁’이라는 용어 하나를 가지고도 여전히 서로 간에 같은 학술적 언어를 공유하 는 길은 먼 듯하다. 또 정재정씨의 논문은 양측의 합의로 한일 양측의 역사 교과서에서 의 ‘이념’에 대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행 교과서의 기술 문제에 태 반이나 소비되고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한국 근대사 연구의 견인차의 한 사 람으로서 역사 교과서 문제에 조예가 깊은 정재정씨의 논고로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 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치관으로 공유하는 한일 양국에는 교과서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
을 수 있다. 이는 정재정씨의 논고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해도 한국 측이 일본 측의 특정 시기의 특정 중학교 교과서를 반드시 언급하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로 역사 인식의 골이 깊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국 측이 강조하여야 한다고 생각 하는 주제가 쓰여 있지 않으면 특별히 문제시하는 경향도 없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이 자연스러운 자세인지의 여부도 논의가 갈리는 지점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재정씨의 논문에서 많은 것을 배운 점은 감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양측이 역사의 사건에 대한 관점과 평가가 나뉠 때 유념할 만한 경구를 제시하며, 이 난삽한 글의 정리를 대신하겠다. 그것은 한일 역사가가 모두 과거에 많은 것을 배운 唐代의 역사 이론가, ≪史通≫(권7, 曲筆篇)의 작자 劉知幾의 지적이다.
古 諸侯並爭, 勝負無恒. 而他善必稱, 己惡不諱. 逮乎近古, 無聞至公. 國自稱爲我長, 家相 爲彼短.
(먼 옛날 제후가 서로 패권을 다투나 승부의 행방은 결정되지 않았다. 그 당시 史家는 다른 나라의 좋은 점은 반드시 칭찬하여 썼으며 자기 나라의 나쁜 점을 숨기는 일이 없 었다. 그런데 가까운 시대가 되면 史家의 공평한 기록은 듣지 못하니 스스로 자기 나라 의 뛰어난 점을 자랑하고 다른 나라의 못한 점을 왈가왈부하는 일이 생겼다.) 

[집필자 답변]
먼저 拙稿를 꼼꼼히 읽고 따끔하게 비평을 해준 야마우치 선생에게 감사한다. 졸고에 
대한 야마우치 선생의 불만은 나로서도 충분히 예견한 것이었다. 특히 한일 양국 교과서 의 ‘이념’이라는 파트에 졸고가 배치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완전히 합치되는 내용의 논문을 쓰지 못한 것은 나에게도 씁쓸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교과서 분과의 한 일합동회의가 주제 선정을 둘러싸고 지루한 논쟁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나도 많이 지 쳐서 쉬운 길을 택한 지도 모르겠다. 야마우치 선생이 그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 나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야마우치 선생은 졸고뿐만 아니라 한국 측의 논문을 읽고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
가 학술적 언어를 공유하는 길이 멀고, 역사인식의 골이 깊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 점은 나를 비롯한 한국 측 위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 와 민족이 다른 역사학자가 만나 처음부터 언어를 공유하고 인식을 일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와 같은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야 마우치 선생이 비평문에서 인용한 古事를 교훈으로 삼아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가 切磋琢磨를 계속하여 언어와 인식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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